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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족]](徐氏族)=[[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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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동물의 토템인 말, 소, 개, 돼지라고도하고, 방위인 동, 서, 남, 북으로하여 행정체계로하여 관리를 파견하였다고한다. 이외에 대사와 사자라는 벼슬이 존재하였다. 아마 동물의 토템이면서 방위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마가, 우가, 구가, 저가중에 어디가 동, 서, 남, 북인지는 현재 알 수 없다. 성씨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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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동물의 토템인 말, 소, 개, 돼지라고도하고, 방위인 동, 서, 남, 북으로하여 행정체계로하여 관리를 파견하였다고한다. 이외에 대사와 사자라는 벼슬이 존재하였다. 아마 동물의 토템이면서 방위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마가, 우가, 구가, 저가중에 어디가 동, 서, 남, 북인지는 현재 알 수 없다. 성씨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1. 마가: 말을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1. 마가: 말을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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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서 백제에는 큰 성씨가 8개의 족속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각각 예족(濊族), [[부여족]](扶餘族), 고조선 유이민으로 추측이되는 한족(韓族)과 중국계 귀화 성씨가 전해진다.
 
백제: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서 백제에는 큰 성씨가 8개의 족속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각각 예족(濊族), [[부여족]](扶餘族), 고조선 유이민으로 추측이되는 한족(韓族)과 중국계 귀화 성씨가 전해진다.
  
1. 진씨: [[부여족]] 계열의 성씨가 아닌 한강 이북에 존재한 예족으로 추정된다. 13대 [[근초고왕]]대에 왕비족이 나오는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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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씨]]: [[부여족]] 계열의 성씨가 아닌 한강 이북에 존재한 예족으로 추정된다. 13대 [[근초고왕]]대에 왕비족이 나오는 성씨이다.
  
2. 해씨: [[온조왕]]과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백제를 세운 [[부여족]] 계열이다. 왕실의 성은 [[부여씨]]를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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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씨]]: [[온조왕]]과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백제를 세운 [[부여족]] 계열이다. 왕실의 성은 [[부여씨]]를 쓰고,  
  
함께 온 세력을 해씨로 사성하였으리라 본다 [[부여]]의 왕성과 고구려 초기 태조왕 이전의 왕성과 같은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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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온 세력을 [[해씨]]로 사성하였으리라 본다 [[부여]]의 왕성과 고구려 초기 태조왕 이전의 왕성과 같은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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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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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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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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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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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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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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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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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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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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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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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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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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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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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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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부여씨]]의 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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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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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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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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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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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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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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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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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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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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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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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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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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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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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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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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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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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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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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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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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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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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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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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부여씨]]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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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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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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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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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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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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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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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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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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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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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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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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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부여씨]]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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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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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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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優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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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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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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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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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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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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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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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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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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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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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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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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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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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력]](夫餘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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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고]](夫餘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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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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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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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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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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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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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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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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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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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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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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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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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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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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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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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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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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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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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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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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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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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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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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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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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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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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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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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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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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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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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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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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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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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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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2022년 9월 30일 (금) 15:56 판

서씨족(徐氏族)=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부여: 동물의 토템인 말, 소, 개, 돼지라고도하고, 방위인 동, 서, 남, 북으로하여 행정체계로하여 관리를 파견하였다고한다. 이외에 대사와 사자라는 벼슬이 존재하였다. 아마 동물의 토템이면서 방위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마가, 우가, 구가, 저가중에 어디가 동, 서, 남, 북인지는 현재 알 수 없다. 성씨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1. 마가: 말을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2. 우가: 소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3. 구가: 개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4. 저가: 돼지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 백제: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서 백제에는 큰 성씨가 8개의 족속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각각 예족(濊族), 부여족(扶餘族), 고조선 유이민으로 추측이되는 한족(韓族)과 중국계 귀화 성씨가 전해진다.

1. 진씨: 부여족 계열의 성씨가 아닌 한강 이북에 존재한 예족으로 추정된다. 13대 근초고왕대에 왕비족이 나오는 성씨이다.

2. 해씨: 온조왕과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백제를 세운 부여족 계열이다. 왕실의 성은 부여씨를 쓰고,

함께 온 세력을 해씨로 사성하였으리라 본다 부여의 왕성과 고구려 초기 태조왕 이전의 왕성과 같은 성씨이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현

여울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

부여기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부여왕 계보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