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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정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광해군은 전교를 내려 조상하고 장례에 쓸 물목을 지급하게 하였다. 같은 해 11월 화장하고 [[합천 해인사|해인사]] 서쪽 기슭(현 [[합천 해인사 홍제암|해인사 홍제암]] 뒤)에 탑을 세웠다.<ref>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8쪽.</ref> 밀양의 [[밀양 표충사|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향산 수충사|수충사(酬忠祠)]], 공주시 계룡면의 [[갑사 표충원|표충원(表忠院)]] 등에 제향되었다.<ref>정제규, "[http://je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je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300770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제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유정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광해군은 전교를 내려 조상하고 장례에 쓸 물목을 지급하게 하였다. 같은 해 11월 화장하고 [[합천 해인사|해인사]] 서쪽 기슭(현 [[합천 해인사 홍제암|해인사 홍제암]] 뒤)에 탑을 세웠다.<ref>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8쪽.</ref> 밀양의 [[밀양 표충사|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향산 수충사|수충사(酬忠祠)]], 공주시 계룡면의 [[갑사 표충원|표충원(表忠院)]] 등에 제향되었다.<ref>정제규, "[http://je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je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300770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제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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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年 가을에 왕이 크게 염려하여 스님을 서울로 모시고 와서치료를 받게 하려고方伯으로 하여금 火急히 보내게 하였다. 그 해 8월 26일 스님은 문도와 많은 大衆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四大肉身은 본시 假合한 것이다. 나는 머지 않아 眞如의 世界로 돌아가려 하거늘, 어찌 屑屑하게 왔다 갔다하면서 허망한 몸뚱이를 괴롭힐 必要가 있겠는가! 나는 곧 入滅하여大化를 따를 것이다.”라 하고는 드디어 跏趺坐를 맺고 단정히 앉아 조용히 入寂하였다. 11월 20일에 문도들이 스님의 法軀를 모시고 해인사의 서쪽 산 기슭에서 화장하니 祥瑞로운 광명이 하늘을 찔렀고, 날아가던 새들도 슬피 울었다. 화장이 끝난 후, 位牌를 모시고 갔던 侍輦의 앞 부분에서 頂珠 一顆를 얻어 石鐘을 다듬어 安藏하고 窣堵坡를 세웠다. | |庚戌年 가을에 왕이 크게 염려하여 스님을 서울로 모시고 와서치료를 받게 하려고方伯으로 하여금 火急히 보내게 하였다. 그 해 8월 26일 스님은 문도와 많은 大衆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四大肉身은 본시 假合한 것이다. 나는 머지 않아 眞如의 世界로 돌아가려 하거늘, 어찌 屑屑하게 왔다 갔다하면서 허망한 몸뚱이를 괴롭힐 必要가 있겠는가! 나는 곧 入滅하여大化를 따를 것이다.”라 하고는 드디어 跏趺坐를 맺고 단정히 앉아 조용히 入寂하였다. 11월 20일에 문도들이 스님의 法軀를 모시고 해인사의 서쪽 산 기슭에서 화장하니 祥瑞로운 광명이 하늘을 찔렀고, 날아가던 새들도 슬피 울었다. 화장이 끝난 후, 位牌를 모시고 갔던 侍輦의 앞 부분에서 頂珠 一顆를 얻어 石鐘을 다듬어 安藏하고 窣堵坡를 세웠다. |
2017년 8월 15일 (화) 15:38 판
유정(惟政) | |
대표명칭 | 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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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惟政 |
생몰년 |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호 | 사명당(四溟堂), 사명(四溟), 송운(松雲) |
법명 | 유정(惟政) |
자 | 이환(離幻) |
이칭 | 종봉(鍾峯) |
성씨 | 임씨 |
본관 | 풍천(豊川) |
속명 | 임응규(任應奎) |
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 |
승탑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
승탑비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목차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유정은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조부 임종원(任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1]
출가수행
유정은 7세를 전후하여 역사를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2]
활동
임진왜란 이전
유정은 1561년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후 봉은사에 머물며 불교 경전을 부지런히 읽었다. 20여 세에 동녀배들로 갑회(甲會)를 조직하고 갑회문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건전한 승려 생활을 실행하자는 뜻을 다짐하였다. 한편 사암(思菴) 박순(朴淳),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자순(子順) 임제(林悌),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 사대부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한번은 하곡(荷谷) 허봉(許篈)과 중국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 한 편을 외우는 내기에 이겨 책 한 권을 받았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재주만 믿고 스스로 만족하면 학문에 발전은 없을 것"이라 하니, 이 말을 새겨듣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에게서 많은 책을 빌려 읽는 이외에도 사자(四子, 공자·맹자·증자·자사)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일취월장하였다.[3]
유정은 1573년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1575년 선종(禪宗)의 수찰(首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3년 동안 수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에 유정은 대동강 부벽루(浮碧樓)에 오르고, 고운 최치원의 족적을 따라 해인사를 비롯하여 사천 곤양성(昆陽城)과 하동 악양루(岳陽樓)를 유력하였다.[4]
1578년 서산대사의 문하를 떠나 금강산 보덕암(報德庵)으로 들어가 세번의 안거(安居)를 지내며 「동해사」 등 많은 시를 지었다. 1579년 『선가귀감』의 발문, 1580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을 짓고 썼다. 이어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순력하면서, 특히 태백산 운망사(雲望寺)의 이름을 고쳐 영은사(靈隱寺)라 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가을 관서로 가는 도중에 귀양살이하는 친한 벗 하곡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1586년 봄 옥천(沃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간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이에 제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열흘 동안 선정에 들었다.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5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단오절을 맞아 낙성식과 향조대회를 열어 완성을 고한 다음 유정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5]
임진왜란
승병으로서의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 법흥사(法興寺)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6]
가토 기요마사와의 회담
1594년 4월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협상과는 별도로 사명대사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송운(松雲)이라는 법명으로 서생포(西生浦) 왜성을 찾아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의 회담을 진행하였다.[7] 제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 5조약으로 제시된 ①천자와 결혼할 것 ②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보내 영주하게 할 것 ⑤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제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제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 열렸는데, 이때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 5조약의 모순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제2차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으며, 1595년(선조 28)에는 장편의 「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렸다.[8] 또한 가토 기요마사와 오갔던 대화와 관련된 일화도 회담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제2차 회담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담판의 주요한 부분이 결렬되자 유정을 놀리기 위해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 근과 읍(邑) 만 호(戶)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 라고 호방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9]
국방 강화 활동
유정은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10]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이 조선 정부에 강화를 청해오자, 유정은 1604년 8월 탐적사(探賊使)로 쓰시마섬에 파견되었다. 유정은 강화 사승(使僧: 사신의 임무를 띤 승려)의 신분으로 그해 12월 교토에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본법사(本法寺)에서 회견했다. 회견의 성과로 1605년 4월 일본에 연행된 피로인(被擄人) 1,300여 명(혹은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유정은 종2품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유정의 이러한 외교적 성과로 조선과 일본 도쿠가와 정권과의 우호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게 되었고, 임진왜란 후 일본에 첫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11]
1605년 당시 조정에서는 전쟁에 불탄 사고(史庫)의 설치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는데, 유정이 귀국하자 그에게 오대산 사고의 설치를 상의하였다. 유정은 곧장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가 10월 하순에 묘향산 보현사로 가서 휴정의 영탑전에 절하였다. 1606년 봄에는 선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삼청동에 초가를 지어 기거하면서 궁궐 공사를 감독하였다. 5월에는 법형제들과 의논하여 금강산 유점사에 휴정의 사리탑을 세우는데, 대사는 공사에 매달려 있어 주지 태희(太熙)에게 「등계의 탑을 세우며 올린 축문」을 지어 보냈다. 윤6월에는 궁궐 역사의 공로로 정2품 형조판서겸지의금부사(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올랐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서울로 올라와 배곡하니, 이로 인하여 병히 심해져 해인사로 내려갔다.[12]
입적
유정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광해군은 전교를 내려 조상하고 장례에 쓸 물목을 지급하게 하였다. 같은 해 11월 화장하고 해인사 서쪽 기슭(현 해인사 홍제암 뒤)에 탑을 세웠다.[13]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 공주시 계룡면의 표충원(表忠院) 등에 제향되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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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혜원, "유정(사명대사) (惟政)",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목정배,
"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10쪽.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1쪽.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4 - 경남』, 돌베개, 2002. 온라인 참조: "사명대사 유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윤기엽, "사승(使僧)",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7-18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8쪽.
- ↑ 정제규, "유정",
『디지털제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02-137쪽.
-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