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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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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직지사
(金泉 直指寺)
대표명칭 김천 직지사
한자 金泉 直指寺
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418년
창건자 아도(阿道)
경내문화재 김천 직지사 대웅전,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김천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김천 직지사 석조나한좌상, 김천 직지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김천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 전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다.

내용

418년(눌지왕 2)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한다.[1]

직지사라고 한 데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아도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하고 황악산(黃嶽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直指寺)'로 불렀다는 설과, 고려 초기에 능여(能如)가 절을 중창할 때 절터를 측량하기 위해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라고 했다는 설, 선종(禪宗)의 교리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2]

창건 이후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이 중창하고, 930년(경순왕 4)에 천묵(天默)이 중수했으며, 936년(태조 19)에 능여태조의 도움을 받아 크게 중창했다.[3]

조선시대에는 학조(學祖)가 주지로 있었고, 유정(惟政)이 여기서 승려가 되었다.[4]

1399년(정종 1) 중건했고 1488년(성종 19) 학조(學祖)가 중수 했으며, 1596년(선조 29)에는 왜병이 불을 질러 건물 43동 가운데 천불전(千佛殿)·천왕문(天王門)·자하문(紫霞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이때 법당 앞에 있던 대형 오층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5]

그 뒤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절을 중건했는데, 1681년(숙종 7) 조종저(趙宗著)가 쓴 사적기에 따르면, 당시의 규모가 8전(殿)·3각(閣)·12당(堂)·3장(藏)·4문(門)에 정실(正室)만 352칸에 달했으며, 부속 암자는 26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05년(순조 5) 이후부터 사세(寺勢)가 차츰 기울기 시작하여 퇴락했다.[6]

현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중건에 착수하여 1966년부터 1981년 10월까지 건물 10동을 중건하고 10동을 이건했으며, 9동을 중수했다.[7]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319), 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606),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607), 대웅전 삼존불탱화(보물 670),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1186) 등의 문화재가 있다.[8]

관련 문화재

지식관계망

  • 김천 직지사에서 출가한 사명대사 유정의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천 직지사 아도 A는 B가 창건하였다 A ekc:founder B
유정 김천 직지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김천 직지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김양순, "직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양순, "직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양순, "직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직지사", 『두산백과』online.
  5. 김양순, "직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양순, "직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양순, "직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직지사", 『두산백과』online.

참고문헌

  • "직지사", 『두산백과』online.
  • 김양순, "직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