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
임제(林悌) | |
대표명칭 | 임제 |
---|---|
한자표기 | 林悌 |
생몰년 | 1549년-1587년 |
본관 | 나주(羅州) |
호 |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
자 | 자순(子順) |
부 | 임진(林晉) |
성격 | 문신 |
유형 | 인물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인이다.
내용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자순(子順)이며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이다. 아버지는 절도사를 지낸 임진(林晉)이다. 허목(許穆)이 그의 외손자이다.[1]
생애 및 활동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1570년(선조 3) 22세 되던 겨울날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젊어서는 얽매임을 싫어하여 기녀와 술자리를 즐기며 살았다. 1571년(선조 4)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때에 잠시 동안 술을 끊고 글공부에 뜻을 두었다.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계속 학업에 정진했으며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관서 도사(關西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저서
「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 한편, 한문소설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임진 | 임제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성운 | 임제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임백호집 | 임제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허교 | 허교 처 나주임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허교 | 허목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허교 처 나주임씨 | 허목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허교 처 나주임씨 | 임제 | A는 B의 딸이다 | A ekc:hasFather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고경식, "임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고경식, "임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고경식, "임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金昌植, 「林悌 詩의 風格」, 『동아시아 문화연구』 17, 漢陽大學校 韓國學硏究所, 1990, 87-124쪽.
- 박경규, 「임제(林悌)의 한시(漢詩)에 끼친 중국문학의 영향」, 『한국고시가문화연구』 5, 한국고시가문학회, 1998, 233-252쪽.
- 웹자원
- 고경식, "임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경식, "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