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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장수로서 [[백제부흥운동]]을 탄압한 인물이 부여융이었다. 그 상황에서 부흥운동을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친동생 [[풍왕|부여풍]].
 
당나라 장수로서 [[백제부흥운동]]을 탄압한 인물이 부여융이었다. 그 상황에서 부흥운동을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친동생 [[풍왕|부여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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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 가묘 위치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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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의 태자로 웅진도독을 역임한 [[부여융]](615~68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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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망산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1920년 발견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출토된 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지석의 크기는 가로 56.8㎝, 세로 대략 57.8㎝로 정방형에 가깝다. 개석의 크기는 지석과 거의 동일하며 녹정형(盝頂形)이다. 개석의 비탈면에는 사방에 모란문을 음각하여 장식하였고, 위면에는 전서체로 대당부여부군묘지(大唐扶餘府君墓誌)라고 3행 3자씩 모두 9자를 양각으로 새겨 넣었다. 재질은 석회암 계열로 청석이다. 묘지명은 현재 두 곳에 분리되어 보관되고 있다. 개석은 중국 하남성 낙양시 낙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지석은 정주시 하남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을 지은 이와 글씨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부여융의 장례를 담당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관리가 지은 것은 확인이 된다. 묘지명의 내용은 모두 26행이며 행당 27자를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그 안에 669자를 해서체로 써서 새겼다. 대개 3자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판독이 가능하다. 지석의 네 측면에는 모란문을 음각하여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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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은 [[부여융]]의 장례를 치른 682년 12월에 만들어졌다. 원래 묘지명이 묻힌 곳은 장례를 치른 낙양 북망산의 청선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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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머리에 누구의 묘지인지 표제를 다는 다른 대부분의 묘지명과 달리 묘주의 이름과 출신을 먼저 밝혔다. 묘주인 [[부여융]]은 휘와 자가 모두 융(隆)이며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진조는 백제 건국 이전에 진국(辰國) 또는 삼한이 진국의 땅에서 나왔다는 출자인식의 표현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치 않다. 선조에 대해서는 기록하였는데 백제국왕 장(璋)이 정관 연간(627~649) 즉, 당 태종 즉위 초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에 책봉되었고, 부친은 의자로 현경 연간(656~66)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에 책봉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백제 무왕이 당의 대방군왕으로 책봉된 사실과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세상을 떠난 의자왕이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에 추증된 것을 말한다. 대개의 당대 묘지명이 선조를 기록할 때 증조부터 기록한 것과 비교해 조부만을 기록한 것은 부여융 가계의 특별한 사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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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은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기개가 삼한을 덮을 정도라 명성이 양맥(兩貊)에 전해졌다고 하였다. 양맥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칭하는 말이다. 성품은 효성스럽고 신중하여 선행을 행하고 의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병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기묘한 계책을 낼 줄 알아서 당 황제에게 귀부하였다고 하여 백제 멸망 당시 투항한 사실을 미화하였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웅진도독 백제군공에 봉해져 백제 유민들을 안무하는데 종사하였다는 것과 신라와는 수호하였다고 하여 665년 취리산 회맹에 참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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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65년 말과 666년 정월에 당 고종을 따라 태산 봉선에 참여한 사실과 이후 대방군왕에 봉해진 것 등 당에서의 활동에 대해 이민족으로 당에 투항하여 충성하였다는 것을 진나라의 유여(由余)와 한나라의 김일제(金日磾)에 빗대서 기록했다. 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는데, 향년 68세인 682년에 사제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12월 24일에 낙양 북망산의 청선리에 묻혔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의 사제는 낙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대 예법에 부친인 의자왕의 무덤 곁에 묻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가 묻힌 청선리는 부친 의자의 무덤이 만들어진 곳일 가능성이 크다. 묘지명의 뒷부분은 명(銘)을 기록하여 그의 선조와 일생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묘지명의 마지막 줄에는 묘지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표제를 달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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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당대 묘지명 중 제목이 첫머리가 아닌 마지막 행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백제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당에 투항한 대부분의 이민족 출신 인물들의 묘지명 기록상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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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의 개석은 2014년까지 낙양 관림 내의 낙양고대예술관에 소장되었다가 2015년부터 낙양박물관으로 이관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지석은 개봉도서관과 개봉박물관을 거쳐 1998년부터는 하남박물원에 이관되어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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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태자였던 부여융의 선조와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부흥운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고, 웅진도독부와 당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특히 입당 이후 부여융의 활동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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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扶餘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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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태자,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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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년(무왕 16) ~ 682년(신문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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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여융]]묘지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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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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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扶餘隆)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이다.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의자왕]] 후반에 [[부여효]](扶餘孝)로 교체되었다. 백제 멸망 후 당의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했고, 이로 인해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되었다. 백제의 대표로 신라와 1차 웅령회맹(熊嶺會盟)과 2차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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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이전까지 부여융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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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은 [[의자왕]](義慈王)의 장자이다. 615년(무왕 16)에 태어났는데, 이때는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기 전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사씨(沙氏)일 것으로 추정된다. 682년(당 고종 원년)에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형제로는 동복형제인 태(泰)와 이복형제인 효(孝)·연(演)·풍(豐)·궁(躬)·충승(忠勝)·충지(忠志) 등이 있다. 후손으로는 [[부여융]]의 대방군왕(帶方郡王) 직위를 계승한 손자 부여경(扶餘敬)이 있다. 그리고 당 사괵왕 이옹(唐 嗣虢王 李邕)의 부인이 [[부여융]]의 손녀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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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44년(의자왕 4) 태자에 책봉되면서부터이다. 부여융은 의자왕의 장자이며, 당시 나이 30세였다. 이후 백제 멸망시기까지 부여융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의자왕 즉위 초 태자로 책봉된 만큼, 의자왕을 보좌하면서 정국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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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백제 멸망기의 기록에서 당시 태자가 [[부여융]]이 아닌 [[부여효]](扶餘孝)라고 되어 있어서 혼란을 준다. 이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태자가 교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태자가 교체된 시기는 655년(의자왕 15)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의자왕이 왕비 은고(恩古)를 총애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충신을 멀리하는 등 정치세력의 교체가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부여융 역시 이 시기에 부여효에게 태자의 지위를 넘겨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은고의 등장과 관련하여 부여효를 은고의 아들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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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의 지위에서 물러나면서 [[부여융]]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은 사비성 함락 상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을 갔다. 사비성에 남은 왕자들 중 부여태(扶餘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저항을 주도했다. 그러자 [[부여효]]의 아들 문사(文思)는 당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나면 부여태에 의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로 [[부여융]]을 설득해, 측근들을 이끌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왕과 태자가 수도를 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직 태자였던 부여융은 어떤 활동도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부여융은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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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의자왕 20) 7월 18일, 웅진 방어 책임자였던 예식진(禰寔進)의 배신으로 사비성의 소정방 앞으로 나가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을 고했다. 8월 2일,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에서 축하연을 열었는데, 여기에서 부여융은 의자왕과 함께 당 아래에 앉아 무열왕(武烈王)과 소정방(蘇定方), 김유신(金庾信) 등에게 술을 따르는 굴욕을 당했다. 그리고 9월 3일 소정방이 귀국할 때 의자왕과 대신들, 백성 12,800여 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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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의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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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은 11월 당의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당 고종은 헌부례(獻俘禮)를 치른 후 의자왕 등을 사면해 주었지만, [[의자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묻혔다. 그리고 [[부여융]]에게는 국가의 창고를 담당하는 사가경(司稼卿)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3년 간 부여융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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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제에서는 멸망 직후부터 부흥군이 봉기하여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백제의 부흥군들은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을 차지하고 버텼다.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正武)가, 임존성에서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세력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대항했다. 소정방이 귀국한 후 사비성에는 유인원(劉仁願)이 거느리는 당군 1만과 김인태(金仁泰)가 이끄는 신라군 7천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부흥운동군을 제압할 수 없었다. 오히려 복신과 도침 등이 임존성을 거점으로 점차 사비성을 향해 세력을 확대하고, 주변의 성들이 이에 호응하는 형국이었다. 이에 당 고종은 유인궤(劉仁軌)를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로 임명해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가도록 했고, 다음해인 661년에는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해 백제지역에 파견했다. 그리고 663년에는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증원군을 다시 파견했는데, 이때 [[부여융]]도 함께 백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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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당연합군은 부흥운동군의 왕성인 주류성(周留城)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인사와 유인원, 문무왕(文武王)은 육군을 이끌었고, 유인궤와 부여융은 수군과 보급선을 이끌고 각각 백강(白江)으로 향했다. 8월 27일과 28일에 걸친 전투에서 나당군은 백강 어귀로 진입하려는 왜군들을 맞아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군선 4백 척을 불태웠다. 불타는 적선에 바닷물이 붉어질 정도로 대승이었다. 백강구전투에서 왜군이 패하자 부흥군의 왕인 부여풍(扶餘豐)은 어디론가 도망하였다. 그리고 백강에서 수군과 합류한 육군은 먼저 주류성으로 가서 9월 7일에 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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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당군은 임존성 공격에 나섰다. 임존성은 원래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인데, 주류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別部將 沙咤相如)와 항복했다. 흑치상지의 항복은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흥운동이 끝난 후 흑치상지가 부여융과 함께 활동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부여융의 적극적인 회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지수신(遲受信)의 거센 저항으로 한 달 넘게 어려움을 겪었으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활약으로 마침내 임존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기록상 이 전투에서 부여융의 활약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당의 군대가 모두 동원된 전쟁이었던 만큼, 부여융 역시 임존성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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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도독 역임 시기의 부여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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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이 끝나자, 손인사의 군대는 물론이고 백제고지에 주둔하던 유인원도 당으로 돌아갔다. 이때 부여융과 흑치상지도 함께 돌아갔다. 백제고지에는 유인궤가 남아 전후 처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신라는 남쪽에서 부흥운동군과 싸워가며 승리해 이 지역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의 영역이 사비성을 함락할 때보다 확장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과 신라는 새롭게 영역을 획정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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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664년(문무왕 4) 2월, 유인원의 중재 하에 신라의 김인문과 백제의 부여융이 웅령(웅진)에서 1차 맹약을 맺었다. 당으로 갔던 부여융은 이 맹약을 맺기 위해 다시 백제로 돌아온 듯하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유인궤의 추천으로 웅진도독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665년(문무왕 5) 8월 13일, 유인원의 중재 하에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 부여융이 웅진 취리산에서 다시 맹약을 맺었다. 취리산회맹의 결과 백제의 서부지역은 웅진도독부가 다스리고, 동부는 계림도독부가 다스리게 되었다. 당시 부여융의 나이는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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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약을 맺은 직후인 8월 하순, 유인궤는 부여융을 포함한 백제·신라·왜의 사자를 데리고 당으로 귀국한다. 이듬해 정월 태산(泰山)에서 있을 당 고종의 봉선의식(封禪儀式)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부여융은 봉선 참여에 이어 곡부(曲阜)에서 공자의 제사를 섭행했다. 그리고 백제로 돌아와 웅진도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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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귀국 이후 부여융의 역할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웅진도독으로서 실제 백제고지를 다스렸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웅진도독 임명 자체가 백제 유민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역할 수행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670년경 신라는 백제고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671년(무무왕 11) 사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웅진도독부는 사실상 역할을 상실하였다. 이후 부여융은 유인원·유인궤와 함께 당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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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에서의 활동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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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당의 계획은 신라의 거센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신라와 당의 이른바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은 676년 2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겼고, 명목상으로만 있던 웅진도독부 역시 요동의 건안성(建安城)으로 이치되었다. 이때 당은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주(熊津都督 帶方郡主)로 임명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백제는 이미 신라에게 점령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다. 부여융은 안동도호부에 의탁해 백제 유민을 다스리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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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이 사망한 것은 682년 12월 24일,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부여융의 시신은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매장되었다. 부여융이 사망한 후 손자인 부여경이 대방군왕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손녀는 사괵왕 이옹의 후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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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은 웅진도독에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당의 입장에서는 백제고지와 당으로 사민된 백제유민을 다스리는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은 [[부여융]]을 일국의 대표로 대우했고, 사후에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했으며 손자에게는 대방군주의 책봉호를 계승하도록 했다. 이로 볼 때 당에서 [[부여융]]을 비롯한 [[부여씨]] 후손들의 지위가 낮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백제왕 계보 ==
 
== 백제왕 계보 ==

2024년 7월 7일 (일) 13:24 기준 최신판

개요

의자왕장남. 백제의 태자였으며, 당나라의 귀족, 장수이자 웅진도독부의 도독이었다.

당나라 장수로서 백제부흥운동을 탄압한 인물이 부여융이었다. 그 상황에서 부흥운동을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친동생 부여풍.

부여융 가묘 위치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6-2


백제 의자왕의 태자로 웅진도독을 역임한 부여융(615~68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

1919년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망산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1920년 발견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출토된 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지석의 크기는 가로 56.8㎝, 세로 대략 57.8㎝로 정방형에 가깝다. 개석의 크기는 지석과 거의 동일하며 녹정형(盝頂形)이다. 개석의 비탈면에는 사방에 모란문을 음각하여 장식하였고, 위면에는 전서체로 대당부여부군묘지(大唐扶餘府君墓誌)라고 3행 3자씩 모두 9자를 양각으로 새겨 넣었다. 재질은 석회암 계열로 청석이다. 묘지명은 현재 두 곳에 분리되어 보관되고 있다. 개석은 중국 하남성 낙양시 낙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지석은 정주시 하남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을 지은 이와 글씨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부여융의 장례를 담당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관리가 지은 것은 확인이 된다. 묘지명의 내용은 모두 26행이며 행당 27자를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그 안에 669자를 해서체로 써서 새겼다. 대개 3자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판독이 가능하다. 지석의 네 측면에는 모란문을 음각하여 장식하였다.

묘지명은 부여융의 장례를 치른 682년 12월에 만들어졌다. 원래 묘지명이 묻힌 곳은 장례를 치른 낙양 북망산의 청선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첫머리에 누구의 묘지인지 표제를 다는 다른 대부분의 묘지명과 달리 묘주의 이름과 출신을 먼저 밝혔다. 묘주인 부여융은 휘와 자가 모두 융(隆)이며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진조는 백제 건국 이전에 진국(辰國) 또는 삼한이 진국의 땅에서 나왔다는 출자인식의 표현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치 않다. 선조에 대해서는 기록하였는데 백제국왕 장(璋)이 정관 연간(627~649) 즉, 당 태종 즉위 초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에 책봉되었고, 부친은 의자로 현경 연간(656~66)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에 책봉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백제 무왕이 당의 대방군왕으로 책봉된 사실과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세상을 떠난 의자왕이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에 추증된 것을 말한다. 대개의 당대 묘지명이 선조를 기록할 때 증조부터 기록한 것과 비교해 조부만을 기록한 것은 부여융 가계의 특별한 사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부여융은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기개가 삼한을 덮을 정도라 명성이 양맥(兩貊)에 전해졌다고 하였다. 양맥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칭하는 말이다. 성품은 효성스럽고 신중하여 선행을 행하고 의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병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기묘한 계책을 낼 줄 알아서 당 황제에게 귀부하였다고 하여 백제 멸망 당시 투항한 사실을 미화하였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웅진도독 백제군공에 봉해져 백제 유민들을 안무하는데 종사하였다는 것과 신라와는 수호하였다고 하여 665년 취리산 회맹에 참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665년 말과 666년 정월에 당 고종을 따라 태산 봉선에 참여한 사실과 이후 대방군왕에 봉해진 것 등 당에서의 활동에 대해 이민족으로 당에 투항하여 충성하였다는 것을 진나라의 유여(由余)와 한나라의 김일제(金日磾)에 빗대서 기록했다. 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는데, 향년 68세인 682년에 사제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12월 24일에 낙양 북망산의 청선리에 묻혔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의 사제는 낙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대 예법에 부친인 의자왕의 무덤 곁에 묻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가 묻힌 청선리는 부친 의자의 무덤이 만들어진 곳일 가능성이 크다. 묘지명의 뒷부분은 명(銘)을 기록하여 그의 선조와 일생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묘지명의 마지막 줄에는 묘지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표제를 달아 밝혔다.

지금까지 알려진 당대 묘지명 중 제목이 첫머리가 아닌 마지막 행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백제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당에 투항한 대부분의 이민족 출신 인물들의 묘지명 기록상의 특징이다.

묘지명의 개석은 2014년까지 낙양 관림 내의 낙양고대예술관에 소장되었다가 2015년부터 낙양박물관으로 이관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지석은 개봉도서관과 개봉박물관을 거쳐 1998년부터는 하남박물원에 이관되어 보관되고 있다.

의자왕의 태자였던 부여융의 선조와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부흥운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고, 웅진도독부와 당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특히 입당 이후 부여융의 활동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부여융[扶餘隆] 백제의 태자,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다 615년(무왕 16) ~ 682년(신문왕 2)

백제 부여융묘지 탁본

개요

부여융(扶餘隆)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이다.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의자왕 후반에 부여효(扶餘孝)로 교체되었다. 백제 멸망 후 당의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했고, 이로 인해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되었다. 백제의 대표로 신라와 1차 웅령회맹(熊嶺會盟)과 2차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에 참여했다.

백제 멸망 이전까지 부여융의 활동

부여융의자왕(義慈王)의 장자이다. 615년(무왕 16)에 태어났는데, 이때는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기 전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사씨(沙氏)일 것으로 추정된다. 682년(당 고종 원년)에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형제로는 동복형제인 태(泰)와 이복형제인 효(孝)·연(演)·풍(豐)·궁(躬)·충승(忠勝)·충지(忠志) 등이 있다. 후손으로는 부여융의 대방군왕(帶方郡王) 직위를 계승한 손자 부여경(扶餘敬)이 있다. 그리고 당 사괵왕 이옹(唐 嗣虢王 李邕)의 부인이 부여융의 손녀로 확인되었다.

부여융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44년(의자왕 4) 태자에 책봉되면서부터이다. 부여융은 의자왕의 장자이며, 당시 나이 30세였다. 이후 백제 멸망시기까지 부여융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의자왕 즉위 초 태자로 책봉된 만큼, 의자왕을 보좌하면서 정국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백제 멸망기의 기록에서 당시 태자가 부여융이 아닌 부여효(扶餘孝)라고 되어 있어서 혼란을 준다. 이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태자가 교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태자가 교체된 시기는 655년(의자왕 15)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의자왕이 왕비 은고(恩古)를 총애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충신을 멀리하는 등 정치세력의 교체가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부여융 역시 이 시기에 부여효에게 태자의 지위를 넘겨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은고의 등장과 관련하여 부여효를 은고의 아들로 보기도 한다.

태자의 지위에서 물러나면서 부여융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은 사비성 함락 상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을 갔다. 사비성에 남은 왕자들 중 부여태(扶餘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저항을 주도했다. 그러자 부여효의 아들 문사(文思)는 당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나면 부여태에 의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로 부여융을 설득해, 측근들을 이끌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왕과 태자가 수도를 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직 태자였던 부여융은 어떤 활동도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부여융은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660년(의자왕 20) 7월 18일, 웅진 방어 책임자였던 예식진(禰寔進)의 배신으로 사비성의 소정방 앞으로 나가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을 고했다. 8월 2일,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에서 축하연을 열었는데, 여기에서 부여융은 의자왕과 함께 당 아래에 앉아 무열왕(武烈王)과 소정방(蘇定方), 김유신(金庾信) 등에게 술을 따르는 굴욕을 당했다. 그리고 9월 3일 소정방이 귀국할 때 의자왕과 대신들, 백성 12,800여 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되었다.

백제부흥운동의 진압

부여융은 11월 당의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당 고종은 헌부례(獻俘禮)를 치른 후 의자왕 등을 사면해 주었지만, 의자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묻혔다. 그리고 부여융에게는 국가의 창고를 담당하는 사가경(司稼卿)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3년 간 부여융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백제에서는 멸망 직후부터 부흥군이 봉기하여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백제의 부흥군들은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을 차지하고 버텼다.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正武)가, 임존성에서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세력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대항했다. 소정방이 귀국한 후 사비성에는 유인원(劉仁願)이 거느리는 당군 1만과 김인태(金仁泰)가 이끄는 신라군 7천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부흥운동군을 제압할 수 없었다. 오히려 복신과 도침 등이 임존성을 거점으로 점차 사비성을 향해 세력을 확대하고, 주변의 성들이 이에 호응하는 형국이었다. 이에 당 고종은 유인궤(劉仁軌)를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로 임명해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가도록 했고, 다음해인 661년에는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해 백제지역에 파견했다. 그리고 663년에는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증원군을 다시 파견했는데, 이때 부여융도 함께 백제로 돌아왔다.

당시 나당연합군은 부흥운동군의 왕성인 주류성(周留城)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인사와 유인원, 문무왕(文武王)은 육군을 이끌었고, 유인궤와 부여융은 수군과 보급선을 이끌고 각각 백강(白江)으로 향했다. 8월 27일과 28일에 걸친 전투에서 나당군은 백강 어귀로 진입하려는 왜군들을 맞아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군선 4백 척을 불태웠다. 불타는 적선에 바닷물이 붉어질 정도로 대승이었다. 백강구전투에서 왜군이 패하자 부흥군의 왕인 부여풍(扶餘豐)은 어디론가 도망하였다. 그리고 백강에서 수군과 합류한 육군은 먼저 주류성으로 가서 9월 7일에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나당군은 임존성 공격에 나섰다. 임존성은 원래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인데, 주류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別部將 沙咤相如)와 항복했다. 흑치상지의 항복은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흥운동이 끝난 후 흑치상지가 부여융과 함께 활동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부여융의 적극적인 회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지수신(遲受信)의 거센 저항으로 한 달 넘게 어려움을 겪었으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활약으로 마침내 임존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기록상 이 전투에서 부여융의 활약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당의 군대가 모두 동원된 전쟁이었던 만큼, 부여융 역시 임존성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본다.

웅진도독 역임 시기의 부여융

백제부흥운동이 끝나자, 손인사의 군대는 물론이고 백제고지에 주둔하던 유인원도 당으로 돌아갔다. 이때 부여융과 흑치상지도 함께 돌아갔다. 백제고지에는 유인궤가 남아 전후 처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신라는 남쪽에서 부흥운동군과 싸워가며 승리해 이 지역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의 영역이 사비성을 함락할 때보다 확장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과 신라는 새롭게 영역을 획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664년(문무왕 4) 2월, 유인원의 중재 하에 신라의 김인문과 백제의 부여융이 웅령(웅진)에서 1차 맹약을 맺었다. 당으로 갔던 부여융은 이 맹약을 맺기 위해 다시 백제로 돌아온 듯하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유인궤의 추천으로 웅진도독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665년(문무왕 5) 8월 13일, 유인원의 중재 하에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 부여융이 웅진 취리산에서 다시 맹약을 맺었다. 취리산회맹의 결과 백제의 서부지역은 웅진도독부가 다스리고, 동부는 계림도독부가 다스리게 되었다. 당시 부여융의 나이는 51세였다.

맹약을 맺은 직후인 8월 하순, 유인궤는 부여융을 포함한 백제·신라·왜의 사자를 데리고 당으로 귀국한다. 이듬해 정월 태산(泰山)에서 있을 당 고종의 봉선의식(封禪儀式)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부여융은 봉선 참여에 이어 곡부(曲阜)에서 공자의 제사를 섭행했다. 그리고 백제로 돌아와 웅진도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귀국 이후 부여융의 역할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웅진도독으로서 실제 백제고지를 다스렸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웅진도독 임명 자체가 백제 유민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역할 수행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670년경 신라는 백제고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671년(무무왕 11) 사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웅진도독부는 사실상 역할을 상실하였다. 이후 부여융은 유인원·유인궤와 함께 당으로 들어갔다.

당에서의 활동과 죽음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당의 계획은 신라의 거센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신라와 당의 이른바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은 676년 2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겼고, 명목상으로만 있던 웅진도독부 역시 요동의 건안성(建安城)으로 이치되었다. 이때 당은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주(熊津都督 帶方郡主)로 임명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백제는 이미 신라에게 점령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다. 부여융은 안동도호부에 의탁해 백제 유민을 다스리다가 죽었다.

부여융이 사망한 것은 682년 12월 24일,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부여융의 시신은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매장되었다. 부여융이 사망한 후 손자인 부여경이 대방군왕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손녀는 사괵왕 이옹의 후처가 되었다.

부여융은 웅진도독에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당의 입장에서는 백제고지와 당으로 사민된 백제유민을 다스리는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은 부여융을 일국의 대표로 대우했고, 사후에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했으며 손자에게는 대방군주의 책봉호를 계승하도록 했다. 이로 볼 때 당에서 부여융을 비롯한 부여씨 후손들의 지위가 낮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초기

부여융의 묘지명에 따르면 부여융615년의자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가 대성팔족 중 하나인 사택씨를 모계로 두고 있기 때문에 초창기에 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부여융은 64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한편 《구당서》에는 647년인 정관 11년 12월에 백제 태자 융이 조공했다[* 百濟王遣其太子隆來朝]는 언급이 있다.

모국의 멸망과 굴욕적인 항복

이상하게도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에는 태자가 '부여효'로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아무래도 655년 정월에 일어났던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의 결과로 보인다. 부여효는 부여융의 배다른 형제로 추측되는데, 백제 말기에 전횡을 일삼았다는 군대부인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를 도와 권세를 잡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대부인 소생인 부여효가 부여융을 몰아내고 태자위를 빼앗아갔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이 군대부인이 은고부인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못하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웅진강 입구의 전투에서 당군에게,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해 수도 사비성 포위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사비성을 탈출하여 북쪽의 요충지인 웅진성으로 피난했다. 부여융은 일단 사비성에 남아있었지만 동생 부여태가 의자왕이 없는 틈을 타 멋대로 백제왕 행세를 하자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문사와 논의 끝에 사비성에 이대로 남아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며 사비성을 탈출했다. 부여태는 탈출하는 이들을 보고도 어쩔 수 없어 막지 못했다.

결국 부여태가 지키는 사비성,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가 들어간 웅진성이 차례로 나당연합군에 함락당해 부여융도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 그런데 현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인 신원사(사찰)(新元寺)의 부속암자인 고왕암(古王庵)의 '융피굴'에 태자 부여융이 도망쳐 숨어있었다가 잡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후 항복 의식에서 신라의 태자 김법민(훗날의 문무왕)이 뱉은 침을 맞는 수모를 겪었는데, 문무왕이 이런 행동을 한 직후 "네 놈의 아비 때문에 대야성에서 내 누이무참하게 죽었다. 오늘 너의 목숨은 나의 손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 걸 보면 분명 과거의 일에 대한 복수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장수가 되어 백제부흥운동을 탄압하다

백제 멸망 이후 부여융은 백제 백성 1만여 명과 함께 으로 압송되었다가 당 고종의 신하로 활동하게 된다.

멸망한 구 백제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할 당나라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662년 당나라 수군을 이끌고 구 백제 강역으로 돌아와 당나라 장수 유인궤와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하는 백제부흥군의 수장이자 자신의 동생인 풍왕 부여풍을 공격했다. 결국 백제부흥군은 백강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와 내분으로 무너졌다.

당나라 웅진도독부 도독이 되다

백강 전투를 비롯, 백제부흥군을 절멸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부여융은 당나라에 의해 웅진도독부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서 부여융은 구도 사비성 부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았다. 당나라는 이전 당나라군의 직접 통치가 백제 유민들의 큰 반발을 가져왔던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번에는 구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백제 유민들의 반감을 줄이면서 옛 백제 지역을 통치하려 했다. 이후 부여융은 670년 나당전쟁 발발 전까지 사비성 인근 옛 백제 수도권 지역을 직접 통치했다.

향후 신라까지 집어삼킬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당나라는 665년에 취리산 회맹을 주재하여, 웅진 도독 부여융과 과거 융에게 침까지 뱉으며 모욕을 주었던 신라 문무왕을 같은 자리에 앉혔다. 여기서 두 사람은 명목상 대등한 위치에서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화해할 것을 맹세했다.(취리산 회맹) 당나라는 취리산 화맹을 통해 신라에게는 이미 멸망한 백제가 멀쩡한 신라와 동격임을 강요하여 옛 백제 영역으로 침투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

한반도에서 쫒겨나 중국에서 여생을 보내다

그러나 670년 나당전쟁이 개전되면서 신라군이 대대적인 웅진도독부를 공격했고[* 동시에 요동 방면으로 설오유가 지휘하는 신라군+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 연합군의 공격이 있었는데, 이는 웅진도독부(옛 백제 지역)에 주공을 하면서 당나라의 시선을 한반도 남부와 북부로 분산시키는 일종의 별동대였다.] 부여융은 결국 672년 바다 건너 당으로 도망가야 했다.[*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에 패퇴한 시점은 기록의 모호성으로 672년설과 676년설이 있다.]

676년 나당전쟁이 끝난 후 웅진도독부는 백제와 아무 상관도 없는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 지역 건안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은 여기에다가 과거 백제에서 압송해온 유민들을 모아 백제유민 자치구를 만들게 된다. 다만 발해가 건국되는 7세기 말 소용돌이에서 대조영이 이끄는 군세에 최종적으로 소멸된다. 다만 부여융이 죽을 때 중국 낙양에서 사망해 북망산에 묻히고 사후에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받은 걸 볼 때, 이 시기에 어떻게든 낙양으로 탈출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후일담과 평가

의자왕과 그의 자손들이 당나라에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부여융은 당나라의 장수이자 웅진도독을 역임하며 최고위 귀족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한편 부여융의 자손들은 웅진도독부를 대조영이 멸망시켰고 당나라는 이 도독부를 부활시킨 바 없기에, 명목상의 백제왕 작위만 어쩌다 받은 듯하다. 최근(?) 밝혀진 부여융의 손녀 부여태비의 생애를 통해 부여융의 자손들이 당나라에서 누린 권세와 영예를 엿볼 수 있다.

여담으로 부여 서씨 측에서는 부여융이 당 황제로부터 서씨를 사성받은 후 내려온 것이 그들 가문이라고 자처하지만, 발견된 부여융 묘지명에는 사성받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부여 서씨가 진짜 부여융의 후손이라면 부여융의 후손 중 누군가가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숨어지내면서 왕성인 부여씨서씨로 개성했던 것을 후에 후손들이 사성을 받은 것이라고 윤색했을 경우가 훨씬 개연성있다.] 부여태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여융의 가문은 당나라에서 이어졌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근초고왕-무령왕-의자왕-부여융-서신일(아간대부 정2품)-서필(내의령 종1품)-서희(내사령 종1품)-서유걸(좌복야 정2품)-서존(병부상서 정3품)-서청습(판전의시사 정2품)-서효리(좌복야 정2품)-서찬(정당문학 종2품)-서희팔(정당문학 종2품)-서춘(판내부사사 정2품) 서박(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총평을 하자면 망국의 비애를 겪은 백제 태자 출신으로 나름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당나라에 협조해 친동생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부흥운동을 자신이 토벌하기도 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생이다. 나당전쟁이 터지자 부여융의 친당 노선에 반발해 도리어 신라에 편입되어 '백금서당'처럼 신라군으로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백제인들이 오히려 당나라 장수가 되어 돌아온 옛 태자에 반발하는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그리고 덕분에 백제는 유민들이 단합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당군, 부흥군, 신라군[* 충상, 상영, 자간 등이 신라에 붙은 백제 구 대신에 해당한다.]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다 궤멸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후백제의 시조 견훤이 부여융의 9대손이라 하는데 신빙성은 낮다. 견훤의 조상 계보는 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룡(지렁이)설, 신라 진흥왕설도 있다. 후삼국 계보 자체가 좋아 보이는 건 다 가져다붙이는 수준이라 외지인인 견훤이 백제 유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꾸며낸 계보일 가능성이 크다.

충청남도 부여군은 사비백제시대 백제 왕가 묘역인 부여 왕릉원 능산리 고분군 한켠에 부여융의 가묘를 만들었다.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묘를 조성하고, 무령왕릉 지석을 참고해 백제의 장례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 매지권, 그리고 중국 북망산에서 출토된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과 부여융묘 자리의 흙을 관과 함께 부여융묘에 매설하였다. 부여융이 죽고 천 년도 훨씬 지나 겨우 고국의 능원에 돌아온 셈이다.

가족 관계

* 아버지 의자왕
* ?[* 부여문사라는 설도 있지만 부여문사의 경우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에 따라 부여효의 아들로 본다.]
 * 손자 부여경
* 아들 부여문선
* 아들 부여덕장
 * 손녀 부인 부여씨[* 당현종 대의 관리인 길온(吉溫)의 어머니라고 한다.]
 * 손녀 부여태비

대중매체에서

삼국시대 말기를 다룬 사극에서 몇 번 등장했는데, 대부분 백제 왕실 내에서 그나마 사리분별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이경영이 연기했다. 직접 무열왕과 소정방에게 항복을 청하고 신라 태자 법민에게 모욕을 당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법민이 아예 칼을 빼서 죽이려는 모습까지 보였으나, 부왕인 김춘추(무열왕)가 만류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 와중에도 백제 백성들의 목숨은 살려줄 것을 청하는 왕자로 등장한다.
*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공정환이 연기했다. 의자왕의 태자였으나 신라를 얕잡아보는 아버지에게 간언을 하다가 아버지의 눈 밖에 나서 태자 자리를 빼앗기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자기 욕심 채우기에나 바쁜 다른 형제들이나 자만심에 빠진 아버지 의자왕과는 달리 나당동맹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 영화 황산벌에서는 박수현이 연기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향하고 있다하자 패닉에 빠지고 아버지 의자왕에게 소정방에게 뇌물을 주자고 했다가 도리어 박치기 당하는(...) 코믹한 역할로 등장.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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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멸망전
* 백제부흥운동
* 부여태비
* 웅진도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