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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5일 (일) 08:1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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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영풍군은 본디 영주, 풍기, 순흥 세 고을이 비슷한 규모로 솔밭처럼 나뉘어 오랜 역사를 이루어온 곳이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이름의 사찰터로, 서원 입구에는 현재까지 4m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평소 자신이 흠모해 왔던 고려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인 이곳 풍기 땅에 부임한 것을 계기로 그의 향리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사당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 서원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가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서당(白雲洞書堂)이라고 하였다가, 중종 40년(1545년)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나아가 주세붕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감사로 부임한 안현은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고, 조선 명종 5년(1550년) 이황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篇額)을 서원에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내렸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이것은 소위 사액서원의 시초였으며, 이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사액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또한 서원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도 정하여, 배움의 장으로서의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당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에 경상우병사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의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다.

1633년(인조)에는 주세붕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그 뒤 안향주자, 이원익, 허목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편집 - 201010312신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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