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표석조사 참고 문헌 목록

onthedh
Onthedh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3일 (월) 16:25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분류 표석명 표석문안 고전자료 근대자료 지도
관청[1] 공세청 터 공세청은 조선시대에 서강나루로 들어오는 선박에서 세금을 거두던 관청이다. 서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였던 서강나루에는 공세청과 함께 점검청(點檢廳), 광흥창(廣興倉)도 있었다.
동빙고 터 조선시대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제사때 쓰던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연산군 10년(1504) 동빙고동으로 옮겨졌음 (이순우 선생님[2])
동활인서 터 활인서는 조선 초기 전염병 환자와 가난한 환자를 치료하려고 서울의 동쪽과 서쪽 두 곳에 설치한 관청이다. 동활인서는 동소문 밖에 있었고, 서활인서는 서소문 밖에 있었는데 1882년(고종 19) 폐지되었다. 경성부사1권, 경성부사 3권
마조단 터 조선시대 국립 살곶이목장(箭串牧場)안에 있던 말의 무병(無病)과 번식을 위해 말의 조상에게 제사지내던 제단터(祭壇址)
사도시 터 조선시대 궁중의 미곡과 장(醬) 등의 물건을 맡은 관청으로 태조1년(1392) 고려의 제도를 따라 요물고(料物庫)를 설치하였다. 태종1년(1401)에는 공정고(供正庫), 세종4년(1422)에는 도관서(導官暑), 세조 6년(1460) 사선서(司膳署)에 흡수되었다가 세조 13년(1467) 도관서를 다시 설치하였고 이후 사도시라 개칭되었으며 고종19년(1882)에 폐지되었다.
사포서 터 사포서(司圃胥)는 궁중의 채소밭과 과수원을 관리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원래 북부 준수방(俊秀坊:종로구 통인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사한단 터 조선시대 빙고(氷庫)에 얼음을 저장할 때와 꺼낼 때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제사를 지냈던 터.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고 동빙제(凍氷祭)와 기한제(祈寒祭)를 지냈는데 1908년에 폐지되었다.
서활인서 터 전염병자를 격리 치료하던 의료기관이 있었던 곳
순청 터 순청은 야간 순찰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야간 순찰은 오후 10시경부터 오전 4시경까지 실시하였다.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1465년 세조 때 좌순청과 우순청을 두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內務衙門) 산하의 경무청 소관으로 바뀌었다. (이순우 선생님[3])
시흥향교 터 조선시대에 공자(孔子)등 성현을 봉안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던 곳으로 1944년 일제가 과천향교(果川鄕校)에 통합시켰음
양향청 터 양향청은 훈련도감에서 사용하는 의복이나 무기, 비품 등의 물자를 조달하고, 재정을 관리 운영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선조 26년(1593)에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때 폐지되었다.
어영청 터 인의동 이 언저리는 왕실과 도성의 수비를 맡았던 군영(軍營) 터 (이순우 선생님[4])
연희궁 터· 서잠실 터 연희궁은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의 하나이다. 1420년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고쳐지었으며, 세종 자신도 1426년에 이 곳에 잠시 머물렀다. 또한 세종은 이 궁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 세조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였다. 1505년에는 연산군이 이를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염초청 터 조선시대 화약을 제조하던 이 관아는 임진왜란 때 설치되어 고종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날 때까지 존속하여 전시에 대비했다. (이순우 선생님[5])
영성단 터 영성단은 조선시대 새해 농사가 잘 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든 제단이다. 조선은 한양 천도 후에 이곳 남교(南郊)에 제단을 설치하고 입추 후 진일(辰日)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또한 태조가 발신한 함흥에도 영성단을 설치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전생서 터 전생서는 궁중의 각종 제사 때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1460년 세조 때 고려시대의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한 관아인 전구서(典廐署)의 이름을 전생서로 바꾸고 이 곳에 설치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경성부시가도(1911)
주교사 터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때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조 13년(1789)에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
총융청 터 총융청은 인조2년(1624)에 설치된 조선시대의 중앙 군영(軍營)이다. 광주(廣州)·양주(楊州)·수원(水原) 등 경기도 지역의 군사 일을 맡았으며, 영조 23년(1747)에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수비를 맡기도 했다. 고종21년(1884)에 폐지되었다.
평창 터 조선후기 서울 북쪽의 방어를 위한 총융청(摠戎廳)의 군량창고가 있던 곳
홍제원 터 여기서 약 50m 골목 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나루[6] 광나루 터 서울과 강원지방을 이어주던 나루터, 원래 너븐나루
노량진 터 노량진은 용산과 마주한 한강 남쪽 기슭의 나루이다. 서울과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잇는 수상 교통의 요지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철교가 놓인 곳이기도 하다.
동재기 나루터 수원 이남 삼남(충청,영남,호남) 지방과 서울(漢陽)을 이어주던 나루터
두뭇개 나루터 경상·강원도의 세곡 등 물산이 집결되었고 경승지로도 유명하였던 나루 터
뚝섬 나루터 이곳은 강남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
방학호진 터 방학호진은 신길동에서 샛강을 지나 마포나루로 건너갈 때 이용하던 나루이다. 나무가 무성한 흰 모래사장과 언덕의 경치가 빼어나고, 학이 노는 호수 같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여졌다.
삼개포구 황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던 물화(物貨) 집산(集散)의 포구
삼전나루 터 경기도 광주, 여주 일대와 서울을 이어주던 유명한 나루터
서강나루 터 삼개 나루(용호,마호,서호)의 하나. 삼남 지방과 서해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
송파나루 터 삼남(충청,영남,호남) 지방과 서울(漢陽)을 이어주던 조선후기의 나루터 경성하이킹코스 3집(1938) 풍납리토성-사진,지도 등
양화진나루 터 서울과 제물포, 강화 방면을 잇던 나루터 경성하이킹코스 4집(1938) 당인리-사진,지도 등
입석포 터 입석포는 천연의 낚시터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입석포'는 한천변의 큰 바위들이 사람처럼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선돌개라 불리기도 하였다. 넓은 평야와 강 가운데 저자도를 포함하는 주변의 수려한 경관은 조선조 문인 서거정, 강희맹 등의 예찬 시로도 유명하다.
능묘 의령원 터 의령원은 영조의 세손 의소(懿昭)의 묘원(墓園)이다. 의소는 영조 26년(1750) 사도세자의 장자로 태어나 세손으로 책봉되고 다음 해 죽어 이곳에 장사되었다. 세손이었기에 장례 절차며 치장에 격식을 갖추어 속칭 '애기능'이라 불렀으며 1948년 서삼릉으로 옮겨갔다.
인명원 터 인명원은 조선후기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소이다. 1950년 6월 13일 서삼릉(西三陵) 내의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휘경원 터 휘경원은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1823년(순조 23) 조성되었다가 1863년(철종 1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겼다.
지명 무쇠막 터(성동구) 조선시대 선철(銑鐵)을 녹여 농기구, 무쇠솥 등을 주조(鑄造)하던 대장간 집단지로 무쇠를 녹이던 곳. 무시막이라고도 하였다.
무쇠막 터(마포구) 무쇠막은 정부에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바친 철공장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일찍부터 무쇠막 또는 무수막 터로 알려졌는데, 무수막에서 수철(水鐵)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수철리에서 신수동이라는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복주우물 복주우물은 복주 즉, 귀인(貴人)이 이용하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이 우물 뒤쪽의 금화산은 공기와 물이 맑아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 그래서 복수산(福壽山)이라고도 하였는데 후에 음이 와전되어 복주산으로 불렸다. 이에 따라 산 아랫마을을 복주산동, 그 마을의 우물을 복주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산골고개 예로부터 이곳에서 산골(生骨 또는 碌磻)이 출토되어 산골고개 또는 녹번고개(碌磻峴)라고 불렀다. 산골은 푸른 빛의 광물질로 골절되었을 때 먹으면 잘 붙는다고 전해진다.
여기소 터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 못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 전설에서, 곧 여기소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장승백이 장승배기는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헌륭원에 참배하러 가면서 쉬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인가도 없고 행인마저 적었는데 정조가 장승을 만들어 세우라고 지시한 이후 장승배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순우 선생님[7])
초리우물 터 초리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가우며, 물이 꼬리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넘쳐서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고 차가운 물이 염색하기에 좋아서 염색을 하는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 부근 마을을 미정동(尾井洞)이라고 했던 것도 이 우물 때문이다.
홍제교 터 조선시대 도성에서 의주로 통하는 길목인 홍제천에 놓였던 돌다리터. 일명 서석게다리
서원 노강서원 터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다가 혹독한 국문(鞠問)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사망한 박태보(朴泰輔, 1654~1689)를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 그가 사망한 장소 인근에 건립되었다.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9년 경기도 의정부시에 중건되었다.
사충서원 터 사충서원은 경종을 폐하고 연잉군(후의 영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1722년(경종 2) 사형된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배향한 서원으로 1725년(영조 1) 건립되었다. 1927년 보광동으로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8년 경기도 하남시에 중건되었다.
정자 낙천정 터 태종(太宗)이 왕위를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지은 '이궁(離宮) 낙천정(樂天亭)'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세종은 태종과 의논하여 대마도(對馬島) 정벌군을 파병하였고, 이기고 돌아온 정벌군의 환영식을 베풀었다. (이순우 선생님[8])
담담정 터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였으나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별장이 되었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시회(詩會)를 베풀었다. 신숙주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세조는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 후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麻浦莊)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등과정 터 등과정은 조선시대 무사들의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한 사정(射亭)이다. 사정이란 활터에 세운 정자를 말하는데, 등과정은 서울 서쪽 지역에 있는 다섯 군데 이름난 사정 가운데 하나였다. 갑오개혁 이래 궁술(弓術)이 폐지되면서 헐렸다. (이순우 선생님[9])
쌍호정 터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1808-1890)의 생가에 있던 정자 터. 신정왕후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嬪)이자 헌종의 어머니로 고종 즉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정자 앞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났다 하여 쌍호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옥호정 터 순조의 장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제택 (第宅)인 옥호정이 있던 곳이다. 전해오는 '옥호정도(玉壺亭圖)'에 그려진 '일관석(日觀石)' 각자(刻字)바위가 현재 북악 동쪽 산 중턱에 남아 있다.
탕춘대 터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이다. 연산군은 경치가 좋은 이곳 일대를 연회장소로 삼고 시냇물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위에 탕춘대를 지었다. 영조 때에는 이 일대에서 무사들을 선발하여 훈련시켰다고 하여 연융대(鍊戎臺)라 부르기도 하였다.
집터[10] 강희맹 살던 곳 조선 초 문인화가로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1424~1483)이 살면서 농업 전반에 관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던 곳
둔촌 이집 집터 이집 선생(1327~1387)은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둔촌(遁村)이었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공민왕 17년(1368)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로 피난하여 숨어살았다. 현재의 송파구 방이동으로 바뀌기 전에 둔촌동이었던 이 인근에 둔굴·밖둔굴·안둔굴·굴바위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박세채정승 살던 곳 박세채(1631~1695)는 조선후기 숙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관리이며, 유학자로 소론(少論)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에 전념하여 '예학의 대가'라고 칭하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의 아호인 현석(玄石)을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이순우 선생님[11])
박팽년 집터 조선 세종 때 한글 창제에 공을 세운 집현전 학사로 유명하였던 박팽년(1417~1456)이 살던 집터. 세종16년(143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이래 형조참판까지 올랐다. 경술(經術))·문장과 필법이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얻은 선비였다.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던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한 분이다. (이순우 선생님[12])
읍백당 터 조선 후기 광해군 때 영의정 박승종(1562~1623)과 성균관 교리를 지낸 그의 차남 읍백당 자응(自凝)이 살던 집 터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경기도 관찰사이던 장남 자흥(自興)의 군사행동을 중지시키고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도성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정 터 조선중기 저명한 역학자(易學者)였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집터.
흥선대원군 별장 터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 터. 현재는 철거되었으나 1985년까지 서울 대가(大家)의 전형적인 정원과 담장이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었다. 금천구 향토문화지(1996)-국립중앙박물관
집터(근대) 김수영 생가 터 이곳은 시인 김수영(1921~1968)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처음 연극을 하다가 1946년 잡지『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시집 『달나라의 장난』 (1959년), 시 「거대한 뿌리」(1964년) 등이 있다.
박인환 집터 이 곳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이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1955년에는 <박인환 시선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과 이시영(1869~1953)은 1910년 건영·석영·철영·호영 등 나머지 4형제와 함께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이회영은 1932년 일본군사령관 사살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이시영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재임한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전영택 집터 목사이고 소설가이며 한국 신문학 운동의 개척자인 늘봄 전영택(1894~1968)이 살던 곳이다. 그는 1919년 최초 문예잡지 <창조>의 동인이며 작품으로는 소설 <화수분(1925년)>,<소(1964년)>,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등이 있다
근대 3․1독립운동기념터; 세브란스병원 1919년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논의하던 곳.
경성궤도회사 터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까지 경성 궤도회사가 경영하던 궤도전차가 운행하던 시발지. 이 협궤전차는 승객 및 물자 수송, 교외 나들이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다.
국도극장 터 국도극장은 1936년 11월에 동양풍(東洋風)을 가미한 르네상스식의 황금좌(黃金座)로 개관하였다. 한국 영화 80년과 운명을 함께 해 온 이 극장은 1948년 국도극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극장은 광복 이후 '춘향전' '미워도 다시 한번' 등 한국영화 상영의 중심지로서 영화인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1999년 10월 30일에 철거되었다.
동양극장 터 1935년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 문을 연 동양극장이 있던 곳이다. 당시 대중 연극의 중심지였던 동양극장은 많은 인기를 모은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 같은 연극을 공연했으나 광복 후 영화관으로 바뀌었으며, 1976년 폐관된 뒤 1990년 철거되었다.
은성주점 터 이 곳에서 약 10m 앞에는 1960년대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봉구(1915~1983)와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던 주점 터이다. 특히 이봉구 선생은 명동을 좋아하여 '명동시장(明洞市長)·명동백작(明洞佰爵)'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이순우 선생님[13])
별기군훈련소 터 조선 말 고종 18년(1881)에 설치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훈련받던 곳. 신식 군대의 육성 없이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양반 자제를 선발, 일본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중위를 초빙하여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 별기군은 초록색 군복을 입었다 해서 초록 군대라고도 했고, 왜별기(倭別技)라고도 불렀다.
서북학회 터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하여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 조직한 애국 계몽 단체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10년에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한때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정치대학이 자리하였다. 경성부시가도(1911)
성동역 터 성동역은 일제강점기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회사가 부설한 사설철도(私設鐵道)인 경춘선의 출발역이었다. 이 역에는 30여 년간 경기도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임산물, 농산물이 많이 운반되었다. 광복 후 경춘선 사설철도는 국유화 되었으며 1970년 청량리역으로 이전하자 헐렸다.
우미관 터 우미관은 우리 나라에 영화문화가 들어온 초창기인 1912년에 개관되어 단성사(團成社)·조선극장(朝鮮劇場)과 더불어 사랑받던 영화관이다. 2층 벽돌 건물로 수용 인원 1000명 정도의 큰 극장이었다.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후에는 대체로 오락물을 상영하였다. 이 극장은 광복 이후에도 이곳에 존속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1959년 옛 화신백화점 뒤로 이전하였다.
전차 차고 터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전차 종점으로 차고가 있던 곳. 또한 종로행이나 청량리 행 손님이 전차를 갈아타기도 하였다. 대경성정도(1936)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 터 일제가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에 설치한 한국통감부 터이다. 이토 히로부미 등이 통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주권을 탈취하는 공작을 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통감부 청사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1926년에 경복궁 안으로 이전하였다. (이순우 선생님[14])
한양의원 터 우리나라 근대 초창기의 양의로 한성의사회 회장과 조선의사협회 초대 간사장을 역임한 박계양(朴啓陽)이 운영하던 병원터. 홍명희, 정인보, 최남선과 같은 명사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참고

  • 원문/번역문/원문 이미지가 필요한데, 원문/번역문 있으면 굳이 원문 이미지 필요 없음. 근데 번역문이 없는 경우는 사료 조사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선택안하는게 좋다.
  • 신문기사는 이미지도 첨부해주길 바람. 원 텍스트도 입력해야 함. 기사가 너무 길면 핵심적인거라도. 그리고 굳이 필요하지 않다면 빼는게 좋다. 신문기사 원문 이미지는 전부 따로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서 모아놓기. 후에 제출해야 함.
  • 지도 : 지도도 원문 이미지 제출해야 함.
  • 사료마다 이 사료를 왜 넣었는지에 대한 한 줄이라도 이유를 넣어야 함.
  • '표석 현황' 부분에서 부정확한 것이 많기 때문에 서울형 지도태깅 공유마당 에서 다시 보고 제대로 쓰기.
    • 지도 > 문화 > 도시생활지도42에서 '역사문화표석' 선택 > 상세보기 - 여기 있는 주소랑 한문명,영문명 고대로 쓰면됨!!! 주소가 완전 다르면 서울시에 말해주면 됨. / 주소는 현주소(구주소) 쓰면 됨. / 지도의 경우 '지도복사'해서 새창으로 열어서 표석위치 캡쳐해서 쓰면 됨.
  • daum 지도에서 '동표시'로 지적 표시해서 지도에 하나 더 캡쳐해서 넣으심.
  • 사료는 시대별로 제시
  • 인물
    • 연보나 행장보면 참고할 수 있음
  • 현행유지
    • 현행유지라고 해도 정비 예시를 좀 더 넣어주면 좋다.

주석

  1. *제일 처음에 관청을 설치한 것에 대해 제시하기.
    • 그리고나서 관청의 기능에 대해 제시.
    • 언제 폐지했는지에 대해서는 문구에 굳이 넣을 필요 없음. 거의 19세기 후반에 폐지하기 때문에. 근대에 와서 어떻게 변했는지 그와 관련된 기록을 넣어주는게 더 좋음.
    • 폐지/혁파/ 장소옮긴거/ 역할 바뀐거 등등은 다 넣으면 됨.(관원이나 이름 바뀐건 너무 많아서 제외하면 됨)
  2. 안에 내용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음. 동빙고동으로 옮겨졌다는 내용이... 경성부사 41년도 판에 수록되어 있음. 뒤쪽 말미 보면 새로 편입된 구역 관한 역사 관련된 것. 거의다 성동구 포함해서 마포되는 이쪽 지역들임. 시편입구역 관련된 곳이므로 이거 쭉 보면 기본 사료들 참고 가능
  3. 다듬을 것 - 순청 터는 순아동이라는 명칭이 순에서 나온 것이므로 저기가 순청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샘 생각에는 초창기에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 뒤에 있는 설명은 별로 의미가 없음. 좌순청과 우순청이라는 것은, 좌순청은 종로거리 있는 쪽이고 우순청은 청경비 ? 있는 곳임. 우순청 자리에 황성신문이 먼저 들어섰다가 그거 밀어내면서 거기에 청경비?? 만듦. 따라서 좌순청과 우순청은 공간상, 시대상 별개의 곳이야. 중간 뒤에는 아주 불필요한 설명임. 따라서 순화동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지명 유래로서 순청이라는게 더 맞다고 봄. 한 자리에 있었던 것은 분명히 아닐 것임. 설명을 분명히 해줄 것
  4. 어영청은 지도나 이런데에 구역이 확정되어 있음. '언저리' 라고 되어 있는 말은 다 바로잡아야 함. '동네' 라고 하거나... 암튼 표현을 바꿔야. 이거는 명쾌하게 자리가 확정되어 있는데다가... 따라서 '언저리'라는 표현을 다듬어야 함. 그리고 기능상으로도 설명을 더 넣어줘야 한다
  5. 염초청이 여러군데 있을 수 있음
  6. *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좀 나옴.
    • 한강지략 뒤지기 / 서울시 책 중에서 서울의 한강 이런 책에 잘 정리했으므로 그거 참고하기 / 서울의 다리 같은 2차 자료 / 이종묵, 조선시대 경강의 별서(강이나 정자 참고) / 경조오부도
    • 전반적으로 지적도는 도움이 안 될것임.
    • 나루터는 근대식 지도를 찾아봐야 함.
    • 마포나루 및 송파나루 등.. 교수님책 107쪽 1910년 지도 참고할 것. 건너가는 곳이 점선처럼 표시되어 잇음. 현재 지도와 겹쳐서 어느정도라고 파악할 것. 당연히 세워야 할 곳 / 현실적으로 세우기 어려워서 대신 세워야 할 곳. 이런걸 구분해서 서술하면 됨.
    • 국편 1/50000 지도 다운 받기(세밀성은 떨어짐) & 중앙도서관에서 1/10000에서 21년 척도 10몇년 척도 다운받기.
      • 송파나루는 매립이 되어서 중간 본류 흔적이 남은게 석촌호수. 건너는 지점을 찾아서 근거를 내면 됨.
  7. 타이틀은 장승백이 인데 안에 설명이나 도로명은 장승배기 라고 되어 있음. 통일성이 없음. 옛날에는 장승백이라고 씀
  8. 논란이 있음. 아파트 안에 정자를 복원하였는데 ... 기록에는 있는데 그 자리가 어딘지 정확히 모른다고 했던 논란이 있음
  9. 丙八인지 양팔인지 알아보라고 하심
  10. *인물이 아닌 집터에 대한 설명을 하면 된다. 그런데 가끔 표석 자체에 그 인물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긴 한데, 그 설명이 뭔가 이상하거나 그러면 보충하면 됨. 따라서 인물이나 터에 대한 모든것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적힌 내용이 무엇을 근거로 썼는지, 고쳐야 된다면 고쳐야 되는 사료들을 제시하면 됨.
  11. 이것도 나중에 박세채 정승 집터 이런 식으로 제안하면 되는 것이라고 하심
  12. 세워진 곳이 애매함
  13. 백작 이라는 한자에서 오타가 난 것 같다.
  14. 명칭을 그냥 통감부로 바꾸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