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별장 터 (興宣大院君別莊址) |
|
|
표석명칭 |
흥선대원군 별장 터 |
한자표기 |
興宣大院君別莊址 |
설치연도 |
2000년 |
주소 |
탑골로3길 50(시흥동 220-2) |
표석 문안
|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터. 현재는 철거되었으나 1985년까지 서울 대가(大家)의 전형적인 정원과 담장이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었다.
|
|
사료 조사 및 분석
동명(洞名) 유래와 별장 터
흥선대원군의 별장은 대표적으로 마포의 아소정, 양주의 곧은골 산장, 부암동의 석파정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시흥동에 위치한 흥선대원군 별장터는 대원군이 실각하여 권좌에서 물러난 1873년~1898년 사이에 사용하던 곳으로 추정되며, 사랑채 하나에 안채 두 채가 딸린 서울 대가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5년 사원용 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고 아파트 뒤편에는 담장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
시흥동(始興洞)
한편 시흥동 220번지에는 대원군별장(大院君別莊)이라고도 알려진 정주영家가 있다. 이 집은 1900년을 전후하여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건평 136평이다. 별장이라기보다는 구조상으로 보아 살림채로 보며 사랑채 하나에 안채가 둘이 딸린 것으로 보아 서울 대가(大家)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몸채는 서향하여 9자형 평면을 기조로 안채는 쌍ㅁ자를 이루는 특이한 것이다. 또한 두 안채가 하나는 ㄱ자 다른 하나는 ㅡ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1고주(高柱) 5량(樑) 집이면서 납도리·홑처마의 집이다. 정원도 상당히 잘 가꾸어져 있으며 건물 뒤에서 담장이 산의 자연적 지세를 따라 기어 올라가 한국 특유의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 집에서 시흥을 읊은 「시흥산장(始興山莊)」이라는 시가 있다.
|
|
출처: 『동명연혁고』구로구편, 1990.
|
|
흥선대원군별장터
탑동초등학교 뒤쪽에 있는 현대아파트가 별장터이다. 대원군이 권좌에서 실각하여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1873~1898년에 사용하던 별장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별장은 136평의 건물로 별장이기 보다는 구조상으로 보아 살림채의 특성을 갖고 한 개의 사랑채와 두 개의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서향하여 ‘9’자형 평면이고, 안채는 쌍‘ㅁ’자형 평면이다. 안채는 ‘ㄱ’자형과 ‘ㅡ’자형의 구조이고 1고주 5량이며, 납도리·홑처마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현재는 아파트 뒷산 사면에 담장지가 일부분 남아 있다. 1985년 ㈜현대에서 사원용 주택 120세대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
또 이곳에서 지었다는‘시흥산장’이라는 시가 전해지고 있다.
시흥산장(始興山庄)
넓은 띠 큰 갓 쓰고 이 고을 찾아드니
늦가을 좋은 질서 바로 중양절이로구나
알겠네 오래된 삼세연분 있음을
옛사람 그리워 외로운 꿈만 길어라.
덕 심음은 자손 위한 계칙이라면서
제 몸 닦음은 이름을 향기롭게 함일 줄 누가 아는가.
평천 화석은 덧없이 변하거니 우숩다
뜬 구름같은 인생 부질없이 제풀로 분망함이여.
|
|
출처: 『금천지명유래』, 금천문화원, 89쪽, 2016.
|
|
흥선대원군별장터
시흥동 현대아파트 자리에 1900년 경에 지어진 아흔아홉간 집이며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다. 집이 헐리기 전까지 건평 136평의 이 집은 별장이라기보다 구조상 살림채로 보였는데, 사랑채 하나에 안채가 둘이 딸린 것으로 보아 서울 대가(大家)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옥이었다.
이 집은 조선시대에 이팔장이라는 정승이 짓고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무상으로 이 집을 출입하면서 연못의 결관과 주변의 정취를 즐겼다. 그러나 1955년 KNA항공사 신용욱 사장에게 이 집이 매도되면서 마을사람들의 출입은 제한되고 집의 정원도 현대화하여 헬리콥터장과 수영장으로 개조되는 등 옛 모습은 사라졌다.
1985년에 현대가 이 집을 헐고 이 터에 사원용 아파트 120세대를 건립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만 은행나무나 고목 두 그루만이 남아있다.
|
|
출처: 『금천지명유래』, 금천문화원, 168~169쪽, 2016.
|
『서울특별시 문화유적 지표조사 종합보고서』에는 시흥동에 거주하는 유겸선씨의 기억에 따라 1996년도에 그려진 별장 내부 배치도가 실려 있다.
|
흥선대원군 별장터(興宣大院君 別莊址)
시흥동의 흥선대원군 별장터는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대원군이 권좌에서 실각하여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1873년부터 1898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사용하던 별장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주로 사용한 별장은 陽州 곧은골 별장과 孔德里 我笑亭으로 알려졌으나 시흥동 별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별장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시흥동에 거주하는 77세 유겸선씨의 기억에 따라 1996년에 그려진 배치도가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별장은 구조상 살림채의 특성을 갖고 있는데 한 개의 사랑채와 두 개의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서향하여 9자형 평면이고 안채는 雙口字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안채 중 하나는 ㄱ자형, 다른 한 채는 ㅡ자형의 구조로 되어있다. 1高柱5樑이고 납도리, 홑처마의 형태로 되어 있다. 별장 안에는 정원도 마련되어 있다.
특히 담장이 건물 뒤에서 산의 자연적 형세를 따라 올라가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 아직도 아파트 뒤 산사면에 담장지의 일부가 일부분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 별장은 이후 ㈜현대의 창립자였던 고 정주영의; 소유였다가 1985년 ㈜현대가 사원용 주택 120세대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
|
|
출처: 『서울특별시 문화유적 지표조사 종합보고서 Ⅲ』, 2005.
|
1918년 장지연이 편찬한 역대 한시선집인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권력에서 밀려난 후 쓸쓸한 소회를 읊은 대원군의 ‘시흥산장(始興山庄)’이라는 한시가 실려 있다.
|
시흥산장(始興山庄)
넓은 띠 큰 갓 쓰고 이 고을 찾아드니 博帶峩冠來此鄕
늦가을 좋은 절서 바로 중양절이로구나 深秋佳節是重陽
알겠네 오래된 삼세연분 있음을 從知宿世三緣在
옛사람 그리워 외로운 꿈만 길어라 回憶前人一夢長
덕 심음은 자손 위한 계칙이라면서 種德方爲子孫計
제 몸 닦음은 이름을 향기롭게 함일 줄 누가 아는가 修身誰識姓名香
평천 화석은 덧없이 변하거니 平泉花石須臾改
우습다 뜬 구름같은 인생 부질없이 제풀로 분망함이여 堪笑浮生空自忙
|
|
출처: 장지연,『大東詩選』권10, 1918.
|
완은군 이재선(李載先)과 별장 터
1881년(고종 18) 역모 사건에 휘말려 민씨 일파에게 사사당한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李載先)과 흥선대원군 별장터에 관련한 시흥동 주민의 구술 내용이 『금천지명유래』에 실려 있다.
|
「기억속의 금천」, 이석기(탑골, 1935년생, 1944년부터 거주)
(...)
답변 : 99칸 집은 누구냐. 민비가 사약을 사사한 양반이니까 대원군의 아들인데 민가로 치면 첩실의 아들이네, 고종보다는 나이가 더 많고. 대원군이 볼모로 갔다 오니 아들이 사살 당했네. 첩실일망정 며느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99칸 집을 말하자면 뺏은 거지. 룰이 왕실에서 하루밤만 묵으면 진상을 해야 한다네. 여기 주인이 누구냐면 경주 이씨인데 영동사람이야. 이 사람이 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운현궁으로 가니까 (대원군이) 시흥에 별장 하나 가진 게 있다는 데, 내가 거기를 좀 한 번··· 안된다고 그래? 그렇게 하시라고···. 그 자리에서 양도를 했대. 옛날에도 권리증 마냥 있었대. 대원군이 그 할머니를 여기 집에 내려 보내고 보호를 해줘야 되니까 팔도에서 장사(보디가드)들이 모아서 여기에 배치를 했어.
질문 : 99칸 집이 대원군 별장터가 맞나요?
답변 : 대원군 별장이 맞아. 구체적으로 보면 대원군 아들중에 민비에게 사사받은 양반의 소실이 살던 집이야. 그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주 이씨를 불러서 집을 받은 거지.
|
|
출처: 『금천지명유래』, 금천문화원, 194~196쪽, 2016.
|
1909년 대원군의 적장자 이재면과 그의 아들 이준용은 동대문밖 왕십리에 있던 이재선의 묘를 연고가 있는 시흥군으로 이장한다.
|
永宣遷墓
東大門外往十里에 在한 故完恩君의 墓所는 何許風水軰의 說에 被惑하얏는지 完興君 李載冕 永宣君 李埈鎔 兩氏가 該墓所를 遷封하기 爲하야 再昨日에 破墓하야 昨日에 始興郡으로 緬奉하얏다더라
|
|
출처: 『황성신문』, 1909년 12월 10일.
|
1914년 이재선의 양자 이관용은 양부 이재선이 대원군으로부터 증여받은 토지를 이재면이 본인 소유로 증명수속을 하였다고 주장하며 이재면의 아들 이준용에게 토지인도소송을 제기하고, 양측은 재판부에 화해신청을 하여 사건을 매듭짓게 된다.
|
雲峴宮裁判 落着
京畿道 始興郡 郡內面 始興里 居住 李瓘鎔은 辯護士 權赫采 金基賢 辰市本丸 三氏를 訴訟代理人으로 定하야 京城中部 校宮 雲峴宮 李埈公殿下를 相對者로하야 土地引渡及證明手續抹消請求訴訟을 京城地方法院民事部에 提出하야 伊來裁判所에셔 審理進行中 其內容을 依한즉 前記 李瓘鎔의 養父 完恩君 李載先은 距今 四十二年前에 原告의 養祖父 大院王으로브터 本件 係爭土地及安山郡草山面所在 沓 七石落의 贈與를 受하야 爾來 此를 所有하얏던바 原告의 養父는 去開國四百九十年 陰曆(辛己)十月中에 遂히 死亡함으로 原告의 養母 申召史는 該遺産을 保護管理하다가 明治四十年中 原告의 養母는 本件係爭土地의 證明을 受하기 爲하야 李埈公의 亡父 李熹公 殿下에게 右土地의 一切 文券을 交付하고 其證明手續을 위탁하얏더니 竟乃 李熹公은 極히 便宜라 稱하고 此를 自己名義로써 證明手續을 終了한지라 然함으로 該一切遺産을 相續한바 原告는 其時 入養한지 日淺하야 係爭土地가 右養父 李載先의 遺産으로 原告의 相續財産됨을 不知하얏더니 大正元年十一月中 原告의 養母 申召史로브터 係爭土地가 亡父 李載先의 遺産됨을 聞知한바 相對者의 父 李熹公은 大正元年 九月中에 旣히 此世를 永別하얏슴으로 右李埈公에게 對하야 前記 係爭土地(見積價額 五萬圓)의 引渡及證明手續抹消를 累累 請求하야 被告는 該土地를 自己의 所有라 稱하고 原告의 請求를 不應함으로 玆以 起訴라하얏슴으로 其間月餘도록 裁判을 進行하는 仝時 前記 李埈公 殿下는 辯護士 內地人 大久保雅彦氏를 代理人으로 定하야 終乃 應訴한바 其間 李王職事務官 增田英信氏를 證據喚間의 申請까지 有하얏고 原被告 兩側의 審理가 多少 時日을 要하겟더니 去月二十六日 當法院 橫田裁判長의 係로 箱田權 兩判事가 陪席한후 兩側 辯護士諸氏가 擧皆出廷하야 和解申請을 하야 遂히 落着되얏다더라
|
|
출처: 『매일신보』, 1914년 7월 2일.
|
1916년 이재선의 처 신씨는 양자 이관용을 상대로 양자 파양소송을 제기한다. 당시까지 팔십이 넘은 신씨는 시흥동에 이관용과 함께 거주한 것으로 신문기사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이는 별장터가 이재선과 관련이 있다는 『금천지명유래』에 실린 거주민의 구술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
完恩君의 死後, 양자가 난봉으로 패가파양재판에 모친이 패소
경긔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이통삼호 신소사(京畿道始興郡東面始興里 申召史)는 임의 죽은 완은군 리재션(故 完恩君 李載璿)씨의 쳐로 명치십사년즁에 완은군이 작고함애 삼십여년동안을 홀로 살아오다가 명치사십오년 오월에 신쇼사는 지금 경셩슈표뎡 팔십칠번디 리관용(水標町 八十七番地 李瓘鎔)을 양자로 삼아 동거한바 리관용은 양자로 드러온후 쥬야로 쥬색에 빠져 방탕함이 심하던 결과 젼래의 재산 젼부를 모다 업새바리고 또는 죠션의 산판까지 팔아버리며 적간 남에게 빗도 불쇼하더니 대졍사년 음력구월에 젼긔 시흥군동면시흥리에 잇는 집을 팔아가지고 단독히 경셩에 올나갈졔 양모되는 신쇼사는 그곳에 내여바려두고 올나오기 때문에 신쇼사는 남의 집에 붓쳐잇셔 겨우 호구를 하던바 양모를 부양치안코 져바려두는 자는 결단코 양자로 삼을슈업스니 리연(離緣)하야 달나고 젼긔 신쇼사는 변호사 김긔현(金基賢)씨를 쇼숑대리인으로 리연쳥구소숑을 경셩디방법원에 뎨긔한데 대하야 젼긔 리관용도 변호사 신우영(申宇永) 즁촌시쟝(中村時章) 량씨를 쇼송대리인으로 일졀권리를 위임하야 응쇼하얏던 일은 당시 본보에 게저하얏거니와 그동안 재판쇼에셔는 뎐즁재판장(田中裁判長)의 계로 심리를 맛치고 지나간 십일에 판결을 언도하얏는대 젼긔 신쇼사의 리연쳥구를 기각(棄却)한데 대하야 그 리유를 들은즉 리관용을 한번 호쥬가 된 권리와 신분이 된 이샹에는 다시 밧고지 못할일인즉 이는 죠션의 관습에 당한일이라 그런즉 부양료는 쳥구한다할지라도 리연쳥구는 부당으로 인뎡한다는 뜻으로 기각이되얏다더라
|
|
출처: 『매일신보』, 1916년 3월 12일.
|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측도한 지적원도에는 별장터인 시흥리 220번지 대지와 221번지 연못이 표시되어 있다,
○ 지적원도, 1911년
시흥리 220번지 소유자는 대원군의 적장자인 이재면으로, 토지대장에 등재된 기록에 의하면 이재면은 이곳 이외에도 시흥리에 수십 필지에 달하는 대지, 논, 밭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토지대장, 1912년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미술관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표석 위치
현재표석은 시흥현대아파트 입구 오른편에 설치되어 있다.
종합 의견
○『금천지명유래』에 수록된 시흥동 주민의 구술에 의하면 별장 터는 본래 흥선대원군의 서자(庶子) 이재선(李載先)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1914년 매일신보에 실린 그의 양자 이관용과 운현궁의 토지인도소송은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 1912년 토지대장에는 시흥동 220번지가 흥선대원군의 적장인 이재면의 소유로 등재되어 있다. 이곳이 대원군의 아들인 이재면 또는 이재선의 소유이므로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 표석의 문구와 위치에 별다른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