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선생 집 터 (朴寅煥家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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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명칭 |
박인환선생 집 터 |
한자표기 |
朴寅煥家址 |
영문명칭 |
Site of Bak Inhwan's House |
설치연도 |
2004년 |
주소 |
종로 1(세종로동 116) |
표석 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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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이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1955년에는 <박인환 시선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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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신문자료
195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은 1955년 생전의 유일한 시집인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내고 1956년 3월 20일 세종로 135번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잡자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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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誌 『後半紀』 發行
今般 都市文化社에서는 詩를 中心으로한 海外文學誌 月刊 「後半紀」를 發行하게 되었다는바 同人은 朴虎權 金璟麟 朴寅煥 李漢稷 趙鄕 李相魯 外 諸氏이며 五月上旬에는 第一號가 發刊되리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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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신문』, 1950년 4월 12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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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寅煥著 『選詩集』
現代에 대한 槪念이 구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現代詩의 槪念도 一定한 法則을 이루지 못한채 混亂과 無秩序의 길을 걸어왔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近代精神의 峻烈한 洗禮를 克服하지 못하고 觀念的으로 現代의 複雜한 樣相만을 핥아본 後進社會에서는 不可避 現代詩에 대한 槪念이 複雜해 질 수밖에 없다. 解放以後 世稱 『모더니즘』을 志向한다는 젊은 詩人群의 登場은 이러한 現代詩의 混亂을 더욱 複雜하게 하는데 拍車를 加하였다. 旣成文壇이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깊은 理解가 不足한 것도 그 原因의 하나라고 볼 수 있으나 그것보다 『모더니즘』을 志向한다는 젊은 詩人들이 『에콜』로서의 뚜렷한 理論과 方法論을 確立하지 못하고 덮어놓고 模倣만을 되풀이해온데 根本的인 理由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大部分의 『모더니스트』들은 詩를 쓰는데 態度보다 技術에 置重하였고 言語의 根本的인 意味를 정확히 把握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가장 『現代詩의 典型』을 實제作의 過程을 통해서 具現化 한 것이 『選詩集』의 朴寅煥이다. 우리들은 그의 詩속에서 眞正한 現代詩의 本質을 찾아볼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진짜 現代詩이냐하는 問題는 그의 詩를 읽음으로써 스스로 解明될 것이다. 亞流的 現代詩가 氾濫하고 있는 우리 詩壇에서 『選詩集』의 出現은 現代詩의 좋은 指針이 될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李奉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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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 1956년 1월 20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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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事
朴寅煥氏(詩人) 二十日 下午 八時 卅分 世宗路 一三五 自宅서 別世 廿二日 上午十一時 同自宅서 發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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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 1956년 3월 22일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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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朴寅煥氏 20日 自宅에서 別世
詩人 朴寅煥氏는 지난 二十日 下午九時頃 心臟痲痺로 世宗路 自宅에서 別世하였다. 氏는 今年 三十三歲의 젊은 詩人으로서 가장 尖銳하고 知的인 感覺을 지니고 우리나라 詩壇에 새로운 작품을 提起시켜주려고 努力하였는데 作品으로서는 지난 겨울에 一百餘編을 엮은 『選詩集』을 내놓았다. 遺家族으로는 夫人과 二男 二女가 있다. 그런데 同氏의 葬禮式은 詩人葬으로서 二十二日 上午十日時에 自宅에서 擧行하리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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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일보』, 1956년 3월 2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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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故 朴寅煥의 詩碑를 세우고, 李鳳九
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버린 詩人 朴寅煥이 저 세상에 살고 있는 곳 이름이 바로 忘憂里라. 서른 한살을 一期로 지난 三月二十四日밤에 희리바람처럼 가버린지 벌써 半年이 넘어섰다.
그 무덤앞에 우리 가까운 친구들이 墓標나마 세워야 友情의 萬分之一이라도 이룩할 수 있다는 설운 追念아래 各其 어려운 주머니를 털어 所聞도 없이 지난 二十三日날 忘憂里 그 묘지앞에 詩碑를 세우고 돌아온지 사흘째되는 오늘(二十五日)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碑까지 『세워놓고 돌아갔으니 나를 보러오는 길이 어려울게고 그대들의 발자죽 소리를 듣기는 점점 멀어져갈것이니 이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수 있으랴. 차라리 碑를 세우지 말고 자주 찾아와 보는 것을 나는 바랄뿐인데』 이런 그대의 心情을 알고 있다는 듯 天心의 눈물인양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寒食날에 가서 때를 입혀놓고 왔기에 때가 살아 무덤을 盛裝할줄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때는 없고 알몸에 이름모를 雜草가 대숲처럼 자라나 우리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아무리 시름을 잊는 그 이름 그대로 忘憂里墓地라 하더라도 어쩌면 들菊花 한송이 볼 수 없는 不毛의 地帶라는데 우리의 눈시울은 한층 더 뜨거워 올랐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자주 와볼 것을 그러나 이것도 마음뿐이지 人生의 苦海속에 절버덕거리며 사느라 너무나 경황이 없어 해가 뜨나 달가지나 明洞거리에서 우리는 술을 마시고 다시 醉해 그대를 생각하며 비틀거렸다. 무덤에 길길이 자라난 풀을 伐草하고나서 碑를 세우고 우리는 그대가 生前에 좋아하던 「쪼니 워카」를 그대 무덤위에 뿌리고 다시 碑에다 뿌려서 적셔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술은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이 돌아가며 마신후 碑앞에 서서 우리 碑文에 새긴 그대의 시 『세월이 가면』을 울면서 노래불렀다.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대도 나는 저 유리창밖 가로수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라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있네
○그대 말대로 세월이 간다고해서 그사람 이름을 진정 잊을 수 있을가. 그러나 누리는 사랑이 사라진대해도 그 눈동자 입속은 우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明洞을 떠나 죽어가 그대와 만나는 그 瞬間까지 우리들 가슴속에 있을 것이다.
不幸하면서도 멋진 詩人의 一生을 마친 朴寅煥의 幽宅門前에 碑갈을 세우고 돌아온 우리 친구들 가슴속엔 寅煥 그대의 ?哭인양 가을비가 퍼붓고 뭇벌레가 우짖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또 술을 마시고 醉해 허전한 걸음으로 그래도 살다 가야겠다는 데서 집으로 밤거리를 더듬어 가고 있다. 大槪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제 새삼스레 無常이니 虛無니 소리쳐 볼 興奮도 나지 않으나 너무나 아득하고 야속한 길인 것만 같아 우리는 견딜 수가 없다.
一九五六年九月二十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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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일보』, 1956년 9월 29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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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月도 사랑도 묻어놓고
詩人 朴寅煥 一周忌 三月廿日에, 李德珍
나이쓰, 모오닝! 굳데이! 오늘 兄과 함께 거리를 散策하기에는 좋은 날씨이네.
인환! 우리들은 그대로 살아있네. 인환의 멋과 詩와 죠니워카와 더불어 오늘도 明洞에서 그대를 생각하고 있네. 형의 「木馬와 淑女」처럼 또한 「幸福」의 老人처럼 「바아지니아 울포」의 生理를 理由없이 되풀이 하고 있네.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내 가슴속에 살아있네. 바람은 불어 落葉은 떨어져도 그러나 寅煥! 落葉위에 歲月은 살아 있네. 雪禍가 극심한 昨年 이맘때 꽃피는 봄 날이 오면 修復된 故鄕 麟蹄를 찾겠다는 나들이의 꿈은 아직도 살아있는가. 寅煥!
世馨이도 잘있고, 世華, 世崑, 모두다 비둘기처럼 귀엽게 자라고 있네. 兄이 간 오늘 主人없는 詩는 살아있고, 멋없는 明洞엔 兄의 體臭만이 남아 있네.
아아, 우리들의 멋, 寅煥! 뜻없이 떠나는 나그네처럼 그대의 傲慢과 怪癖과 孤獨이 적시는 어쩔수 없는 鄕愁를 우리는 술과 락키스트라이크의 紫煙속에 파묻고 있네.
寅煥! 이제 兄이 간지 一年이 되네. 歲月은 가도 사랑은 남아 있고, 사랑은 가도 歲月은 살아있네. 조촐한 우리들의 「싸롱」 동방! 매담은 바꿨어도 兄의 音樂과 詩는 오늘도 들려오고 歲月은 가도 兄의 멋은 우리를 싸주고 있네.
슬플수록 익어가는 明洞의 에레지! 세월도 사랑도 이제 모두다 묻어놓고 그립던 지난날의 우리들의 멋을 이렇게 오늘 한자리에 모인 永遠한 兄의 벗을 보게! 寅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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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신문』, 1957년 3월 20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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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15년 4월호에는 장남인 박세형씨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는데, 박인환은 1948년 결혼 후 처갓집인 세종로 135번지에 사망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135번지의 위치를 현 교보생명 본사 사옥 뒤라고 한 것은, 2019년 11월 박세형씨와 유선상으로 통화한 결과 기자가 현 표석이 설치된 곳을 자택의 위치로 잘못 이해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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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⑤ 시인 박인환의 장남 박세형
(...) 시인이 살았던 세종로 135번지는 박인환의 처가였다. 그곳은 현재 교보생명 광화문 본사 사옥 뒤쪽이다. 그는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제 외조부는 일제시대 은행지점장을 하셨고, 창덕궁 이왕직(李王職)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분이셨어요."
이왕직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다. 한일병탄 이후 이왕직은 대한제국 황실이 아닌 일본의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됐다. 시인의 장인은 고종의 재산과 재정운영을 맡았다고 한다.
"외조부는 딸만 둘을 두셨는데, 어머니는 맏딸과 14살 차이가 나는 둘째셨어요. 그렇게 어여뻐하시며 애지중지로 키우셨어요. 그런 사랑을 받아서인지 어머니 성격이 의존적이셨어요. 평생 모든 재화를 처가를 통해 받았으니 돈 개념도 없으셨어요. 원서동(창덕궁 인근) 시댁에서 밤마다 친정이 그리워 우셨다고 해요. 딸 소식이 궁금한 외조부가 퇴근길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우는 모습을 보셨어요. 하는 수 없이 외조부가 조부에게 얘기해 신접살림을 처가로 옮겼습니다. 아버지는 수레에 한가득 책을 싣고 처가로 들어가게 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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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조선』, 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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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연보
연도 |
내용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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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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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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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
경성으로 이주하여 종로구 내수동 거주 후 종로구 원서동 134번지로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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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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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덕수공립소학교 졸업, 경기공립중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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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경기공립중학교 자퇴, 한성학교 야학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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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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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명신중학교 졸업, 평양의학전문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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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광복 후 평양의학전문학교 중퇴하고 상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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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 2번지에 서점 마리사사를 개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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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 시 「단층」을 낭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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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시동인 신시론(新詩論)을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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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마리서사를 폐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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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 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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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과 결혼하고,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로 이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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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
김경린,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과 신시론 동인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도시문화사)을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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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신문사 퇴사, 경향신문사 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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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보도연맹에서 주최한 '국민예술제전'에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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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후 9․28 수복 시까지 서울에서 숨어 지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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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
대구로 내려와 경향신문사 종군기자로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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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사 본사를 따라 부산으로 이주하여 특파원으로 근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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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
부산에서 후반기 해체를 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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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직이 편집한 한국시집 상(대양출판사)에 시 「회상의 긴 계곡」, 「세 사람의 가족」, 「검은 신이여」가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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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사 퇴사, 대동신문사 문화부장으로 이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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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
대한해운공사 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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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상임간사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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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부산항을 출발하여 일본과 미국을 거쳐 5월에 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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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19일간의 아메리카」를 조선일보에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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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행에서 얻은 다수의 시와 산문을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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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운공사 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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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간 시집』(문성당)에 「눈을 뜨고도」와 「센티멘탈 쟈-니」, 「목마와 숙녀」가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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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한국문학선 시편(국방부정훈국)에 「행복」과 「검은 신이여」가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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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선시집』을 간행하였으나 배포되지 못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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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
1월 초순 시집 『선시집』이 간행되어 실제로 배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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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추모의 밤'을 열고, 추모시 「죽은 아포롱-이상 그가 떠난 날에」(한국일보, 1956.3.17)를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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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자택에서 사망하여 3월 22일 망우리에 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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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문우들에 의해 망우리 묘소에 시비 건립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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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대장과 지적도
박인환의 장인인 이연용(李淵鎔)은 일제강점기 왕실의 사무를 관장하던 이왕직(李王職)에서 근무하였고 친정과 떨어져 원서동(苑西洞)에서 사는 막내딸을 애처롭게 여겨 세종로 135번지 본인의 집에서 같이 살게 하였다. 토지대장에서 세종로 135번지의 소유가 1935년(소화 10) 이연용에게 이전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세종로 135번지는 1967년 세종로 119번지에 통합되고 1975년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가 이를 인수하여, 1980년 교보생명 본사 사옥이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
지도 및 도판자료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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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표석 위치
종합 의견
〇 세종로 135번지는 「고종즉위40년 칭경기념비」 와 멀리 않은 교보생명 본사 남측 출입구에 해당하므로, 현재 표석과는 100여 미터 떨어진 위치이다. 이에 표석의 이전을 권고한다.
〇 ‘박인환 시선집’의 정확한 명칭은 『朴寅煥 選詩集』이다. 표석의 문구 중 존칭을 생략하여 ‘박인환 집 터’로 표기하고 옛 주소(세종로 135번지)를 명기할 것을 권고한다.
〇 또한 성(姓)인 ‘Bak’의 영문자 표기도 유족에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표석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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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집터
이곳 옛 세종로 135번지는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이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그는 1955년 첫 시집인 <박인환 선시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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