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원 터 (弘濟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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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명칭 |
홍제원 터 |
한자표기 |
弘濟院 |
설치연도 |
1987년 |
주소 |
통일로 440-1 (홍제동 161-1 도) |
표석 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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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약 50m 골목 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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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조사 및 분석
편년자료 및 고전번역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명(明)으로 떠나는 사신을 홍제원에서 전송한 일 및 중국 사신이 모화관에 당도하기 전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은 일, 혹은 이곳에서 쉬어가거나 묵은 일에 대한 기록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홍제원은 돈의문(서대문) 밖의 첫 번째 원(院)으로서 서북(西北) 제1로로 통하는 곳이므로, 서북쪽 외방과 도성 사이의 주요한 연결 지점이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의 홍제원 기사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명으로 보내는 사신을 이곳에서 전송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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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에 거둥하여 명나라 서울에 가는 우정승 김사형을 전송하다
幸弘濟院, 餞右政丞金士衡。士衡如京師賀登極, 政堂河崙行陳慰弔祭禮。
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전송하였다. 김사형은 명나라 서울에 가서 등극(登極)을 하례하고, 정당(政堂) 하윤(河崙)은 진위 조제례(陳慰弔祭禮)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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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종실록』권1 > 정종 1년(1399) > 1월 2일(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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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사신을 홍제원에서 접대한 기록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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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이 하직하니 홍제원에서 전송할 것을 명하다
明使別宣慰使都承旨韓明澮辭, 命判內侍府事田昀齎酒饌, 餞于洪濟院, 幷賜內女樂, 命臨瀛大君璆、桂陽君璔、義昌君玒、密城君琛往參。
명(明)나라 사신(使臣)이 선위사(宣慰使)인 도승지(都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작별(作別)하면서 하직하니, 임금이 판내시부사(判內侍府士) 전균(田畇)에게 명하여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홍제원(洪濟院)에서 전송하게 하고, 아울러 내여악(內女樂)을 내려 주었는데,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에게 명하여 가서 참석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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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권7 > 세조 3년(1457) > 4월 4일(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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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홍제원은 홍제원 건물을 포함한 그 일대의 터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넓고 평평한 땅이었기 때문에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다. 세종 대에는 보제원(普濟院)과 이태원(利泰院) 외에 홍제원에도 진제장(賑濟場)을 추가로 설치하여 백성들을 구휼하게끔 하였다. 홍제원 터에 흙집을 지어 진제장으로 사용한 것이다. 세조, 성종, 중종, 현종, 숙종, 정조 대에도 홍제원 진제장을 확대하여 기민을 구휼한 일이 나온다. 서울 서북권의 교통의 요지로서 백성들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으로서 진휼소를 운영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세종 대의 홍제원 원사 확대에 관한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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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에서 보제원과 홍제원의 원사를 늘릴 것을 건의하다
議政府據漢城府呈啓: "已於普濟院、洪濟院, 設東西飢民賑濟場, 各置土宇二間。 今飢民日多, 不能容接, 且或有病者, 雜置一處, 互相傳染, 致死可畏。 令繕工監修葺院舍以處之, 每場增置醫員各一人治療。 其無衣者, 令濟用監依舊例製衣以給。" 從之。
의정부에서 한성부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미 보제원(普濟院)과 홍제원(洪濟院)에 동서 기민 진제장(飢民賑濟場)을 설치하여 각각 흙집[土宇] 2간씩 두었으나, 요새 기민이 날로 많아져서 능히 다 수용할 수 없삽고, 혹시 병든 자가 있게 되면 한곳에 섞여 있어서 서로 전염(傳染)되어 죽게 될까 두렵사오니,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원사(院舍)를 늘리게 하여 거처시키고 각 진제장마다 의원(醫員) 각 한 사람씩을 더 두어서 치료하게 하며 옷이 없는 자는 제용감(濟用監)으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옷을 지어서 주게 하사이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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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권107 > 세종 27년(1445) > 1월 21일(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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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외방과 통하는 길목이므로 표류민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전 홍제원으로 올려 보내는 일이 많았다. 현종 대에는 제주도에 표류해 온 중국인을 홍제원으로 압송해 왔다. 정조 대에는 전라도에서 올려 보낸 유구(琉球) 표류민을 홍제원에서 접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홍제원 접대가 너무 간소하다고 여겨 새로 지은 경기감영 건물로 옮겨 접대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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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한 유구인에 관해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치계하다
(…略…)尋敎曰: "琉球國漂人出來, 卽來貢以後初有。初欲接置於弘濟院矣, 更思其所顧恤, 當有拔例。今聞筵臣言, 十月初十日, 似已來泊古達島云, 數日後當上來。日寒若此, 嚴飭畿伯, 造置衣袴及毛具等物, 待其渡江, 接置新營, 躬往慰諭。發送時亦爲厚給應式外盤纏, 以爲順付使行之地。"
이어 또 하교하기를, "유구국에서 사람들이 표류하여 온 것은 곧 공물을 바쳐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처음에는 홍제원(弘濟院)에서 접대하고자 하였는데 다시 생각하여 보니, 그 돌보아주는 바에 마땅히 특별한 예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연신(筵臣)의 말을 들으니 10월 10일에 고달도(古達島)에 와 닿게 될 것 같다고 하니, 며칠 후에는 마땅히 올라올 것이다. 날씨가 춥기가 이와 같으니, 경기 감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의복과 털로 된 방한구 등의 물건들을 만들어 두었다가 한강을 건너오기를 기다려 새 감영에 맞이해 두고 몸소 가서 위로하여 주도록 하라. 그리고 떠나보낼 때에도 정해진 것 이외의 노자를 후하게 주어 사행 편에 따라가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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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41 > 정조 18년(1794) > 9월 11일(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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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 건물의 변천사에 대해서도 실록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홍제원 터는 툭 트인 평평한 대지였으므로 사람과 건물이 벼락을 맞거나 풍해를 입는 일이 종종 있었다. 중종 33년(1538) 6월에 크게 풍재를 입어 건물이 손실을 보았던 일이 중종실록에 실려 있다. 그 기록에서 “홍제원은 대청 두 칸의 기와가 바람에 날려 깨졌고 뒤편 마루판 두 쪽이 솟구쳐서 앞 뜨락에 떨어져 있고, 앞쪽 난간이 모두 울려 밀려났습니다. 동서 행랑채는 지붕의 북쪽 모서리 판자가 다 걷혔고 기와가 깨졌고, 뒤편 대청의 동쪽 모서리 판자도 다 걷혔습니다.(…)”고 밝히고 있어서 당시 홍제원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홍제원 건물의 규모는 작지 않았던 듯하나, 제대로 된 접대 시설을 갖춘 정식 관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보다 앞선 성종 대의 기사를 보면 홍제원에서 사신 일행이 유숙하는 것이 곤란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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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접사에게 치서하여 큰 비가 오면 사신을 벽제에 유숙시키라고 하다
御經筵。講訖, 上曰: "爾來霾霖如此, 使臣到碧蹄, 雨若不止, 則使之信宿, 待晴入京可也。" 居正曰: "到洪濟院若大雨, 則何以處之?" 上曰: "大雨則不可迎勅, 其留宿洪濟院亦可。" 領事金國光曰: "如宿于洪濟院, 支供之弊不貲, 大雨則已, 小雨則迎勅爲可。" 上曰: "大雨則迎勅爲難, 其馳書遠接使, 稟使臣旨趣, 且留碧蹄, 則其支待雜物, 當預先備之, 亦下諭觀察使。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요즈음 장마가 이와 같으니, 사신이 벽제(碧蹄)에 도착하였어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그들로 하여금 신숙(信宿)하게 하였다가 날이 개는 것을 기다려 서울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가하다."하니, 서거정(徐居正)이 말하기를, "홍제원(洪濟院)에 도착하여 만약 큰 비가 내리면 어떻게 조치하여야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큰 비가 내리면 조칙(詔勅)을 맞이할 수 없으니, 홍제원에서 유숙(留宿)하게 하는 것도 가하다." 하였는데, 영사(領事) 김국광(金國光)이 말하기를, "만일 홍제원에서 유숙하게 되면 지공(支供)하는 폐단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큰 비가 내리면 어쩔 수 없지만 작은 비가 내리면 조칙을 맞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큰 비가 내리면 조칙을 맞기 어려우니 그것을 원접사(遠接使)에게 치서(馳書)하여 사신에게 취지(趣旨)를 물어 보게 하고, 또 벽제(碧蹄)에 유숙한다면 거기에 따른 지대(支待)할 여러가지 물품으로서 마땅히 미리 준비해야 할 것도 관찰사(觀察使)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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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종실록』권116 > 성종 11년(1480) > 4월 27일(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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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26년(1593) 11월 9일 기사에서 “오늘 장 도사(張都司)가 들어올 적에 홍제원(弘濟院)에다 장막(帳幕)과 포진(鋪陳)을 전연 배설(排設)하지 않음으로써 노천에 서서 옷을 갈아입게 했으니, 도감(都監)과 차지 낭청(次知郞廳)을 파직하도록 명하소서.”라는 말이 보이며, 선조 28년(1595) 4월 28일 기사에서 “전에는 명사가 홍제원에 도착하면 원접사가 즉시 종사관을 보내어 당도했음을 아뢰어 알렸으나 지금은 홍제원이 없고 시간도 늦었으니 이런 절차를 생략하고 선전관을 보내어 가서 탐색하고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원이 의논하라.”라고 한 것을 보면 한동안 홍제원에는 건물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대신 이 시기에는 홍제원 터에 민충단(愍忠壇)을 세워서 임진왜란 때 죽은 명 장수들의 제사를 지냈다.
홍제원 건물이 복구된 것은 청과 화의를 맺은 후 양국이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면서부터이다. 홍제원 관사의 설치를 주장한 것은 청의 사신 측이었다. 조선 측에서는 역참의 추가 설치에 부담을 느꼈으나 결국 청의 요구대로 새 관사를 설치하였다. 아래는 관련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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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 도감이 서로에 폐단이 많다는 칙사의 말을 전하다
迎接都監啓曰: "勑使使譯官來言曰: ‘俺等往來西路, 多有弊端。吾助川、金郊兩站, 相距不遠, 兩站之間設一中火之所。且入京之際, 每宿碧蹄, 犯夜馳入, 亦多有弊。弘濟院舊基, 設一館宇, 使往來勑行, 中火於碧蹄, 來宿於弘濟院, 則彼此甚便。今番雖未及變通, 俺等還去之後, 趁卽擧行。’ 云。請令廟堂定奪。" 備局回啓曰: "海西則革一站可以省弊, 而京畿則增一站, 弊端甚多。百爾思之, 事甚不便。黃海道 金郊、吾助川間設一站便否, 移文本道, 使之料理狀啓後處置, 弘濟院館舍排設難便之由, 則令都監, 措辭開諭, 期於防塞爲當。" 上從之。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칙사가 역관을 보내와 말하기를 ‘우리들이 왕래하는 서로(西路)에 폐단이 많다. 오조천(吾助川)과 금교(金郊) 두 역참(驛站)은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두 역참의 사이에 점심 먹을 장소를 설치하라. 그리고 서울에 들어올 때 항상 벽제(碧蹄)에서 잠을 자고 야밤에 달려 들어오므로 또한 폐단이 많으니, 홍제원(弘濟院) 옛터에 하나의 관사를 설치하여 왕래하는 칙행으로 하여금 벽제에서 점심을 먹고 홍제원에 와서 잠을 자게 한다면 피차간에 매우 편할 것이다. 이번에는 미처 변통하지 못했으나 우리들이 돌아간 뒤에 즉시 거행하라.’ 하였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해서(海西)는 역참 하나를 혁파하면 폐단을 덜 수 있으나, 경기는 역참 하나를 늘이면 폐단이 매우 많아 백 가지로 생각해도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황해도의 금교와 오조천 사이에 역참 하나를 설치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본도에 이문(移文)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헤아려서 장계하게 한 뒤에 조처하고, 홍제원에 관사를 배설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사유를 도감으로 하여금 말을 잘 만들어 납득시켜 기어코 막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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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조실록』권44 > 인조 21년(1643) > 10월 12일(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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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이 홍제원에 참을 설치하여 경기 백성들의 곤폐가 극심해지다
淸人使設站於弘濟院。畿民困弊, 自此益甚。
청인(淸人)이 홍제원(弘濟院)에 참(站)을 설치하게 하였다. 경기 백성들의 곤폐가 이로부터 더욱 극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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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조실록』권49 > 인조 26년(1648) > 2월 24일(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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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자료
다음은 개항 이후 홍제원 터의 사진이다. 역원제가 폐지되면서 홍제원도 자연히 그 기능을 상실하고, 홍제원 일대는 목장으로 용도 변환되었다. 본래 넓고 평평한 지대로서 하천을 끼고 있기 때문에 목장으로 사용하기 적합했던 것이다. 대개 홍제원이 1895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때 역원제가 폐지되었다는 의미이다. 실제 홍제원 건물이 언제 헐렸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한편 1936년에 출판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에 홍제원에 관한 정보를 기록해 놓은 부분이 있다. '홍제원(弘濟院) 옛터'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지도와 함께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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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 옛터
홍제원 건물은 갑오년까지 존재하였다. 지금은 그 터에 경성목장이 들어섰다. 위치는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 1번지로서 부지는 약 2,000평이나 된다. 지금도 밭에서는 오래된 기와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부근에 현존하는 사원으로서 홍제원은 소화 연간에 건립된 것이므로 예전의 원(院)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또한 부근의 작은 개울 언덕에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매우 진기한 5층석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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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경성부사(京城府史)』제2권,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3, 9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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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의 당시 주소 및 홍제원 터의 면적이 나와 있고, 부근의 사원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 및 5층 석탑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현재 이 탑은 경복궁으로 이전되었다.
『개항 이후 서울의 근대화와 그 시련』, 서울역사편찬원, 2015, 205쪽
아래는 1935년의 서울의 모습을 담고 있는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에 수록된 무악재 근방의 지도이다. 홍제원 터에 만들어진 경성목장(京城牧場)의 위치 및 주변 경관을 확인할 수 있다.
『대경성부대관』, 서울역사박물관, 2015, 19쪽
지도 및 도판자료
중국 사신이 홍제원에 머문 일은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6월의 기록을 끝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때 칙사는 애초에 홍제원에서 숙박을 하고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결국 잠시 쉬어가는 참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때까지 홍제원 건물이 관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1886년부터 홍제원 터는 별기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 때는 경성목장이 들어섰다.
홍제원 및 홍제원 터는 위치상의 이점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여러 용도로 활용되면서 수많은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게 되었다. 1623년 3월 12일 김류(金瑬)를 대장으로 한 인조반정의 주도자들이 집결했던 곳 역시 홍제원이었다. 민충단을 세워 명에 대한 은혜를 기리던 곳도 홍제원이었으며, 이후 청 사신을 맞이하던 곳도 이곳이었다. 많은 백성들이 오가는 장소였기에 기민장이 설치되었고, 여염집과 시장이 금지되었다가 풀리게 되면서 길 떠나는 하졸들과 백성들이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던 곳도 이곳이었다. 청과의 사대외교가 종식되고 조선 왕조가 망하게 되자 홍제원도 몇 차례 변모를 겪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고문헌을 통해 이러한 홍제원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홍제원 관련 정보를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게 기술할 수 있다. 고지도 자료를 통해 홍제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검정색 원으로 표시한 부분. ‘洪濟院’으로 표기되어 있다.) 홍제원이 표기된 고지도는 이외에도 다수 발견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홍제원 옛 터의 위치를 보다 상세히 고구할 수 있다.
『여지도(輿地圖)』도성도(都城圖), 18세기 후반(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은 청(淸)의 사신으로 1717-1725년 사이에 네 차례 조선을 방문하였다. 『봉사도(奉使圖)』는 아극돈이 1725년 네 번째 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한 화첩으로, 그가 조선 사행길에서 지은 28수의 시와 20폭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6은 아극돈 일행이 홍제원을 출발하여 모화관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에 붙은 시에 홍제원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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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 가에서 서둘러 새벽 출발해서 弘濟院邊催曉發
모화관 바깥에 역졸 말을 세워두었네. 慕華館外駐征鑣
늘어선 조반이 경건히 첨배 행하니 鴛班排立虔瞻拜
오색의 천서가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네. 五色天書下絳霄
【홍제원은 왕성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하루 전에 여기에서 묵고, 다음날 일찍 모화관에 이르러 영칙례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비로소 성에 들어갔다.[弘濟院距王城十里. 前一日館此, 次早至慕華館, 行迎勅禮, 畢始入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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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사도(奉使圖)』,17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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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의 주석에 의하면 청 사신 일행은 도성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홍제원에 묵고 이른 아침 모화관으로 들어가서 영칙례를 치른 것으로 나온다. 대개 중국 사신은 홍제원에 잠시 들러 옷을 갈아입고 바로 모화관으로 출발하였는데, 일정이나 일기(日氣)에 따라 홍제원에서 하루를 묵기도 하였다. 아극돈이 특별히 홍제원이라는 지명을 기록에 남긴 것은 그가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기 때문이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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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 위치
종합 의견
표석명의 한자를 '弘濟院'과 '洪濟院'의 두 가지로 표기한다. 또한 홍제원 터의 위치를 비정한 기존의 표석문안에 홍제원 및 홍제원 터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추가한다.
표석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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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弘濟院·洪濟院) 터
여기서 약 50m 골목 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홍제원은 돈의문에서 의주 방면으로 나가는 서북로의 길목에 있던 원(院)이다. 중국 사신이 모화관(慕華館)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었으며, 하룻밤을 묵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648년에 새 관사를 설치하였다. 세종 대에 이곳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였다. 인조반정 때에 반정군이 집결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 때에는 경성목장(京城牧場)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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