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U조은혜
경복궁 개괄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도성의 대표적인 궁궐이다.1395년(태조 4) 처음 건설되었고(『태조실록』 4년 10월 7일)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1865년(고종 2)의 공사를 통해 중건되었다(『고종실록』2년 4월 2일).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정면에 세워지면서 왕실 궁궐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조선물산공진회’ 등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2011년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의 역사
- 경복궁이 처음 건설된 것은 1395년(태조 4)이다.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 사직과 함께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였는데 그것이 경복궁이다. 정도전(鄭道傳)은 궁궐에 대해 국왕이 정사하는 곳이며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곳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고 명칭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시경(詩經)』「대아(大雅)」편에 나오는 시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이름 지었다.[1]
- 태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심덕부(沈德符), 김주(金湊), 이염(李恬), 이직(李稷)으로 하여금 도성과 궁궐을 짓는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최초의 경복궁은 연침(燕寢) 7칸, 동서이방(東西耳房) 각 2칸, 서루 5칸, 보평청(報平廳) 5칸과 이들 사이의 행랑 등이 내전(內殿)을 구성하였고, 정전(正殿) 5칸, 동서각루 각 2칸, 앞쪽의 문 등과 행각 등이 외전(外殿)을 구성하였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 태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심덕부(沈德符), 김주(金湊), 이염(李恬), 이직(李稷)으로 하여금 도성과 궁궐을 짓는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최초의 경복궁은 연침(燕寢) 7칸, 동서이방(東西耳房) 각 2칸, 서루 5칸, 보평청(報平廳) 5칸과 이들 사이의 행랑 등이 내전(內殿)을 구성하였고, 정전(正殿) 5칸, 동서각루 각 2칸, 앞쪽의 문 등과 행각 등이 외전(外殿)을 구성하였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경복궁은 처음부터 종적인 배치의 형태로 구성되었고 정전, 보평청, 연침 등 세 동의 전각이 그 중심에 놓여 있었다. 이들 전각에는 각각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궁성을 쌓아 동문을 건춘문, 서문을 영추문, 남문을 광화문이라 이름 하였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경복궁 위치 선정 이유(지도)
좌구명 | 주 | 국어(國語) |
공자 | 춘추시대 | 춘추(春秋) |
사마천 | 전한 | 사기(史記) |
반고 | 후한 | 한서(漢書) |
이름 | 시대 | 저서 |
---|---|---|
사마천 | 전한 | 사기(史記) |
공자 | 춘추시대 | 춘추(春秋) |
좌구명 | 주 | 국어(國語) |
반고 | 후한 | 한서(漢書) |
구분 | 목록 | 한자 |
---|---|---|
본기 | 오제본기 | 五帝本紀 |
하제본기 | 夏帝本紀 | |
은본기 | 殷本紀 | |
표 | 10권 | |
서 | 8권 | |
세가 | 30권 | |
열전 | 70권 |
경복궁에서 살았던 왕들 (연표식)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경복궁 초기 건축 배경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경복궁(景福宮))]
경복궁 이름 유래
임진왜란 이후의 경복궁
흥선대원군 집권기 중건 변화
경복궁 구역별 소개
-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경복궁 예궐
경복궁한국민족문화대백과-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근정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442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경복궁(景福宮))]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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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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