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혜연습2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21101576 조은혜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이름 | 학번 | 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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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혜 | 2021101576 | 국어국문학과 |
목차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은 하나의 정의로 설명될 수 없는 다양각색하고도 커다란 영역이다. 따라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면이 있고, 정의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디지털 인문학을 활용하는 방향성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지기도 한다.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서술하기 이전에, 다양한 디지털 인문학의 정의와 활용 사례를 조사해 보았다. 각 정의와 사례를 읽으면서 그것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물론 차이점 및 고유한 활용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디지털 인문학을 배우면서 내가 생각하는 디지털 인문학의 정의와 가장 가까운 것을 정리해보고, 이에 이어 내가 생각하는 디지털 인문학의 현주소를 서술하고자 한다.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일컫는다. 미국에서 발표된 디지털 인문학 선언문은 이를 1차 디지털 인문학과 2차 디지털 인문학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1차 디지털 인문학이 데이터베이스 검색, 코퍼스 언어학 및 하이퍼카드 등을 이용한 양적연구 중심이었던 반면, 2차 디지털 인문학에서는 질적·해석적·경험적·감성적·생성적 연구가 주를 이루며, 복잡성·매체적 특성·역사적 배경·분석적 깊이·비평 및 해석 등을 중시하는 인문학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디지털 도구를 연구에 적용한다.[1] 이는 디지털 인문학을 설명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활용 측면에서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디지털 인문학은 이미 수많은 활동을 진행했고,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현 사회에서 디지털은 더이상 사라지거나 무시할 수 없고 우리와 함께 나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방법으로, 현재를 기록하고 직면하는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맞이하는 방법으로 디지털 인문학이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디지털 인문학은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궁궐 프로젝트와 같이 기존 디지털 인문학의 결과물로 존재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선별적으로 수집하고 편집하며 오류를 잡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쉽고 빠르게 이용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 동시에 디지털 인문학의 개방성, 창조성, 생성성 등의 특징을 살펴보았을 때, 수용자는 수용자인 동시에 생산자로서 그리고 생산자는 생산자인 동시에 수용자로서 인문 지식을 분별력 있고, 조심스럽게 소화할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미 만들어진 훌륭한 디지털 인문학의 결과물들에 대한 홍보와 실질적인 활용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디지털 인문학의 발전은 학자들의 정보 접근성보다도 대중의 정보 접근성이 높아져야 그 존재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인문학은 '디지털'이라는 환경 요소가 전제 조전인데, 이는 최대의 강점이자 최대의 약점일 수 있다. 다수의 접근에도 오류가 뜨지 않아야 하는 서버의 안정성은 필수이다. 예를 들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은 2022년 4월 24일 시점으로 서버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2022년 4월 23일부터 접속되지 않고 있는데, 이렇게 인터넷 또는 서버 환경에 오류가 있으면 이용 불가능하다. 또한, 인문학을 디지털 속에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디지털의 언어와 문법을 알아야 한다. 위키 페이지를 편집하기 위해서는 위키 문법을 알아야 한다. 디지털 인문학의 전망은 무궁무진하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인문학을 활용하고 발전시킬 인재의 육성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인문학이라하여 단순히 과거 문헌을 디지털화하는 것으로 한정지어서는 안된다. 디지털 인문학은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공 과목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무한한 디지털 세상에 흩뿌려져 있는 1차 디지털 인문학의 결과 등을 조합하고 편집하며 보다 양질의 정보를 생성하고 이를 공유하는 데에 있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기의 보급 그리고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정보의 수용자는 곧 생산자가 될 수 있다. 현재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강의를 통해 조선의 궁궐에 대한 정보를 아카이빙 및 편집하여 하나의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기존 인터넷에 존재하는 궁궐과 궁궐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이 디지털 인문학의 실현이라고 생각하며, 이 자체가 디지털 인문학의 정의라고 본다. 디지털 인문학은 누구나/쉽고/빠르게/풍부한 디지털 정보를/습득하고/개인적, 공동 협업적으로 생성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학자만의 독점적 정보가 아닌 일반인 역시 정보를 접할 수 있고, 또한 편집하여 새로운 장을 생성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디지털 인문학의 특징은 개인이 개인의 정보를 다루는 것을 넘어 공동의 정보를 공동이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디지털 인문학은 지식의 유통 방법을 바꾸어놓았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협업을 통해 디지털 인문학 연구의 결과물을 도출해 내고, 이를 공유하여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디지털 인문학의 연구이자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디지털 인문학의 활용 예시가 바로 위키페이지이다. 위키 페이지는 모두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는 자유 백과사전으로, 누구나 백사전을 사용할 수 있고 편집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에서 경복궁에 대한 텍스트를 수집하고, 국가문화유산포탈 사이트에서 경복궁의 사진을 다운 받아 새로 생성한 위키 페이지에 삽입한다. 경복궁을 조사하는 우리 팀경복궁팀은 서로의 페이지를 공유하고, 편집 및 보완하며 협업하고 있다. 디지털 인문학은 정보의 확장 측면에서 유용하게 작용한다. 내가 읽고 있는 텍스트 또는 편집하고 있는 텍스트는 텍스트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들(단어, 문단 등)의 세부 정보 확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보 파도타기가 용이하다. 예를 들어, 경복궁 페이지에서 경복궁 이름의 유래에 대한 텍스트를 읽는다. 정도전이라는 키워드에 링크를 걸어 수용자는 경복궁-경복궁 이름-정도전에 대한 정보를 유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무분별하게 분포되어 있는 디지털 속의 무수한 정보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 따라서 읽은 텍스트의 원전, 근거, 부가 설명 등은 하이퍼링크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전기에 창건되어 법궁[2]으로 이용된 궁궐이다.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사적 제117호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다.[3] 풍수지리적으로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는 고대 중국의 궁궐 배치 수법을 따르는 전형적인 형태로, 남·북 방향의 축선을 따라 주요한 문(門)과 전각이 배열되었다.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강녕전(交泰殿)과 교태전(交泰殿)을 중심으로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文),영추문(迎秋門), 신무문(神武門) 등 4개의 대문이 있고 경회루(慶會樓), 자경전(慈慶殿), 자미당(紫微堂) 등의 내전 전각과 자선당(資善堂), 비현각(丕顯閣) 등의 동궁 전각 등이 있다. 전체 7,000여 칸에 이르는 규모였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경복궁이 처음 건설된 것은 1395년(태조 4)이다.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 사직과 함께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였는데 그것이 경복궁이다. 정도전(鄭道傳)은 궁궐에 대해 국왕이 정사하는 곳이며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곳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고 명칭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시경(詩經)』「대아(大雅)」편에 나오는 시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이름 지었다.[4] 태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심덕부(沈德符), 김주(金湊), 이염(李恬), 이직(李稷)으로 하여금 도성과 궁궐을 짓는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5] 이때 만들어진 최초의 경복궁은 연침(燕寢)7칸, 동서이방(東西耳房) 각 2칸, 서루 5칸, 보평청(報平廳) 5칸과 이들 사이의 행랑 등이 내전(內殿)을 구성하였고, 정전(正殿)5칸, 동서각루 각 2칸, 앞쪽의 문 등과 행각 등이 외전(外殿)을 구성하였다.[6] 경복궁은 처음부터 종적인 배치의 형태로 구성되었고 정전, 보평청, 연침 등 세 동의 전각이 그 중심에 놓여 있었다. 이들 전각에는 각각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궁성을 쌓아 동문을 건춘문, 서문을 영추문, 남문을 광화문이라 이름 하였다.[7]
태조 이후 경복궁은 사용되지 않다가 세종 즉위 이후에야 다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세종대에 변경되거나 새롭게 건축된 대표적인 전각은 사정전, 강녕전, 계조당, 문소전 등이며 함원전(咸元殿), 교태전, 자미당, 종회당(宗會堂), 송백당(松栢堂), 인지당(麟趾堂), 청연루(淸燕樓) 등도 세종대에 건립되었다. 궁궐 내에 간의대(簡儀臺), 보루각(報漏閣), 흠경각(欽敬閣) 등 천문 기기를 위한 전각도 마련되었다. 1553년(명종 8)에는 중종대에 소실된 경복궁 동궁을 공사하던 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 남기고 편전과 침전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8]. 복구된 경복궁은 다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궁궐과 종묘와 같이 소실되었고, 이후 고종대에 중건되기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 고종대에 들어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전교로서 경복궁 중건을 명하였다.[9] 복구공사를 거쳐 경복궁은 법궁으로 재탄생하였으나, 1873년(고종 10) 12월과 1876년(고종 13) 11월 등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 연이은 화재로 크게 손상되었고, 이후 1888년(고종 25)에 대체적인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국권을 침탈당하면서 경복궁도 왕조의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1915년의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박람회가 경복궁에서 개최되어 조선의 법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고, 현재 계조당 권역 복원이 진행 중이다.[10]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투호
병을 일정한 거리에 놓고, 그 속에 화살을 던져 넣은 후 그 개수로 승부를 가리는 성인남녀놀이로, 승부놀이이다. 두 사람이 하거나 또는 편을 나누어 청·홍의 화살을 병 속에 던져 넣은 후에 그 수효로써 승부를 결정한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중의 연회나 고관들의 기로연(耆老宴) 때 여흥으로 벌였다. 본래는 중국 당나라 때에 성행되었던 것인데, 『북사(北史)』 백제전과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도 일찍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마광(司馬光)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그 설명이 쓰여 있다. 투호 병은 입 지름이 3치[寸]이고, 귀[耳]의 입 지름은 1치이며 높이는 1자[尺]이다. 병 속은 팥으로 채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을 자리에서 2살[矢] 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2개를 사용하며 그 길이는 2자 4치이다. 실수하지 않고 병에 던져 꽂힌 것을 상(上)으로 삼는데, 먼저 120을 채우는 쪽이 이긴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놀이기구나 놀이방법에 대하여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놀이 때 쓰는 병의 종류나 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화살의 크기 또한 다양하다. 일정한 장소에 둔 투호 병을 향하여 일정한 위치에서 살을 던져 병 속이나 귀에 던져 넣는 것으로, 살이 꽂히는 데 따라 득점이 정하여진다. 던지는 위치는 병에서 2살 반, 즉 3자 가량 떨어진 거리이며, 한 사람이 살 12개를 가지고 승패를 다툰다. 살은 병의 위로 5치 가량 되는 데서 수직으로 떨어지게 한다. 투입법(投入法)에 유의할 점은 던지는 사람의 양쪽 어깨가 균형을 취할 것과 어깨가 기울어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이다.이렇게 하여 이기는 것을 ‘현(賢)’, 지는 것을 ‘불승(不勝)’이라 하며 한번을 ‘일호(一壺)’라 한다. 그 점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헌배(獻盃)·벌배(罰盃) 등이 행하여진다.
투호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오래된 예법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주인과 손님이 술자리를 베푼 자리에서 재예(才藝)를 강론하는 예로써 권장되고 장려되었다. 활쏘기가 덕을 함양하는 수단으로 권장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호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퇴계 이황은 ‘정심투호 貞心投壺라 하며 투호를 던지면서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조선의 왕 성종은 투호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조선왕조실록 1478년(성종 9)10월 27일][13]
"예전에 투호(投壺)906) 하는 예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 하여 행하지 아니하는가?"
하니, 지사(知事) 홍응(洪應)이 대답하기를,
"예전 사마 온공(司馬溫公)907) 의 투호보(投壺譜)가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투호는 희롱하고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았던 모양으로, 같은 해 11월 2일 승정원에 “투호는 장난이 아니므로, 재신宰臣이 모인 곳에서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또 1482년(성종 13) 3월 11일 정승들에게 옛사람은 투호로 마음을 바르게 잡았다며, 장원자에게 망아지 한마리를, 나머지에게 활 1틀씩 주었다. 이후 연산군, 중종, 명종 등 조선의 왕들이 투호를 즐겼고 경연을 벌여 상을 내렸다. 중종도 기사에 “종친 가운데 활을 못 쏘는 자는 투호를 시켰고, 세자도 투호를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14]
성종(成宗) 10년에는 투호의(投壺儀)를 제정하고 권장하면서, 궁중행사의 하나로 관례화되어 매년 3월 3일이나 9월 9일에 기로연과 기영회에서는 투호를 시행하게 하였다. 또한 궁중에서 투호를 행할 때에 낙양춘(洛陽春)과 같은 아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투호는 서울의 왕실과 양반관료층 내에서 뿐 아니라,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도 행해졌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투호가 흥학(興學)의 일환으로 향사(鄕射)와 더불어 권장되었다고 밝힌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왕비를 비롯한 지배층 여성들의 오락 수단이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투호는 근대와 현대시기를 거치면서 일반적인 놀이로 대중화되어 갔다. 일반 놀이로 대중화되면서 투호가 담고 있는 유교적인 예법은 거의 간소화되거나 사라졌다. 오늘날 투호가 명절 때 고궁을 비롯한 어디에서나 전통놀이로 행해지는 것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상을 말해준다.[15]
승경도 놀이
옛 벼슬 이름을 종이에 도표로 그려 놓고 윤목(輪木)이나 주사위를 던져 누가 가장 먼저 높은 관직에 오르는가를 겨루는 민속놀이이다. 승경도(陞卿圖)는 ‘벼슬살이하는 도표’라는 뜻으로 ‘종경도(從卿圖)’, ‘종정도(從政圖)’ ‘승정도(陞政圖)’, ‘승관도(勝官圖)’라고도 부른다. 승경도놀이는 오각형으로 길쭉하게 만든 윤목이나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수대로 말을 이동하여, 놀이판의 최종 종착지인 봉조하(奉朝賀)에 도착하면 승리하는데 주로 양반 자제들이 즐기던민속놀이이다. 대개 계절에 상관없이 즐겼으나, 이 놀이를 통해 일 년의 운세를 점치기도 했기 때문에 주로 정월에 즐겨 놀았다.
승경도놀이는 조선 초기 관료제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말판놀이를 응용해 만든 판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높은 벼슬에 오르고 싶은 욕망을 놀이를 통해서 대리 충족시킬 목적으로 양반 자제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이러한 흔적은 『성종실록成宗實錄』[18]을 비롯하여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오희문呉希文의 『쇄미록瑣尾錄』, 이덕무李德懋의 『사소절士小節』 등 여러 문헌에서 나타난다. 또한 조선시대 관리는 등급이 많고 칭호와 상호관계가 매우 복잡하였기 때문에 양반집에서는 어릴 때부터 이러한 관직에 대한 체계적인 관념을 자제들에게 익히게 하기 위해 이 놀이를 장려하였다.
승경도놀이의 주 놀이 도구인 말판은 대개 가로 80㎝, 세로 120㎝ 내외의 크기이며, 바둑판형으로 격자를 만들고 그 안에 관직과 다음 이동할 칸의 위치를 써 넣어 만든다. 칸의 수는 대략 적게는 80여 칸이며, 많게는 300여 칸을 넣기도 한다. 벼슬자리의 수와 써 넣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방으로는 이른바 외직인 8도의 감사·병사·수사·주요 고을의 수령을 배치하고, 중앙부의 첫 꼭대기에는 정1품을, 그 다음에 종1품을 차례대로 늘어 놓아 맨 밑에는 종9품이 오게 한다. 윤목은 막대형과 주사위형이 있다. 막대형은 약 10∼15㎝ 길이의 막대를 오각기둥형태로 깎고 각각의 모서리에 하나에서 다섯까지의 눈금을 새겨 넣는다. 주사위형인 경우에는 나무를 정육면체로 깎고, 각 면에 품행이나 행동을 나타내는 글자를 새겨 숫자 대신 사용하였다. 말은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흰색, 그리고 누런 바탕에 붉은 테를 두른 말이 사용된다.
놀이 방법은 말판과 노는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먼저 출발점인 초도(初度)에서 말을 굴려 출발점을 정한다. 출발점으로는 크게 문과(文科), 무과(武科), 은일(隱逸), 남행(南行), 군졸(軍卒) 등이 있다. 각자의 출발점이 정해지면 윤목을 굴려 나온 수에 따라 이동한다. 말을 굴려 누가 가장 빨리 높은 자리(문과 출신은 영의정, 무과출신은 도원수)에 올라가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말을 옮기는 도중에 중요한 관직에 오르면 그 관직이 지니는 권능에 따라 파직이나 사약을 받음으로써 변화와 긴장감을 더한다. 벌칙으로는 파면이나 유배·사약 등이 부과되는데, 파면이나 유배의 경우에는 복직이 가능하나, 사약을 받는 경우에는 바로 탈락하게 된다.[19]
유객주 놀이
놀이방법[20]
끈으로 묶인 두 개의 구슬을 어느 한쪽으로 몰거나 몰린 구슬을 두 곳으로 옮기는 놀이이다. 유객주(留客珠)는 한자말을 풀이하면 ‘손님을 머물게 하는 구슬’이란 뜻으로, 특별하게 할 일이 없을 때 가지고 노는 놀잇감이다. 옛날에는 손님이 방문을 했는데 주인이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손님에게 유객주를 주어 무료함을 달래게 했다. 놀이의 정확한 기원과 유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중국에서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로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놀이 재료가 고급스럽고 한가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기에 주로 지배층에서 즐겨 하였다. 이와 비슷한 유객환이란 놀이는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조조의 아들 조식이 만들어 아내에게 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널리 보급된 놀이로 여겨진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명맥이 끊어졌지만,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서양에서는 가정에서 하는 놀이이다.
한쪽 끈의 고리에 있는 구슬을 다른 쪽의 끈의 고리로 옮기거나 옮겨간 구슬을 다시 처음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게 하는 놀이이다. 옛날에는 재질이 단단한 나무와 무명실이나 명주실로 만든 노끈을 사용했으나, 요즘에는 이런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다. 놀이 도구는 가로 15㎝×세로 5㎝ 정도 크기로 두께는 3∼5㎜ 정도이고 구멍이 세 개 있다. 가운데 구멍은 넓게 뚫어서 실이 움직일 수 있고, 양쪽의 구멍은 작게 뚫어 실이 고정되게 한다. 이 끈에 두 개의 구슬이 있는데 직경 3∼5㎝ 정도의 크기이다. 끈은 길이가 60㎝ 정도인데 비교적 굵은 편이다.
- 놀이판을 왼손으로 잡고 그림의 가운데 부분을 앞으로 잡아당겨 공간을 만든다.
- 넓어진 공간으로 왼편의 구슬을 오른쪽으로 통과시킨다.
- 놀이판의 뒤편에서 가운데 구멍에있는 두 줄을 함께 잡아당기면 구멍으로 두 개의 매듭이 따라 나온다.
- 두 매듭은 한 공간을 통해 구슬을 오른쪽으로 보낸다.
- 이 매듭을 통해 구슬을 오른쪽으로 보내고 처음과 같은 상태로 끈을 조절한다.
- 놀이판의 가운데 구멍 뒤편으로 보면 구멍 안으로 네 줄이 들어가 있다. 이 네 줄을 한꺼번에 잡아당기면 매듭이 따라 나온다.
- 반대편으로 보내려면 위와 같은 순서로 하되, 방향만 반대로 한다.
놀이 도구에 ‘유객(留客)’이 앞머리에 들어가는 유객주, 유객환, 유객판(칠교) 등은 모두 손님을 위한 놀이 도구이다. 이것들은 여럿이 할 수도 있지만 혼자서도 놀 수 있는 놀이 도구들이기도 하다.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만큼 풀었을 때의 기쁨과 성취감도 크다.[21]
칠교
일곱 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칠교를 이용하여 여러가지 형태를 만드는 놀이이다.우리 말로 칠교(七巧)는 일곱 개의 교묘한 조각이라고 해석한다. 일곱 개의 조각은 직각 삼각형 큰 것 두 개, 큰 삼각형 절반 크기의 중간 삼각형 한 개, 중간 삼각형의 절반 크기인 작은 삼각형 두 개와 정사각형 한 개, 평행사변형 한 개로 이루어져, 이를 합치면 가로세로 약 10㎝ 정도의 정사각형이 만들어진다. 이 조각들은 피나무, 버드나무, 은행나무, 살구나무 등으로 만들어졌다.
칠교놀이는 일곱 조각으로 이루어진 칠교판(七巧板)과 여러가지모양을 그려 놓은 칠교도(七巧圖)를 가지고 하는데, 칠교도에는 사람·식물·동물·물건·숫자·글자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규장각에 있는 『칠교해』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된 『칠교도』가 있다. 이 두 책은 내용이 비슷하지만 전자는 각 도안의 이름이 한자로만 되어 있고, 후자는 한자 이름과 나란히 한글 이름이 적혀 있다. 중국이나 유럽 등지의 칠교 도안 출판 사례들이 있는데, 비슷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각 나라별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 형태들을 보고 똑같이 따라하는데 일곱 조각 중에 어떤 것을 뺀다거나 조각을 하나 더 쓴다거나 하면 안 되고 정해진 일곱 조각만을 사용해서 만들어야 한다. 혼자서 칠교도를 보고 어느 정도 칠교를 맞출 수 있게 되면 경기 방식으로 놀이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상대편에서 걷고 있는 사람을 만들라고 요구하면 정해진 시간 안에 걷는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보통 시간 안에 상대가 제시한 도안을 정확하게 완성하면 점수를 얻고, 그렇지 못하면 점수를 얻지 못하고 상대에게 기회를 넘겨야 한다. 이렇게 순서대로 엇바꾸어 상대가 지정하는 형태를 만들어야 점수를 얻기 때문에 상대편이 잘 만들지 못하게 되도록 어려운 형태를 찾아서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에는 만들어져 있는 칠교도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것만도 쉽지 않지만, 차츰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칠교놀이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안에 없는 새로운 그림들을 창작하는 과정까지 가게 된다. 1803년에 중국에서 칠교놀이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지만 실제 놀이는 훨씬 오래전부터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손님을 머무르게 한다고 하여 ‘유객판留客板’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서양으로 전해져서는 ‘7인의 마법사’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고 영어로는 ‘탱그램(Tangram)’이라고 한다.
칠교는 일곱 조각으로 끝이 나지 않고 네 조각, 다섯 조각, 열네 조각 등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 놀이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칠교 조각과 칠교도가 있어야 할 수 있다 보니 양반층을 중심으로 유행했다가 근대에는 거의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학교 교과서에 칠교놀이가 소개되면서 다시 널리 알려지게되었다. 칠교놀이는 어린이뿐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쉽고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곱 개의 도형이 들어갈자리를 찾기까지는 꽤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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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선 정돈
사이트 홈에서 상세보기 메뉴(三)를 들어갔을 때, 국채보상운동, 검색, 아키이브이용방법 부분과 아래 아카이브 검색, 의연금 섬색, 콘텐츠 보기, 전문 검색 부분의 구분의 각 구분선이 어긋나있어 보기에 불편하다. X와 개인정보처리방침, 저작권 정책, 유관사이트 부분이 동일한 크기의 칸으로 나누지면 보기에 편할 것 같고, 그 오른쪽의 나머지 부분들도 그렇다. 개인정보처리방침이 배경 칸 구분선과 겹치지 않는 것이 깔끔할 것 같다.
타언어 링크 연결 메뉴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영어, 중국어, 일본어 페이지에서는 상단에 각 다른 언어로 정리한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홈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놓았는데,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한국어) 페이지에서는 다른 언어로 연결되는 링크 또는 메뉴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이름 변경
사소하거나, 의미 없는 지적일 수 있지만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한국) 페이지 홈에서 1907 KOREA가 1907 한국, 조선 또는 한국(조선), 또는 구체적 지명이 표기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독성 향상
(화면 비율을 100%(기본)으로 설정해놓았을 때) 사이트의 각 메뉴, 글씨 크기의 구성이 너무 꽉 들어차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복잡하거나 난잡해보인다. 다양한 연령층의 사용을 고려했을지라도, 가독성이 없는 페이지는 사용자가 피로감을 느끼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페이지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 더 짜임새있고, 보기 용이하게 수정되면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카이브 검색하기 페이지에서 검색어를 입력하는 메뉴바와 그 윗부분에 붙어있는 메뉴 카테고리의 크기를 조금 작게 수정하고, 가운데에 배치하면 좋겠다.
문단 정렬
국채보상운동 카테고리 중 콘텐츠 보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로 최초의 국민모금운동, 국채보상운동부터 다섯 번째 이야기까지 준비되어 있다. 각 이야기로 들어가면 해당하는 세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본문이 ‘양쪽 정렬‘로 정리되면 가독성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 예상한다. 일부만 정리되지 않은 것인 줄 알았는데 모든 이야기의 전문이 왼쪽 정렬로만 설정되어 각 줄의 오른쪽 부분이 깔끔하지 않아 보기에 거슬렸다.
참고문헌
참고사이트
- 국내
각주
- ↑ 홍정욱, 「디지털 기술 전환 시대의 인문학」(미국의 디지털 인문학 선언), 『인문콘텐츠』 38 (2015)
- ↑ 왕이 정규적으로 임어(臨御)하는 도성 내의 궁궐들 중에서 으뜸이 되는 궁궐.
- ↑ 경복궁 현주소
- ↑ 『태조실록』1395년(태조 4) 10월 7일)
- ↑ 『태조실록』1394년(태조 3) 9월 1일
- ↑ 『태조실록』1395년(태조 4) 9월 29일
- ↑ 『태조실록』1395년(태조 4) 10월 7일
- ↑ 『명종실록』 1553년(성종 8) 9월 14일
- ↑ 1865년(고종 2) 4월 2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경복궁(景福宮))]
- ↑ [한국세시풍속사전]
- ↑ [국립민속박물관]
- ↑ [조선왕조실록 1478년(성종 9)10월 27일
- ↑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10027_002 위키실록피디아(투호)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투호(投壺))
- ↑ [한국세시풍속사전]
- ↑ [한국세시풍속사전]
- ↑ 1479년 (성종 10년) 12월 24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승경도놀이)
-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 한국민속대백과사전(유객주놀이)
- ↑ 한국민속대백과사전(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