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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태종이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정궁이던 경복궁에 들지 않고 경복궁 동편에 새로 이궁(離宮)을 세워 이름을 창덕궁이라고 하였다[1]. 역대 왕들이 다른 궁보다 이곳을 좋아하였으며 17세기 이후에는 경복궁을 대신해서 정궁으로 사용했다. 동쪽에는 담을 사이에 두고 창경궁이 있어서 창덕궁의 부족한 공간을 채워 주었다. 조선후기에는 두 궁을 합해서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도성 북쪽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을 살려 지세에 맞추어 건물들을 지었다. 따라서 전체 건물 배치는 좌우 대칭을 피하고 크고 작은 건물과 마당들이 불규칙하면서도 서로 연속성을 갖고 이어지도록 구성하였다. 넓은 숲으로 이루어진 후원은 인공을 최소화하고 자연 상태의 언덕과 골짜기로 만들어졌으며 곳곳에 정자와 샘물이 마련되었다. 후원은 창경궁에서도 함께 이용했다.[2]


  1. 외전
    1. 인정전
    2. 선정전
  2. 내전
    1. 희정당
    2. 대조전
  3. 동궁
  4. 궐내각사
  5. 후원
  6. 기거구역

이미지

역사

궁궐 구조

외전

내전

동궁

궐내각사

후원

기거구역

테스트

  • 이름 있는 링크

경희대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 이름 없는 링크

[1]

  • 외부 링크 노출

http://gukmun.khu.ac.kr/

역사서
이름 시대 저서
좌구명 국어(國語)
공자 춘추시대 춘추(春秋)
사마천 전한 사기(史記)
반고 후한 한서(漢書)
사기
구분 목록 한자
본기 오제본기 五帝本紀
하제본기 夏帝本紀
은본기 殷本紀
10권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


후원

부용지 주합루 일원

애련지 연경당 일원

중간고사 연습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사견

디지털 인문학은 말 그대로 디지털 환경에서 인문학적 연구 또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이 가장 빠른 정보 습득의 창구가 된 현 시대이지만, 많은 기존 인문 연구들이 여전히 디지털화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혹은 온라인상에서 해당 정보를 얻을 수 있더라도 여전히 접근성이 매우 낮은 형태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이 실제로 인문학적 자료를 디지털 콘텐츠화하고 있지만[3], 큰 예산을 들여 구축한 것에 비해 홍보 등이 미진하여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기존의 인문 지식 데이터를 이용해 문화 콘텐츠 등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난 최근, 보다 다양하고 질 높은 결과물을 위해서는 역시 원천 지식이 풍부히 구축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디지털 인문학은 그 자체로는 원천 지식의 아카이빙에 가깝겠지만, 이것을 재료로 하여 다양한 콘텐츠와 연구 등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창덕궁

창덕궁은 1405년 지어진 조선왕조의 이궁이다. 경복궁의 동쪽이자 도성 북쪽에 위치한 응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굴곡진 지형을 살려 건물을 지었다. 때문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형태를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동쪽으로는 창경궁과 맞닿아 있어 조선 후기에는 이 두 궁을 합해 동궐[4]이라 부르기도 했다. 임진왜란이나 인조반정을 비롯한 여러 사건과 화재 등으로 소실과 복원을 다수 반복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본래의 모습을 다수 잃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선의 궁궐 중에서는 그 원형을 비교적 보존하고 있다는 점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배치 등을 높게 평가해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동궐도


창덕궁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동궐도에서 복원 이전, 실제 궁으로 사용되었던 무렵의 창덕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술과 음주 문화


조선의 왕 중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던 이라면 단연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으로 남겨진 술의 이름은 많지 않으나 그 중 하나가 삼해주인데, 정조는 금주령을 아뢰는 신하에게 "술이란 물건은 금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지금 기강이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하였으니 비록 금령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어찌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의 명령을 금석처럼 믿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또 더구나 삼해주(三亥洒)가 이미 다 익었으니 이제 와서 이미 다 빚어놓은 술을 공연히 버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내년은 보통 해와 달라서 온 세상이 기뻐하며 춤출 것이므로 더욱 술 빚는 것을 금할 필요가 없다”고 이른 바가 있다.[5]

또한 정조는 창덕궁의 후원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기도 했다. 부용정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며 고기를 낚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벌칙 삼아 술을 마시게 하거나, 제한 시간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부용지 한가운데의 작은 섬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정약용은 「부용정시연기(芙蓉亭詩宴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적기도 했다.

“임금께서 등극한 지 19년째 되는 해(1795) 봄에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는 잔치를 베풀었다. 부용정에 배를 띄우고 배 안에서 시를 지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지어 올리지 못 하는 자가 있으면 연못 가운데 있는 조그만 섬에 안치(安置)시키기로 했다. 몇 사람이 과연 섬 가운데로 귀양을 갔는데 곧 풀어주셨다.”[6]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개선점

주석

  1. 『태종실록』 5년 10월 25일
  2. 창덕궁, 실록위키
  3.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페이지를 예로 들 수 있다.
  4. 『경종실록』 경종 1년 11월 2일
  5. 『정조실록』 41권, 정조 18년 10월 24일
  6. 문화재청, 함께 어울려 친분을 돈독히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