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U박세윤
onthedh
목차
창경궁 개괄
창경궁 이름 뜻
성종이 즉위하였을 때 생존해 있던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덕종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예종 비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모시기 위해 1484년[1]에 지은 궁이다(성종실록[2] 15년 9월 27일). 그 터에는 고려 말에 남경 천도를 계획하면서 궁을 세웠던 것으로 전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자 세종이 상왕의 거처로 다시 궁을 지어 수강궁(壽康宮)이라 했으며 성종대 다시 궁을 지어 창경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에서는 왕실의 공식적인 의례인 조하 의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은 거의 치러지지 않았고 왕이나 왕비, 왕대비 및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정문과 정전이 동향을 하였는데, 궁의 정문이나 정전이 동향을 하고 있는 점은 조선시대 다른 궁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동향을 하게 된 배경에는 왕대비 처소를 정전의 동편에 둔다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궁궐 배치 관습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에는 주로 왕대비나 후궁이 거처하였고 왕이 침소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후기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 이라고 불렀다. 후원은 창덕궁과 함께 사용했으며 후원에서 과거시험을 치를 때는 주로 창경궁 쪽에서 출입했다.
정문과 정전이 동향을 하였는데, 궁의 정문이나 정전이 동향을 하고 있는 점은 조선시대 다른 궁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동향을 하게 된 배경에는 왕대비 처소를 정전의 동편에 둔다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궁궐 배치 관습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에는 주로 왕대비나 후궁이 거처하였고 왕이 침소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후기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 이라고 불렀다. 후원은 창덕궁과 함께 사용했으며 후원에서 과거시험을 치를 때는 주로 창경궁 쪽에서 출입했다.
창경궁의 건립 배경
창경궁 소실과 재건의 역사
임진왜란 | 임진왜란 | 광해군 |
인조 2년 | 이괄의 난 | 인조 11년 |
순조 30년 | 큰 화재 | 순조 33년 |
창경궁 전각 소개 간단히
구분 | 목록 | 완공년도 |
---|---|---|
남아있는 전각 | 명정전 | 성종 15년 |
문정전 | 성종 15년 | |
통명전 | 성종 15년 | |
사라진 전각 | 자경전 | |
저승전 | ||
통화전 | ||
낙선당 | ||
온실 | 대온실 |
창경궁 건물과 역사
정조와 사도세자
인현왕후
대장금
창경원에 얽힌 역사
창경원 건립 배경
창경원의 모습
창경원 건립 시 당대 반응
창경궁의 현재 모습
창경궁에 남아있는 전각
창경궁 지도
창경궁 관람시간 및 관람료
- 창경궁의 현재
- 관람시간
- 휴무요일
- 관람료
- 관람 가능 전각
- 행사
이미지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 디지털 인문학이란 말 그대로 인문학을 디지털화한 것으로,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문학 또한 그에 맞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간의 인문학은 활자 문서로 적혀왔으며, 서적이나 출판물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이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는다는 점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 유익한 지식과 정보를 준다 해도, 읽히지 않는다면 결국 무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에서 손쉽게 정보를 얻는 것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보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서 보는 일은 어쩌면 불편하고 힘든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인문학에서 이러한 현대인의 양상을 반영하여 디지털화한 것이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생각된다.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닌, 서적이나 출판물 형태의 인문학을 그대로 인터넷에 옮겨 놓은 것이 디지털 인문학이라 생각된다. 위키 페이지나 HTML 등의 인터넷 문서에 인문학적인 내용들을 옮겨 적는다거나, 각각의 개인 인터넷 서버를 만들어 인문학적인 내용을 적어 놓는 것이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디지털 인문학은 기존의 서적 및 출판물 형태의 인문학과는 달리 인터넷에서 쉽게 정보를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내용이 추가되어도 쉽게 수정을 할 수 없는 기존의 인문학과는 달리, 내용이 추가되거나 수정되면 쉽게 수정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르게 보면 '누구나 디지털에 인문학의 정보를 입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서적, 출판물 등은 나오기까지 수십 명의 사람이 확인하며, 편찬한 사람의 이름이 있기에 거짓된 내용을 적을 수 없는데, 디지털 인문학의 경우 익명으로도 가능하기에 허황된 정보가 존재할 수도 있다.
나아가 '디지털 인문학에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기에 웹페이지를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양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불편감이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인문학이 필수적이며, 더욱더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IT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해 갈 것이기에 사람들은 더욱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구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맞추어 인문학도 디지털과 융합하여 사람들이 인문학을 좀 더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도록 하여, 인문학이 사람들로부터 잊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인문학은 인문학의 새로운 시대이자 지평이라고 생각한다.
장점 | 단점 |
---|---|
접근성이 뛰어남 | 전문성이 떨어짐 |
쉽게 추가 및 수정 가능 | 양식의 비동일성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 창경궁
창경궁 개요
창경궁의 소실과 재건
- 이와 같은 창경궁은 여러 번 소실되고 재건되었는데, 맨 처음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인양전, 공사청, 홍화문 등을 중건하였으나 '인조 2년' 때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인조 11년' 때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 창경궁의 중건을 진행하였고, 빠른 시일 내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지속해서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수리가 이어지다가 '순조 30년' 때 큰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 함인정, 빈양문, 숭문당 등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순조 33년' 때 다시 복구하였고, 이때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 숭문당, 함인정, 양화당, 영춘헌, 오행각을 중건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내전의 전각은 대부분 이때 중건하였다.
- 창경궁이 심하게 훼손된 것은 '순종이 즉위한 뒤'로, 순종은 즉위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일제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하에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만들어 융희 3년에 개원하였다. 춘당지라는 연못도 이때 생겼으며,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춘당지에 보트를 놓아 창경원의 구실을 확실시하였다. 이는 왕권과 왕실의 상징성을 격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는 공사는 '1984년'부터 시작했다. 창경궁으로의 이름 환원은 '1983년 12월 30일'에 이뤄졌으며 '1986년'에 명정전 화랑과 문정전 등 일부 전각을 복원하였다.
소실 | 소실 이유 | 재건 | 재건 정보 |
---|---|---|---|
선조 25년 | 임진왜란 | 광해군 |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인양전, 공사청, 홍화문 등 중건 |
인조 2년 | 이괄의 난 | 인조 11년 |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 창경궁 중건 |
순조 30년 | 큰 화재 | 순조 33년 |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 숭문당, 함인정, 양화당, 영춘헌, 오행각 등 중건 |
순종 즉위 후 | 창경원 개원 | 1984년 | 창경궁 복원 |
창경궁의 독특함
- 창경궁은 지형을 따라지어 대칭이 맞지 않는다.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데 이는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 온 궁궐이기 때문이다.[3]
현재의 창경궁
- 현재의 창경궁 정문 영역에는 홍화문과 옥천교가 있고, 외전 영역으로는 동쪽의 명정문과 서쪽의 빈양문을 경계로 명정전·문정전·숭문당이 있으며, 내전 영역으로는 함인정·경춘전·환경전·통명전·양화당·영춘헌·집복헌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창덕궁에 속한 부용지 일대까지 아우르던 후원 영역에는 춘당지와 관덕정, 일제 때 세워진 식물원이 남아있다.
창경궁의 역사적 사건
- 창경궁에서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도 일어났는데, 대장금과 중종의 일,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건, 영조와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났다. 대장금과 중종은 환경전에서,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통명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는 문정전에서 일어났다. 정조는 경춘전에서 태어났으며,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고 직접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지금 걸려있는 편액은 순조의 어필이다.
창경궁의 가치
- 현재 창경궁은 국보 1점(명정전)과 보물 7점(홍화문, 명정문 및 행각, 옥천교, 통명전, 풍기대, 관천대, 팔각칠층석탑) 그리고 등록문화재 1점(대온실)을 가지고 있다. [4]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 창경궁 대온실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나?
창경궁 대온실의 역사
- 창경궁 대온실의 역사는 일제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하에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 춘당지를 만들어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에서 시작된다. 1909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창경궁의 대온실은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일본인 후쿠바 하야토가 1907년에 설계하였으며, 프랑스 회사가 시공을 담당하였다. 약 170평(약 582m2)으로 동양 최대 규모의 목조 식물원이었으며 각종 희귀 식물을 전시해놓았다.[5]
외부적인 이유
"근심과 걱정이 많은 순종을 위로하고자 대온실을 설립하였다." |
- 이와 같은 대온실은 외부적인 이유로 볼 땐 일제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하에 설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대한제국은 모든 실권을 일제에게 빼앗긴 상태였고, 일제는 대한제국의 모든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따라서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제는 근심이 많은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창경원으로 개조하여 대온실을 설립하였기 때문이다.[6]
내부적인 이유
"조선 궁궐과 왕의 위상을 격하시키고자 대온실을 설립하였다" |
- 그러나 내부적인 이유를 보자면 일제는 조선 궁궐과 왕의 위상을 격하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07년에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자 일제가 그때를 맞춰서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었기 때문이다. 창경궁은 창경원의 건립 이전 조선시대 궁궐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창경원의 개원 이후 일반 사람들의 관람을 허용하면서 그 위상이 격하되었다. 이의 증거로는 다음을 내세울 수 있다. 첫째, 1911년(순종 4년)에 궁궐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창경궁이 갖고 있는 궁궐의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둘째, 창경원의 높은 언덕 위에 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식물원 본관에도 일본식 가옥 1동(棟)을 신축하여 낙성하였다. 셋째, 창경궁 내에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 등을 세우고 춘당지라는 연못을 파놓는 등 하여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다.[7] 그간 궁궐에 왕실의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보안 등의 여러 이유도 있지만 왕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용하였다는 것은 왕의 위상을 격하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왕만의 공간에 일반인들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앞선 이유와 증거들로 창경궁의 대온실은 왕인 순종의 위상을 격하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이유
- 한편 대온실이 서양식으로 지어진 이유에 대해 후쿠바 하야토는 이토 히로부미가 제안한 예산과 규모에 맞추어 창경궁 대온실을 설계했다고 말했다. 이는 궁궐 내 주변 환경과 여건에 어울리게 지은 게 아니라 통감부의 기획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서양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이색적으로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 예쁜 창경궁의 대온실은 이와 같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만들어졌다.[8]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SCROLL DOWN
-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딱 들어가면 여러 사진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라고 나오고 그 밑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가치'라 쓰여있고, 또 그 밑에 작게 마우스 표시와 'SCROLL DOWN'이라고 쓰여있는데, 'SCROLL DOWN'이 너무 작게 쓰여있어 페이지를 들어가자마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사이트를 클릭하여 들어갔을 때, 여러 정보들을 알 수 있도록 바로가기 메뉴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SCROLL DOWN'은 한국어로 쓰고, 좀 더 크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간격의 비동일성
- 화면을 클릭하자마자 들어가는 페이지에서 스크롤을 내리면 아카이브로 보는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페이지가 나온다. 그런데 이 페이지의 간격이 서로 어긋나있는 것이 어지러우며 보기 힘든 것 같다. 사진의 길이나 글씨의 길이 등으로 각각에 맞게 길이 조성을 해놓은 것으로 확인되는데, 오류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사진의 원본 크기를 줄이거나 여백이 많이 비더라도 각각의 길이를 똑같이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한눈에 확인하기 쉬울 것 같다.
문장의 양끝
- '콘텐츠 보기'에 들어가서 아무 항목이나 클릭하면 그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뜨는데 글씨의 양 끝 간격이 맞지 않아 읽는데 흐름이 끊기며, 불편함이 생긴다. 또한 너무 끝부분이 맞지 않아 오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밑에 있는 사진들은 크기가 같지 않아 오류처럼 보인다. 물론 원본 크기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크기를 다 똑같이 맞췄으면 좋겠다. 나아가 사진의 크기를 줄여도 글씨의 위치는 똑같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형식이 조금 더 깔끔해질 것 같다.
구분 선과 네모 박스
- '아카이브 검색'을 들어가서 뜨는 여러 항목들 중 하나를 클릭하여 들어가면 뜨는 '상세보기' 항목들을 표로 정리하거나 선을 그어 뚜렷하게 표시했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도 여백을 동일하게 설정하고, 굵은 글씨를 처리하는 등 구분을 잘해놓기는 했지만 정보들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아가 '원문보기', '해석보기'에서도 표의 항목을 만들거나 네모 박스를 만들어 그 안에 내용을 넣는 등을 했으면 좋겠다. 너무 하얀 바탕에 글씨만 딱 있어, 파악은 쉬우나, 만들다가 만 느낌이 든다.
전체적인 통일성
-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아카이브 검색'코너와 '의연금 검색', '콘텐츠 보기', '전문 검색', '1907 KOREA', 'eBook'의 각 항목을 누르면 나오는 콘텐츠들이 어떤 것은 꾸밈없이 심플하고 색상도 검정과 하양인 반면, 어떤 것은 예쁘게 꾸며져 있고 알록달록하기도 하다. 물론 각 콘텐츠에 맞게 꾸며지는 것은 좋으나 사이트 내의 전체적인 통일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각주
- ↑ (성종 15)
- ↑ 『성종실록』
-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 ↑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
- ↑ 근대문화 역사유산
-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827&code=kc_age_30 우리역사넷]
-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827&code=kc_age_30 우리역사넷]
- ↑ 근대문화 역사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