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강궁
개설
수강궁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머물던 궁이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3일). 태종 사후에는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하였다. 성종 연간에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를 위한 궁인 창경궁을 수강궁 터에 건립하면서 수강궁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성종실록』 10년 5월 29일).
위치 및 용도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수강궁의 위치를 한양의 연화방(蓮花坊)으로 추정하였다. 현재 서울의 창경궁이 자리한 곳이다. 수강궁은 본래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건축된 상왕전(上王殿)이다. 태종 사후에는 왕실의 별궁 역할을 했다. 태종과 세조가 이곳에서 별세했고, 예종이 수강궁의 중문(中門)에서 즉위했다.
변천 및 현황
수강궁이 태종의 상왕전으로 영건된 것은 1418년(세종 즉위)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던 해다. 태종이 이어하여 거처하는 동안에도 수강궁의 공역은 계속되었는데 1419년(세종 1)에 남쪽 행랑과 수강문(壽康門)이 완성되었다. 수강궁에 옮겨 살던 태종은 1422년(세종 4)에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태종 사후 수강궁은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단종과 세조는 공역이 계속되는 경복궁, 창덕궁 등을 피하여 종종 이곳에 머물며 정사를 논의했다. 세조는 병이 깊어지자 수강궁으로 이어했고 1468년(세조 14) 정침에서 별세했다. 따라서 세조를 이어 왕위를 이은 예종은 수강궁의 중문에서 즉위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 연간에도 수강궁은 왕실의 별궁으로써 기능하였다. 특이한 내용으로는 1473년(성종 4)에 수강궁의 장춘문루(長春門樓)에서 무신(武臣)의 말타기와 활쏘기[騎射]를 점검한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4년 5월 5일).
1479년(성종 10) 인혜왕대비와 인수왕대비가 왕이 머무는 대전(大殿)이 좁다 하여 수강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이후 수강궁은 왕대비들의 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결국 1482년(성종 13) 성종은 창덕궁을 수리하는 대신 왕대비들이 머물러 있는 수강궁의 수축(修築)을 명하였다.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공역이 지연되기는 했으나, 1484년 완성되어 창경궁이라는 궁호(宮號)를 얻게 되었다(『성종실록』 15년 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