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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사견
오늘날, 사람들이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두말할 것 없이 인터넷이다. 단지 몇 개의 검색어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정보의 바다를 떠도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불러올 수 있으니 말이다.
디지털 인문학은 인터넷과 같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지칭하는 말”[1]로, 간략히 정리하자면 디지털 환경에서 인문학적 연구 또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이 가장 빠른 정보 습득의 창구가 된 현 시대이지만, 많은 기존 인문 연구들이 여전히 디지털화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혹은 온라인상에서 해당 정보를 얻을 수 있더라도 여전히 접근성이 매우 낮은 형태다. 바야흐로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는 인터넷에는 이제 출처가 불분명한 채로 떠돌아다니는 허위 정보들이 더 많다. 특히 학술적 정보에 있어 이러한 사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신뢰성을 가진 적합한 자료를 찾는 것은 어렵고, 오염된 정보가 필터링 없이 그대로 올라와 있으니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로서는 후자를 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의 해소를 위해서라도 파편화되어 있는 인문학적 연구 자료 등의 이용이 용이해지도록 다양한 노력을 더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이 실제로 인문학적 자료를 디지털 콘텐츠화하고 있지만[2], 큰 예산을 들여 구축한 것에 비해 홍보 등이 미진하여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기존의 인문 지식 데이터를 이용해 문화 콘텐츠 등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난 최근, 보다 다양하고 질 높은 결과물을 위해서는 역시 원천 지식이 풍부히 구축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디지털 인문학은 그 자체로는 원천 지식의 아카이빙에 가깝겠지만, 이것을 재료로 하여 다양한 콘텐츠와 연구 등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창덕궁
창덕궁은 1405년 지어진 조선왕조의 이궁이다. 경복궁의 동쪽이자 도성 북쪽에 위치한 응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굴곡진 지형을 살려 건물을 지었다. 때문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형태를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동쪽으로는 창경궁과 맞닿아 있어 조선 후기에는 이 두 궁을 합해 동궐[3]이라 부르기도 했다. 임진왜란이나 인조반정을 비롯한 여러 사건과 화재 등으로 소실과 복원을 다수 반복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본래의 모습을 다수 잃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선의 궁궐 중에서는 그 원형을 비교적 보존하고 있다는 점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배치 등을 높게 평가해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동궐도에서 복원 이전, 실제 궁으로 사용되었던 무렵의 창덕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돈화문을 통해 처음 궁궐로 들어서면 금천이 먼저 눈에 띈다. 금천교를 통해 개울을 건너고, 인정문을 지나면 외전 중 하나인 인정전이 위치해 있다. 인정전 내부는 본래의 전돌이 아니라 마루가 깔려 있고, 샹들리에와 커튼이 달려 일제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지만 외관은 꽤 근사하다. 이밖에도 인정전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정무 기능을 갖는 빈청·대청·승정원·선전관청 등이, 서쪽에는 이문원·선원전·양지당·홍문관·내의원·예문관·상의원 등의 여러 관서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들 중 여러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축되지 않거나, 잘못 복원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은 경우가 대다수이다. 대조전이나 희정당 역시 과거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창덕궁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인 후원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네모난 연못과 그 안의 둥근 섬으로 천원지방 세계관을 표현한 부용정 연지는 창덕궁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 술과 음주 문화
조선의 왕 중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던 이라면 단연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으로 남겨진 술의 이름은 많지 않으나 그 중 하나가 삼해주인데, 정조는 금주령을 아뢰는 신하에게 "술이란 물건은 금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지금 기강이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하였으니 비록 금령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어찌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의 명령을 금석처럼 믿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또 더구나 삼해주(三亥洒)가 이미 다 익었으니 이제 와서 이미 다 빚어놓은 술을 공연히 버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내년은 보통 해와 달라서 온 세상이 기뻐하며 춤출 것이므로 더욱 술 빚는 것을 금할 필요가 없다”고 이른 바가 있다.[4]
그가 창덕궁의 후원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기도 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5] 또한 남겨진 일화에 따르면, 정조는 부용정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며 고기를 낚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벌칙 삼아 술을 마시게 하거나, 제한 시간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부용지 한가운데의 작은 섬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정약용은 「부용정시연기(芙蓉亭詩宴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적었다.
“임금께서 등극한 지 19년째 되는 해(1795) 봄에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는 잔치를 베풀었다. 부용정에 배를 띄우고 배 안에서 시를 지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지어 올리지 못 하는 자가 있으면 연못 가운데 있는 조그만 섬에 안치(安置)시키기로 했다. 몇 사람이 과연 섬 가운데로 귀양을 갔는데 곧 풀어주셨다.”[6] |
정조가 시험에 합격한 성균관 유생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발언한 것 역시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7] |
이때 불려 온 유생 중 오태증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다섯 잔을 마시고도 아직 취하지 않은 채였다. 이에 정조는 연회가 열린 희정당은 오태증의 선조인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더불어 짓궂게도 “태증이 만약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술잔을 사양하”겠냐 며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순배를 오태증에게 내렸다. 결국 태증이 술에 취하게 만든 정조는 그를 물러가게 하라 이르는 신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취하여 누워 있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숙종조에 고 판서가 경연의 신하로서 총애를 받아 임금 앞에서 술을 하사받아 마시고서 취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던 일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또 이 희정당에서 취해 누웠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8]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개선점
모바일 UI
- 이미지에서 보이다시피, 모바일 페이지에서 왼쪽 상단의 메뉴를 확인할 경우, 검색창이 가운데에 위치한 탓에 일부분을 가려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PC 버전과 마찬가지로 검색창이 상단에 고정되도록 반응형 디자인의 수정이 필요하다.
그래프 가독성
- ‘아카이브 통계’ 페이지에서 원형 그래프의 각 요소 텍스트가 겹쳐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차지하는 비율이 적어 원형 그래프에서 유의미한 비율을 보이지 못하는 유형이더라도 그 종류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도록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Book 검색 결과
- ‘eBook 검색’ 페이지에 들어가면 저자/출판사/연도/검색어 등을 입력하라는 창만이 덩그러니 존재한다. 어떤 검색어를 넣어야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는지, 어떤 자료들이 존재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전문 검색’ 페이지처럼 검색어를 입력하기 이전이라도 하단에 전체 결과가 미리 보이도록 수정하는 쪽이 용이할 것이다.
원본이미지 확인
- ‘아카이브 검색’ 페이지에 있는 각종 자료들에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이미지를 볼 수 있”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미지를 클릭하면 뷰어 프로그램 설치 페이지로 이동하게 된다. 단순히 이미지를 확인하고 싶을 뿐인데 뷰어까지 설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굳이 프로그램 설치로 넘어가지 않더라도 원본 크기의 이미지를 다운로드/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보다 편리할 것이다.
메인 페이지 슬라이드
- 메인 페이지에는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라는 타이틀 뒤로 관련 이미지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우측 하단에 있는 원 세 개가 각각 세 종류의 배경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굳이 이것을 슬라이드 쇼처럼 배치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배경 이미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아 이것이 어떤 문서인지, 해당 운동에 있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를 짐작하기 힘들다. 차라리 메인 페이지 하단의 ‘아카이브로 보는 국채보상운동’의 각 자료를 슬라이드 형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용자의 흥미를 끄는 데에 더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각주 및 참고문헌
창덕궁 이야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 ↑ 김현, 「디지털 인문학: 인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상생 구도에 관한 구상」, 『인문콘텐츠』 29, 인문콘텐츠학회, 2013.
- ↑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페이지를 예로 들 수 있다.
- ↑ 『경종실록』 경종 1년 11월 2일
- ↑ 『정조실록』 41권, 정조 18년 10월 24일
- ↑ ”언젠가 여러 신하들과 부용정(芙蓉亭)에서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정조실록』 1권, 정조 대왕 묘지문
- ↑ 문화재청, 함께 어울려 친분을 돈독히 하다
- ↑ 『정조실록』 34권, 정조 16년 3월 2일
- ↑ 『정조실록』 34권, 정조 16년 3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