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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이란?

디지털 인문학인문학정보기술(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이 합쳐진 융합학문이다. 전통적인 인문학의 연구과정에 정보기술의 설계, 구축, 분석, 해석, 시각화의 과정이 융합되어 탄생된 인문학의 새로운 방법론이며 학문분과이다.[1]


디지털 인문학의 필요성

전통적인 인문학계에서, 가령 어떠한 역사 연구를 진행한다고 가정한다면 기본적으로 해당 시대의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야 한다. 과거에는 참고해야 하는 1차 자료의 양이 많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는 자료의 양이 방대해지면서 이제는 일개 개인의 힘으로 어떠한 단일 학문 분야의 모든 연구자료를 조사하고 연구사를 정리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이에 대해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논문이나 문헌 등의 많은 인문학 자료들을 디지털 상에서 공유 및 정리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인문학 연구에 있어 시·공간적인 제약의 상당 부분을 해결해 주었다. 실례로 조선시대를 연구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사료가 되는 『조선왕조실록』은 디지털 아카이브화 되어 누구나 인터넷 상으로 손쉽게 자료를 검색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RISS나 KISS같은 사이트를 통해 각종 논문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고, 각종 문헌도 굳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갈 필요 없이 인터넷 상에서 ‘e-book’을 구매하거나 대여할 수 있다. 이처럼 디지털 인문학은 방대한 자료로 인해 동맥경화에 걸린 인문학계에 하나의 처방책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디지털화 된 수많은 자료를 통해 인문학과 빅데이터를 연동하여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추론’은 인문학계가 모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으며, 이외에도 디지털 인문학의 활용 방안은 매우 무궁무진하다.


디지털 인문학의 미래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다시금 조명 받고 있는 인문학의 미래는 과연 어찌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제 디지털 인문학의 발전 없이는 인문학의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디지털 인문학 연구는 전세계적으로 미국, 영국 뿐 아니라, 캐나다,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도 활발하게 전개 되고 있으며, 일본 대만에서도 그것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2]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도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교육과 육성에 대한 지원이 국가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경복궁


기원 및 이름 유래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최초이자 대표적인 궁궐이다. 경복궁이 처음 건설된 것은 1395년(태조 4)으로,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 사직과 함께 조선왕조의 새로운 궁궐로 경복궁을 건설하였다. 경복궁에서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정도전(鄭道傳)은 궁궐에 대해 국왕이 정사하는 곳이며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곳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고 명칭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시경(詩經)』「대아(大雅)」편에 나오는 시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이름 지었다.[3]

변천사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처음 건설되었고, 태종, 세종 대를 거쳐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4] 이후 1865년(고종 2)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공사를 통해 중건되었다.[5]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정면에 세워지고 궁궐 내부의 많은 건물들이 훼손되면서 왕실 궁궐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여기에 더해 ‘조선물산공진회’ 등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더욱 훼손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여러 번의 걸친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현재에는 2011년부터 진행된 제 2차복원정비사업이 진행 중이며, 사업이 완료되는 2030년까지 원래 궁궐 규모의 75.8%수준으로 복원을 완료할 계획이다.[6]

경복궁 연표
연대 내용
1392년 태조 1 한양 천도 결정, 종묘, 경복궁 조성 시작
1394년 태조 3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1395년 태조 4 종묘, 사직, 경복궁 창건
1396년 태조 5 경복궁 궁성 축조
1412년 태종 12 경회루를 고쳐지음
1427년 세종 9 동궁 자선당 건립
1429년 세종 11 사정전과 경회루 다시 지음
1431년 세종 13 광화문을 고쳐 지음
1432년 세종 14 문소전을 새로 지음
1433년 세종 15 신무문 새로 지음, 강녕전 고쳐 지음
1434년 세종 16 광화문에 새 종 설치, 보루각 새로 지음, 용문루 및 용무루 수리
1438년 세종 20 흠경각 새로 지음
1443년 세종 25 계조당, 교태전 새로 지음
1456년 세조 2 취로정 새로 지음
1474년 성종 5 근정전에 청기와 올림
1543년 중종 38 동궁 화재로 인해 소실
1553년 명종 8 화재로 강영전, 사정전, 흠경각 등 소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손실
1865년 고종 2 경복궁 중건 시작
1867년 고종 4 경복궁 중건 완료
1868년 고종 5 창덩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
1873년 고종 10 경복궁에 건청궁 새로 지음
1876년 고종 13 화재로 인해 830여칸 건물 소실
1888년 고종 25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등 다시 지음
1915년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1927년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 광화문 이전
1968년 광화문 복원
1997년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현재 2차 경복궁 복원 사업 진행중


형태

전체적인 배치는 고대 중국의 궁궐 배치 수법을 따르는 전형적인 형태로, 남·북 방향의 축선을 따라 주요한 문(門)과 전각이 배열되었다.</del>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강녕전(交泰殿) 교태전(交泰殿)을 중심으로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文), 영추문(迎秋門), 강녕전(交泰殿) 등 4개의 대문이 있고 경회루(慶會樓), 자경전(慈慶殿), 자미당(紫微堂) 등의 내전 전각과 자선당(資善堂), 비현각(丕顯閣) 등의 동궁 전각 등이 있는 전체 7,000여 칸에 이르는 규모였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무력으로 조선을 점령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선전활동의 수단으로 공진회·박람회 등의 전시행사들을 활용하였다. 이 중에서도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이하 조선공진회로 표기)는 최초의 공식 박람회로서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지 5년째 되는 해인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까지 약 50일간 개최되었고, 전시장소는 바로 조선왕조 통치의 핵심공간인 ‘경복궁’이었다. 일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빌미로 근정전을 비롯한 궁궐의 주요 전각 몇 군데만 남기고 무수한 건물들을 헐어냈다. 이후 1926년도에는 건물들을 헐어낸 자리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게 된다.[7]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 각도의 물산품을 전시하여 식민지배 하에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목적과 더불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조선을 일본에 홍보하여 일본 기업과 일본인들을 조선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이른바 '식민(植民)'의 선전장 역할을 하였다. 공진회 규모는 5,226평으로서 주요 전시관은 제1진열관, 제2진열관, 미술관, 기계관, 근정전 회곽, 철도국 별관 등이 있었으며 전시물로는 각종 산업에 대한 물품을 망라하고 외국품도 조선의 산업상 필요하다 인정하는 물품을 출품하였는데 각 전시관을 통틀어 4,655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8]

일제는 경회루에 매점과 음식점을 만들고 경복궁 내에 가건물 축사를 지어 소, 닭, 돼지까지 전시하였으며 야간에도 관람객의 입장을 자유롭게 하여 경복궁을 하나의 유흥 장소로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일제는 대내외적으로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모두 짓밟은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 기본적으로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인들을 포함하여 국채보상운동이 언제, 어떻게, 왜 발생한 사건인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문외한 사람이 보기에는 스스로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자료를 찾기에는 너무 막연한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해서 ‘콘텐츠 보기'란에 있는 국채보상운동의 내용을 조금 더 보강 및 편집하여(이를테면 사소하지만 글자 정렬 방식 같은 것도) 디지털 아카이브 홈페이지의 맨 윗부분에 두면 좋을 것 같다.
  •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검색’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은 대다수 한자 혹은 옛한글이 많이 쓰여 있어서 이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해당 자료들 아래에 해석을 추가한다면 자료의 접근성 측면에서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 ‘e-book 검색’란에서는 아무런 도서를 검색할 수 있는데 왜 있는 것인지에 대해 존재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해서 일제강점기 및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도서들을 찾을 수 있게 도서들을 추가한다면 자료를 찾는 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 ‘전문 검색’란에서는 아카이브 내용 전체를 디지털화하여 방대한 자료를 빠르게 검색할 수 있는 점이 만족스럽다. 그런데 상당수 많은 부분들의 이미지가 잘려있는데 이에 대해서 다시 이미지를 복원해주거나 혹은 이미지가 잘린 이유에 대해서라도 설명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
  • 사소하지만 의연금에 대해 해당 금액이 현재 가치로 환산하여 어느 정도 되는 금액인지 적고, 이에 대해서 환율에 따라 외국인들도 보기 편하게 하면 좋을 것 같다.

각주

  1. (김바로, 『시맨틱 데이터 아카이브의 구축과 활용』, 파주:보고사, 2018.12.10., pp.17~20)
  2. 김현. (2013). 디지털 인문학. 인문콘텐츠, (29), 9-26.
  3. (『태조실록』 4년 10월 7일)
  4.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5. (『고종실록』2년 4월 2일)
  6. 문화재청 (2010년 6월 23일). 경복궁 2차 복원정비 계획보고 (보고서). 문화재청. 12쪽.
  7. (이동훈(Yee, Dong-Hoon)(李東勳).(2021).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와 1910년대 식민지 조선. 韓日民族問題硏究, 40(1): 55-86)
  8. 최병택(Choi Byung-Taek).(2019).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물 선정 및 배치에 나타난 특징. 교육논총, 56(1): 136-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