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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정보 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인문학을 다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 인문학의 연구 방식은 발전한 과학 기술을 통해 인문지식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며, 자료를 디지털화하여 보관 및 연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나는 디지털 인문학을 ‘정보통신 기술의 도움을 받아 정보 기술의 환경에서 인문지식을 재생산, 창조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현대 과학 기술과 전통 인문학이 결합한 교차 학문으로서, 디지털 인문학은 다양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연구 분야가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문화의 시각화’이다. 우리는 문화의 시각화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 관련한 그림이나 사진, 이미지 자료를 디지털화하고, 그것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인터넷에 오픈함으로써, 인문학 자료에 대한 접근성을 줄이고, 인문지식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관리하는 디지털 장서각[1]이다. 디지털 장서각은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를 디지털화하여 누구나 원문자료를 열람하고, 내려받을 수 있게 만든 아카이브이다. 고문서의 특성상 정보의 접근이 어려워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던 이전과 달리, 현재는 많은 사람이 고문서를 활용,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디지털 인문학은 단순히 인문지식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인문학을 바탕으로 인문학적 지식을 재생산, 창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디지털 인문학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 이전의 고문서를 디지털 자료로 변환시킨다든지, 문화재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디지털 자원을 형성한다든지, 이외에도 현재의 뉴스, 콘텐츠 등 문서, 사진, 동영상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자료를 디지털화하여 보관, 연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디지털 인문학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 다양한 국적의 사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디지털 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도록 작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경복궁

경복궁 개요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2]으로 도성의 대표적인 궁궐이다. 1395년(태조 4년) 처음 건설되었고[3]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4] 1865년(고종 2년)의 공사를 통해 중건되었다[5].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정면에 세워지면서 왕실 궁궐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조선 물산 공진회’ 등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2011년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인 배치는 고대 중국의 궁궐 배치 수법을 따르는 전형적인 형태로, 남·북 방향의 축선을 따라 주요한 문(門)과 전각이 배열되었다.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강녕전(交泰殿)과 교태전(交泰殿)을 중심으로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文), 영추문(迎秋門), 신무문(神武門) 등 4개의 대문이 있고 경회루(慶會樓), 자경전(慈慶殿), 자미당(紫微堂) 등의 내전 전각과 자선당(資善堂), 비현각(丕顯閣) 등의동궁 전각 등이 있는 전체 7,000여 칸에 이르는 규모였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경복궁의 명칭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명에 따라[6]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교태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복궁의 역사:조선왕조 시기

1300년대: 경복궁 창건
년도 내용
태조 3년(1394)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태조 4년(1395) 종묘·사직 그리고 경복궁 창건
태조 5년(1396) 경복궁 궁성 축조
1400년대: 법궁 체제 확립
년도 내용
태종 12년(1412) 경회루를 고쳐 지음
세종 9년(1427)) 동궁 자선당 건립
세종 11년(1429)) 사정전과 경회루 다시 지음
세종 13년(1431) 광화문을 고쳐 지음
세종 14년(1432) 문소전을 새로 지음
세종 15년(1433)) 신무문 새로 지음. 강녕전 고쳐 지음
세종 16년(1434) 광화문에 새 종 설치. 보루각 새로 지음(자격루 설치).융문루·융무루 수리
세종 20년(1438) 흠경각 새로 지음(옥루기륜 설치)
세종 25년(1443) 계조당·교태전 새로 지음
세조 2년(1456) 취로정 새로 지음
성종 5년(1474) 근정전에 청기와 올림
1500년대: 화재 및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소실
년도 내용
중종 38년(1543) 동궁 화재로 인해 소실
명종 8년(1553) 화재로 인해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 등 소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소실
1800년대: 흥선대원군의 중건과 화재
년도 내용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시작
고종 4년(1867) 경복궁 중건 완료. 근정전에서 조하 의식 거행
고종 5년(1868)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
고종 10년(1873) 경복궁에 건청궁 새로 지음
고종 13년(1876) 화재로 인해 830여칸 건물 소실
고종 25년(1888) 강녕전·교태전·자경전 등 다시 지음

관련 영상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 한중록

작품 소개

조선 정조의 생모(生母)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嬪)이었던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자전적(自傳的)인 회고록(懷古錄)으로 <한중만록(閑中漫錄)>이라고도 한다. 총 4편으로 구성된 『한중록』은 혜경궁홍씨가 환갑이 되던 1795년 제1편을 작성하였으며, 나머지 3편은 1801년(순조 1)부터 1805년(순조 5) 사이에 작성하였다.

저자 소개

경의왕후(敬懿王后, 1735∼1815)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 思悼世子)의 비(妃)로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영조 20) 세자빈에 책봉되었고[7],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에 추서되었다가[8]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라[9] 혜경궁 홍씨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혜경궁 홍씨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뒤 1795년 남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책이 유명한 <한중록>이며, 이것은 궁중문학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을축 4월 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돌아간 해이다.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洪鳳漢)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祕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10]

의의

궁중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므로 궁중 용어와 궁중 풍속 등이 풍부하게 등장하며, 여류 문학이라는 점에서 당시 여성들의 삶과 가치관 등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하던 때에 당사자로 사건에 연루되거나, 직접 사건을 목격하는 등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겪은 내용을 서술하였으므로 사실만을 나열한 관찬 사료에 비하여 이야기가 풍부한 것도 특징이다.

원문 참조

규장각 원문 검색 서비스[11]에 가면 원문을 볼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12]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eBook 검색 ‘연도를 입력해주세요’ 오류

eBook 검색에 들어가서 ‘연도를 입력해주세요’ 입력란, 날짜 선택 부분에서 오류가 존재한다. 전체화면으로 보았을 때는 오류 없이 작동하지만, 작은 화면으로 보았을 때, 아래 사진과 같이, 년도 선택 키가 두 개가 겹치거나, 선택할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한다. 화면 크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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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이용방법 페이지 개선점

아카이브 이용방법 페이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아카이브 이용방법 페이지에 들어가면, 메인페이지, 아카이브 검색, 의연금 검색 활용방법은 자세히 안내되어있지만, 그 외의 이용방법, 예를 들어 메인페이지에 있는 콘텐츠 보기, 전문검색, 1907 KOREA, eBook 검색에 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머지 활용법이 아카이브 이용방법 페이지에 추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 검색 자료의 원문 내용 개선점

메인 화면 바로 가기 중 하나인 전문검색 페이지에 들어가면, 자료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 자료 중 들어가 보면, 원문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예로. <이대형(李大衡)에게 보낸 답장 편지>라는 자료에서, 원문 보기를 들어가 보면, 원문 제목만 나와 있고, 원문 내용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 아래에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일부는 사라진 옛 한글로 쓰였습니다. 해당 페이지에서는 옛 한글 그대로를 위해 네이버의 '나눔 바른 고딕 옛 한글' 폰트를 사용하였습니다. 나눔 옛 한글 설치하기 >’라는 안내 문구가 작성되어있다. 이 말은, 옛 한글 폰트를 내려받지 않는다면 볼 수 없다는 말과 같은데, 자료를 열람하는 데 있어 너무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을 가진 자료가 <이대형(李大衡)에게 보낸 답장 편지> 하나만이 아니다. 차라리 원문 보기 페이지를 이미지로 대체하는 편이 더 접근성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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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검색 자료의 해석보기 개선점

메인화면 바로 가기 중 하나인 전문검색 페이지에서 자료를 검색하고, ‘해석 보기’를 들어가 보면 원문 보기뿐만이 아니라 해석 보기에도 해석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 오류가 있다. 만약에 해석 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빈 페이지로 둘 것이 아니라 ‘해석 보기를 지원하지 않는 파일입니다.’와 같이 안내하는 문구가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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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콘텐츠 보기 첫 번째 이야기- 취지서 해설 부분 개선점

국채보상운동에서 ‘콘텐츠 보기’에 들어가 보면 첫 번째 이야기부터 다섯 번째 이야기까지 다양한 관련 내용을 스토리텔링 해놓았다. 그중에서, 첫 번째 이야기와 다섯 번째 이야기에 있는 ‘취지서 해설’ 부분에 오류가 있다. 원래는 번호를 나누어 구역별로 부분 해석하려는 의도 같았으나, 원자료의 1번 구역에 해당하는 해설 부분에 전문이 실린 결과가 나타나 있다. 2번 구역부터 6번 구역까지 표시된 부분과, 그것에 대한 해석은 올바르게 되어있는데, 왜 제목 해설 부분에 전문 해설이 실리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만약 전문 해설이 원래 의도였다면, 그냥 구역을 나눌 필요 없이 전문을 싣는 방향으로 수정하거나, 중요 부분만 해설할 의도였다면, 제목 부분에 들어간 전문 해설을 삭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참고 사이트

각주

  1. 디지털 장서각 홈페이지
  2. 왕이 정규적으로 임어(臨御)하는 도성 내의 궁궐들 중에서 으뜸이 되는 궁궐.
  3. 『태조실록』 4년(1395년) 10월 7일
  4. 『선조수정실록』 25년(1592년) 4월 14일
  5. 『고종실록』 2년(1865년) 4월 2일
  6.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1395)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7. 영조실록 59권, 영조 20년(1744) 1월 9일 정해 1번째기사
  8.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 윤5월 21일 계미 2번째기사
  9.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 3월 10일 신사 2번째기사
  1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중록(閑中錄))]
  11.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12.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