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풍납리 토성과 백제시대의 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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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7일 (목) 19:23 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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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풍납리 토성과 백제시대의 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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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廣州風納里土成과 百濟時代의 蛇城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0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4월
시작쪽 145쪽 종료쪽 153쪽 전체쪽 009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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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5-1지금 漢江의 廣壯津(舊名廣津)은 龍山方面의 鷺梁津에 다음가는 南北交通의 要津으로, 역시 近年에 宏大한 人道橋의 架設을 보게 되였지만, 옛날 특히 廣州를 中心으로 하든 百濟時代에 있어서의 이곳의 任務와 意義는 더욱 重大하여 決코 漢江의 다른 渡津의 比가 아니었다. 廣壯津背 後에 不等邊方形의 輪郭을 나타내고 있는 廣壯山城―즉 峨嵯山城은 일즉이 이 要津을 江北에서 扼守하든 城鎭으로, 원문주1▶그것이 百濟時代(乃至 新羅所有時代)의 有名한 阿旦城地임에 틀림없음은 茶山 丁若鏞先生이 임이 이를 說破[1]한 以來 今日 學者의 共認하는 바이다. (輿地勝覽 漢城府 古跡條에 󰡔長漢城在漢江上, 新羅時, 置重鎭 後爲高句麗所據 羅人擧兵復之 作長漢城歌 以紀其功󰡕이라 한 長漢城도 이 山城의 指稱인 것을 역시 丁茶山先生이 이를 말하였다.) 但, 󰡔阿旦󰡕은 書에 따라 원문주2▶阿且[2]로 된 곳도 많고, 또 그로 因하야 後世에 󰡔峨嵯󰡕란 山名을 얻게까지 되었지만 元名은 阿旦이 옳다고 생각한다. 丁先生은 이에 對하여는 一言의 辨證이 없는 것을 보면 역시 阿且를 阿旦의 誤로 보지 못한 모양이다. 어떻든 阿旦은 廣津北岸에 있는 三國時代의 重鎭으로, 특히 百濟所有 時代에는 國都 漢城(廣州古邑, 春宮里)을 防衛함에 江北 第一의 要塞로 되여있던 것은 의심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廣壯山城(阿旦城)의 마즌 쪽, 즉 廣津南
廣州風納里及其附近圖

▶P146-1岸, 人道橋 下側가까이에 風納里란 작은 部落이 있거니와 이 部落周圍에 一大土城의 遺址가 있어, 近來 學者들은 이를 風納里土城이라고 이름하게 되였다. (現今 行政區域으로는) 風納里는 廣州郡 九川面에 屬하야, 西는 漢江에 直面하고 北은 京忠間大路를 隔하야 店村의 沙場에 連接하고 東은 現名 曲橋里 城內里에 이웃하고 南은 조그만 내를 隔하야 中垈面의 夢村 及松坡里에 길이 通하여 있으며, 또 西北으로는 江을 隔하야 阿旦城址를 눈앞에 바라보고, 東으로는 東部面 春宮里의 二聖山城, 東南으로는 멀리 南漢山城을 바라보고 있다. 이 風納里의 土城은 그 規模가 比較的 雄大하야 周圍一里 弱(舊朝鮮里程七八里), 南北約十二三町, 東西約 六七町, 高二三十尺의 楕圓形에 가까운 土城으로서, 東側城壁에는 數處의 城門址가 뚜렷이 남아 있거니와, 西北隅와 西側城壁의 大部分은 漢江의 水魔로 因하야 거의 자최를 잃고 있다. 지나간 乙丑年(大正十四年) 여름 大洪水에는 激流가 土城의 北部一帶를 斜斷하야 그 곳에 있던 人家까지 全部 휩쓸어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土城의 東北隅와 東쪽 部分은 比較的 完全한 자최를 남기어 있고 西南隅와 南쪽 部分도 그 城址를 認할 만큼 뚜렷이 남아있다. 筆者는 이 土城에 就하야 數三次의 實地踏査를 行하였으나 遺物로는 아직 그럴듯한 것을 發見치 못하였고, 오직 城內田畝間에서 百濟時代에 屬한듯한 土器의 破片을 若干 주서온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年前에 總督府博物館에서는 風納里南端 土沙 中에서 出土되였다고 하는 所謂 (支那)六朝式의 鐎斗 二箇와 金環 等을 購入所藏한 것이 있고, 원문주3▶또 鮎貝房之進도 일즉이 이 土城址를 踏査하다가 一老婆에게(城內에서 拾得하였다고 하는) 紫紺色의 瑠璃玉十數箇를 사서 一行과 共分하였다고 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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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6-2그러면 이 土城은 어느 時代 어떤 나라의 遺蹟이라고 볼 수 있을까? 近來 學者는 이를 百濟時代의 土城이라고 함이 普通이니, 筆者도 이에 對하여는 何等의 異議가 없는 바이다. 그러나 이 土城을 대담하게 百濟의 一都城으로 看做하는―심지어 百濟初期의 都城인 慰禮城에 比定하는 一部學者의 說이 있는데, 거기 對하여는 贊同하기 어렵다. 百濟의 一都城이었으리라고 主張하는 派의 意▶P147-1見을 들으면, 첫째 그곳이 百濟의 領內에 屬하고, 둘째 土城의 規模가 훌륭하고, 셋째 遺物로 宗廟祭器用의 鐎斗가 出土되였다는 것이 그 唯一한 論證이며, 또 百濟初期의 慰禮城에 比定하는 派의 說을 들으면, 右의 理由外에 文獻上으로 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祖傳說 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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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7-2

十臣諫曰 惟此漢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中略) 溫祚都河南慰禮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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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7-3云云의 一節을 들어, 特히 其中의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의 句가 이 風納里의 地理와 相應하다고 함에 있다. 우에 말한 鮎貝房之進氏는 역시 風納里慰禮城說을 主張하는 一人으로, 右句를 解釋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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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7-4

원문주4▶東高岳に據るは 晝長山(卽ち南漢山) 山脈を指したので, 南沃澤を望むは屯骨堤の沃田を指したので, 其地形も風納里として正に 恰當して居るからであります. 若しも漢山(廣州古邑)の方と見んか, 南高岳に據り北沃澤を望むとあるべきであります[4]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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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疆域考卷三, 漢城考.
  2. 같은 三國史記에도 百濟紀 責稽王元年條 및 蓋鹵王二十一年條에는 阿且로 되어 있으나, 地理志四, 三國有名未詳地中, 及列傳 溫達傳에는 分明히 阿旦으로 보여 있다. 이러한 例는 󰡔乙阿旦󰡕(永春)에서도 볼 수 있으니, 三國史記 地理志二 奈城郡條, 及同志四(高句麗州郡縣一百六十四中)와 世宗實錄 地理志 永春縣條에는 乙阿且로 되어 있음에 對하야 輿地勝覽(卷十四) 永春縣條에는 또한 分明히 乙阿旦으로 되어 있다. 何如間 旦과 且의 字形上類似로 因하야 寫本 板本에는 訛傳을 生하기 쉬운 것인즉 以上 諸書의 異同으로는 何者가 옳고 그른 것을 判斷하기 어렵지만, 有名한 高句麗 好太王(廣開土王) 陵碑의 百濟征服地名中에 보이는 󰡔阿旦城󰡕에 依하야 決定的 斷案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陵碑는 當時 史料의 絶對的 價値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旦은 頓, 呑과 한 가지 高句麗地名 끝에 흔히 붙는 字로 谷(タニ)을 意味한 말 같고(例하면 水谷城을 一云買旦忽, 十谷城을 一云德頓忽, 𢈴谷縣을 一云首乙呑, 於支呑을 一云翼谷이라고 함과 같은 것), 阿는 阿利水(漢江)의 略稱인 듯하니, 그렇다고 하면 阿旦은 즉 阿利水의 洞谷이란 말로 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야 南漢江의 上流인 永春을 乙阿旦이라 한 것도 이 本阿旦에 對한 對稱으로 乙은 上을 意味하는 󰡔우󰡕 󰡔웃󰡕의 音譯이 아닌가 한다.
  3. 雜誌 󰡔朝鮮󰡕 第二百三十四號(昭和九年十一月號) 所載 󰡔百濟古都案內記󰡕.
  4. 同 上.






현대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