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저전파고 -공로자 조엄‧이광려‧강계현‧강필리‧김장순‧선종한‧서유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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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1일 (일) 23:51 판 (본문3: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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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저전파고 -공로자 조엄‧이광려‧강계현‧강필리‧김장순‧선종한‧서유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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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甘藷傳播考 -功勞者 趙曮‧李匡呂‧姜啓賢‧姜必履‧金長淳‧宣宗漢‧徐有榘 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손진태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03월
시작쪽 086쪽 종료쪽 109쪽 전체쪽 02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현금 우리의 생활에 있어 감저(甘藷)(고구마)가 필수 식량의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이것이 조선에 누구의 손으로 수입되었으며 또 어떠한 경과로 전파되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아는 이가 적은 모양이다. 소화 3년 9월호 「조선학술지」지 상에 송전신인물(松田申)씨가 조선감저전래에 대한 소개를 하여 영종39년(2423 1763)에 통신사 조엄인물(趙曮)이 대마도로부터 부산진으로 저종(藷種)을 보낸 것이 그 최초라고 지적하고 그 후 서유구인물(徐有榘)가 「종저보서적(種藷譜)」를 지어 세상에 전한 것이(순조34 1834) 조엄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두 정당한 말이다. 그러나 씨는 참고문헌이 적었던 탓인지 감저전파에 대한 상세한 고증을 하지 않고 오직 조서양씨만을 거론함에 그치었다. 나는 근자에 김장순인물(金長淳)·선종한인물(宣宗漢) 공저한 「감저신보서적(甘藷新譜)」(사본 아마 희구서일 듯)란 것을 얻고 또 「이참봉집서적(李參奉集)」에서 이광려인물(李匡呂)·강계현인물(姜啟賢)의 공적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이 조선감저의 조종(祖宗)이라고 전하던 강씨란 사람이 강필리인물(姜必履)이었다는 것이며 이 강필리(또는 그 형제 강필교인물(姜必敎))가 소위 「강씨감저보서적(姜氏甘藷譜)」의 저자인 것까지 고증할 수 있게 되어 비록 충분치는 못하나마 조선감저의 역사를 대체로 알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세상에 발표하여 대방의 질정을 받음과 아울러 공로선인(功勞先人)의 덕을 찬앙하고자 이 글을 초(抄)하게 된 것이다.
쪽수▶P86-1現今 우리의 生活에 있어 甘藷(고구마)가 必需食糧의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周知의 事實이나 이것이 朝鮮에 누구의 손으로 輸入되였으며 또 어떠한 經過로 傳播되였는가 하는 點에 關해서는 아는 이가 적은 모양이다. 昭和三年九月號 「朝鮮」誌上에 松田申氏가 朝鮮甘藷傳來에 對한 紹介를 하야 英宗三十九年(二四二三一七六三)에 通信使 趙曮이 對馬島로부터 釜山鎭으로 藷種을 보낸 것이 그 最初라고 指摘하고 其後 徐有榘가 「種藷譜」를 지어 世上에 傳한 것이(純祖三四一八三四) 趙曮의 遺志를 繼承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도 正當한 말이다. 그러나 氏는 參考文獻이 적었든 탓인지 甘藷傳播에 對한 詳細한 考證을▶P87-1하지 않고 오즉 趙徐兩氏만을 擧論함에 그치었다. 나는 近者에 金長淳·宣宗漢 共著한 「甘藷新譜」(寫本 아마 稀覯書일 듯)란 것을 얻고 또 「李參奉集」에서 李匡呂·姜啟賢의 功績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이 朝鮮甘藷의 祖宗이라고 傳하든 姜氏란 사람이 姜必履이었다는 것이며 이 姜必履(又는 其弟姜必敎)가 所謂 「姜氏甘藷譜」의 著者인 것까지 考證할 수 있게 되어 비록 充分치는 못하나마 朝鮮甘藷의 歷史를 大體로 알게 되였으므로 이것을 世上에 發表하야 大方의 叱正을 받음과 아울너 功勞先人의 德을 讚仰하고저 이 글을 抄하게 된 것이다.
감저의 최초 구래자가 조엄이었던 것은 송전씨도 이미 지적하였고 또 차항에서 나도 상술코자 하는 바이지마는 조선서는 재래로 조씨를 말하지 않고 강필리 또는 이광려에게 그 공을 돌리었던 모양으로 김장순은 그 저서인 「감저신보」(순조13년 계유성, 1813년) 중에서 “落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云云”이라 하여 강씨(강필리를 가르쳐 이름인 것은 후에 상술코자 한다)를 최초의 저종 득래자라 하고 이어서 강씨의 이 공적을 고려말엽 원으로부터 면종(棉種)을 득래한 강성군 문익점인물(文益漸)에 대하여
쪽수▶P87-2甘藷의 最初 購來者가 趙曮이었든 것은 松田氏도 이미 指摘하였고 또 次項에서 나도 詳述코저 하는 바이지마는 朝鮮서는 在來로 趙氏를 말하지 않고 姜必履 又는 李匡呂에게 그 功을 돌니었든 모양으로 金長淳은 그 著書인 「甘藷新譜」(純祖十三年癸酉成, 一八一三年) 中에서 「落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云云」이라 하야 姜氏(姜必履를 가르처 이름인 것은 後에 詳述코저 한다)를 最初의 藷種得來者라 하고 이어서 姜氏의 이 功績을 高麗末葉 元으로부터 棉種을 得來한 江城君 文益漸에 對하야

江城君文益漸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久 衣被一國 而姜氏得藷種而來者 將踰半百年 而尙無涓埃之益 云々
盖江城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識種法與土宜 故高低原隰 分以種之 得盡其妙 然後敎之一國之民 故人皆信之 不令而從 此即江城之志 可謂篤矣 其智亦可謂周矣 姜氏則不然 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傅布 而其方 則日人之所秘而瞞告者也 是故 種之一歳 而不驗 則人皆不信 然則 姜氏之志 可追於江城 而其智 則果不及矣 云々

쪽수▶P87-3

江城君文益漸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久 衣被一國 而姜氏得藷種而來者 將踰半百年 而尙無涓埃之益 云々
盖江城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識種法與土宜 故高低原隰 分以種之 得盡其妙 然後敎之一國之民 故人皆信之 不令而從 此即江城之志 可謂篤矣 其智亦可謂周矣 姜氏則不然 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傅布 而其方 則日人之所秘▶P88-1而瞞告者也 是故 種之一歳 而不驗 則人皆不信 然則 姜氏之志 可追於江城 而其智 則果不及矣 云々

이라 하여 그 지(志)는 비등하나 그 지(智)는 강성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쪽수▶P88-2이라하야 其志는 比等하나 其智는 江城君에 미치지 몯한다고 하였다.
김장순 뿐 아니라 이광려도 그 저 「이참봉집」 중에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며 서유구(徐有榘)도 그 「종저보(種藷譜)」 중에 동일한 말을 하였다(후술 이광려조 및 강필리조 참조). 현대문주1▶그런데 이규경인물(李圭景)은 이에 관하여 그 저 「오주연문장전산고서적(五洲衍文長箋散稿)」 권3 북저변증설 중에서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使姜啓賢往東萊府因 信使携種得之〿負至)傳種”[a 1]이라 하여 이광려를 그 최초의 사람이라 하고 조엄을 들지 아니하였다.
쪽수▶P88-3金長淳뿐 아니라 李匡呂도 그 著 「李參奉集」 中에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며 徐有榘도 그 「種藷譜」 中에 同一한 말을 하였다(後述李匡呂條 及 姜必履條參照). 원문주1▶그런데 李圭景은 이에 閥하야 그 著 「五洲衍文長箋散稿」卷三 北藷辨證說 中에서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使姜啓賢往東萊府因 信使携種得之〿負至)傳種」[1]이라 하야 李匡呂를 그 最初의 人이라 하고 趙曮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우리 선인들이 왜 조엄의 공을 말하지 않고 저조(藷祖)로 특히 강필리나 이참봉을 추앙하였던가. 우견으로서는 조씨는 통신사로서 상토(桑土)로 갔을 때 대마도의 고구마에 착안하여 그 종자를 부산진 및 동래부에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중앙에 재래배식하여 그 종재방(種栽方)을 연구한 후 그것을 전토(全土)에 전포하여 보겠다는 열성까지는 없었고 중앙 지방은 기후가 틀리니 대마도와 기후 유사한 제주도 및 기타도서에 송치권재(送致勸栽)하여 보겠다는 것이 그 목적의 대부분이었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하여 강필리와 이광려는 그들 자신이 그 종재방을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혹은 저종을 경성에 송치하여 그 광포(廣布)를 꾀하였으며 또 혹은 저서를 내어 그것을 세상에 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성의 이유로 그들이 최고의 명예를 전득한 것이 아닐까한다.
쪽수▶P88-4그러면 우리 先人들이 왜 趙曮의 功을 말하지 않고 藷祖로 特히 姜必履나 李參奉을 推仰하였든가. 愚見으로서는 趙氏는 通信使로서 桑土로 갔을 때 對馬島의 고구마에 着眼하야 그 種子를 釜山鎭 及 東萊府에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中央에 齋來培殖하야 그 種栽方을 硏究한 後 그것을 全土에 傳布하여 보겠다는 熱誠까지는 없었고 中央地方은 氣候가 틀리니 對馬島와 氣候 類似한 濟州島 及 其他島嶼에 送致勸栽하여 보겠다는 것이 그 目的의 大部分이였었든 모양이다. 이에 對하야 姜必履와 李匡呂는 그들 自身이 그 種栽方을 硏究하였을뿐 아니라 或은 藷種을 京城에 送致하야 그 廣布를 꾀하였으며 또 或은 著書를 내어 그것을 世上에 傳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精誠의 理由로 그들이 最高의 名譽를 傳得한 것이 아닐가한다.


































본문2: 조엄


조엄(趙曮) 호 영호(永湖) 관지리조판서 익문익공(謚文翼公). 한양부 풍양현인. 숙종45년생. 기고상경(其考尙絅) 호 학당(鶴塘) 관행리조판서. 현대문주2▶그가 예조태의(禮曹泰議)로서 궤일통신정사(潰日通信正使)를 배명(拜命)한 것은 영종39년(서기1763) 그가 45세 때이었다.[a 2] 그는 8월 초삼일 경성을 출발하여 10월 6일에 대마도의 좌수내포에 도착, 10일까지 거기서 유(留)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저종을 부산진에 구송한 것은 실로 그가 좌수내포에 유한 5일간의 일이었다. 현대문주3▶그러고 그가 제이차로 저종을 좌수내포로부터 재래한 것은 익영종40년 6월 18일 그가 회정하였을 때의 일이었다.[a 3] 그는 그의 「해사일기」 중에 저종 등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선고서간행회본 해행총재사소수 327혈)
쪽수▶P89-1趙曮 號永湖 官至吏曹判書 謚文翼公. 漢陽府豊壤縣人. 肅宗四十五年生. 其考尙絅 號鶴塘 官行吏 曹判書. 원문주2▶그가 禮曹泰議로서 潰日通信正使를 拜命한 것은 英宗三十九年(西紀一七六三) 그가 四十五歲 때이었다.[2] 그는 八月初三日 京城을 出發하야 十月六日에 對馬島의 佐須奈浦에 到着, 同十日까지 거기서 留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藷種을 釜山鎭에 求送한 것은 實로 그가 佐須奈浦에 留한 五日間의 일이었다. 원문주3▶그러고 그가 第二次로 藷種을 佐須奈浦로부터 載來한 것은 翌英宗四十年 六月十八日 그가 回程하였을 때의 일이었다.[3] 그는 그의 「海槎日記」 中에 藷種騰來에 對하야 다음과 같이 記錄하였다. (朝鮮古書刊行會本 海行摠載四所收 三二七頁)

[英宗四十年甲申 六月十八日] 島中有草根可食者 名曰甘藷 或謂孝子麻 日音古貴爲麻 其形或如山藥 或如菁根 如瓜如芋 不一其狀 其葉如山葉之葉 而稍大而厚 微有赤色 其蔓亦大於山藥之蔓 其味比山藥而稍堅 實有眞氣 或似牛煨之栗味 生可食也 炙可食也 烹亦可食也 和穀而作糜粥可也 拌清而爲正果可也 或作餅或和飯 而無不可 可謂救荒 之好材料也 此物聞自南京流入日本 日本陸地諸島間 多有之 而馬島尤盛云 其種法 春和後 種之於向陽之處 待其草 蔓之出土稍長 取其蔓間一二節 貼地掩土 則隨其所掩處 輒皆泡卵 卵之大小 必隨土品之當否矣 葉脫秋高之後 採取其棖 坑坎稍深 鋪藷一匝 實土數寸 復鋪甘藷 又實堅土 如是者五六層 後多積藁草 厚葉盖土 俾避風雨 得免腐傷 待春川種如法云矣 昨年初到佐須奈浦(△△△△△△△△) 見甘藷(△△△) 求得數斗(△△△△) 出送釜山鎭(△△△△△) 便之取種(△△△△) 今於回路(△△△△) 又此求得(△△△△) 將授於萊州校吏輩(△△△△△△△△) 行中諸人(△△△△) 亦有得去者(△△△△△) 此物果能皆生 廣布於我國 與文棉之爲 則豈不大助於吏民耶 萊州所種(△△△△) 若能能延(△△△△) 移我於濟州(△△△△△) 及他息(△△△) 似爲宜矣(△△△△) 聞濟州土俗(△△△△△) 或似馬島者多(△△△△△△) 甘藷如果蔓盛 則濟民之逐歲仰哺 羅合之泛舟郜榖 庶可除矣 但地官未詳(△△△△△) 土産皆異(△△△△) 番〿之如意(△△△△△) 亦何可必也(△△△△△)

쪽수▶P89-2

[英宗四十年甲申 六月十八日] 島中有草根可食者 名曰甘藷 或謂孝子麻 日音古貴爲麻 其形或如山藥 或如菁根 如瓜如芋 不一其狀 其葉如山葉之葉 而稍大而厚 微有赤色 其蔓亦大於山藥之蔓 其味比山藥而稍堅 實有眞氣 或似牛煨之栗味 生可食也 炙可食也 烹亦可食也 和穀而作糜粥可也 拌清而爲正果可也 或作餅或和飯 而無不可 可謂救荒 之好材料也 此物聞自南京流入日本 日本陸地諸島間 多有之 而馬島尤盛云 其種法 春和後 種之於向陽之處 待其草 蔓之出土稍長 取其蔓間一二節 貼地掩土 則隨其所掩處 輒皆泡卵 卵之大小 必隨土品之當否矣 葉脫秋高之後 採取其棖 坑坎稍深 鋪藷一匝 實土數寸 復鋪甘藷 又實堅土 如是者五六層 後多積藁草 厚葉盖土 俾避風雨 得免腐傷 待▶P90-1春川種如法云矣 昨年初到佐須奈浦(△△△△△△△△) 見甘藷(△△△) 求得數斗(△△△△) 出送釜山鎭(△△△△△) 便之取種(△△△△) 今於回路(△△△△) 又此求得(△△△△) 將授於萊州校吏輩(△△△△△△△△) 行中諸人(△△△△) 亦有得去者(△△△△△) 此物果能皆生 廣布於我國 與文棉之爲 則豈不大助於吏民耶 萊州所種(△△△△) 若能能延(△△△△) 移我於濟州(△△△△△) 及他息(△△△) 似爲宜矣(△△△△) 聞濟州土俗(△△△△△) 或似馬島者多(△△△△△△) 甘藷如果蔓盛 則濟民之逐歲仰哺 羅合之泛舟郜榖 庶可除矣 但地官未詳(△△△△△) 土産皆異(△△△△) 番〿之如意(△△△△△) 亦何可必也(△△△△△)

이것을 요언하면, 그는 영종39년 계미 10월 6일에 대마도의 좌수내포에 상륙, 풍랑으로 인하여 10일까지 동포에 머무는 동안에 동도 토산 감저(甘藷)가 가히 구황의 자(資)가 될 것을 짐작하고 종자 수두를 얻어 부산진으로 보내면서 그 종자를 취하도록 전탁하였다. 생각건대 동시에 보장재식(保藏栽植)의 방법까지 전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익년 6월 18일 신사(信使)의 임(任)을 마치고 동로 좌수내포에 재도하였을 때에 다시 그 약간을 구하여 자신이 그것을 수래(輸來)하였는데 일행 중에서도 여러 사람이 역시 저종을 득래하였으며, 이번 것은 동래부 교리배(校吏輩)에게 전하여 그 종자를 받아, 대마도와 기후물산이 유사한 제주도에 먼저 이식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피아 지의(地宜)가 다르므로 만일 이것을 경성으로 재래하였다가 실패하면 다시 그 종자를 얻기가 곤란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에 재배한 것이 성공하면 종자 염려는 없어지므로 그때는 이것을 전도에 시험하여 보리라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전도에서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은 문익점의 목면과 같이 동민의 생활에 큰 복리를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행 중에서 감저 뿐 아니라 그 풍속 습관이며 문물제도며 역사 지리기타에 유의하였을 뿐 아니라 농지 제방 수거 등에까지 세심의 주의를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도 그가 결코 평범한 일개의 사신만이 아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쪽수▶P90-2이것을 要言하면, 그는 英宗三十九年癸未十月六日에 對馬島의 佐須奈浦에 上陸, 風浪으로 因하야 同十日까지 同浦에 留하는 동안에 同島土産 甘藷가 可히 救荒의 資가 될 것을 짐작하고 種子數斗를 얻어 釜山鎭으로 보내면서 그 種子를 取하도록 傳託하였다. 생각건대 同時에 保藏栽植의 方法까지 傳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翌年 六月十八日 信使의 任을 맟이고 同路 佐須奈浦에 再到하였을 때에 다시 그 若干을 求하야 自身이 그것을 輸來하였는대 一行 中에서도 여러 사람이 亦是 藷種을 得來하였으며, 이번 것은 東萊府校吏輩에게 傳하야 그 種子를 받아, 對馬島와 氣候物產이 類似한 濟州島에 먼저 移植하는 것이 最善의 方法이라 생각하였다. 彼我 地宜가 다르므로 萬一 이것을 京城으로 載來하였다가 失敗하면 다시 그 種子를 얻기가 困難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야 濟州島에 栽培한 것이 成功하면 種子念慮는 없어지므로 그때는 이것을 全道에 試驗하여 보리라는 생각이었든 모양이다. 이렇게 全道에서 成功하게 된다면 그것은 文益漸의 木棉과 같이 東民의 生活에 큰 福利를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使行 中에서 甘藷뿐 아니라 그 風俗 習慣이며 文物 制度며 歷史 地理其他에 留意하였을 뿐▶P91-1아니라 農地 堤防 水車等에까지 細心의 注意를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도 그가 決코 平凡한 一個의 使臣만이 아니었든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것은 別問題로 하고,
그러면 부산진과 동래로 보낸 그 저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조엄의 손(孫)인 조인영(趙寅永)의 「운석유고」 권15초에 실린 그의 행장 중에서 보면
쪽수▶P91-2그러면 釜山鎭과 東萊로 보낸 그 藷種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趙曮의 孫인 趙寅永의 「雲石遺稿」 卷十五初에 실닌 그의 行狀 中에서 보면

島產有甘藷 宜於救荒 府君取其種而歸 送濟州種之日 濟之土產 似()島 此物或其宜也 異日濟民 必有所賴 種種果漸繁 或稱趙藷(△△)云(十二張裏)

쪽수▶P91-3

島產有甘藷 宜於救荒 府君取其種而歸 送濟州種之日 濟之土產 似()島 此物或其宜也 異日濟民 必有所賴 種種果漸繁 或稱趙藷(△△)云(十二張裏)

이라 하였다. 이로서보면 초지(初志)와 여히 그 종자의 대부분을 제주로 보낸 것은 명백하며 제주인은 그것을 조저(趙藷)라고까지 하여 그 덕을 기념하였던 모양이다. 그가 제주의 일부분을 경성으로 재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신사일행 중에 저종을 경성까지 갖고 온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이광려의 「이참봉집」 권2 증강생계현조 중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으로서 추측할 것이다.
쪽수▶P91-4이라하였다. 이로서보면 初志와 如히 그 種子의 大部分을 濟州로 보낸 것은 明白하며 濟州人은 그것을 趙藷라고까지 하야 그 德을 記念하였든 모양이다. 그가 濟州의 一部分을 京城으로 齎來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信使一行 中에 藷種을 京城까지 갖고 온 사람은 없었든 모양이다. 그것은 李匡呂의 「李參奉集」 卷二 贈姜生啓賢條 中에 보이는 다음의 記錄으로서 推測할 것이다.

云々 然萊釜地內 竟不見藷 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僅持二本(△△△△△△△) 其一聞往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行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云々(七張裏)

쪽수▶P91-5

云々 然萊釜地內 竟不見藷 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僅持二本(△△△△△△△) 其一聞往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行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云々(七張裏)

이것은 다음의 강계현조에서 다시 상술하려니와 요컨대 사행이 밀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그 일행 중에 저종 근 2본밖에 없었던 모양이며 그 일은 이미 타처로 가고 남은 일본을 강계현이 득래하여 경성에서 고대하는 이참봉에게 바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엄이 초지와 여히 제이차 재래한 저종은 제주로 즉시 보내지 않고 동래부 교리배에 위탁하여 거기서 취종 후 익년에 제주로 보내도록 한 것 같이 생각되는 점은 다음 조에 상술코자하며 그 이유는 아마 계절 관계인 듯하다.)
쪽수▶P91-6이것은 다음의 姜啓賢條에서 다시 詳述하려니와 要컨대 使行이 密陽에 到着하였을 때에는 그 一行 中에 藷種 僅二本밖에 없었든 모양이며 其一은 이미 他處로 가고 餘一本을 姜啓賢이 得來하야 京城에서 苦待하는 李參奉에게 밭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趙曮이 初志와 如히 第二次 齋來한 藷種은▶P92-1濟州로 即時 보내지 않고 東萊府校吏輩에 委託하야 거기서 取種後 翌年에 濟州로 보내도록 한 것 같이 생각되는 點은 다음 條에 詳述코저하며 그 理由는 아마 季節關係인 듯하다.)




































본문3: 이광려‧강계현


조엄은 저종의 전도적 전파를 희망은 하였으나 자신이 그것을 조선의 토지에 적합하도록 실제로 연구하여 보겠다는 성의까지는 없었다. 혹은 그러한 시간의 여유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는 부산진 첨사며 동래부 교리배에 그 일을 촉탁하였음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강계현 이참봉(광려) 2인은 이것을 전국적으로 분포시킬 것을 꾀하고 한 막대한 고심과 노력으로 몸소 실제의 재배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 사실은 「이참봉집」에서 능히 알 수가 있다. 「이참봉집」 권2 증강생계현조에서 이광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쪽수▶P92-2趙曮은 藷種의 全道的傳播를 希望은 하였으나 自身이 그것을 朝鮮의 土地에 適合하도록 實際로 硏究하여 보겠다는 誠意까지는 없었다. 或은 그러한 時間의 餘裕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何如튼 그는 釜山鎭僉使며 東萊府校吏輩에 그 일을 囑託하였음에 不過하였다. 그런데 姜啓賢 李參奉(匡呂) 二人은 이것을 全國的으로 分布시킬 것을 꾀하고 한 莫大한 苦心과 勞力으로 몸소 實際의 栽培方法을 研究하였다. 이 事實은 「李參奉集」에서 能히 알 수가 있다. 「李參奉集」卷二 贈姜生啓賢條에서 李匡呂는 다음과 같이 記錄하였다.

萬曆番茹始入閩 如今天下少饑人 寸根千里窮南海 五十姜翁只一身
甞聞中國近有一奇物 名爲甘藷 此物種來百餘年 自閩浙 漸及內地 將不復以水旱豐凶爲憂 儘異實也 考之農政全書 書中所說甘藷典故 及種植留種之方 累千萬言 念如得此物 爲東國之植 其利益 有不可勝言 顧恨無由致之 甞試語之譯流(△△△△△△) 一再使行(△△△△) 並無所見聞而歸(△△△△△△△) 最後所傳 如有近似者 徐相一之適爲戶判 爲囑使行 必得之 歸至中路 啓視之 皆槁矣 念此物求之於北 既不易致之 日中必有之久矣 凡中國物貨及書籍 日中必先得之 况此本是南產耶 旣而聞日中所有者 其根植枝蔓形色味性 十分是藷也 適有故人子(△△△△△) 隨信使往日本者(△△△△△△△) 余爲勤托之(△△△△△) 其明年春 余夜坐 姜生在側 余言恐信 使之歸 未必能得藷 如不果得之 又將虛過此年 吾意萊釜間 必己有傳種在民間者 但其未知爲藷耳 徍彼窮搜 或可得之 恨無人能往耳 姜生慨然曰 吾請徍 即使有之 豈不得來 余問君將何以往 生日(△△) 徒步去(△△△) 去何憂不到(△△△△△) 到何憂不得(△△△△△) 但 未知有無耳 時有所親爲密陽宰 又有爲作害萊府者 生乃辭去 手未持行資(△△△△△) 尙著絮南去(△△△△△) 日氣漸熱(△△△△) 不知歸期(△△△△) 事近〿空(△△△△) 種種喫苦(△△△△) 可知也(△△△) 而行意翩然(△△△△△) 了無難色(△△△△) 余心奇之 且無論其得藷種與否也 四月某日發去(△△△△△△) 一去更無信息 直至七月欲晦(△△△△) 余病作 委頓在室 怱聞窓外足音 問爲誰 應之日 遠客耳 姜生聲也 不覺身至窓處 推窓視外 生從一人以入 背木櫃 置在廳 見櫃中植物 出蔓尺許 冶葉搖搖也 喜不可言 生具言往還事 前後往來萊釜所經歷 極勞苦 全荷密陽之饋待 然萊釜地內(△△△△) 竟不見(△△△)此藷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 僅持二本(△△△△) 其一聞徍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 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從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余裁書 更謝密陽 即治庭前地種之(△△△△△△△) 至八九月 蔓葉甚盛 幾遍數間 旣而聞萊伯新出(△△△△) 而隣人之所親也 使作書 盛言藷事 萊伯果力圖之(△△△△△△) 明年藷種多至京(△△△△△△△) 又多留植其地(△△△△△△) 而吾庭中所植 不善收藏 皆不可作種 求得數本於萊伯家 分種之 藷種之轉於國中始此(△△△△△△△△△) 即乙酉歲也(△△△△△) 前後種者 多得卵頗戤 而失在留種(△△△△△) 又終患種法不明(△△△△△△△) 皆一再種而止(△△△△△△) 惟南中(△△△) 至今多種者(△△△△△) 然皆用爲食啖之美物而已(△△△△△△△△△△△) 莫能以代食救荒 李吉甫深明種植 余謂吉甫 君何不盛植此物 使民間視效也 吉甫日 吾國人 習喫大椀飯 豈肯以藷代食 此物雖美 吾國終不能爲用 如中國也 其時以此言 爲未必然 今思之 吉甫之言 乃眞得物情耶 然凡物用捨盛衰 皆有時 如果蓏煙草木綿之屬 其始 亦非中土之產 而中國今皆爲日用 至於流傳東國 又不知今爲幾百年 今人皆認爲土產固有者 莫想其本初來自異國 至於藷 豈獨不然 况藷之甚美 又非諸物所可倫擬耶 然又念藷之不能盛行 抑由其甚美 故國人之貧者 不得與霑 而濟其急也 姜生之歸也 余爲作詩識之 生不畜妻子(△△△△△) 身外無一物(△△△△△) 寄食人家(△△△△) 其心思手藝(△△△△△) 無所不能(△△△△) 偶爲人造器物種葉茹(△△△△△△△△△) 皆盡其妙(△△△△) 而終不屑爲治生事(△△△△△△△△) 其赤日徒步 行數千里 必得藷種 本非其爲身口也 故余詩云云 若使此物 遍行於國中 其爲益於民生 救荒濟飢 何可勝言 至於窮士 不能農商 又無田土者 正足資之爲食 又如京城内外 單戶孤寡 家有隙地 種無幾而足一年 乃其針指織紝□□之所出 自當用爲蔽體禦寒 又可推爲昏喪祭祀疾病之用 豈不甚優益哉 豊凶貧富貴賤 所在得其益利 國計民憂 宜莫急於此 烏可少也 (六張至九張)

쪽수▶P92-3

萬曆番茹始入閩 如今天下少饑人 寸根千里窮南海 五十姜翁只一身
甞聞中國近有一奇物 名爲甘藷 此物種來百餘年 自閩浙 漸及內地 將不復以水旱豐凶爲憂 儘異實也 考之農政全書 書中所說甘藷典故 及種植留種之方 累千萬言 念如得此物 爲東國之植 其利益 有不可勝言 顧恨無由致之 甞試語之譯流(△△△△△△) 一再使行(△△△△) 並無所見聞而歸(△△△△△△△) 最後所傳 如有近似者 徐相一之適爲戶判 爲囑使行 必得之 歸至中路 啓視之 皆槁矣 念此物求之於北 既不易致之 日中必有之久矣 凡中國物貨及書籍 日中必先得之 况此本是南產耶 旣而聞日中所有▶P93-1者 其根植枝蔓形色味性 十分是藷也 適有故人子(△△△△△) 隨信使往日本者(△△△△△△△) 余爲勤托之(△△△△△) 其明年春 余夜坐 姜生在側 余言恐信 使之歸 未必能得藷 如不果得之 又將虛過此年 吾意萊釜間 必己有傳種在民間者 但其未知爲藷耳 徍彼窮搜 或可得之 恨無人能往耳 姜生慨然曰 吾請徍 即使有之 豈不得來 余問君將何以往 生日(△△) 徒步去(△△△) 去何憂不到(△△△△△) 到何憂不得(△△△△△) 但 未知有無耳 時有所親爲密陽宰 又有爲作害萊府者 生乃辭去 手未持行資(△△△△△) 尙著絮南去(△△△△△) 日氣漸熱(△△△△) 不知歸期(△△△△) 事近〿空(△△△△) 種種喫苦(△△△△) 可知也(△△△) 而行意翩然(△△△△△) 了無難色(△△△△) 余心奇之 且無論其得藷種與否也 四月某日發去(△△△△△△) 一去更無信息 直至七月欲晦(△△△△) 余病作 委頓在室 怱聞窓外足音 問爲誰 應之日 遠客耳 姜生聲也 不覺身至窓處 推窓視外 生從一人以入 背木櫃 置在廳 見櫃中植物 出蔓尺許 冶葉搖搖也 喜不可言 生具言往還事 前後往來萊釜所經歷 極勞苦 全荷密陽之饋待 然萊釜地內(△△△△) 竟不見(△△△)此藷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 僅持二本(△△△△) 其一聞徍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 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從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余裁書 更謝密陽 即治庭前地種之(△△△△△△△) 至八九月 蔓葉甚盛 幾遍數間 旣而聞萊伯新出(△△△△) 而隣人之所親也 使作書 盛言藷事 萊伯果力圖之(△△△△△△) 明年藷種多至京(△△△△△△△) 又多留植其地(△△△△△△) 而吾庭中所植 不善收藏 皆不可作種 求得數本於萊伯家 分種之 藷種之轉於國中始此(△△△△△△△△△) 即乙酉歲也(△△△△△) 前後種者 多得卵頗戤 而失在留種(△△△△△) 又終患種法不明(△△△△△△△) 皆一再種而止(△△△△△△) 惟南中(△△△) 至今多種者(△△△△△) 然皆用爲食啖之美物而已(△△△△△△△△△△△) 莫能以代食救荒 李吉甫深明種植 余謂吉甫 君何不盛植此物 使民間視效也 吉甫日 吾國人 習喫大椀飯 豈肯以藷代食 此物雖美 吾國終不能爲用 如中國也 其時以此言 爲未必然 今思之 吉甫之言 乃眞得物情耶 然凡物用捨盛衰 皆有時 如果蓏煙草木綿之屬 其始 亦非中土之產 而中國今皆爲日用 至於流傳東國 又不知今爲幾百年 今人皆認爲土產固有者 莫想其本初來自異國 至▶P94-1於藷 豈獨不然 况藷之甚美 又非諸物所可倫擬耶 然又念藷之不能盛行 抑由其甚美 故國人之貧者 不得與霑 而濟其急也 姜生之歸也 余爲作詩識之 生不畜妻子(△△△△△) 身外無一物(△△△△△) 寄食人家(△△△△) 其心思手藝(△△△△△) 無所不能(△△△△) 偶爲人造器物種葉茹(△△△△△△△△△) 皆盡其妙(△△△△) 而終不屑爲治生事(△△△△△△△△) 其赤日徒步 行數千里 必得藷種 本非其爲身口也 故余詩云云 若使此物 遍行於國中 其爲益於民生 救荒濟飢 何可勝言 至於窮士 不能農商 又無田土者 正足資之爲食 又如京城内外 單戶孤寡 家有隙地 種無幾而足一年 乃其針指織紝□□之所出 自當用爲蔽體禦寒 又可推爲昏喪祭祀疾病之用 豈不甚優益哉 豊凶貧富貴賤 所在得其益利 國計民憂 宜莫急於此 烏可少也 (六張至九張)

이것을 요언하면 이참봉은 연래로 감저를 조선에 이식하여 보고자하였다. 그것은 아마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는 중국행 사신이며 혹은 그 일행에 저종 구래를 재삼회나 부탁하였으나 번번이 뜻을 얻지 못하고 있던 중 영종39년 계미에 마침 조엄 등이 견일 통신사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 일행 중의 한 사람에게 근근 부탁하여 두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미신(未信)하여 동래 부산 등지에 혹 기래의 저종이 있지 아니할까 하고 한탄하는 것을 이참봉의 사랑(舍廊)에 왕래하던 강계현이 그 말을 듣고 비상히 공명하여 저종을 구하기까지는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는 대결심으로 의복 노자의 준비도 없이 도보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강계현은 당년 50옹으로 처자도 없이 남의 사랑으로 돌아다니며 기식하는 형편이었으므로 4월임에도 불구하고 서의(絮衣)를 입은 채 그대로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수예와 종〿에 남다른 천품이 있었다. 그가 저에 흥미를 느낀 것도 이러한 천품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94-2이것을 要言하면 李參奉은 年來로 甘藷를 朝鮮에 移植하여 보고저 하였다. 그것은 아마 徐光啓의 「農政全書」에서 얻은 知識이 아니었든가 한다. 그는 中國行 使臣이며 或은 그 一行에 藷種求來를 再三回나 附托하였으나 番番이 뜻을 얻지 못하고 있든 中 英宗三十九年癸未에 마침 趙曮 等이 遣日通信使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 一行 中의 한 사람에게 勤勤 附托하여 두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未信하야 東萊 釜山 等地에 或 旣來의 藷種이 있지 아니할가 하고 恨嘆하는 것을 李參奉의 舍廊에 往來하든 姜啓賢이 그 말을 듣고 非常히 共鳴하야 藷種을 求하기까지는 도라오지 아니하리라는 大決心으로 衣服 路資의 準備도 없이 徒步로 出發하였든 것이다. 姜啓賢은 當年五十翁으로 妻子도 없이 남의 舍廊으로 도라 다니며 寄食하는 形便이었으므로 四月임에도 不拘하고 絮衣를 입은 채 그대로 떠났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手藝와 種〿에 남다른 天品이 있었다. 그가 藷에 興味를 느낀 것도 이러한 天品이 그렇▶P95-1게 한 것이 안인가한다.
그는 이참봉의 편지를 갖고 먼저 밀양으로 갔었을 터이다. 그러고 다음으로 동래부사도 찾았을 터이다. 그러나 밀양이나 동부 등지에서 마침내 감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동안의 궤대주선은 밀양 군수가 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심하는 중에 마침 신사 일행이 밀양에 도착하였던 모양이다. 「해사일기」에 의하면 그것은 영종40년 갑신 6월 26일 저녁이었다. 현대문주4▶당시 밀양졸은 김인대(金仁大)이었으며 신사 조엄의 척종(戚從)이었다.[a 4] 김인대는 신사 일행 중에 간청하여 2본밖에 없는 저종 중에서 1본을 구하여 강계현에게 탁송한 것이다. 만일 강씨가 동래서 신사행 중의 저종을 얻었다고 하면 거기에는 조엄의 재래한 저종이 다량으로 있었을 터이므로 지유이본(只有二本)이란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밀양서 신사 일행을 만났던 것이다. 더구나 사행은 22일 2경에 환도부산. 35일에 중화동래 석차양산 하였으므로 동래서는 불과 수 시간의 지체이었던 것이다.(조엄이 동래서 교리들에게 저종을 전하였다는 것은 일기에 보이지 아니하나 경성으로 갖고 오지 아니한 이상 동래에 유거(遺去)하였을 것은 틀림없다.) 현대문주5▶이리하여 강씨는 사행보다 늦어 7월회에 환경(還京)하였고 사행은 7월 8일에 경성에 도착하였다.[a 5] (이참봉의 기록 중에 사행 중 혹자에게 간탁하였던 감저의 내부(來否)를 말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아마 허탁이었던 모양이다.)
쪽수▶P95-2그는 李參奉의 편지를 갖고 먼저 密陽으로 갔었을 터이다. 그러고 다음으로 東萊府使도 찾었을 터이다. 그러나 密陽이나 東釜 等地에서 마침내 甘藷를 發見하지 못하였다. 그동안의 饋待周旋은 密陽郡守가 한 것이었다. 이렇게 苦心하는 中에 마침 信使一行이 密陽에 到着하였든 모양이다. 「海槎日記」에 依하면 그것은 英宗四十年甲申 六月二十六日夕이었다. 원문주4▶當時 密陽倅는 金仁大이었으며 信使趙曮의 戚從이었다.[4] 金仁大는 信使一行 中에 懇請하야 二本밖에 없은 藷種 中에서 一本을 求하야 姜啓賢에게 托送한 것이다. 萬一 姜氏가 東萊서 信使行 中의 藷種을 얻었다고 하면 거기에는 趙曮의 載來한 藷種이 多量으로 이었을 터이므로 只有二本이란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分明히 密陽서 信使一行을 맛났든 것이다. 더구나 使行은 二十二日二更에 還到釜山. 三十五日에 中火東萊 夕次梁山 하였으므로 東萊서는 不過數時間의 遲滯이었든 것이다.(趙曮이 東萊서 校吏들에게 藷種을 傳하였다는 것은 日記에 보이지 아니하나 京城으로 갖고 오지 아니한 以上 東萊에 遺去하였을 것은 틀님없다.) 원문주5▶이리하야 姜氏는 使行보다 늦어 七月晦에 還京하였고 使行은 七月八日에 京城에 到着하였다.[5] (李參奉의 記錄 中에 使行中 或者에게 懇托하였든 甘藷의 來否를 말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아마 虛托이었든 모양이다.)
이참봉은 강계현의 재래한 1본의 저종을 정전공지(庭前空地)에 배식하였으나 (아마 강계현과 협력하였을 것이다) 1본으로서는 불안한 바 있어 염려하던 중 마침 다음 8월에 소친린인(所親隣人)이 동래부사로 신임되었으므로 그 사람에게 저종을 부탁하였다. 현대문주6▶신임부사는 실로 강필리 그 사람이었다.[a 6] 강부사는 신(信)을 지키어 익년 즉 영종41년 을유에 다량의 저종을 이참봉가 및 경성 자기 본택에 상송하였을 뿐 아니라 동래지에서도 본격적으로 재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 저종은 강필리가 별로히 대마도 등지로부터 구래한 것인가 또는 조엄의 유거하였던 그것일까. 지금 그것을 거연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의 상근(桑槿) 관계가 결코 화친치 못하였던 것과 또 저종을 위하여 일부러 대마도에 공문서와 사인(使人)을 보냈으리라던지 또 혹은 왕래의 대마도 상인 등을 통하여 구입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하기 곤란하므로 이 저종은 상필 조씨의 유거물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국제 교역은 금일같이 용이한 것이 아니었으며 조선으로서는 가급적 교통을 회피하는 경원(敬遠)의 태도를 취하던 형편이었으므로 교빙의 직접 책임자의 지위에 있는 동래부사로서는 결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쪽수▶P95-3李參奉은 姜啓賢의 齎來한 一本의 藷種을 庭前空地에 培植하였으나 (아마 姜啓賢과 協力하였을▶P96-1것이다) 一本으로서는 不安한 바 있어 念慮하든 中 마침 翌八月에 所親隣人이 東萊府使로 新任되었으므로 그 사람에게 藷種을 付託하였다. 원문주6▶新任府使는 實로 姜必履 그 사람이었다.[6] 姜府使는 信을 직히어 翌年 即英宗四十一年乙酉에 多量의 藷種을 李參奉家 及京城自己本宅에 上送하였을뿐 아니라 東萊地에서도 本格的으로 栽培를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 藷種은 姜必履가 別로히 對馬島等地로부터 購來한 것인가 또는 趙曮의 遺去하였든 그것일가. 지금 그것을 遽然히 判斷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當時의 桑槿關係가 決코 和親치 못하였든 것과 또 藷種을 爲하야 일부러 對馬島에 公文書와 使人을 보냈으리라든지 또 或은 往來의 對馬島商人 等을 通하야 購入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하기 困難하므로 이 藷種은 想必 趙氏의 遺去物이었을 것이다. 當時의 國際交易은 今日같이 容易한 것이 아니었으며 朝鮮으로서는 可及的 交通을 廻避하는 敬遠의 態度를 取하든 形便이었으므로 交聘의 直接責任者의 地位에 있는 東萊府使로서는 決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고심하여 얻은 저종도 그 종법과 유종(留種) 방법을 알지 못하여 경성 지방에서는 결국 불수년에 실패하고 말았으나 남중에는 강필리의 너력으로 다소 전파되었던 모양이다. (당시 부귀가에서만 이것을 진미로 담상(啖賞)할 수 있었다는 것도 흥미있는 이야기 거리이다.)
쪽수▶P96-2이토록 苦心하여 얻은 藷種도 그 種法과 留種方法을 알지 못하야 京城地方에서는 結局 不數年에 失敗하고 말었으나 南中에는 姜必履의 勞力으로 多少 傳播되었든 모양이다. (當時 富貴家에서만 이것을 珍味로 啖賞할 수 있었다는 것도 興味있는 이약이 거리이다.)
이참봉의 약전을 「이참봉집」 서문에 의하여 초출하면
쪽수▶P96-3李參奉의 略傳을 「李參奉集」 序文에 依하야 抄出하면

國朝右文敎三百餘年 參奉李先生々 六十四年卒 于西門外乎洞里第 先生未〿自號 亦〿官以交官喜 無中箱之〿 而集中所載 一時從遊士大夫口誦耳習 固不待集而傳也 昔我 正廟 覽先生爲人作 元陵挽詞 嗟賞久之日 誰所爲也 近世無此作 命修無寃錄 語編輯臣日 聞李某釋此書 得古人意 可采而戟之 嗟乎 先生以一命士 受知聖主 若是其深 而壞實丘園 皓首無施 云々

쪽수▶P96-4

國朝右文敎三百餘年 參奉李先生々 六十四年卒 于西門外乎洞里第 先生未〿自號 亦〿官以交官喜 無中箱之〿 而▶P97-1集中所載 一時從遊士大夫口誦耳習 固不待集而傳也 昔我 正廟 覽先生爲人作 元陵挽詞 嗟賞久之日 誰所爲也 近世無此作 命修無寃錄 語編輯臣日 聞李某釋此書 得古人意 可采而戟之 嗟乎 先生以一命士 受知聖主 若是其深 而壞實丘園 皓首無施 云々

선생은 환로(宦路)에서는 불우(不遇)이었으나 문학은 당대에 있어 파(頗)히 고명하였으며 이규경에 의하면 그 호는 칠탄(七灘)이었다.
쪽수▶P97-2先生은 宦路에서는 不遇이었으나 文學은 當代에 있어 頗히 高名하였으며 李圭景에 依하면 그 號는 七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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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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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英宗乙酉는 姜必履가 東萊로부터 藷種을 보낸 해이오 姜啓賢은 그 前年인 甲申에 密陽에서 信使行中의 藷種을 求得한 것이다. 李參奉集을 精讀치 아니한 까닭으로 此誤을 犯한 것이다. 本文 姜啓賢條 參照.
  2. 趙寅永 「雲石遺稿」 卷十五 王考永湖府君家狀 叅照.
  3. 趙曮 「海槎日記」(朝鮮故書刊行會本 海行摠載四 一三三頁 一五二頁―一五八頁 三二七頁 百十二行 等 參照). 松田氏가 英祖 三十九年 十二月에 第一次로 藷種이 釜山鎭에 送致되었다고 한 것은 誤植인가 한다. 陽曆換算이 아닌 것은 다른 곳에서 모도 陰曆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아 明白하다.
  4. 朝鮮故書刊行會本 三四〇頁.
  5. 「海槎日記」 三四六頁. 「英宗實錄」 卷百四 二張裏
  6. 「英宗實錄」 百四 十一張裏云 「乙未(十六日)配東萊府使宋文載 接慰官尹弘烈于極邊」. 이것은 交隣事體에 關한 處分이었다. 이 後任은 「東萊府邑誌」에 依하면 그 宦蹟府 先生條에서 「宋文載 癸未十二月十三日到 甲申九月二十日 以病遞. 姜必履甲申八月二十日 以順天府使移拜 丙戌十一月初十日辭遞」(純〿朝版 及 光武三年版)






현대문주


  1. 영종 을유는 강필리가 동래로부터 저종을 보낸 해이오, 강계현은 그 전년인 갑신에 밀양에서 신사행중의 저종을 구득한 것이다. 이참봉집을 정독치 아니한 까닭으로 차오을 범한 것이다. 본문 강계현조 참조.
  2. 조인영(趙寅永) 「운석유고(雲石遺稿)」 권15 왕고영호부군가장(王考永湖府君家狀) 참조.
  3. 조엄 「해사일기(海槎日記)」(조선고서간행회본 해행총재사 133혈 152혈-158혈 327혈 112행 등 참조). 송전씨가 영조39년 12월에 제일차로 저종이 부산진에 송치되었다고 한 것은 오식인가 한다. 양력 환산이 아닌 것은 다른 곳에서 모두 음력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아 명백하다.
  4. 조선고서간행회본 340혈.
  5. 「해사일기」 346혈. 「영종실록(英宗實錄)」 권104 2장이
  6. 「영종실록」 104 11장 리운 “乙未(十六日)配東萊府使宋文載 接慰官尹弘烈于極邊”. 이것은 교린사체(交隣事體)에 관한 처분이었다. 이 후임은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 의하면 그 환적부 선생조에서 “宋文載 癸未十二月十三日到 甲申九月二十日 以病遞. 姜必履甲申八月二十日 以順天府使移拜 丙戌十一月初十日辭遞”(순〿조판 및 광무3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