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저전파고 -공로자 조엄‧이광려‧강계현‧강필리‧김장순‧선종한‧서유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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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저전파고 -공로자 조엄‧이광려‧강계현‧강필리‧김장순‧선종한‧서유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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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甘藷傳播考 -功勞者 趙曮‧李匡呂‧姜啓賢‧姜必履‧金長淳‧宣宗漢‧徐有榘 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손진태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03월
시작쪽 086쪽 종료쪽 109쪽 전체쪽 02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현금 우리의 생활에 있어 감저(甘藷)(고구마)가 필수 식량의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이것이 조선에 누구의 손으로 수입되었으며 또 어떠한 경과로 전파되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아는 이가 적은 모양이다. 소화 3년 9월호 「조선학술지」지 상에 송전신인물(松田申)씨가 조선감저전래에 대한 소개를 하여 영종39년(2423 1763)에 통신사 조엄인물(趙曮)이 대마도로부터 부산진으로 저종(藷種)을 보낸 것이 그 최초라고 지적하고 그 후 서유구인물(徐有榘)가 「종저보서적(種藷譜)」를 지어 세상에 전한 것이(순조34 1834) 조엄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두 정당한 말이다. 그러나 씨는 참고문헌이 적었던 탓인지 감저전파에 대한 상세한 고증을 하지 않고 오직 조서양씨만을 거론함에 그치었다. 나는 근자에 김장순인물(金長淳)·선종한인물(宣宗漢) 공저한 「감저신보서적(甘藷新譜)」(사본 아마 희구서일 듯)란 것을 얻고 또 「이참봉집서적(李參奉集)」에서 이광려인물(李匡呂)·강계현인물(姜啟賢)의 공적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이 조선감저의 조종(祖宗)이라고 전하던 강씨란 사람이 강필리인물(姜必履)이었다는 것이며 이 강필리(또는 그 형제 강필교인물(姜必敎))가 소위 「강씨감저보서적(姜氏甘藷譜)」의 저자인 것까지 고증할 수 있게 되어 비록 충분치는 못하나마 조선감저의 역사를 대체로 알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세상에 발표하여 대방의 질정을 받음과 아울러 공로선인(功勞先人)의 덕을 찬앙하고자 이 글을 초(抄)하게 된 것이다.
쪽수▶P86-1現今 우리의 生活에 있어 甘藷(고구마)가 必需食糧의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周知의 事實이나 이것이 朝鮮에 누구의 손으로 輸入되였으며 또 어떠한 經過로 傳播되였는가 하는 點에 關해서는 아는 이가 적은 모양이다. 昭和三年九月號 「朝鮮」誌上에 松田申氏가 朝鮮甘藷傳來에 對한 紹介를 하야 英宗三十九年(二四二三一七六三)에 通信使 趙曮이 對馬島로부터 釜山鎭으로 藷種을 보낸 것이 그 最初라고 指摘하고 其後 徐有榘가 「種藷譜」를 지어 世上에 傳한 것이(純祖三四一八三四) 趙曮의 遺志를 繼承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도 正當한 말이다. 그러나 氏는 參考文獻이 적었든 탓인지 甘藷傳播에 對한 詳細한 考證을▶P87-1하지 않고 오즉 趙徐兩氏만을 擧論함에 그치었다. 나는 近者에 金長淳·宣宗漢 共著한 「甘藷新譜」(寫本 아마 稀覯書일 듯)란 것을 얻고 또 「李參奉集」에서 李匡呂·姜啟賢의 功績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이 朝鮮甘藷의 祖宗이라고 傳하든 姜氏란 사람이 姜必履이었다는 것이며 이 姜必履(又는 其弟姜必敎)가 所謂 「姜氏甘藷譜」의 著者인 것까지 考證할 수 있게 되어 비록 充分치는 못하나마 朝鮮甘藷의 歷史를 大體로 알게 되였으므로 이것을 世上에 發表하야 大方의 叱正을 받음과 아울너 功勞先人의 德을 讚仰하고저 이 글을 抄하게 된 것이다.
감저의 최초 구래자가 조엄이었던 것은 송전씨도 이미 지적하였고 또 차항에서 나도 상술코자 하는 바이지마는 조선서는 재래로 조씨를 말하지 않고 강필리 또는 이광려에게 그 공을 돌리었던 모양으로 김장순은 그 저서인 「감저신보」(순조13년 계유성, 1813년) 중에서 “落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云云”이라 하여 강씨(강필리를 가르쳐 이름인 것은 후에 상술코자 한다)를 최초의 저종 득래자라 하고 이어서 강씨의 이 공적을 고려말엽 원으로부터 면종(棉種)을 득래한 강성군 문익점인물(文益漸)에 대하여
쪽수▶P87-2甘藷의 最初 購來者가 趙曮이었든 것은 松田氏도 이미 指摘하였고 또 次項에서 나도 詳述코저 하는 바이지마는 朝鮮서는 在來로 趙氏를 말하지 않고 姜必履 又는 李匡呂에게 그 功을 돌니었든 모양으로 金長淳은 그 著書인 「甘藷新譜」(純祖十三年癸酉成, 一八一三年) 中에서 「落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云云」이라 하야 姜氏(姜必履를 가르처 이름인 것은 後에 詳述코저 한다)를 最初의 藷種得來者라 하고 이어서 姜氏의 이 功績을 高麗末葉 元으로부터 棉種을 得來한 江城君 文益漸에 對하야

江城君文益漸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久 衣被一國 而姜氏得藷種而來者 將踰半百年 而尙無涓埃之益 云々
盖江城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識種法與土宜 故高低原隰 分以種之 得盡其妙 然後敎之一國之民 故人皆信之 不令而從 此即江城之志 可謂篤矣 其智亦可謂周矣 姜氏則不然 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傅布 而其方 則日人之所秘而瞞告者也 是故 種之一歳 而不驗 則人皆不信 然則 姜氏之志 可追於江城 而其智 則果不及矣 云々

쪽수▶P87-3

江城君文益漸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久 衣被一國 而姜氏得藷種而來者 將踰半百年 而尙無涓埃之益 云々
盖江城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識種法與土宜 故高低原隰 分以種之 得盡其妙 然後敎之一國之民 故人皆信之 不令而從 此即江城之志 可謂篤矣 其智亦可謂周矣 姜氏則不然 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傅布 而其方 則日人之所秘▶P88-1而瞞告者也 是故 種之一歳 而不驗 則人皆不信 然則 姜氏之志 可追於江城 而其智 則果不及矣 云々

이라 하여 그 지(志)는 비등하나 그 지(智)는 강성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쪽수▶P88-2이라하야 其志는 比等하나 其智는 江城君에 미치지 몯한다고 하였다.
김장순 뿐 아니라 이광려도 그 저 「이참봉집」 중에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며 서유구(徐有榘)도 그 「종저보(種藷譜)」 중에 동일한 말을 하였다(후술 이광려조 및 강필리조 참조). 현대문주1▶그런데 이규경인물(李圭景)은 이에 관하여 그 저 「오주연문장전산고서적(五洲衍文長箋散稿)」 권3 북저변증설 중에서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使姜啓賢往東萊府因 信使携種得之〿負至)傳種”[a 1]이라 하여 이광려를 그 최초의 사람이라 하고 조엄을 들지 아니하였다.
쪽수▶P88-3金長淳뿐 아니라 李匡呂도 그 著 「李參奉集」 中에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며 徐有榘도 그 「種藷譜」 中에 同一한 말을 하였다(後述李匡呂條 及 姜必履條參照). 원문주1▶그런데 李圭景은 이에 閥하야 그 著 「五洲衍文長箋散稿」卷三 北藷辨證說 中에서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使姜啓賢往東萊府因 信使携種得之〿負至)傳種」[1]이라 하야 李匡呂를 그 最初의 人이라 하고 趙曮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우리 선인들이 왜 조엄의 공을 말하지 않고 저조(藷祖)로 특히 강필리나 이참봉을 추앙하였던가. 우견으로서는 조씨는 통신사로서 상토(桑土)로 갔을 때 대마도의 고구마에 착안하여 그 종자를 부산진 및 동래부에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중앙에 재래배식하여 그 종재방(種栽方)을 연구한 후 그것을 전토(全土)에 전포하여 보겠다는 열성까지는 없었고 중앙 지방은 기후가 틀리니 대마도와 기후 유사한 제주도 및 기타도서에 송치권재(送致勸栽)하여 보겠다는 것이 그 목적의 대부분이었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하여 강필리와 이광려는 그들 자신이 그 종재방을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혹은 저종을 경성에 송치하여 그 광포(廣布)를 꾀하였으며 또 혹은 저서를 내어 그것을 세상에 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성의 이유로 그들이 최고의 명예를 전득한 것이 아닐까한다.
쪽수▶P88-4그러면 우리 先人들이 왜 趙曮의 功을 말하지 않고 藷祖로 特히 姜必履나 李參奉을 推仰하였든가. 愚見으로서는 趙氏는 通信使로서 桑土로 갔을 때 對馬島의 고구마에 着眼하야 그 種子를 釜山鎭 及 東萊府에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中央에 齋來培殖하야 그 種栽方을 硏究한 後 그것을 全土에 傳布하여 보겠다는 熱誠까지는 없었고 中央地方은 氣候가 틀리니 對馬島와 氣候 類似한 濟州島 及 其他島嶼에 送致勸栽하여 보겠다는 것이 그 目的의 大部分이였었든 모양이다. 이에 對하야 姜必履와 李匡呂는 그들 自身이 그 種栽方을 硏究하였을뿐 아니라 或은 藷種을 京城에 送致하야 그 廣布를 꾀하였으며 또 或은 著書를 내어 그것을 世上에 傳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精誠의 理由로 그들이 最高의 名譽를 傳得한 것이 아닐가한다.


































본문2: 조엄


조엄(趙曮) 호 영호(永湖) 관지리조판서 익문익공(謚文翼公). 한양부 풍양현인. 숙종45년생. 기고상경(其考尙絅) 호 학당(鶴塘) 관행리조판서. 현대문주2▶그가 예조태의(禮曹泰議)로서 궤일통신정사(潰日通信正使)를 배명(拜命)한 것은 영종39년(서기1763) 그가 45세 때이었다.[a 2] 그는 8월 초삼일 경성을 출발하여 10월 6일에 대마도의 좌수내포에 도착, 10일까지 거기서 유(留)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저종을 부산진에 구송한 것은 실로 그가 좌수내포에 유한 5일간의 일이었다. 현대문주3▶그러고 그가 제이차로 저종을 좌수내포로부터 재래한 것은 익영종40년 6월 18일 그가 회정하였을 때의 일이었다.[a 3] 그는 그의 「해사일기」 중에 저종 등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선고서간행회본 해행총재사소수 327혈)
쪽수▶P89-1趙曮 號永湖 官至吏曹判書 謚文翼公. 漢陽府豊壤縣人. 肅宗四十五年生. 其考尙絅 號鶴塘 官行吏 曹判書. 원문주2▶그가 禮曹泰議로서 潰日通信正使를 拜命한 것은 英宗三十九年(西紀一七六三) 그가 四十五歲 때이었다.[2] 그는 八月初三日 京城을 出發하야 十月六日에 對馬島의 佐須奈浦에 到着, 同十日까지 거기서 留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藷種을 釜山鎭에 求送한 것은 實로 그가 佐須奈浦에 留한 五日間의 일이었다. 원문주3▶그러고 그가 第二次로 藷種을 佐須奈浦로부터 載來한 것은 翌英宗四十年 六月十八日 그가 回程하였을 때의 일이었다.[3] 그는 그의 「海槎日記」 中에 藷種騰來에 對하야 다음과 같이 記錄하였다. (朝鮮古書刊行會本 海行摠載四所收 三二七頁)

[英宗四十年甲申 六月十八日] 島中有草根可食者 名曰甘藷 或謂孝子麻 日音古貴爲麻 其形或如山藥 或如菁根 如瓜如芋 不一其狀 其葉如山葉之葉 而稍大而厚 微有赤色 其蔓亦大於山藥之蔓 其味比山藥而稍堅 實有眞氣 或似牛煨之栗味 生可食也 炙可食也 烹亦可食也 和穀而作糜粥可也 拌清而爲正果可也 或作餅或和飯 而無不可 可謂救荒 之好材料也 此物聞自南京流入日本 日本陸地諸島間 多有之 而馬島尤盛云 其種法 春和後 種之於向陽之處 待其草 蔓之出土稍長 取其蔓間一二節 貼地掩土 則隨其所掩處 輒皆泡卵 卵之大小 必隨土品之當否矣 葉脫秋高之後 採取其棖 坑坎稍深 鋪藷一匝 實土數寸 復鋪甘藷 又實堅土 如是者五六層 後多積藁草 厚葉盖土 俾避風雨 得免腐傷 待春川種如法云矣 昨年初到佐須奈浦(△△△△△△△△) 見甘藷(△△△) 求得數斗(△△△△) 出送釜山鎭(△△△△△) 便之取種(△△△△) 今於回路(△△△△) 又此求得(△△△△) 將授於萊州校吏輩(△△△△△△△△) 行中諸人(△△△△) 亦有得去者(△△△△△) 此物果能皆生 廣布於我國 與文棉之爲 則豈不大助於吏民耶 萊州所種(△△△△) 若能能延(△△△△) 移我於濟州(△△△△△) 及他息(△△△) 似爲宜矣(△△△△) 聞濟州土俗(△△△△△) 或似馬島者多(△△△△△△) 甘藷如果蔓盛 則濟民之逐歲仰哺 羅合之泛舟郜榖 庶可除矣 但地官未詳(△△△△△) 土産皆異(△△△△) 番〿之如意(△△△△△) 亦何可必也(△△△△△)

쪽수▶P89-2

[英宗四十年甲申 六月十八日] 島中有草根可食者 名曰甘藷 或謂孝子麻 日音古貴爲麻 其形或如山藥 或如菁根 如瓜如芋 不一其狀 其葉如山葉之葉 而稍大而厚 微有赤色 其蔓亦大於山藥之蔓 其味比山藥而稍堅 實有眞氣 或似牛煨之栗味 生可食也 炙可食也 烹亦可食也 和穀而作糜粥可也 拌清而爲正果可也 或作餅或和飯 而無不可 可謂救荒 之好材料也 此物聞自南京流入日本 日本陸地諸島間 多有之 而馬島尤盛云 其種法 春和後 種之於向陽之處 待其草 蔓之出土稍長 取其蔓間一二節 貼地掩土 則隨其所掩處 輒皆泡卵 卵之大小 必隨土品之當否矣 葉脫秋高之後 採取其棖 坑坎稍深 鋪藷一匝 實土數寸 復鋪甘藷 又實堅土 如是者五六層 後多積藁草 厚葉盖土 俾避風雨 得免腐傷 待▶P90-1春川種如法云矣 昨年初到佐須奈浦(△△△△△△△△) 見甘藷(△△△) 求得數斗(△△△△) 出送釜山鎭(△△△△△) 便之取種(△△△△) 今於回路(△△△△) 又此求得(△△△△) 將授於萊州校吏輩(△△△△△△△△) 行中諸人(△△△△) 亦有得去者(△△△△△) 此物果能皆生 廣布於我國 與文棉之爲 則豈不大助於吏民耶 萊州所種(△△△△) 若能能延(△△△△) 移我於濟州(△△△△△) 及他息(△△△) 似爲宜矣(△△△△) 聞濟州土俗(△△△△△) 或似馬島者多(△△△△△△) 甘藷如果蔓盛 則濟民之逐歲仰哺 羅合之泛舟郜榖 庶可除矣 但地官未詳(△△△△△) 土産皆異(△△△△) 番〿之如意(△△△△△) 亦何可必也(△△△△△)

이것을 요언하면, 그는 영종39년 계미 10월 6일에 대마도의 좌수내포에 상륙, 풍랑으로 인하여 10일까지 동포에 머무는 동안에 동도 토산 감저(甘藷)가 가히 구황의 자(資)가 될 것을 짐작하고 종자 수두를 얻어 부산진으로 보내면서 그 종자를 취하도록 전탁하였다. 생각건대 동시에 보장재식(保藏栽植)의 방법까지 전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익년 6월 18일 신사(信使)의 임(任)을 마치고 동로 좌수내포에 재도하였을 때에 다시 그 약간을 구하여 자신이 그것을 수래(輸來)하였는데 일행 중에서도 여러 사람이 역시 저종을 득래하였으며, 이번 것은 동래부 교리배(校吏輩)에게 전하여 그 종자를 받아, 대마도와 기후물산이 유사한 제주도에 먼저 이식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피아 지의(地宜)가 다르므로 만일 이것을 경성으로 재래하였다가 실패하면 다시 그 종자를 얻기가 곤란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에 재배한 것이 성공하면 종자 염려는 없어지므로 그때는 이것을 전도에 시험하여 보리라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전도에서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은 문익점의 목면과 같이 동민의 생활에 큰 복리를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행 중에서 감저 뿐 아니라 그 풍속 습관이며 문물제도며 역사 지리기타에 유의하였을 뿐 아니라 농지 제방 수거 등에까지 세심의 주의를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도 그가 결코 평범한 일개의 사신만이 아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쪽수▶P90-2이것을 要言하면, 그는 英宗三十九年癸未十月六日에 對馬島의 佐須奈浦에 上陸, 風浪으로 因하야 同十日까지 同浦에 留하는 동안에 同島土産 甘藷가 可히 救荒의 資가 될 것을 짐작하고 種子數斗를 얻어 釜山鎭으로 보내면서 그 種子를 取하도록 傳託하였다. 생각건대 同時에 保藏栽植의 方法까지 傳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翌年 六月十八日 信使의 任을 맟이고 同路 佐須奈浦에 再到하였을 때에 다시 그 若干을 求하야 自身이 그것을 輸來하였는대 一行 中에서도 여러 사람이 亦是 藷種을 得來하였으며, 이번 것은 東萊府校吏輩에게 傳하야 그 種子를 받아, 對馬島와 氣候物產이 類似한 濟州島에 먼저 移植하는 것이 最善의 方法이라 생각하였다. 彼我 地宜가 다르므로 萬一 이것을 京城으로 載來하였다가 失敗하면 다시 그 種子를 얻기가 困難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야 濟州島에 栽培한 것이 成功하면 種子念慮는 없어지므로 그때는 이것을 全道에 試驗하여 보리라는 생각이었든 모양이다. 이렇게 全道에서 成功하게 된다면 그것은 文益漸의 木棉과 같이 東民의 生活에 큰 福利를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使行 中에서 甘藷뿐 아니라 그 風俗 習慣이며 文物 制度며 歷史 地理其他에 留意하였을 뿐▶P91-1아니라 農地 堤防 水車等에까지 細心의 注意를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도 그가 決코 平凡한 一個의 使臣만이 아니었든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것은 別問題로 하고,
그러면 부산진과 동래로 보낸 그 저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조엄의 손(孫)인 조인영(趙寅永)의 「운석유고」 권15초에 실린 그의 행장 중에서 보면
쪽수▶P91-2그러면 釜山鎭과 東萊로 보낸 그 藷種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趙曮의 孫인 趙寅永의 「雲石遺稿」 卷十五初에 실닌 그의 行狀 中에서 보면

島產有甘藷 宜於救荒 府君取其種而歸 送濟州種之日 濟之土產 似()島 此物或其宜也 異日濟民 必有所賴 種種果漸繁 或稱趙藷(△△)云(十二張裏)

쪽수▶P91-3

島產有甘藷 宜於救荒 府君取其種而歸 送濟州種之日 濟之土產 似()島 此物或其宜也 異日濟民 必有所賴 種種果漸繁 或稱趙藷(△△)云(十二張裏)

이라 하였다. 이로서보면 초지(初志)와 여히 그 종자의 대부분을 제주로 보낸 것은 명백하며 제주인은 그것을 조저(趙藷)라고까지 하여 그 덕을 기념하였던 모양이다. 그가 제주의 일부분을 경성으로 재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신사일행 중에 저종을 경성까지 갖고 온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이광려의 「이참봉집」 권2 증강생계현조 중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으로서 추측할 것이다.
쪽수▶P91-4이라하였다. 이로서보면 初志와 如히 그 種子의 大部分을 濟州로 보낸 것은 明白하며 濟州人은 그것을 趙藷라고까지 하야 그 德을 記念하였든 모양이다. 그가 濟州의 一部分을 京城으로 齎來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信使一行 中에 藷種을 京城까지 갖고 온 사람은 없었든 모양이다. 그것은 李匡呂의 「李參奉集」 卷二 贈姜生啓賢條 中에 보이는 다음의 記錄으로서 推測할 것이다.

云々 然萊釜地內 竟不見藷 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僅持二本(△△△△△△△) 其一聞往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行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云々(七張裏)

쪽수▶P91-5

云々 然萊釜地內 竟不見藷 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僅持二本(△△△△△△△) 其一聞往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行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云々(七張裏)

이것은 다음의 강계현조에서 다시 상술하려니와 요컨대 사행이 밀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그 일행 중에 저종 근 2본밖에 없었던 모양이며 그 일은 이미 타처로 가고 남은 일본을 강계현이 득래하여 경성에서 고대하는 이참봉에게 바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엄이 초지와 여히 제이차 재래한 저종은 제주로 즉시 보내지 않고 동래부 교리배에 위탁하여 거기서 취종 후 익년에 제주로 보내도록 한 것 같이 생각되는 점은 다음 조에 상술코자하며 그 이유는 아마 계절 관계인 듯하다.)
쪽수▶P91-6이것은 다음의 姜啓賢條에서 다시 詳述하려니와 要컨대 使行이 密陽에 到着하였을 때에는 그 一行 中에 藷種 僅二本밖에 없었든 모양이며 其一은 이미 他處로 가고 餘一本을 姜啓賢이 得來하야 京城에서 苦待하는 李參奉에게 밭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趙曮이 初志와 如히 第二次 齋來한 藷種은▶P92-1濟州로 即時 보내지 않고 東萊府校吏輩에 委託하야 거기서 取種後 翌年에 濟州로 보내도록 한 것 같이 생각되는 點은 다음 條에 詳述코저하며 그 理由는 아마 季節關係인 듯하다.)




































본문3: 이광려‧강계현


조엄은 저종의 전도적 전파를 희망은 하였으나 자신이 그것을 조선의 토지에 적합하도록 실제로 연구하여 보겠다는 성의까지는 없었다. 혹은 그러한 시간의 여유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는 부산진 첨사며 동래부 교리배에 그 일을 촉탁하였음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강계현 이참봉(광려) 2인은 이것을 전국적으로 분포시킬 것을 꾀하고 한 막대한 고심과 노력으로 몸소 실제의 재배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 사실은 「이참봉집」에서 능히 알 수가 있다. 「이참봉집」 권2 증강생계현조에서 이광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쪽수▶P92-2趙曮은 藷種의 全道的傳播를 希望은 하였으나 自身이 그것을 朝鮮의 土地에 適合하도록 實際로 硏究하여 보겠다는 誠意까지는 없었다. 或은 그러한 時間의 餘裕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何如튼 그는 釜山鎭僉使며 東萊府校吏輩에 그 일을 囑託하였음에 不過하였다. 그런데 姜啓賢 李參奉(匡呂) 二人은 이것을 全國的으로 分布시킬 것을 꾀하고 한 莫大한 苦心과 勞力으로 몸소 實際의 栽培方法을 研究하였다. 이 事實은 「李參奉集」에서 能히 알 수가 있다. 「李參奉集」卷二 贈姜生啓賢條에서 李匡呂는 다음과 같이 記錄하였다.

萬曆番茹始入閩 如今天下少饑人 寸根千里窮南海 五十姜翁只一身
甞聞中國近有一奇物 名爲甘藷 此物種來百餘年 自閩浙 漸及內地 將不復以水旱豐凶爲憂 儘異實也 考之農政全書 書中所說甘藷典故 及種植留種之方 累千萬言 念如得此物 爲東國之植 其利益 有不可勝言 顧恨無由致之 甞試語之譯流(△△△△△△) 一再使行(△△△△) 並無所見聞而歸(△△△△△△△) 最後所傳 如有近似者 徐相一之適爲戶判 爲囑使行 必得之 歸至中路 啓視之 皆槁矣 念此物求之於北 既不易致之 日中必有之久矣 凡中國物貨及書籍 日中必先得之 况此本是南產耶 旣而聞日中所有者 其根植枝蔓形色味性 十分是藷也 適有故人子(△△△△△) 隨信使往日本者(△△△△△△△) 余爲勤托之(△△△△△) 其明年春 余夜坐 姜生在側 余言恐信 使之歸 未必能得藷 如不果得之 又將虛過此年 吾意萊釜間 必己有傳種在民間者 但其未知爲藷耳 徍彼窮搜 或可得之 恨無人能往耳 姜生慨然曰 吾請徍 即使有之 豈不得來 余問君將何以往 生日(△△) 徒步去(△△△) 去何憂不到(△△△△△) 到何憂不得(△△△△△) 但 未知有無耳 時有所親爲密陽宰 又有爲作害萊府者 生乃辭去 手未持行資(△△△△△) 尙著絮南去(△△△△△) 日氣漸熱(△△△△) 不知歸期(△△△△) 事近〿空(△△△△) 種種喫苦(△△△△) 可知也(△△△) 而行意翩然(△△△△△) 了無難色(△△△△) 余心奇之 且無論其得藷種與否也 四月某日發去(△△△△△△) 一去更無信息 直至七月欲晦(△△△△) 余病作 委頓在室 怱聞窓外足音 問爲誰 應之日 遠客耳 姜生聲也 不覺身至窓處 推窓視外 生從一人以入 背木櫃 置在廳 見櫃中植物 出蔓尺許 冶葉搖搖也 喜不可言 生具言往還事 前後往來萊釜所經歷 極勞苦 全荷密陽之饋待 然萊釜地內(△△△△) 竟不見(△△△)此藷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 僅持二本(△△△△) 其一聞徍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 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從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余裁書 更謝密陽 即治庭前地種之(△△△△△△△) 至八九月 蔓葉甚盛 幾遍數間 旣而聞萊伯新出(△△△△) 而隣人之所親也 使作書 盛言藷事 萊伯果力圖之(△△△△△△) 明年藷種多至京(△△△△△△△) 又多留植其地(△△△△△△) 而吾庭中所植 不善收藏 皆不可作種 求得數本於萊伯家 分種之 藷種之轉於國中始此(△△△△△△△△△) 即乙酉歲也(△△△△△) 前後種者 多得卵頗戤 而失在留種(△△△△△) 又終患種法不明(△△△△△△△) 皆一再種而止(△△△△△△) 惟南中(△△△) 至今多種者(△△△△△) 然皆用爲食啖之美物而已(△△△△△△△△△△△) 莫能以代食救荒 李吉甫深明種植 余謂吉甫 君何不盛植此物 使民間視效也 吉甫日 吾國人 習喫大椀飯 豈肯以藷代食 此物雖美 吾國終不能爲用 如中國也 其時以此言 爲未必然 今思之 吉甫之言 乃眞得物情耶 然凡物用捨盛衰 皆有時 如果蓏煙草木綿之屬 其始 亦非中土之產 而中國今皆爲日用 至於流傳東國 又不知今爲幾百年 今人皆認爲土產固有者 莫想其本初來自異國 至於藷 豈獨不然 况藷之甚美 又非諸物所可倫擬耶 然又念藷之不能盛行 抑由其甚美 故國人之貧者 不得與霑 而濟其急也 姜生之歸也 余爲作詩識之 生不畜妻子(△△△△△) 身外無一物(△△△△△) 寄食人家(△△△△) 其心思手藝(△△△△△) 無所不能(△△△△) 偶爲人造器物種葉茹(△△△△△△△△△) 皆盡其妙(△△△△) 而終不屑爲治生事(△△△△△△△△) 其赤日徒步 行數千里 必得藷種 本非其爲身口也 故余詩云云 若使此物 遍行於國中 其爲益於民生 救荒濟飢 何可勝言 至於窮士 不能農商 又無田土者 正足資之爲食 又如京城内外 單戶孤寡 家有隙地 種無幾而足一年 乃其針指織紝□□之所出 自當用爲蔽體禦寒 又可推爲昏喪祭祀疾病之用 豈不甚優益哉 豊凶貧富貴賤 所在得其益利 國計民憂 宜莫急於此 烏可少也 (六張至九張)

쪽수▶P92-3

萬曆番茹始入閩 如今天下少饑人 寸根千里窮南海 五十姜翁只一身
甞聞中國近有一奇物 名爲甘藷 此物種來百餘年 自閩浙 漸及內地 將不復以水旱豐凶爲憂 儘異實也 考之農政全書 書中所說甘藷典故 及種植留種之方 累千萬言 念如得此物 爲東國之植 其利益 有不可勝言 顧恨無由致之 甞試語之譯流(△△△△△△) 一再使行(△△△△) 並無所見聞而歸(△△△△△△△) 最後所傳 如有近似者 徐相一之適爲戶判 爲囑使行 必得之 歸至中路 啓視之 皆槁矣 念此物求之於北 既不易致之 日中必有之久矣 凡中國物貨及書籍 日中必先得之 况此本是南產耶 旣而聞日中所有▶P93-1者 其根植枝蔓形色味性 十分是藷也 適有故人子(△△△△△) 隨信使往日本者(△△△△△△△) 余爲勤托之(△△△△△) 其明年春 余夜坐 姜生在側 余言恐信 使之歸 未必能得藷 如不果得之 又將虛過此年 吾意萊釜間 必己有傳種在民間者 但其未知爲藷耳 徍彼窮搜 或可得之 恨無人能往耳 姜生慨然曰 吾請徍 即使有之 豈不得來 余問君將何以往 生日(△△) 徒步去(△△△) 去何憂不到(△△△△△) 到何憂不得(△△△△△) 但 未知有無耳 時有所親爲密陽宰 又有爲作害萊府者 生乃辭去 手未持行資(△△△△△) 尙著絮南去(△△△△△) 日氣漸熱(△△△△) 不知歸期(△△△△) 事近〿空(△△△△) 種種喫苦(△△△△) 可知也(△△△) 而行意翩然(△△△△△) 了無難色(△△△△) 余心奇之 且無論其得藷種與否也 四月某日發去(△△△△△△) 一去更無信息 直至七月欲晦(△△△△) 余病作 委頓在室 怱聞窓外足音 問爲誰 應之日 遠客耳 姜生聲也 不覺身至窓處 推窓視外 生從一人以入 背木櫃 置在廳 見櫃中植物 出蔓尺許 冶葉搖搖也 喜不可言 生具言往還事 前後往來萊釜所經歷 極勞苦 全荷密陽之饋待 然萊釜地內(△△△△) 竟不見(△△△)此藷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 僅持二本(△△△△) 其一聞徍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 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從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余裁書 更謝密陽 即治庭前地種之(△△△△△△△) 至八九月 蔓葉甚盛 幾遍數間 旣而聞萊伯新出(△△△△) 而隣人之所親也 使作書 盛言藷事 萊伯果力圖之(△△△△△△) 明年藷種多至京(△△△△△△△) 又多留植其地(△△△△△△) 而吾庭中所植 不善收藏 皆不可作種 求得數本於萊伯家 分種之 藷種之轉於國中始此(△△△△△△△△△) 即乙酉歲也(△△△△△) 前後種者 多得卵頗戤 而失在留種(△△△△△) 又終患種法不明(△△△△△△△) 皆一再種而止(△△△△△△) 惟南中(△△△) 至今多種者(△△△△△) 然皆用爲食啖之美物而已(△△△△△△△△△△△) 莫能以代食救荒 李吉甫深明種植 余謂吉甫 君何不盛植此物 使民間視效也 吉甫日 吾國人 習喫大椀飯 豈肯以藷代食 此物雖美 吾國終不能爲用 如中國也 其時以此言 爲未必然 今思之 吉甫之言 乃眞得物情耶 然凡物用捨盛衰 皆有時 如果蓏煙草木綿之屬 其始 亦非中土之產 而中國今皆爲日用 至於流傳東國 又不知今爲幾百年 今人皆認爲土產固有者 莫想其本初來自異國 至▶P94-1於藷 豈獨不然 况藷之甚美 又非諸物所可倫擬耶 然又念藷之不能盛行 抑由其甚美 故國人之貧者 不得與霑 而濟其急也 姜生之歸也 余爲作詩識之 生不畜妻子(△△△△△) 身外無一物(△△△△△) 寄食人家(△△△△) 其心思手藝(△△△△△) 無所不能(△△△△) 偶爲人造器物種葉茹(△△△△△△△△△) 皆盡其妙(△△△△) 而終不屑爲治生事(△△△△△△△△) 其赤日徒步 行數千里 必得藷種 本非其爲身口也 故余詩云云 若使此物 遍行於國中 其爲益於民生 救荒濟飢 何可勝言 至於窮士 不能農商 又無田土者 正足資之爲食 又如京城内外 單戶孤寡 家有隙地 種無幾而足一年 乃其針指織紝□□之所出 自當用爲蔽體禦寒 又可推爲昏喪祭祀疾病之用 豈不甚優益哉 豊凶貧富貴賤 所在得其益利 國計民憂 宜莫急於此 烏可少也 (六張至九張)

이것을 요언하면 이참봉은 연래로 감저를 조선에 이식하여 보고자하였다. 그것은 아마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는 중국행 사신이며 혹은 그 일행에 저종 구래를 재삼회나 부탁하였으나 번번이 뜻을 얻지 못하고 있던 중 영종39년 계미에 마침 조엄 등이 견일 통신사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 일행 중의 한 사람에게 근근 부탁하여 두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미신(未信)하여 동래 부산 등지에 혹 기래의 저종이 있지 아니할까 하고 한탄하는 것을 이참봉의 사랑(舍廊)에 왕래하던 강계현이 그 말을 듣고 비상히 공명하여 저종을 구하기까지는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는 대결심으로 의복 노자의 준비도 없이 도보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강계현은 당년 50옹으로 처자도 없이 남의 사랑으로 돌아다니며 기식하는 형편이었으므로 4월임에도 불구하고 서의(絮衣)를 입은 채 그대로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수예와 종〿에 남다른 천품이 있었다. 그가 저에 흥미를 느낀 것도 이러한 천품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94-2이것을 要言하면 李參奉은 年來로 甘藷를 朝鮮에 移植하여 보고저 하였다. 그것은 아마 徐光啓의 「農政全書」에서 얻은 知識이 아니었든가 한다. 그는 中國行 使臣이며 或은 그 一行에 藷種求來를 再三回나 附托하였으나 番番이 뜻을 얻지 못하고 있든 中 英宗三十九年癸未에 마침 趙曮 等이 遣日通信使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 一行 中의 한 사람에게 勤勤 附托하여 두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未信하야 東萊 釜山 等地에 或 旣來의 藷種이 있지 아니할가 하고 恨嘆하는 것을 李參奉의 舍廊에 往來하든 姜啓賢이 그 말을 듣고 非常히 共鳴하야 藷種을 求하기까지는 도라오지 아니하리라는 大決心으로 衣服 路資의 準備도 없이 徒步로 出發하였든 것이다. 姜啓賢은 當年五十翁으로 妻子도 없이 남의 舍廊으로 도라 다니며 寄食하는 形便이었으므로 四月임에도 不拘하고 絮衣를 입은 채 그대로 떠났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手藝와 種〿에 남다른 天品이 있었다. 그가 藷에 興味를 느낀 것도 이러한 天品이 그렇▶P95-1게 한 것이 안인가한다.
그는 이참봉의 편지를 갖고 먼저 밀양으로 갔었을 터이다. 그러고 다음으로 동래부사도 찾았을 터이다. 그러나 밀양이나 동부 등지에서 마침내 감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동안의 궤대주선은 밀양 군수가 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심하는 중에 마침 신사 일행이 밀양에 도착하였던 모양이다. 「해사일기」에 의하면 그것은 영종40년 갑신 6월 26일 저녁이었다. 현대문주4▶당시 밀양졸은 김인대(金仁大)이었으며 신사 조엄의 척종(戚從)이었다.[a 4] 김인대는 신사 일행 중에 간청하여 2본밖에 없는 저종 중에서 1본을 구하여 강계현에게 탁송한 것이다. 만일 강씨가 동래서 신사행 중의 저종을 얻었다고 하면 거기에는 조엄의 재래한 저종이 다량으로 있었을 터이므로 지유이본(只有二本)이란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밀양서 신사 일행을 만났던 것이다. 더구나 사행은 22일 2경에 환도부산. 35일에 중화동래 석차양산 하였으므로 동래서는 불과 수 시간의 지체이었던 것이다.(조엄이 동래서 교리들에게 저종을 전하였다는 것은 일기에 보이지 아니하나 경성으로 갖고 오지 아니한 이상 동래에 유거(遺去)하였을 것은 틀림없다.) 현대문주5▶이리하여 강씨는 사행보다 늦어 7월회에 환경(還京)하였고 사행은 7월 8일에 경성에 도착하였다.[a 5] (이참봉의 기록 중에 사행 중 혹자에게 간탁하였던 감저의 내부(來否)를 말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아마 허탁이었던 모양이다.)
쪽수▶P95-2그는 李參奉의 편지를 갖고 먼저 密陽으로 갔었을 터이다. 그러고 다음으로 東萊府使도 찾었을 터이다. 그러나 密陽이나 東釜 等地에서 마침내 甘藷를 發見하지 못하였다. 그동안의 饋待周旋은 密陽郡守가 한 것이었다. 이렇게 苦心하는 中에 마침 信使一行이 密陽에 到着하였든 모양이다. 「海槎日記」에 依하면 그것은 英宗四十年甲申 六月二十六日夕이었다. 원문주4▶當時 密陽倅는 金仁大이었으며 信使趙曮의 戚從이었다.[4] 金仁大는 信使一行 中에 懇請하야 二本밖에 없은 藷種 中에서 一本을 求하야 姜啓賢에게 托送한 것이다. 萬一 姜氏가 東萊서 信使行 中의 藷種을 얻었다고 하면 거기에는 趙曮의 載來한 藷種이 多量으로 이었을 터이므로 只有二本이란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分明히 密陽서 信使一行을 맛났든 것이다. 더구나 使行은 二十二日二更에 還到釜山. 三十五日에 中火東萊 夕次梁山 하였으므로 東萊서는 不過數時間의 遲滯이었든 것이다.(趙曮이 東萊서 校吏들에게 藷種을 傳하였다는 것은 日記에 보이지 아니하나 京城으로 갖고 오지 아니한 以上 東萊에 遺去하였을 것은 틀님없다.) 원문주5▶이리하야 姜氏는 使行보다 늦어 七月晦에 還京하였고 使行은 七月八日에 京城에 到着하였다.[5] (李參奉의 記錄 中에 使行中 或者에게 懇托하였든 甘藷의 來否를 말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아마 虛托이었든 모양이다.)
이참봉은 강계현의 재래한 1본의 저종을 정전공지(庭前空地)에 배식하였으나 (아마 강계현과 협력하였을 것이다) 1본으로서는 불안한 바 있어 염려하던 중 마침 다음 8월에 소친린인(所親隣人)이 동래부사로 신임되었으므로 그 사람에게 저종을 부탁하였다. 현대문주6▶신임부사는 실로 강필리 그 사람이었다.[a 6] 강부사는 신(信)을 지키어 익년 즉 영종41년 을유에 다량의 저종을 이참봉가 및 경성 자기 본택에 상송하였을 뿐 아니라 동래지에서도 본격적으로 재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 저종은 강필리가 별로히 대마도 등지로부터 구래한 것인가 또는 조엄의 유거하였던 그것일까. 지금 그것을 거연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의 상근(桑槿) 관계가 결코 화친치 못하였던 것과 또 저종을 위하여 일부러 대마도에 공문서와 사인(使人)을 보냈으리라던지 또 혹은 왕래의 대마도 상인 등을 통하여 구입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하기 곤란하므로 이 저종은 상필 조씨의 유거물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국제 교역은 금일같이 용이한 것이 아니었으며 조선으로서는 가급적 교통을 회피하는 경원(敬遠)의 태도를 취하던 형편이었으므로 교빙의 직접 책임자의 지위에 있는 동래부사로서는 결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쪽수▶P95-3李參奉은 姜啓賢의 齎來한 一本의 藷種을 庭前空地에 培植하였으나 (아마 姜啓賢과 協力하였을▶P96-1것이다) 一本으로서는 不安한 바 있어 念慮하든 中 마침 翌八月에 所親隣人이 東萊府使로 新任되었으므로 그 사람에게 藷種을 付託하였다. 원문주6▶新任府使는 實로 姜必履 그 사람이었다.[6] 姜府使는 信을 직히어 翌年 即英宗四十一年乙酉에 多量의 藷種을 李參奉家 及京城自己本宅에 上送하였을뿐 아니라 東萊地에서도 本格的으로 栽培를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 藷種은 姜必履가 別로히 對馬島等地로부터 購來한 것인가 또는 趙曮의 遺去하였든 그것일가. 지금 그것을 遽然히 判斷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當時의 桑槿關係가 決코 和親치 못하였든 것과 또 藷種을 爲하야 일부러 對馬島에 公文書와 使人을 보냈으리라든지 또 或은 往來의 對馬島商人 等을 通하야 購入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하기 困難하므로 이 藷種은 想必 趙氏의 遺去物이었을 것이다. 當時의 國際交易은 今日같이 容易한 것이 아니었으며 朝鮮으로서는 可及的 交通을 廻避하는 敬遠의 態度를 取하든 形便이었으므로 交聘의 直接責任者의 地位에 있는 東萊府使로서는 決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고심하여 얻은 저종도 그 종법과 유종(留種) 방법을 알지 못하여 경성 지방에서는 결국 불수년에 실패하고 말았으나 남중에는 강필리의 너력으로 다소 전파되었던 모양이다. (당시 부귀가에서만 이것을 진미로 담상(啖賞)할 수 있었다는 것도 흥미있는 이야기 거리이다.)
쪽수▶P96-2이토록 苦心하여 얻은 藷種도 그 種法과 留種方法을 알지 못하야 京城地方에서는 結局 不數年에 失敗하고 말었으나 南中에는 姜必履의 勞力으로 多少 傳播되었든 모양이다. (當時 富貴家에서만 이것을 珍味로 啖賞할 수 있었다는 것도 興味있는 이약이 거리이다.)
이참봉의 약전을 「이참봉집」 서문에 의하여 초출하면
쪽수▶P96-3李參奉의 略傳을 「李參奉集」 序文에 依하야 抄出하면

國朝右文敎三百餘年 參奉李先生々 六十四年卒 于西門外乎洞里第 先生未〿自號 亦〿官以交官喜 無中箱之〿 而集中所載 一時從遊士大夫口誦耳習 固不待集而傳也 昔我 正廟 覽先生爲人作 元陵挽詞 嗟賞久之日 誰所爲也 近世無此作 命修無寃錄 語編輯臣日 聞李某釋此書 得古人意 可采而戟之 嗟乎 先生以一命士 受知聖主 若是其深 而壞實丘園 皓首無施 云々

쪽수▶P96-4

國朝右文敎三百餘年 參奉李先生々 六十四年卒 于西門外乎洞里第 先生未〿自號 亦〿官以交官喜 無中箱之〿 而▶P97-1集中所載 一時從遊士大夫口誦耳習 固不待集而傳也 昔我 正廟 覽先生爲人作 元陵挽詞 嗟賞久之日 誰所爲也 近世無此作 命修無寃錄 語編輯臣日 聞李某釋此書 得古人意 可采而戟之 嗟乎 先生以一命士 受知聖主 若是其深 而壞實丘園 皓首無施 云々

선생은 환로(宦路)에서는 불우(不遇)이었으나 문학은 당대에 있어 파(頗)히 고명하였으며 이규경에 의하면 그 호는 칠탄(七灘)이었다.
쪽수▶P97-2先生은 宦路에서는 不遇이었으나 文學은 當代에 있어 頗히 高名하였으며 李圭景에 依하면 그 號는 七灘이었다.

































































































본문4: 강필리


본문 초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장순은 강씨를 감저의 시조라 하였다. 그러고 서유구의 「종저보」 및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중 만학지 권3 감저조 내에도
쪽수▶P97-3本文 初頭에서 말한 바와 같이 金長淳은 姜氏를 甘藷의 始祖라 하였다. 그러고 徐有榘의 「種藷譜」 及 「林園經濟志」 中 晚學志卷三 甘藷條內에도

我東傳種 始于 英宗乙酉 來自日本 蓋番躇藷也

쪽수▶P97-4

我東傳種 始于 英宗乙酉 來自日本 蓋番躇藷也

라 하였는데 을유년은 강필리가 동래로부터 경성본제 및 이참봉가에 대량으로 저종을 보낸 영종41년(서기1765)이므로 강필리로부터 시초를 삼은 것 같이 해석되기도 한다. 기술한 바와 같이 강필리보다 1년 앞서 강계현이 저종을 구래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겨우 1본이오 또 취종에도 실패하였으므로 비록 그 노력은 가상하나 저조(藷祖)라고 까지는 추앙할 수 없어 이참봉까지가 을유세(乙酉歲)로서 저종지(藷種之) 전어국중(傳於國中)이 시차(始此)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97-5라 하였는데 乙酉年은 姜必履가 東萊로부터 京城本第 及李參奉家에 大量으로 藷種을 보낸 英宗四十一年(西紀一七六五)이므로 姜必履로부터 始初를 삼은 것 같이 解釋되기도 한다. 旣述한 바와 같이 姜必履보다 一年 앞서 姜啓賢이 藷種을 求來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겨우 一本이오 또 取種에도 失敗하였으므로 비록 그 勞力은 可賞하나 藷祖라고 까지는 推仰할 수 없어 李參奉까지가 乙酉歲로서 藷種之 傳於國中이 始此라고 한 것이 안인가한다.
그러면 강필리는 감저에 대하여 얼마만한 관심을 가졌었으며 또 무슨 공적을 남기었는가. 이것을 말하려면 세상에 전하는 소위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금일)란 것이 과연 누구의 저술인가를 먼저 구명할 필요가 있다. 서유구의 「종저보」 및 「임원경제지」 중 만학지 권3 감저조에 인용된 조선측의 감저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오직 「강씨감저보」란 것과 「김씨감저보」란 것과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 및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가 보일 뿐이며 차등(此等)이 감저에 관한 기록의 중요한 자(者)인 모양이다. 그러고 「종저보」는 대체로 만학지 감저조의 기술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며 「김씨감저보」의 저자가 김장순인 것은 「종저보」 및 「만학지」 소인문(所引文)이 김장순의 「감저신보」(여장)의 그것과 전연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명백히 알 수 있으나 「강씨감저보」란 것이 과연 강필리의 작(作)인지 또는 강계현의 저술인지 또는 그 외 하모의 것인지 이 점에 약간 의문이 있다.
쪽수▶P98-1그러면 姜必履는 甘藷에 對하야 얼마만한 關心을 갖이었으며 또 무슨 功蹟을 남기었는가. 이것을 말하랴면 世上에 傳하는 所謂 「姜氏甘藷譜」(今逸)란 것이 果然 누구의 著述인가를 먼저 究明할 必要가 있다. 徐有榘의 「種藷譜」 及 「林園經濟志」中 晚學志卷三 甘藷條에 引用된 朝鮮側의 甘藷에 關한 記錄으로서는 오즉 「姜氏甘藷譜」란 것과 「金氏甘藷譜」란 것과 朴齊家의 「北學議」 及 「增補山林經濟」가 보일 뿐이며 此等이 甘藷에 關한 記錄의 重要한 者인 모양이다. 그러고 「種藷譜」는 大體로 晚學志甘藷條의 記述과 內容이 一致하는 것이며 「金氏甘藷譜」의 著者가 金長淳인 것은 「種藷譜」 及 「晚學志」 所引文이 金長淳의 「甘藷新譜」(余藏)의 그것과 全然一致하는 것으로 보아 明白히 알 수 있으나 「姜氏甘藷譜」란 것이 果然 姜必履의 作인지 又는 姜啓賢의 著述인지 또는 其外 何某의 것인지 이 點에 若干疑問이 있다.
강계현이 학문인이 아니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으니 문인반족의 사랑으로 기식한 위인이면 무식문맹으로 판단할 수는 없고 그리고 감저에 열성이 있었으며 더욱 이참봉의 협력도 상상할 수 있으므로 그 저술이 결코 불가능한 바는 아니다. 하지마는 「종저보」(11장) 및 만학지 감저 토의조에 인용한 강씨감저보 중에
쪽수▶P98-2姜啓賢이 學問人이 아니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으니 文人班族의 舍廊으로 寄食한 爲人이면 無識文盲으로 判斷할 수는 없고 그리고 甘藷에 熱誠이 있었으며 더욱 李參奉의 協力도 想像할 수 있으므로 그 著述이 決코 不可能한 바는 아니다. 하지마는 「種藷譜」(十一張) 及 晚學志 甘藷 土宜條에 引用한 姜氏甘藷譜 中에

昨年(△△) 購藷種于日本(△△△△△△) 種之萊府(△△△△) 或成或不成 細察之 專由土性硬輭之如何耳 云々

쪽수▶P98-3

昨年(△△) 購藷種于日本(△△△△△△) 種之萊府(△△△△) 或成或不成 細察之 專由土性硬輭之如何耳 云々

한 것을 보면 강씨는 동래부에서 자신이 재배 시험한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결코 경성의 강계현일 수 없고 반드시 동래부사 강필리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이 기록은 전인(前引) 이참봉의 ‘우다유직기(又多留稙其)’란 말과도 합치된다. 과연 그러하다면 이 감저의 저술연대까지도 짐작할 수 있으니 강필리가 동래부사로 재임한 기간이 갑신(영종40년) 8월 20일로부터 병술(영종42년) 11월 10일까지이니까 영종41년 혹은 동42년의 찬성(撰成)일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 권3 북저변증설 중에서 “南藷 有姜必敎甘藷譜 金氏甘藷譜 徐五費有榘種落譜 反 日本所傳原譜”라 하여 강필교를 그 저자라고 한 것이다. 현대문주7▶「진주강씨세보(晉州姜氏世譜)」권2 20장 및 32장에 의하면 강필리는 자 석여(錫汝) 숙종39년 계사생 관동래백 지대사간 영종43년 정해졸 향년55이니 동래부사가 된 것은 52세 때이며 54세 때 내직으로 전보(轉補) 55세 6월에[a 7] 대사간이 되었다가 미구(未久)에 사(辭)하고 동년 11월에 작고하였다. 필교는 필리의 형제로 출계하였고 관현감 경오진사장원 경종2년 임인생 정종3년 무오졸 향년77이며 그 형이 동래부사가 된 영종40년 갑신은 그의 43세 때이니 출계한 사십여 세의 사람으로 그 형에 수행하였을 리도 없으니(그들이 경성에 거주하였던 것은 이참봉집에서 알 수 있다) 그가 동래서 감저를 재배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고 「진산세고속집(晉山世稿續集)」이며 「진주강씨가장(晉州姜氏家狀)」 등에도 그들의 사적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강씨감저보 완본이 출현하기 까지는 저보가 감저보의 것이거나 혹은 감저보의 유저에 그 형제 필교가 다소의 산증(刪增)을 가하여 세상에 공포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규경의 착오일 것이다.
쪽수▶P98-4한 것을 보면 姜氏는 東萊府에서 自身이 栽培試驗한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決코 京城의 姜啟賢일 수▶P99-1없고 반다시 東萊府使 姜必履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이 記錄은 前引 李參奉의 「又多留稙其他」란 말과도 合致된다. 果然 그러하다면 이 甘藷의 著述年代까지도 짐작할 수 있으니 姜必履가 東萊府使로 在任한 期間이 甲申(英宗四十年)八月二十日로부터 丙戌(英宗四十二年)十一月十日까지이니까 英宗四十一年 或은 同四十二年의 撰成일 것이 明白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問題가 되는 것은 李圭景이 「五洲衍文長箋散稿」卷三 北藷辨證說 中에서 「南藷 有姜必敎甘藷譜 金氏甘藷譜 徐五費有榘種落譜 反 日本所傳原譜」라 하야 姜必敎를 그 著者라고 한 것이다. 원문주7▶「晉州姜氏世譜」卷二三十張 及 三十二張에 依하면 姜必履는 字錫汝 肅宗三十九年 癸巳生 官東萊伯 至大司諫 英宗四十三年 丁亥卒 享年五十五이니 東萊府使가 된 것은 五十二歲時이며 五十四歲時 內職으로 轉補 五十五歲時 六月에[7] 大司諫이 되였다가 未久에 辭하고 同年十一月에 作故하였다. 必敎는 必履의 弟로 出系하였고 官縣監 庚午進士壯元 景宗二年壬寅生 正宗三年戊午卒 享年七十七이며 其兄이 東萊府使가 된 英宗四十年甲申은 그의 四十三歲時이니 出系한 四十餘歲의 人으로 其兄에 隨行하였을 理도 없으니(그들이 京城에 居住하였든 것은 李參奉集에서 알 수 있다) 그가 東萊서 甘藷를 栽培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고 「晉山世稿續集」이며 「晉州姜氏家狀」 等에도 그들의 事蹟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姜氏甘藷譜 完本이 出現하기 까지는 藷譜가 甘藷譜의 것이거나 或은 甘藷譜의 遺著에 其弟 必敎가 多少의 刪增을 加하야 世上에 公布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 아니하면 李圭景의 錯誤일 것이다.
이로써 보면 강씨는 이참봉의 권면(勸勉)에 공명하여 동래 부임 후 감저의 취종 및 전파에 노심하였으며 저서까지를 세상에 전하였으나 그의 임기가 겨우 2년 3개월이라는 단기이었음과 또 재관의 몸으로 저사(藷事)에만 전심할 수 없는 관계도 있었던지 그 저서에 많은 결함이 있다는 것은 김장순의 설이다. 그러고 그 저종도 아마 조엄의 구래유탁한 그것이었을 것과 또 저종의 일부를 자기 경제 및 이참봉가에 보내어 중앙 이식을 도모하였다는 것도 기술하였다. 강필리씨는 그 문집의 행하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이 이상 그의 감저에 대한 공적을 알기 어렵다. 그리고 그 「감저보」도 지금 일서(逸書)가 되어 그 전모를 알기 어려우나 김장순이 그 「감저신보」 말에 부록한 「강씨감저보변와」 서문에서
쪽수▶P100-1이로서 보면 姜氏는 李參奉의 勸勉에 共鳴하야 東萊赴任後 甘藷의 取種及傳播에 勞心하였으며 著書까지를 世上에 傳하였으나 그의 任期가 겨우 二年三個月이라는 短期이었음과 또 在官의 몸으로 藷事에만 專心할 수 없는 關係도 있었든지 그著書에 많은 缺陷이 있다는 것은 金長淳의 說이다. 그러고 그 藷種도 아마 趙曮의 購來遺託한 그것이었을 것과 또 藷種의 一部를 自己京第 及 李參奉家에 보내여 中央移植을 圖謀하였다는 것도 旣述하였다. 姜必履씨는 그 文集의 行하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이 以上 그의 甘藷에 對한 功績을 알기 어렵다. 그리고 그 「甘藷譜」도 지금 逸書가 되어 그 全貌를 알기 어려우나 金長淳이 그 「甘藷新譜」末에 附錄한 「姜氏甘藷譜辨訛」 序文에서

緖譜 有故案考·續錄考‧記聞考·驗試考 而多有詿誤者 此皆他國人忌其取種 不以情告 而姜氏具蒐輯 以傳於世 後 之種藷者 試之一歲 而不驗 則使同芭蘺邊物事 然則此譜之傳 非徒無益 而又害之矣 然而徒以新譜刊傳 則與舊譜混淆 眞〿莫辨 故今於舊譜詿誤處 逐條辨之 傳免後人臨歧趟趑趄之嘆云爾

쪽수▶P100-2

緖譜 有故案考·續錄考‧記聞考·驗試考 而多有詿誤者 此皆他國人忌其取種 不以情告 而姜氏具蒐輯 以傳於世 後 之種藷者 試之一歲 而不驗 則使同芭蘺邊物事 然則此譜之傳 非徒無益 而又害之矣 然而徒以新譜刊傳 則與舊譜混淆 眞〿莫辨 故今於舊譜詿誤處 逐條辨之 傳免後人臨歧趟趑趄之嘆云爾

라 한 것으로 보아 그 구성과 실용가치 등을 짐작할 수 있으나 하여튼 이것은 감저에 관한 최초의 문헌이었으며 김장순의 인용문에 의하여 강씨가 중국 문헌으로서 「농정전서(農政全書)」 「이물지(異物志)」 「광지(廣誌)」 「패사류편(稗史類編)」 등을 인용한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소장본이 「강씨감저보변와」의 부분이 완전치 못한 것이 유감이며 서유구의 인용도 결코 그 전부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쪽수▶P100-3라 한 것으로 보아 그 構成과 實用價値 等을 짐작할 수 있으나 何如튼 이것은 甘藷에 關한 最初의 文獻이었으며 金長淳의 引用文에 依하야 姜氏가 中國文獻으로서 「農政全書」 「異物志」 「廣誌」 「稗史類編」 等을 引用한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余所藏本이 「姜氏甘藷譜辨訛」의 部分이 完全치 못한 것이 遺憾이며 徐有榘의 引用도 決코 그 全部에 及치는 못하였다.









































본문5: 김장순·선종한


이상은 영종39년 계미(거금 177년)로부터 동41년 을유에 이르는 3년간의 감저 사실을 고구한 것이나 그 후의 경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제현(諸賢)의 노력은 다행히 헛되지 아니하여 그 후 14년 정종2년 무술에 된 박제가의 「북학의」 종저조에는
쪽수▶P101-1以上은 英宗三十九年癸未(距今百七十七年)로부터 同四十一年乙酉에 이르는 三年間의 甘藷事實을 考究한 것이나 其後의 經過는 어떻케 되었는가. 諸賢의 努力은 多幸히 處ㅅ되지 아니하야 其後十四年 正宗二年戊戌에 된 朴齊家의 「北學議」種藷條에는

甘藷爲救荒第一 宜令屯田官 別種之 叉於箭串·栗島等處 可以多種 又勸民自種 當年內不忠不繁 云々

쪽수▶P101-2

甘藷爲救荒第一 宜令屯田官 別種之 叉於箭串·栗島等處 可以多種 又勸民自種 當年內不忠不繁 云々

이라 하여 장려의 기운이 움직이었으며 또 남방에서는 점차로 전파되었고 국가에서도 시시로 이것을 권장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을유 후 35년인 정종22년 무오년 11월의 장태(狀態)에 대하여 「정종실록」 권50(29장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쪽수▶P101-3이라하야 獎勵의 機運이 움직이었으며 또 南方에서는 漸次로 傳播되었고 國家에서도 時々로 이것을 勸獎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乙酉後三十五年인 正宗二十二年戊午年十一月의 狀態에 對하야 「正宗實錄」卷五十(二十九張裏)에는 다음과 같은 記錄이 보인다.

備邊司覆奏曰 云云 甘藷事 甘藷實爲救荒之要種 南沿諸邑 間多有之 年前亦已申飭培養 而實效有無 姑未可知 更爲另飭諸道
[國家의 答] 甘藷取種事 其功之幾與菽粟等 充膓潤胃 味亦〿〿 所以購貿·裁植之方 亦不必別頒新令 令各該道臣 各思食效之道 無或看作例飭

쪽수▶P101-4

備邊司覆奏曰 云云 甘藷事 甘藷實爲救荒之要種 南沿諸邑 間多有之 年前亦已申飭培養 而實效有無 姑未可知 更爲另飭諸道
[國家의 答] 甘藷取種事 其功之幾與菽粟等 充膓潤胃 味亦〿〿 所以購貿·裁植之方 亦不必別頒新令 令各該道臣 各思食效之道 無或看作例飭

현대문주8▶이것은 당시 대대적으로 농정을 진작[a 8]코저한 왕지(王旨)에 응하여 비변사(備邊司)가 농정전서 광포중외사 제언사 감저사 영남조선사 등 四項을 주상(奏上)한 중의 그 일이다.
쪽수▶P101-5원문주8▶이것은 當時 大々的으로 農政을 振作[8]코저한 王旨에 𥌾하야 備邊司가 農政全書廣布中外事 堤堰事 甘藷事 嶺南漕船事等 四項을 奏上한 中의 其一이다.
다시 15년을 지나 즉 감저전래 50년만인 순조13년 계서에 이르러 김장순 선종한 2인이 일어나 감저전파에 노심하였으니 그들의 공은 2인 공저인 「감저신보」(통칭 김씨저보라는 것이다)에서 엿볼 수 있다. 그 김장순 서문에
쪽수▶P102-1다시 十五年을 지나 即甘藷傳來 五十年만인 純祖十三年癸西에 이르러 金長淳 宣宗漢 二人이 이러나 甘藷傳播에 勞心하였으니 그들의 功은 二人共著인 「甘藷新譜」(通稱 金氏藷譜라는 것이다)에서 엿볼 수 있다. 그 金長淳序文에

云云 今有物 其用適於布帛菽粟 而其利〿於布帛敦菽粟者 其名曰藷 余昔在南邑也 濱海之人 有以是諸遺者 始甞其味 實種蒔中佳品 而救荒之良劑也 余思欲廣布於一國 問諸其人 曰此種始自萊府 購來於日本 至於仰澈 朝家 遠播八域 〿而皆非土宜 故獨湖南濱海之地 徍往有之矣 余聞甚恨之 而視之若渡淮之橘 西蜀之荒矣 玆後 適遇兆陽宣君武賢 市語到藷事 而以余所聞告之 宣君笑曰 此種何處不宜 而萊府購得之時 其所傳種蒔之力 皆被日人揶揄者也 吾所居之土 素稱非其宜 而吾手種九年(△△△△△△) 盡得其妙矣(△△△△△) 若使一國之人 皆如吾法 魯空之懸盤 不足憂也 宋野之呼庚 無足畏矣 然而南土之人 亦相秘其法 于今五十年(△△△△△) 未得究實效於一國生靈(△△△△△△△△△△) 吾甚痛之 今吾携得數百本種子而來(△△△△△△△△△△△) 欲先於京國誌之(△△△△△△△) 以爲八方之描楷(△△△△△△△) 而無足與議者 良可歎也 余聞甚壯之門 是誠仁人君子之志也 若使其利 幈幪於億萬元元 則是亦一布帛菽粟 而可使紋綉珠玉 爲糞土矣 余當樂與之周章矣 於是春 種得幾眭 至秋 乃收勝得數千百本 然後 始知〿可渡淮 而〿可種蜀矣 於是 宣君屬余 著爲種蒔食品之規 又請辯卷之文 以廣其傳 顧余蔑識 不足以撰綴文字 而〿不能浞默者 誠愛其志之不謀而同 亦希其惠之普被一世 玆述顚末 以俟識務者之有取焉 崇禎紀元後三癸酉冬十二月甲子 安東 金長淳序

쪽수▶P102-2

云云 今有物 其用適於布帛菽粟 而其利〿於布帛敦菽粟者 其名曰藷 余昔在南邑也 濱海之人 有以是諸遺者 始甞其味 實種蒔中佳品 而救荒之良劑也 余思欲廣布於一國 問諸其人 曰此種始自萊府 購來於日本 至於仰澈 朝家 遠播八域 〿而皆非土宜 故獨湖南濱海之地 徍往有之矣 余聞甚恨之 而視之若渡淮之橘 西蜀之荒矣 玆後 適遇兆陽宣君武賢 市語到藷事 而以余所聞告之 宣君笑曰 此種何處不宜 而萊府購得之時 其所傳種蒔之力 皆被日人揶揄者也 吾所居之土 素稱非其宜 而吾手種九年(△△△△△△) 盡得其妙矣(△△△△△) 若使一國之人 皆如吾法 魯空之懸盤 不足憂也 宋野之呼庚 無足畏矣 然而南土之人 亦相秘其法 于今五十年(△△△△△) 未得究實效於一國生靈(△△△△△△△△△△) 吾甚痛之 今吾携得數百本種子而來(△△△△△△△△△△△) 欲先於京國誌之(△△△△△△△) 以爲八方之描楷(△△△△△△△) 而無足與議者 良可歎也 余聞甚壯之門 是誠仁人君子之志也 若使其利 幈幪於億萬元元 則是亦一布帛菽粟 而可使紋綉珠玉 爲糞土矣 余當樂與之周章矣 於是春 種得幾眭 至秋 乃收勝得數千百本 然後 始知〿可渡淮 而〿可種蜀矣 於是 宣君屬余 著爲種蒔食品之規 又請辯卷之文 以廣其傳 顧余蔑識 不足以撰綴文字 而〿不能浞默者 誠愛其志之不謀而同 亦希其惠之普被一世 玆述顚末 以俟識務者之有取焉 崇禎紀元後三癸酉冬十二月甲子 安東 金長淳序

라 하고 또 그 문답편 중에는
쪽수▶P102-3라하고 또 그 問答篇中에는

藷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 云云 姜氏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傳布 而其方則 日人之所秘 而暪告者也 是故 種之一歲 而不驗則 人皆不信 云云 兹故 余必手種 盡知其妙 然後乃敢舉筆作譜 不然則 人誰信之乎 此實出於爲一世救民之志 云云
客又問曰 雖然 東俗自是貿貿 〿在上之人 遍告一國 不啻若耳提而面命 惟恐其不從 而况吾子(△△) 今以自面書(△△△△△)生 欲以一 幅紙新譖 一朝墉其積久之迷 則不幾於以一尺之膠 救千尋之濁者平 余喟然三嘆而答曰 是誠然矣 云云 余若知之 而不告於世 則是誠不仁也 告之而不吾從 則非吾所恤也 云云

쪽수▶P103-1

藷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 云云 姜氏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傳布 而其方則 日人之所秘 而暪告者也 是故 種之一歲 而不驗則 人皆不信 云云 兹故 余必手種 盡知其妙 然後乃敢舉筆作譜 不然則 人誰信之乎 此實出於爲一世救民之志 云云
客又問曰 雖然 東俗自是貿貿 〿在上之人 遍告一國 不啻若耳提而面命 惟恐其不從 而况吾子(△△) 今以自面書(△△△△△)生 欲以一 幅紙新譖 一朝墉其積久之迷 則不幾於以一尺之膠 救千尋之濁者平 余喟然三嘆而答曰 是誠然矣 云云 余若知之 而不告於世 則是誠不仁也 告之而不吾從 則非吾所恤也 云云

이라 하였다. 그들은 모두 무명인사로 그들의 대지(大志)가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자신도 없었던 모양이나 하여튼 선종한은 9년이란 세월을 비(費)하여 감저를 연구하여 그 성과를 김장순과 함께 저술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엔 벌써 망일(亡逸)되어 그들의 이름조차 영구히 인멸되려는 것을 천행으로 진실로 천행으로 그 원본을 얻게 된 것이다.
쪽수▶P103-2이라 하였다. 그들은 모도 無名人士로 그들의 大志가 반다시 成功하리라는 自信도 없었든 모양이나 何如튼 宣宗漢은 九年이란 歲月을 費하야 甘藷를 硏究하여 그 成果를 金長淳과 함게 著述하였든 것이다. 그것이 지금엔 벌서 亡逸되여 그들의 일홈조차 永久히 湮滅되려는 것을 天幸으로 眞實로 天幸으로 그 元本을 얻게 된 것이다.
김장순은 자 인보(仁甫) 안동인이며 선종한은 자 무현(武賢) 보성인인 것이 그 저서 소기에 의하여 알 수 있고 그 서문에 의하여 보면 김장순은 경성 거주의 사람이며 선종한은 보성서 종저법을 연구하여 중앙에 시(試)코자 수백본의 종자를 경성으로 지래(持來)하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그 시종(試種)이 성공하였던 모양이다. 과연 그로부터 경기의 저식(藷植)이 전포된 것인지 어쩐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쪽수▶P103-3金長淳은 字仁甫 安東人이며 宣宗漢은 字武賢 寶城人인 것이 그 著書所記에 依하야 알 수 있고 그 序文에 依하야 보면 金長淳은 京城居住의 人이며 宣宗漢은 寶城서 種藷法을 硏究하야 中央에 試코저 數百本의 種子를 京城으로 持來하였든 모양이다. 그러고 그 試種이 成功하였든 모양이다. 果然 그로부터 京畿의 藷植이 傳布된 것인지 어쩐지는 詳考할 길이 없다.
선김 2인으로부터 다시 21년을 지나 순조34년에 서유구가 「종저보」를 지어 호남에 권식(勸植)하였으니 그 뜻은 그 자서 중에
쪽수▶P103-4宣金二人으로부터 다시 二十一年을 지나 純祖三十四年에 徐有榘가 「種藷譜」를 지어 湖南에 勸植▶P104-1하였으니 그 뜻은 그 自序中에

云云 番藷 在菓蓏中 最後出 可以賙饑 可以延年 又可以禦蝗而弭旱 誠奇種也 始自閩廣 殆遍天下 獨我東 近始購種 於日本 沿海若而邑 僅得傳殖 而崍野之民 不識藷爲何物 非果風土不宜 職由傳種蒔壅之不得其方耳 歲甲午 余巡按湖南 見蘆嶺南北 往往有平疇衍壠 一望汙萊 詢之土人 曰往値巳巳甲戍之餞 佃戶流亡 鎡基不入者久矣 噫天與之時 地與之產 皆所以養人也 而特因人工之不逮 拋天之時 錭地之產 橫計於土地 所失者將不知爲幾千萬億 云云 余爲是懼 函訪藷種於產藷州郡 頒諸列邑 且取皇明徐玄扈甘藷疏 我東姜金二氏之譜 彚類編纂 用聚珍宇 擺印廣布 以諗其 種藝之法焉 云云 願與今日牧民之長 交相勗之 上之三十四年甲午季春 湖南巡察使 徐有榘 書于觀風軒中

쪽수▶P104-2

云云 番藷 在菓蓏中 最後出 可以賙饑 可以延年 又可以禦蝗而弭旱 誠奇種也 始自閩廣 殆遍天下 獨我東 近始購種 於日本 沿海若而邑 僅得傳殖 而崍野之民 不識藷爲何物 非果風土不宜 職由傳種蒔壅之不得其方耳 歲甲午 余巡按湖南 見蘆嶺南北 往往有平疇衍壠 一望汙萊 詢之土人 曰往値巳巳甲戍之餞 佃戶流亡 鎡基不入者久矣 噫天與之時 地與之產 皆所以養人也 而特因人工之不逮 拋天之時 錭地之產 橫計於土地 所失者將不知爲幾千萬億 云云 余爲是懼 函訪藷種於產藷州郡 頒諸列邑 且取皇明徐玄扈甘藷疏 我東姜金二氏之譜 彚類編纂 用聚珍宇 擺印廣布 以諗其 種藝之法焉 云云 願與今日牧民之長 交相勗之 上之三十四年甲午季春 湖南巡察使 徐有榘 書于觀風軒中

이라 한 것에 보아 명백하다. 서유구는 자 준평(準平) 호 풍석(楓石) 대구인 관지리조판서 익문간공 보만재총서의 저자인 명응(命膺)의 손(孫)으로 대대로 경제학자로 유명하고 그의 대저 「임원경제지」 53책은 조선경제학의 대집성으로 이미 천하 유명한 것이며 기타에도 다수의 저서가 있다.
쪽수▶P104-3이라 한 것에 보아 明白하다. 徐有榘는 字準平 號楓石 大邱人 官至吏曹判書 謚文簡公 保晚齋叢書의 著者인 命膺의 孫으로 代々로 經濟學者로 有名하고 그의 大著 「林園經濟志」 五十三冊은 朝鮮經濟學의 大集成으로 이미 天下 有名한 것이며 其他에도 多數의 著書가 있다.
이로써 보면 저종전래 71년만인 서유구 당시에도 종저는 남방에 편행하고 아직 중부에는 그다지 행치 아니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현대문주9▶이로부터 다시 13년[a 9]을 지나 헌종13년 정미에 이규경은 그의 유명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그의 소위 남저(즉 감저)의 전포 상태에 대하여
쪽수▶P104-4이로써 보면 藷種傳來 七十一年만인 徐有榘 當時에도 種藷는 南方에 偏行하고 아즉 中部에는 그대지 行치 아니하였든 것을 알 수 있다. 원문주9▶이로부터 다시 十三年[9]을 지나 憲宗十三年丁未에 李圭景은 그의 有名한 「五州衍文長箋散稿」에서 그의 所謂 南藷(即甘藷)의 傳布狀態에 對하야

且南藷則 我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註略)傳種 南沿郡邑多種之 尙未聞代糧救荒 好事者(△△△) 或移栽圻湖(△△△△△) 不善〿殖 動値雌黃 云云

쪽수▶P104-5

且南藷則 我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註略)傳種 南沿郡邑多種之 尙未聞代糧救荒 好事者(△△△) 或移栽圻湖(△△△△△) 不善〿殖 動値雌黃 云云

이라 하여 이종(移種) 팔십여 년 후에도 오히려 기호(畿湖)에 보급되지 못하고 호사자가 별미로 재배함에 불과하였으며 남방에 있어서도 대량 구황의 정도에까지 발달되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고 차술 이규경설에 의하면 기호 관동 등지에는 헌종조에 북저가 성입하여 남저를 〿수할 형세에 있었다하며 금일은 함북을 제한 전도에 남북저가 함께 성행하는 상태이며 또 이미 남저를 말한 김이니 다음에 이규경의 북저설을 소개하여 두고자 한다.
쪽수▶P105-1이라 하야 移種八十餘年後에도 오히려 畿湖에 普及되지 못하고 好事者가 別味로 栽培함에 不過하였으며 南方에 있어서도 代糧救荒의 程度에까지 發達되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고 次述 李圭景說에 依하면 畿湖 關東等地에는 憲宗朝에 北藷가 盛入하야 南藷를 〿遂할 形勢에 있었다하며 今日은 咸北을 除한 全道에 南北藷가 함끼 盛行하는 狀態이며 또 이미 南藷를 말한 김이니 다음에 李圭景의 北藷說을 紹介하여 두고저 한다.






































본문6: 이규경북저설


소위 북저(마령서(馬鈴薯))에 대하여는 달리 볼 만한 기록이 없고 오직 이규경의 설이 가장 상밀하다. 다음에 그 대략을 초(抄)하여 보면 「오주연문장전산고」 권3 북저변증설 중에
쪽수▶P105-2所謂 北藷(馬鈴薯)에 對하야는 달리 볼 만한 記錄이 없고 오죽 李圭景의 說이 가장 詳密하다. 다음에 그 大略을 抄하여 보면 「五洲衍文長箋散稿」 卷三 北藷辨證說 中에

云云 天於其間 眷眷不忘 若慈母之戀子 不忍遺棄 爱生一物 水旱不能侵 饒瘠不足擇 以代民食 其名日藷 其餘物也 性平味甘 好生喜蔓 可埒嘉縠 民賴以生 宜旡餘蘊也 然而慮其南北異宜 便生一物 與藷相類 原濕俱宜 方城隨處 茍得寸士 傳生極繁 比藷尤盛 天爲斯民 何若是周悉之悲耶 從茲以往 藷有南北之別 所謂南藷 則出自蕃夷 或稱番藷 通稱甘藷 最冗南方 故名之以南 所謂北藷 則雖緣北來 適冝四方 而特自北徼 故名焉 或曰 與南藷 同源而派別(△△△△△) 盖莖葉頗殊(△△△△△) 根魋碩異(△△△△) 而似番藷之卵 故強名曰躇 番藷則早出 而見於群書 又有藷譜 南藷 有姜必教甘藷譜 金氏甘譜譜 徐五費有榘種藷譜 及日本所傳原譜 云云
唯北藷 則晚出 而入于我東者 才經一紀(△△) 姑無表章著錄 未得噪名 此物之幸不幸也 貝南藷 則我 英廟乙酉 李七灘 從日本得來傳種 云云 北藷則 越豆滿 入于北塞 似在我 純廟甲申乙酉之間 自 英廟乙酉 距 純廟甲申乙酉之間 則已經一甲 而自 純廟甲申乙酉之間 距今富宁丁未(△△△△△) 則及過二十三年(△△△△)矣 云云
北藷之來 未滿一紀(△△△△) 播種諸處 俱得其利楊州·原州·鐵原等邑 凶歲種此免飢 北關鏡城府輸城驛距里山谷村落 近五六十戶 專種爲業 爲一年之糧云試種都下 數弓沙士 蕃廡不已 稱頌者方滔滔 若因此廣播 則蹲鴟胡擅其素封之美區 芋焉得爲獨阜民之利哉 但恐北藷興(△△△△) 則南藷衰矣(△△△△△) 前賢艱得之功 可不惜哉 云云
北藷 一名土甘藷 純廟甲申乙酉之間 始自關北出來 或言 明川府金某(△△△△△) 業唐舉者 游京師 傳北藷始 或曰 此物自北界 彼地而傳種 厥初 彼人以探蔘 犯越我境 結棚山谷 種此爲食 及其入去 其跧伏處畦間 遺一物 葉如蕪菁 根似薯芋 不知爲何物 移栽我土 極繁殖 詢于開市被商 則以爲北方甘藷 食以爲糧云
李茂出亨在 爲茂山倅也 聞而求諸民間 不應焉 間其故 咸曰 前此謠言(△△), 北藷渡江(△△△△) 寸士如金(△△△△) 州宰惡之 柰其種蒔 然民間利其食 冒禁潜種 故不敢進 李倅以塩貿之 仍得流播
其狀不類藷 而名北藷 莖葉似提倉 葉參差相比 云云 大〿如拳 小卵如丸 皮薄微黃 肉軟如芋而白 味甘淡潤 比蕷稍鬆 〿雖北產 遍宜四方 旡處不生 取其根魁 視其生芽處 點點微凹 如人毛孔 以竹刀剜之取種 旡皮旡不生而腐 折莖插之亦生 以子種之亦生 以土罋節亦生 其好生性也 地旡所擇 然最忌下濕 又惡大穢小便 云云 北藷南藷 其利最勝 藏種甚易 不憚暎澇 不厭饒瘠 不藉芸藝 不責灌漑 誠濟民之奇貨也 云云

쪽수▶P105-3

云云 天於其間 眷眷不忘 若慈母之戀子 不忍遺棄 爱生一物 水旱不能侵 饒瘠不足擇 以代民食 其名日藷 其餘物也 性平味甘 好生喜蔓 可埒嘉縠 民賴以生 宜旡餘蘊也 然而慮其南北異宜 便生一物 與藷相類 原濕俱宜 方城隨處 茍得寸士 傳生極繁 比藷尤盛 天爲斯民 何若是周悉之悲耶 從茲以往 藷有南北之別 所謂南藷 則出自蕃夷 或稱番藷 通稱甘藷 最冗南方 故名之以南 所謂北藷 則雖緣北來 適冝四方 而特自北徼 故名焉 或曰 與南藷 同源而派別(△△△△△) 盖莖葉頗殊(△△△△△) 根魋碩異(△△△△) 而似番藷之卵 故強名曰躇 番藷則早出 而見於群書 又有藷譜 南藷 有姜必教甘藷譜 金氏甘譜譜 徐五費有榘種藷譜 及日本所傳原譜 云云
▶P106唯北藷 則晚出 而入于我東者 才經一紀(△△) 姑無表章著錄 未得噪名 此物之幸不幸也 貝南藷 則我 英廟乙酉 李七灘 從日本得來傳種 云云 北藷則 越豆滿 入于北塞 似在我 純廟甲申乙酉之間 自 英廟乙酉 距 純廟甲申乙酉之間 則已經一甲 而自 純廟甲申乙酉之間 距今富宁丁未(△△△△△) 則及過二十三年(△△△△)矣 云云
北藷之來 未滿一紀(△△△△) 播種諸處 俱得其利楊州·原州·鐵原等邑 凶歲種此免飢 北關鏡城府輸城驛距里山谷村落 近五六十戶 專種爲業 爲一年之糧云試種都下 數弓沙士 蕃廡不已 稱頌者方滔滔 若因此廣播 則蹲鴟胡擅其素封之美區 芋焉得爲獨阜民之利哉 但恐北藷興(△△△△) 則南藷衰矣(△△△△△) 前賢艱得之功 可不惜哉 云云
北藷 一名土甘藷 純廟甲申乙酉之間 始自關北出來 或言 明川府金某(△△△△△) 業唐舉者 游京師 傳北藷始 或曰 此物自北界 彼地而傳種 厥初 彼人以探蔘 犯越我境 結棚山谷 種此爲食 及其入去 其跧伏處畦間 遺一物 葉如蕪菁 根似薯芋 不知爲何物 移栽我土 極繁殖 詢于開市被商 則以爲北方甘藷 食以爲糧云
李茂出亨在 爲茂山倅也 聞而求諸民間 不應焉 間其故 咸曰 前此謠言(△△), 北藷渡江(△△△△) 寸士如金(△△△△) 州宰惡之 柰其種蒔 然民間利其食 冒禁潜種 故不敢進 李倅以塩貿之 仍得流播
其狀不類藷 而名北藷 莖葉似提倉 葉參差相比 云云 大〿如拳 小卵如丸 皮薄微黃 肉軟如芋而白 味甘淡潤 比蕷稍鬆 〿雖北產 遍宜四方 旡處不生 取其根魁 視其生芽處 點點微凹 如人毛孔 以竹刀剜之取種 旡皮旡不生而腐 折莖插之亦生 以子種之亦生 以土罋節亦生 其好生性也 地旡所擇 然最忌下濕 又惡大穢小便 云云 北藷南藷 其利最勝 藏種甚易 不憚暎澇 不厭饒瘠 不藉芸藝 不責灌漑 誠濟民之奇貨也 云云

이규경이 일기(一紀)를 기년(幾年)으로 생각하였는지는 불명하나 23년에 대하여 이것을 재경일기(才經一紀)이니 미경일기(未經一起)이니 한 것은 명백하여 북저는 거금 115-6년 전에 북관으로 이식된 것이며 명천 김모씨 재래설 청인 채삼자(採蔘者)의 유거설 등이 있었고 당시 그것이 급속도로 전파되어 지가(地價)가 고등한 것도 짐작할 수 있으며 이형재(李亨在)가 그것을 경기에 유파(流播)한 사실도 알 수 있다. 단 주재(州宰)가 그 재배를 금하였단 말은 좀 이해키 곤란하나 혹은 곡물 대신 감저를 심어 조세를 받기 어려운 무슨 이유가 그 사이에 있지 아니하였던가 하는 상상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북저는 그 종식(種植)의 용이함과 기후에 무관한 관계로 불과 백년에 전역에 보급되었으나 남저는 온대(溫帶) 소산인 까닭으로 금일도 오히려 함북 및 함남 고산지대‧평남도 고산지대 등에는 전파되지 못한 모양이다.
쪽수▶P107-1李圭景이 一紀를 幾年으로 생각하였는지는 不明하나 二十三年에 對하야 이것을 才經一紀이니 未經一起이니 한 것은 明白하여 北藷는 距今 百十五六年 前에 北關으로 移植된 것이며 明川金某氏 齋來 說 淸人 採蔘者의 遺去說 等이 있었고 當時 그것이 急速度로 傳播되어 地價가 高騰한 것도 짐작할 수 있으며 李亨在가 그것을 京畿에 流播한 事實도 알 수 있다. 但 州宰가 그 栽培를 禁하였단 말은 좀 理解키 困難하나 或은 穀物 代身 甘藷를 심어 租稅를 받기 어려운 무슨 理由가 其間에 있지 아니하였든가 하는 想像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北藷는 그 種植의 容易함과 氣候에 無關한 關係로 不過 百年에 全域에 普及되었으나 南藷는 溫帶 所産인 까닭으로 今日도 오히려 咸北 及 咸南 高山地帶‧平南道 高山地帶 等에는 傳播되지 못한 모양이다.













































본문7: 명칭


문헌상에는 고구마를 감저라고 하나 속어로는 북저(北藷) 즉 마령서(馬鈴薯)를 감자(○○)라 하고 감저(甘藷)는 고구마라고 할 뿐이다. 이 고구마의 어원에 대하여 이규경은 “我東以盛於古今島 稱宙合伊 膾炙人口”라 하였으나 이것은 억설인 듯하고 조엄의 「해사일기」(전인) 중의 “島中有草根可食者 名曰甘藷 或謂孝子麻 日音古貴爲麻”라는 힌트에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대마도 방언 コウコウイモ(효행우(孝行芋))라는 것이 와전된 것인 모양이다. 효자우(孝子芋)설은 조선에도 전하여 「오주연문(五洲衍文)」 중에도 “日本所傳原譜 日本呼甘藷曰 古古里文畏 日本方言孝子曰 古古伊 謂芋魁曰文畏 昔孝子始種藷以養親 而藷如芋魁故名”라 하였다. 그러나 이 어학적 설명에는 불통하는 점이 있으니 고고이(古古伊)는 방사(彷似)하나 문외(文畏)는 외문(畏文)의 전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강씨감저보」(종저보 2장리 소인)에는 “甘藷日人呼爲古古伊文瓜”라 하였는데 고고이문(古古伊文)은 용이히 해석되지마는 과(瓜)는 연자(衍字)일까 한다. 조엄의 고귀위마(古貴爲麻)가 친문(親聞)인 만큼 가장 정확한 음일 것이다.
쪽수▶P107-2文獻上에는 고구마를 甘藷라고 하나 俗語로는 北藷 即馬鈴薯를 감자(○○)라 하고 甘藷는 고구마라고 할 뿐이다. 이 고구마의 語源에 對하야 李圭景은 「我東以盛於古今島 稱宙合伊 膾炙人口」라 하였으나 이것은 臆說인 듯하고 趙曮의 「海槎日記」(前引) 中의 「島中有草根可食者 名曰甘藷 或謂孝子麻 日音古貴爲麻」라는 힌트에서 說明하는 것이 妥當할 것이다. 即 對馬島 方言 コウコウイモ(孝行芋)라는 것이 訛傳된 것인 모양이다. 孝子芋說은 朝鮮에도 傳하야 「五洲衍文」 中에도 「日本所傳原譜 日本呼甘藷曰▶P108-1古古里文畏 日本方言孝子曰 古古伊 謂芋魁曰文畏 昔孝子始種藷以養親 而藷如芋魁故名」라 하였다. 그러나 이 語學的 說明에는 不通하는 點이 있으니 古古伊는 彷似하나 文畏는 畏文의 顚倒가 아닌가 생각된다. 「姜氏甘藷譜」(種藷譜 二張裏 所引)에는 「甘藷日人呼爲古古伊文瓜」라 하였는데 古古伊文은 容易히 解釋되지마는 瓜는 衍字일가 한다. 趙曮의 古貴爲麻가 親聞인 만큼 가장 正確한 音일 것이다.
평안도에서는 마령서를 토종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단히 감자라 하고 감저는 외래종이란 의미로 호(胡)감자라고 한다. 이것은 해도(該道)의 감저가 최근세에 남방으로부터 이식된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쪽수▶P108-2平安道에서는 馬鈴薯를 土種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單히 감자라 하고 甘藷는 外來種이란 意味로 胡감자라고 한다. 이것은 該道의 甘藷가 最近世에 南方으로부터 移植된 것을 意味하는 말이 안인가 한다.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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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英宗乙酉는 姜必履가 東萊로부터 藷種을 보낸 해이오 姜啓賢은 그 前年인 甲申에 密陽에서 信使行中의 藷種을 求得한 것이다. 李參奉集을 精讀치 아니한 까닭으로 此誤을 犯한 것이다. 本文 姜啓賢條 參照.
  2. 趙寅永 「雲石遺稿」 卷十五 王考永湖府君家狀 叅照.
  3. 趙曮 「海槎日記」(朝鮮故書刊行會本 海行摠載四 一三三頁 一五二頁―一五八頁 三二七頁 百十二行 等 參照). 松田氏가 英祖 三十九年 十二月에 第一次로 藷種이 釜山鎭에 送致되었다고 한 것은 誤植인가 한다. 陽曆換算이 아닌 것은 다른 곳에서 모도 陰曆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아 明白하다.
  4. 朝鮮故書刊行會本 三四〇頁.
  5. 「海槎日記」 三四六頁. 「英宗實錄」 卷百四 二張裏
  6. 「英宗實錄」 百四 十一張裏云 「乙未(十六日)配東萊府使宋文載 接慰官尹弘烈于極邊」. 이것은 交隣事體에 關한 處分이었다. 이 後任은 「東萊府邑誌」에 依하면 그 宦蹟府 先生條에서 「宋文載 癸未十二月十三日到 甲申九月二十日 以病遞. 姜必履甲申八月二十日 以順天府使移拜 丙戌十一月初十日辭遞」(純〿朝版 及 光武三年版)
  7. 英宗 四十三年 丁亥 六月에 同副承旨로부터 大司諫이 되었다. 「英宗實錄」 卷百八 三張 七行 及 回書 卷百九 一張裏 一行 參照.
  8. 「正宗實錄」 卷五十 十六張 十三行 以下 「二十三年戊午十一月(庚申朔)己丑 下勸農政·求農書綸音曰 明年己未 卽我 先王親耕 籍田之年也 五紀光御 八方涵育 盖以勤民重農 爲治敎之原云々 予食雖可減 民不可以闕食也 民食之闕 其責在農 云々 咨爾京外小大臣庶 咸須聽悉 如有己見可以有裨於三農者 或以章疏 或以簿冊 京而呈于廟堂 外而納于監司 而毋泥乎異俗 毋拘乎古方 山沿饒瘠 各陳其當 云々」. 이에 應하야 數多의 官民이 다투어 그 意見을 奏하였으며 王은 親耕 親蠶까지 行하였다.
  9. 北著辨證說 中에 「自純廟甲申乙酉之間 距令當宁丁未 云々」이란 句가 있는 것으로 보아 李圭景의 此文執筆이 憲宗 十三年 丁未 一八四七年이었든 것을 알 수 있다.






현대문주


  1. 영종 을유는 강필리가 동래로부터 저종을 보낸 해이오, 강계현은 그 전년인 갑신에 밀양에서 신사행중의 저종을 구득한 것이다. 이참봉집을 정독치 아니한 까닭으로 차오을 범한 것이다. 본문 강계현조 참조.
  2. 조인영(趙寅永) 「운석유고(雲石遺稿)」 권15 왕고영호부군가장(王考永湖府君家狀) 참조.
  3. 조엄 「해사일기(海槎日記)」(조선고서간행회본 해행총재사 133혈 152혈-158혈 327혈 112행 등 참조). 송전씨가 영조39년 12월에 제일차로 저종이 부산진에 송치되었다고 한 것은 오식인가 한다. 양력 환산이 아닌 것은 다른 곳에서 모두 음력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아 명백하다.
  4. 조선고서간행회본 340혈.
  5. 「해사일기」 346혈. 「영종실록(英宗實錄)」 권104 2장이
  6. 「영종실록」 104 11장 리운 “乙未(十六日)配東萊府使宋文載 接慰官尹弘烈于極邊”. 이것은 교린사체(交隣事體)에 관한 처분이었다. 이 후임은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 의하면 그 환적부 선생조에서 “宋文載 癸未十二月十三日到 甲申九月二十日 以病遞. 姜必履甲申八月二十日 以順天府使移拜 丙戌十一月初十日辭遞”(순〿조판 및 광무3년판)
  7. 영종43년 정해 6월에 동부승지로부터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영종실록」 권108 3장 7행 및 회서 권109 1장리 1행 참조.
  8. 「정종실록」 권50 16장 13행 이하 “二十三年戊午十一月(庚申朔)己丑 下勸農政·求農書綸音曰 明年己未 卽我 先王親耕 籍田之年也 五紀光御 八方涵育 盖以勤民重農 爲治敎之原云々 予食雖可減 民不可以闕食也 民食之闕 其責在農 云々 咨爾京外小大臣庶 咸須聽悉 如有己見可以有裨於三農者 或以章疏 或以簿冊 京而呈于廟堂 外而納于監司 而毋泥乎異俗 毋拘乎古方 山沿饒瘠 各陳其當 云々”. 이에 응하여 수다의 관민이 다투어 그 의견을 주(奏)하였으며 왕은 친경(親耕) 친잠(親蠶)까지 행하였다.
  9. 북저변증설 중에 “自純廟甲申乙酉之間 距令當宁丁未 云々”이란 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규경의 차문 집필이 헌종13년 정미 1847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