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저전파고 -공로자 조엄‧이광려‧강계현‧강필리‧김장순‧선종한‧서유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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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1일 (일) 23:50 판 (본문2: 조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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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저전파고 -공로자 조엄‧이광려‧강계현‧강필리‧김장순‧선종한‧서유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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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甘藷傳播考 -功勞者 趙曮‧李匡呂‧姜啓賢‧姜必履‧金長淳‧宣宗漢‧徐有榘 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손진태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03월
시작쪽 086쪽 종료쪽 109쪽 전체쪽 02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현금 우리의 생활에 있어 감저(甘藷)(고구마)가 필수 식량의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이것이 조선에 누구의 손으로 수입되었으며 또 어떠한 경과로 전파되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아는 이가 적은 모양이다. 소화 3년 9월호 「조선학술지」지 상에 송전신인물(松田申)씨가 조선감저전래에 대한 소개를 하여 영종39년(2423 1763)에 통신사 조엄인물(趙曮)이 대마도로부터 부산진으로 저종(藷種)을 보낸 것이 그 최초라고 지적하고 그 후 서유구인물(徐有榘)가 「종저보서적(種藷譜)」를 지어 세상에 전한 것이(순조34 1834) 조엄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두 정당한 말이다. 그러나 씨는 참고문헌이 적었던 탓인지 감저전파에 대한 상세한 고증을 하지 않고 오직 조서양씨만을 거론함에 그치었다. 나는 근자에 김장순인물(金長淳)·선종한인물(宣宗漢) 공저한 「감저신보서적(甘藷新譜)」(사본 아마 희구서일 듯)란 것을 얻고 또 「이참봉집서적(李參奉集)」에서 이광려인물(李匡呂)·강계현인물(姜啟賢)의 공적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이 조선감저의 조종(祖宗)이라고 전하던 강씨란 사람이 강필리인물(姜必履)이었다는 것이며 이 강필리(또는 그 형제 강필교인물(姜必敎))가 소위 「강씨감저보서적(姜氏甘藷譜)」의 저자인 것까지 고증할 수 있게 되어 비록 충분치는 못하나마 조선감저의 역사를 대체로 알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세상에 발표하여 대방의 질정을 받음과 아울러 공로선인(功勞先人)의 덕을 찬앙하고자 이 글을 초(抄)하게 된 것이다.
쪽수▶P86-1現今 우리의 生活에 있어 甘藷(고구마)가 必需食糧의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周知의 事實이나 이것이 朝鮮에 누구의 손으로 輸入되였으며 또 어떠한 經過로 傳播되였는가 하는 點에 關해서는 아는 이가 적은 모양이다. 昭和三年九月號 「朝鮮」誌上에 松田申氏가 朝鮮甘藷傳來에 對한 紹介를 하야 英宗三十九年(二四二三一七六三)에 通信使 趙曮이 對馬島로부터 釜山鎭으로 藷種을 보낸 것이 그 最初라고 指摘하고 其後 徐有榘가 「種藷譜」를 지어 世上에 傳한 것이(純祖三四一八三四) 趙曮의 遺志를 繼承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도 正當한 말이다. 그러나 氏는 參考文獻이 적었든 탓인지 甘藷傳播에 對한 詳細한 考證을▶P87-1하지 않고 오즉 趙徐兩氏만을 擧論함에 그치었다. 나는 近者에 金長淳·宣宗漢 共著한 「甘藷新譜」(寫本 아마 稀覯書일 듯)란 것을 얻고 또 「李參奉集」에서 李匡呂·姜啟賢의 功績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이 朝鮮甘藷의 祖宗이라고 傳하든 姜氏란 사람이 姜必履이었다는 것이며 이 姜必履(又는 其弟姜必敎)가 所謂 「姜氏甘藷譜」의 著者인 것까지 考證할 수 있게 되어 비록 充分치는 못하나마 朝鮮甘藷의 歷史를 大體로 알게 되였으므로 이것을 世上에 發表하야 大方의 叱正을 받음과 아울너 功勞先人의 德을 讚仰하고저 이 글을 抄하게 된 것이다.
감저의 최초 구래자가 조엄이었던 것은 송전씨도 이미 지적하였고 또 차항에서 나도 상술코자 하는 바이지마는 조선서는 재래로 조씨를 말하지 않고 강필리 또는 이광려에게 그 공을 돌리었던 모양으로 김장순은 그 저서인 「감저신보」(순조13년 계유성, 1813년) 중에서 “落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云云”이라 하여 강씨(강필리를 가르쳐 이름인 것은 후에 상술코자 한다)를 최초의 저종 득래자라 하고 이어서 강씨의 이 공적을 고려말엽 원으로부터 면종(棉種)을 득래한 강성군 문익점인물(文益漸)에 대하여
쪽수▶P87-2甘藷의 最初 購來者가 趙曮이었든 것은 松田氏도 이미 指摘하였고 또 次項에서 나도 詳述코저 하는 바이지마는 朝鮮서는 在來로 趙氏를 말하지 않고 姜必履 又는 李匡呂에게 그 功을 돌니었든 모양으로 金長淳은 그 著書인 「甘藷新譜」(純祖十三年癸酉成, 一八一三年) 中에서 「落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云云」이라 하야 姜氏(姜必履를 가르처 이름인 것은 後에 詳述코저 한다)를 最初의 藷種得來者라 하고 이어서 姜氏의 이 功績을 高麗末葉 元으로부터 棉種을 得來한 江城君 文益漸에 對하야

江城君文益漸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久 衣被一國 而姜氏得藷種而來者 將踰半百年 而尙無涓埃之益 云々
盖江城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識種法與土宜 故高低原隰 分以種之 得盡其妙 然後敎之一國之民 故人皆信之 不令而從 此即江城之志 可謂篤矣 其智亦可謂周矣 姜氏則不然 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傅布 而其方 則日人之所秘而瞞告者也 是故 種之一歳 而不驗 則人皆不信 然則 姜氏之志 可追於江城 而其智 則果不及矣 云々

쪽수▶P87-3

江城君文益漸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久 衣被一國 而姜氏得藷種而來者 將踰半百年 而尙無涓埃之益 云々
盖江城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識種法與土宜 故高低原隰 分以種之 得盡其妙 然後敎之一國之民 故人皆信之 不令而從 此即江城之志 可謂篤矣 其智亦可謂周矣 姜氏則不然 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傅布 而其方 則日人之所秘▶P88-1而瞞告者也 是故 種之一歳 而不驗 則人皆不信 然則 姜氏之志 可追於江城 而其智 則果不及矣 云々

이라 하여 그 지(志)는 비등하나 그 지(智)는 강성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쪽수▶P88-2이라하야 其志는 比等하나 其智는 江城君에 미치지 몯한다고 하였다.
김장순 뿐 아니라 이광려도 그 저 「이참봉집」 중에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며 서유구(徐有榘)도 그 「종저보(種藷譜)」 중에 동일한 말을 하였다(후술 이광려조 및 강필리조 참조). 현대문주1▶그런데 이규경인물(李圭景)은 이에 관하여 그 저 「오주연문장전산고서적(五洲衍文長箋散稿)」 권3 북저변증설 중에서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使姜啓賢往東萊府因 信使携種得之〿負至)傳種”[a 1]이라 하여 이광려를 그 최초의 사람이라 하고 조엄을 들지 아니하였다.
쪽수▶P88-3金長淳뿐 아니라 李匡呂도 그 著 「李參奉集」 中에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며 徐有榘도 그 「種藷譜」 中에 同一한 말을 하였다(後述李匡呂條 及 姜必履條參照). 원문주1▶그런데 李圭景은 이에 閥하야 그 著 「五洲衍文長箋散稿」卷三 北藷辨證說 中에서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使姜啓賢往東萊府因 信使携種得之〿負至)傳種」[1]이라 하야 李匡呂를 그 最初의 人이라 하고 趙曮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우리 선인들이 왜 조엄의 공을 말하지 않고 저조(藷祖)로 특히 강필리나 이참봉을 추앙하였던가. 우견으로서는 조씨는 통신사로서 상토(桑土)로 갔을 때 대마도의 고구마에 착안하여 그 종자를 부산진 및 동래부에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중앙에 재래배식하여 그 종재방(種栽方)을 연구한 후 그것을 전토(全土)에 전포하여 보겠다는 열성까지는 없었고 중앙 지방은 기후가 틀리니 대마도와 기후 유사한 제주도 및 기타도서에 송치권재(送致勸栽)하여 보겠다는 것이 그 목적의 대부분이었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하여 강필리와 이광려는 그들 자신이 그 종재방을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혹은 저종을 경성에 송치하여 그 광포(廣布)를 꾀하였으며 또 혹은 저서를 내어 그것을 세상에 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성의 이유로 그들이 최고의 명예를 전득한 것이 아닐까한다.
쪽수▶P88-4그러면 우리 先人들이 왜 趙曮의 功을 말하지 않고 藷祖로 特히 姜必履나 李參奉을 推仰하였든가. 愚見으로서는 趙氏는 通信使로서 桑土로 갔을 때 對馬島의 고구마에 着眼하야 그 種子를 釜山鎭 及 東萊府에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中央에 齋來培殖하야 그 種栽方을 硏究한 後 그것을 全土에 傳布하여 보겠다는 熱誠까지는 없었고 中央地方은 氣候가 틀리니 對馬島와 氣候 類似한 濟州島 及 其他島嶼에 送致勸栽하여 보겠다는 것이 그 目的의 大部分이였었든 모양이다. 이에 對하야 姜必履와 李匡呂는 그들 自身이 그 種栽方을 硏究하였을뿐 아니라 或은 藷種을 京城에 送致하야 그 廣布를 꾀하였으며 또 或은 著書를 내어 그것을 世上에 傳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精誠의 理由로 그들이 最高의 名譽를 傳得한 것이 아닐가한다.


































본문2: 조엄


조엄(趙曮) 호 영호(永湖) 관지리조판서 익문익공(謚文翼公). 한양부 풍양현인. 숙종45년생. 기고상경(其考尙絅) 호 학당(鶴塘) 관행리조판서. 현대문주2▶그가 예조태의(禮曹泰議)로서 궤일통신정사(潰日通信正使)를 배명(拜命)한 것은 영종39년(서기1763) 그가 45세 때이었다.[a 2] 그는 8월 초삼일 경성을 출발하여 10월 6일에 대마도의 좌수내포에 도착, 10일까지 거기서 유(留)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저종을 부산진에 구송한 것은 실로 그가 좌수내포에 유한 5일간의 일이었다. 현대문주3▶그러고 그가 제이차로 저종을 좌수내포로부터 재래한 것은 익영종40년 6월 18일 그가 회정하였을 때의 일이었다.[a 3] 그는 그의 「해사일기」 중에 저종 등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선고서간행회본 해행총재사소수 327혈)
쪽수▶P89-1趙曮 號永湖 官至吏曹判書 謚文翼公. 漢陽府豊壤縣人. 肅宗四十五年生. 其考尙絅 號鶴塘 官行吏 曹判書. 원문주2▶그가 禮曹泰議로서 潰日通信正使를 拜命한 것은 英宗三十九年(西紀一七六三) 그가 四十五歲 때이었다.[2] 그는 八月初三日 京城을 出發하야 十月六日에 對馬島의 佐須奈浦에 到着, 同十日까지 거기서 留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藷種을 釜山鎭에 求送한 것은 實로 그가 佐須奈浦에 留한 五日間의 일이었다. 원문주3▶그러고 그가 第二次로 藷種을 佐須奈浦로부터 載來한 것은 翌英宗四十年 六月十八日 그가 回程하였을 때의 일이었다.[3] 그는 그의 「海槎日記」 中에 藷種騰來에 對하야 다음과 같이 記錄하였다. (朝鮮古書刊行會本 海行摠載四所收 三二七頁)

[英宗四十年甲申 六月十八日] 島中有草根可食者 名曰甘藷 或謂孝子麻 日音古貴爲麻 其形或如山藥 或如菁根 如瓜如芋 不一其狀 其葉如山葉之葉 而稍大而厚 微有赤色 其蔓亦大於山藥之蔓 其味比山藥而稍堅 實有眞氣 或似牛煨之栗味 生可食也 炙可食也 烹亦可食也 和穀而作糜粥可也 拌清而爲正果可也 或作餅或和飯 而無不可 可謂救荒 之好材料也 此物聞自南京流入日本 日本陸地諸島間 多有之 而馬島尤盛云 其種法 春和後 種之於向陽之處 待其草 蔓之出土稍長 取其蔓間一二節 貼地掩土 則隨其所掩處 輒皆泡卵 卵之大小 必隨土品之當否矣 葉脫秋高之後 採取其棖 坑坎稍深 鋪藷一匝 實土數寸 復鋪甘藷 又實堅土 如是者五六層 後多積藁草 厚葉盖土 俾避風雨 得免腐傷 待春川種如法云矣 昨年初到佐須奈浦(△△△△△△△△) 見甘藷(△△△) 求得數斗(△△△△) 出送釜山鎭(△△△△△) 便之取種(△△△△) 今於回路(△△△△) 又此求得(△△△△) 將授於萊州校吏輩(△△△△△△△△) 行中諸人(△△△△) 亦有得去者(△△△△△) 此物果能皆生 廣布於我國 與文棉之爲 則豈不大助於吏民耶 萊州所種(△△△△) 若能能延(△△△△) 移我於濟州(△△△△△) 及他息(△△△) 似爲宜矣(△△△△) 聞濟州土俗(△△△△△) 或似馬島者多(△△△△△△) 甘藷如果蔓盛 則濟民之逐歲仰哺 羅合之泛舟郜榖 庶可除矣 但地官未詳(△△△△△) 土産皆異(△△△△) 番〿之如意(△△△△△) 亦何可必也(△△△△△)

쪽수▶P89-2

[英宗四十年甲申 六月十八日] 島中有草根可食者 名曰甘藷 或謂孝子麻 日音古貴爲麻 其形或如山藥 或如菁根 如瓜如芋 不一其狀 其葉如山葉之葉 而稍大而厚 微有赤色 其蔓亦大於山藥之蔓 其味比山藥而稍堅 實有眞氣 或似牛煨之栗味 生可食也 炙可食也 烹亦可食也 和穀而作糜粥可也 拌清而爲正果可也 或作餅或和飯 而無不可 可謂救荒 之好材料也 此物聞自南京流入日本 日本陸地諸島間 多有之 而馬島尤盛云 其種法 春和後 種之於向陽之處 待其草 蔓之出土稍長 取其蔓間一二節 貼地掩土 則隨其所掩處 輒皆泡卵 卵之大小 必隨土品之當否矣 葉脫秋高之後 採取其棖 坑坎稍深 鋪藷一匝 實土數寸 復鋪甘藷 又實堅土 如是者五六層 後多積藁草 厚葉盖土 俾避風雨 得免腐傷 待▶P90-1春川種如法云矣 昨年初到佐須奈浦(△△△△△△△△) 見甘藷(△△△) 求得數斗(△△△△) 出送釜山鎭(△△△△△) 便之取種(△△△△) 今於回路(△△△△) 又此求得(△△△△) 將授於萊州校吏輩(△△△△△△△△) 行中諸人(△△△△) 亦有得去者(△△△△△) 此物果能皆生 廣布於我國 與文棉之爲 則豈不大助於吏民耶 萊州所種(△△△△) 若能能延(△△△△) 移我於濟州(△△△△△) 及他息(△△△) 似爲宜矣(△△△△) 聞濟州土俗(△△△△△) 或似馬島者多(△△△△△△) 甘藷如果蔓盛 則濟民之逐歲仰哺 羅合之泛舟郜榖 庶可除矣 但地官未詳(△△△△△) 土産皆異(△△△△) 番〿之如意(△△△△△) 亦何可必也(△△△△△)

이것을 요언하면, 그는 영종39년 계미 10월 6일에 대마도의 좌수내포에 상륙, 풍랑으로 인하여 10일까지 동포에 머무는 동안에 동도 토산 감저(甘藷)가 가히 구황의 자(資)가 될 것을 짐작하고 종자 수두를 얻어 부산진으로 보내면서 그 종자를 취하도록 전탁하였다. 생각건대 동시에 보장재식(保藏栽植)의 방법까지 전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익년 6월 18일 신사(信使)의 임(任)을 마치고 동로 좌수내포에 재도하였을 때에 다시 그 약간을 구하여 자신이 그것을 수래(輸來)하였는데 일행 중에서도 여러 사람이 역시 저종을 득래하였으며, 이번 것은 동래부 교리배(校吏輩)에게 전하여 그 종자를 받아, 대마도와 기후물산이 유사한 제주도에 먼저 이식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피아 지의(地宜)가 다르므로 만일 이것을 경성으로 재래하였다가 실패하면 다시 그 종자를 얻기가 곤란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에 재배한 것이 성공하면 종자 염려는 없어지므로 그때는 이것을 전도에 시험하여 보리라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전도에서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은 문익점의 목면과 같이 동민의 생활에 큰 복리를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행 중에서 감저 뿐 아니라 그 풍속 습관이며 문물제도며 역사 지리기타에 유의하였을 뿐 아니라 농지 제방 수거 등에까지 세심의 주의를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도 그가 결코 평범한 일개의 사신만이 아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쪽수▶P90-2이것을 要言하면, 그는 英宗三十九年癸未十月六日에 對馬島의 佐須奈浦에 上陸, 風浪으로 因하야 同十日까지 同浦에 留하는 동안에 同島土産 甘藷가 可히 救荒의 資가 될 것을 짐작하고 種子數斗를 얻어 釜山鎭으로 보내면서 그 種子를 取하도록 傳託하였다. 생각건대 同時에 保藏栽植의 方法까지 傳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翌年 六月十八日 信使의 任을 맟이고 同路 佐須奈浦에 再到하였을 때에 다시 그 若干을 求하야 自身이 그것을 輸來하였는대 一行 中에서도 여러 사람이 亦是 藷種을 得來하였으며, 이번 것은 東萊府校吏輩에게 傳하야 그 種子를 받아, 對馬島와 氣候物產이 類似한 濟州島에 먼저 移植하는 것이 最善의 方法이라 생각하였다. 彼我 地宜가 다르므로 萬一 이것을 京城으로 載來하였다가 失敗하면 다시 그 種子를 얻기가 困難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야 濟州島에 栽培한 것이 成功하면 種子念慮는 없어지므로 그때는 이것을 全道에 試驗하여 보리라는 생각이었든 모양이다. 이렇게 全道에서 成功하게 된다면 그것은 文益漸의 木棉과 같이 東民의 生活에 큰 福利를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使行 中에서 甘藷뿐 아니라 그 風俗 習慣이며 文物 制度며 歷史 地理其他에 留意하였을 뿐▶P91-1아니라 農地 堤防 水車等에까지 細心의 注意를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도 그가 決코 平凡한 一個의 使臣만이 아니었든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것은 別問題로 하고,
그러면 부산진과 동래로 보낸 그 저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조엄의 손(孫)인 조인영(趙寅永)의 「운석유고」 권15초에 실린 그의 행장 중에서 보면
쪽수▶P91-2그러면 釜山鎭과 東萊로 보낸 그 藷種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趙曮의 孫인 趙寅永의 「雲石遺稿」 卷十五初에 실닌 그의 行狀 中에서 보면

島產有甘藷 宜於救荒 府君取其種而歸 送濟州種之日 濟之土產 似()島 此物或其宜也 異日濟民 必有所賴 種種果漸繁 或稱趙藷(△△)云(十二張裏)

쪽수▶P91-3

島產有甘藷 宜於救荒 府君取其種而歸 送濟州種之日 濟之土產 似()島 此物或其宜也 異日濟民 必有所賴 種種果漸繁 或稱趙藷(△△)云(十二張裏)

이라 하였다. 이로서보면 초지(初志)와 여히 그 종자의 대부분을 제주로 보낸 것은 명백하며 제주인은 그것을 조저(趙藷)라고까지 하여 그 덕을 기념하였던 모양이다. 그가 제주의 일부분을 경성으로 재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신사일행 중에 저종을 경성까지 갖고 온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이광려의 「이참봉집」 권2 증강생계현조 중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으로서 추측할 것이다.
쪽수▶P91-4이라하였다. 이로서보면 初志와 如히 그 種子의 大部分을 濟州로 보낸 것은 明白하며 濟州人은 그것을 趙藷라고까지 하야 그 德을 記念하였든 모양이다. 그가 濟州의 一部分을 京城으로 齎來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信使一行 中에 藷種을 京城까지 갖고 온 사람은 없었든 모양이다. 그것은 李匡呂의 「李參奉集」 卷二 贈姜生啓賢條 中에 보이는 다음의 記錄으로서 推測할 것이다.

云々 然萊釜地內 竟不見藷 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僅持二本(△△△△△△△) 其一聞往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行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云々(七張裏)

쪽수▶P91-5

云々 然萊釜地內 竟不見藷 乃信使行回所得 而密陽周旋得之者也 使行中僅持二本(△△△△△△△) 其一聞往他處(△△△△△△) 此則初猶未知死活 密陽爲木櫃植之 命一隸負之行 中路行櫃中生芽 而葉而蔓 今如許矣 云々(七張裏)

이것은 다음의 강계현조에서 다시 상술하려니와 요컨대 사행이 밀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그 일행 중에 저종 근 2본밖에 없었던 모양이며 그 일은 이미 타처로 가고 남은 일본을 강계현이 득래하여 경성에서 고대하는 이참봉에게 바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엄이 초지와 여히 제이차 재래한 저종은 제주로 즉시 보내지 않고 동래부 교리배에 위탁하여 거기서 취종 후 익년에 제주로 보내도록 한 것 같이 생각되는 점은 다음 조에 상술코자하며 그 이유는 아마 계절 관계인 듯하다.)
쪽수▶P91-6이것은 다음의 姜啓賢條에서 다시 詳述하려니와 要컨대 使行이 密陽에 到着하였을 때에는 그 一行 中에 藷種 僅二本밖에 없었든 모양이며 其一은 이미 他處로 가고 餘一本을 姜啓賢이 得來하야 京城에서 苦待하는 李參奉에게 밭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趙曮이 初志와 如히 第二次 齋來한 藷種은▶P92-1濟州로 即時 보내지 않고 東萊府校吏輩에 委託하야 거기서 取種後 翌年에 濟州로 보내도록 한 것 같이 생각되는 點은 다음 條에 詳述코저하며 그 理由는 아마 季節關係인 듯하다.)




































본문3: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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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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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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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英宗乙酉는 姜必履가 東萊로부터 藷種을 보낸 해이오 姜啓賢은 그 前年인 甲申에 密陽에서 信使行中의 藷種을 求得한 것이다. 李參奉集을 精讀치 아니한 까닭으로 此誤을 犯한 것이다. 本文 姜啓賢條 參照.
  2. 趙寅永 「雲石遺稿」 卷十五 王考永湖府君家狀 叅照.
  3. 趙曮 「海槎日記」(朝鮮故書刊行會本 海行摠載四 一三三頁 一五二頁―一五八頁 三二七頁 百十二行 等 參照). 松田氏가 英祖 三十九年 十二月에 第一次로 藷種이 釜山鎭에 送致되었다고 한 것은 誤植인가 한다. 陽曆換算이 아닌 것은 다른 곳에서 모도 陰曆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아 明白하다.






현대문주


  1. 영종 을유는 강필리가 동래로부터 저종을 보낸 해이오, 강계현은 그 전년인 갑신에 밀양에서 신사행중의 저종을 구득한 것이다. 이참봉집을 정독치 아니한 까닭으로 차오을 범한 것이다. 본문 강계현조 참조.
  2. 조인영(趙寅永) 「운석유고(雲石遺稿)」 권15 왕고영호부군가장(王考永湖府君家狀) 참조.
  3. 조엄 「해사일기(海槎日記)」(조선고서간행회본 해행총재사 133혈 152혈-158혈 327혈 112행 등 참조). 송전씨가 영조39년 12월에 제일차로 저종이 부산진에 송치되었다고 한 것은 오식인가 한다. 양력 환산이 아닌 것은 다른 곳에서 모두 음력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아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