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저전파고 -공로자 조엄‧이광려‧강계현‧강필리‧김장순‧선종한‧서유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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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1일 (일) 21:21 판 (본문1: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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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저전파고 -공로자 조엄‧이광려‧강계현‧강필리‧김장순‧선종한‧서유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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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甘藷傳播考 -功勞者 趙曮‧李匡呂‧姜啓賢‧姜必履‧金長淳‧宣宗漢‧徐有榘 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손진태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03월
시작쪽 086쪽 종료쪽 109쪽 전체쪽 02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현금 우리의 생활에 있어 감저(甘藷)(고구마)가 필수 식량의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이것이 조선에 누구의 손으로 수입되었으며 또 어떠한 경과로 전파되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아는 이가 적은 모양이다. 소화 3년 9월호 「조선(朝鮮)」지 상에 송전신(松田申)씨가 조선감저전래에 대한 소개를 하여 영종39년(2423 1763)에 통신사 조엄(趙曮)이 대마도로부터 부산진으로 저종(藷種)을 보낸 것이 그 최초라고 지적하고 그 후 서유구(徐有榘)가 「종저보(種藷譜)」를 지어 세상에 전한 것이(순조34 1834) 조엄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두 정당한 말이다. 그러나 씨는 참고문헌이 적었던 탓인지 감저전파에 대한 상세한 고증을 하지 않고 오직 조서양씨만을 거론함에 그치었다. 나는 근자에 김장순(金長淳)·선종한(宣宗漢) 공저한 「감저신보(甘藷新譜)」(사본 아마 희구서일 듯)란 것을 얻고 또 「이참봉집(李參奉集)」에서 이광려(李匡呂)·강계현(姜啟賢)의 공적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이 조선감저의 조종(祖宗)이라고 전하던 강씨란 사람이 강필리(姜必履)이었다는 것이며 이 강필리(또는 그 형제 강필교(姜必敎))가 소위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의 저자인 것까지 고증할 수 있게 되어 비록 충분치는 못하나마 조선감저의 역사를 대체로 알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세상에 발표하여 대방의 질정을 받음과 아울러 공로선인(功勞先人)의 덕을 찬앙하고자 이 글을 초(抄)하게 된 것이다.
쪽수▶P86-1現今 우리의 生活에 있어 甘藷(고구마)가 必需食糧의 하나로 되어있는 것은 周知의 事實이나 이것이 朝鮮에 누구의 손으로 輸入되였으며 또 어떠한 經過로 傳播되였는가 하는 點에 關해서는 아는 이가 적은 모양이다. 昭和三年九月號 「朝鮮」誌上에 松田申氏가 朝鮮甘藷傳來에 對한 紹介를 하야 英宗三十九年(二四二三一七六三)에 通信使 趙曮이 對馬島로부터 釜山鎭으로 藷種을 보낸 것이 그 最初라고 指摘하고 其後 徐有榘가 「種藷譜」를 지어 世上에 傳한 것이(純祖三四一八三四) 趙曮의 遺志를 繼承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도 正當한 말이다. 그러나 氏는 參考文獻이 적었든 탓인지 甘藷傳播에 對한 詳細한 考證을▶P87-1하지 않고 오즉 趙徐兩氏만을 擧論함에 그치었다. 나는 近者에 金長淳·宣宗漢 共著한 「甘藷新譜」(寫本 아마 稀覯書일 듯)란 것을 얻고 또 「李參奉集」에서 李匡呂·姜啟賢의 功績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이 朝鮮甘藷의 祖宗이라고 傳하든 姜氏란 사람이 姜必履이었다는 것이며 이 姜必履(又는 其弟姜必敎)가 所謂 「姜氏甘藷譜」의 著者인 것까지 考證할 수 있게 되어 비록 充分치는 못하나마 朝鮮甘藷의 歷史를 大體로 알게 되였으므로 이것을 世上에 發表하야 大方의 叱正을 받음과 아울너 功勞先人의 德을 讚仰하고저 이 글을 抄하게 된 것이다.
감저의 최초 구래자가 조엄이었던 것은 송전씨도 이미 지적하였고 또 차항에서 나도 상술코자 하는 바이지마는 조선서는 재래로 조씨를 말하지 않고 강필리 또는 이광려에게 그 공을 돌리었던 모양으로 김장순은 그 저서인 「감저신보」(순조13년 계유성, 1813년) 중에서 “落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云云”이라 하여 강씨(강필리를 가르쳐 이름인 것은 후에 상술코자 한다)를 최초의 저종 득래자라 하고 이어서 강씨의 이 공적을 고려말엽 원으로부터 면종(棉種)을 득래한 강성군 문익점(文益漸)에 대하여
쪽수▶P87-2甘藷의 最初 購來者가 趙曮이었든 것은 松田氏도 이미 指摘하였고 또 次項에서 나도 詳述코저 하는 바이지마는 朝鮮서는 在來로 趙氏를 말하지 않고 姜必履 又는 李匡呂에게 그 功을 돌니었든 모양으로 金長淳은 그 著書인 「甘藷新譜」(純祖十三年癸酉成, 一八一三年) 中에서 「落種 自姜氏得來之後 至今果爲五十年 而尙不遍布於一國者 只緣於種法之未備云云」이라 하야 姜氏(姜必履를 가르처 이름인 것은 後에 詳述코저 한다)를 最初의 藷種得來者라 하고 이어서 姜氏의 이 功績을 高麗末葉 元으로부터 棉種을 得來한 江城君 文益漸에 對하야

江城君文益漸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久 衣被一國 而姜氏得藷種而來者 將踰半百年 而尙無涓埃之益 云々
盖江城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識種法與土宜 故高低原隰 分以種之 得盡其妙 然後敎之一國之民 故人皆信之 不令而從 此即江城之志 可謂篤矣 其智亦可謂周矣 姜氏則不然 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傅布 而其方 則日人之所秘▶P88-1而瞞告者也 是故 種之一歳 而不驗 則人皆不信 然則 姜氏之志 可追於江城 而其智 則果不及矣 云々

쪽수▶P87-3

江城君文益漸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久 衣被一國 而姜氏得藷種而來者 將踰半百年 而尙無涓埃之益 云々
盖江城 得木綿種於中國而來 不識種法與土宜 故高低原隰 分以種之 得盡其妙 然後敎之一國之民 故人皆信之 不令而從 此即江城之志 可謂篤矣 其智亦可謂周矣 姜氏則不然 購得藷種 而井求其方 一時傅布 而其方 則日人之所秘▶P88-1而瞞告者也 是故 種之一歳 而不驗 則人皆不信 然則 姜氏之志 可追於江城 而其智 則果不及矣 云々

이라 하여 그 지(志)는 비등하나 그 지(智)는 강성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쪽수▶P88-2이라하야 其志는 比等하나 其智는 江城君에 미치지 몯한다고 하였다.
김장순 뿐 아니라 이광려도 그 저 「이참봉집」 중에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며 서유구(徐有榘)도 그 「종저보(種藷譜)」 중에 동일한 말을 하였다(후술 이광려조 및 강필리조 참조). 현대문주1▶그런데 이규경(李圭景)은 이에 관하여 그 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3 북저변증설 중에서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使姜啓賢往東萊府因 信使携種得之〿負至)傳種”[a 1]이라 하여 이광려를 그 최초의 사람이라 하고 조엄을 들지 아니하였다.
쪽수▶P88-3金長淳뿐 아니라 李匡呂도 그 著 「李參奉集」 中에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며 徐有榘도 그 「種藷譜」 中에 同一한 말을 하였다(後述李匡呂條 及 姜必履條參照). 원문주1▶그런데 李圭景은 이에 閥하야 그 著 「五洲衍文長箋散稿」卷三 北藷辨證說 中에서 「英廟乙酉 李七灘(匡呂官參奉)從日本得來(使姜啓賢往東萊府因 信使携種得之〿負至)傳種」[1]이라 하야 李匡呂를 그 最初의 人이라 하고 趙曮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우리 선인들이 왜 조엄의 공을 말하지 않고 저조(藷祖)로 특히 강필리나 이참봉을 추앙하였던가. 우견으로서는 조씨는 통신사로서 상토(桑土)로 갔을 때 대마도의 고구마에 착안하여 그 종자를 부산진 및 동래부에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중앙에 재래배식하여 그 종재방(種栽方)을 연구한 후 그것을 전토(全土)에 전포하여 보겠다는 열성까지는 없었고 중앙 지방은 기후가 틀리니 대마도와 기후 유사한 제주도 및 기타도서에 송치권재(送致勸栽)하여 보겠다는 것이 그 목적의 대부분이었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하여 강필리와 이광려는 그들 자신이 그 종재방을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혹은 저종을 경성에 송치하여 그 광포(廣布)를 꾀하였으며 또 혹은 저서를 내어 그것을 세상에 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성의 이유로 그들이 최고의 명예를 전득한 것이 아닐까한다.
쪽수▶P88-4그러면 우리 先人들이 왜 趙曮의 功을 말하지 않고 藷祖로 特히 姜必履나 李參奉을 推仰하였든가. 愚見으로서는 趙氏는 通信使로서 桑土로 갔을 때 對馬島의 고구마에 着眼하야 그 種子를 釜山鎭 及 東萊府에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中央에 齋來培殖하야 그 種栽方을 硏究한 後 그것을 全土에 傳布하여 보겠다는 熱誠까지는 없었고 中央地方은 氣候가 틀리니 對馬島와 氣候 類似한 濟州島 及 其他島嶼에 送致勸栽하여 보겠다는 것이 그 目的의 大部分이였었든 모양이다. 이에 對하야 姜必履와 李匡呂는 그들 自身이 그 種栽方을 硏究하였을뿐 아니라 或은 藷種을 京城에 送致하야 그 廣布를 꾀하였으며 또 或은 著書를 내어 그것을 世上에 傳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精誠의 理由로 그들이 最高의 名譽를 傳得한 것이 아닐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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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英宗乙酉는 姜必履가 東萊로부터 藷種을 보낸 해이오 姜啓賢은 그 前年인 甲申에 密陽에서 信使行中의 藷種을 求得한 것이다. 李參奉集을 精讀치 아니한 까닭으로 此誤을 犯한 것이다. 本文 姜啓賢條 參照.






현대문주


  1. 영종 을유는 강필리가 동래로부터 저종을 보낸 해이오, 강계현은 그 전년인 갑신에 밀양에서 신사행중의 저종을 구득한 것이다. 이참봉집을 정독치 아니한 까닭으로 차오을 범한 것이다. 본문 강계현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