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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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서(C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6일 (목) 15:48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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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한자명)
박은식님.jpeg
출처 :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1]online, 공훈전자사료관.
 
한글명 박은식 한자명 朴殷植 영문명 가나명 이칭 박기정(朴箕貞)
성별 남성 생년 1859년 몰년 1925년 출신지 밀양(密陽)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때, 황성신문 및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통사』 등을 저술한 유학자 · 언론인 · 독립운동가.[1]


생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 젊은 시절

박은식은 1859년 9월 30일(음력)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밀양 박씨 집안의 박용호인물와 어머니 노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2]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3]1882년에 상경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해 낙향,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4]


독립협회의 영향을 받다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한 후인 1898년에 독립협회단체 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독립협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5] 그 해 11월에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동하였다.[6]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되다

이상설, 신규식 등과 함께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고, 대한국민노인동맹회(大韓國民老人同盟會)를 결성하며 항일운동을 주도한 박은식은 1919년 8월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통합을 지원하였다.[7] 뒤이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의 거듭되는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을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였다.[8]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은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튿날인 3월 24일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였다.[9]





연구


교육진흥책을 논구하다

독립협회가 강제해산 당한 후에는 1900년부터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10] 이 때 교육진흥책을 논구하는 『겸곡문고(謙谷文稿)서적』와 『학규신론(學規新論)』서적를 저술하였다.[11]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용호 Person: 박은식 A hasSon B
Person: 박은식 Group: 독립협회 A isMemberOf B
Book:『겸곡문고(謙谷文稿)』 Person: 박은식 A creator B
Book:『학규신론(學規新論)』 Person: 박은식 A creato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