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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유럽에서 보낸 11년의 청춘)
(유럽에서 보낸 11년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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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으나, 고향과는 정반대인 대도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9년 6월 말에 이의경(이미륵)을 만나기 위해 뮌헨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를 실행으로 옮긴 지 이틀이 지나서 그를 만나 장래 계획을 논의할 수 있었다.<ref> 김인혜,「[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2/11/5MVRVYLHUVCORLTSC4ZLATVIJE/ 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아무튼, 주말』<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ref> 이를 계기로 독일어를 익히기 시작했고, 그의 조언으로 독일의 뮌헨 대학에서 배울 전공으로 교육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ref> 김인혜,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2/11/5MVRVYLHUVCORLTSC4ZLATVIJE/ 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아무튼, 주말』<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ref> 이후 질병•자금 부족•독일 사회의 혼란 등의 변수들로 고생한 끝에 1934년 봄에 교육학과 최종 시험 합격에 성공하지만, 당시 한국의 불안정한 정세와 함께 '진정한 배움'의 부족함을 느꼈기에 엘세 부인의 조언에 따라 1935년 6월에 벨기에로 이동했다.<ref> 김재원, 『<small>초대박물관장자서전</small>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46-53쪽.</ref> 안트워프에서 켄트대학 출신의 헨체(Hentze, C.) 교수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6년간 그의 조수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독일어와 동양 고고학을 매우 세세히 습득할 수 있었다.<ref> </ref> 1936년에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두 국가의 사회적 간극으로 인한 적응 실패로 1년 후에 다시 독일로 건너갔고,193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헨체 교수 부부를 다시 만나 3년 동안 같이 지냈다. <ref> </ref> 1940년 5월 5일, 언론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안트워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독일 선배의 추천으로 당해 11월부터 보성전문학교의 독일어 촉탁 강사로 봉직했었다.<ref>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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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00:18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조승아(CNU2024))이 작성했습니다.




김재원(金載元)
바바파파.jpg
출처 :
 
한글명 김재원 한자명 金載元 영문명 Kim Jae-won 가나명 이칭 여당[藜堂]
성별 생년 1909년 몰년 1990년 출신지 함경남도 함주 전공 독일 뮌헨대학 철학부 - 교육학과(학부와 석사) & 고고학(박사)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생애


어두웠던 유년시절

1909년 2월 22일 함경남도 함주에서 아버지 학호(鶴鎬)와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1] 3살 때,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었으며, 동생마저 홍역으로 잃어야 했다.[2] 심지어 함흥으로의 이사 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출가로 고아가 되었다.[3] 이 때문에 친척들이 모여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초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함흥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장티푸스에 걸리면서 1년 유급과 함께 숙부를 비롯한 일부 친척들이 병으로 죽는 난리를 겪어야 했다.[4] 이러한 비극 속에서 한 가지 진귀한 기회를 얻는데, 바로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친척을 만난 것이었다. 친척과의 교류 과정에서 서양의 발전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다.[5] 이후 1927년, 18살의 나이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는 데 성공한다.[6] 고향을 벗어나 폭넓은 경험을 얻기 원했기에, 20살이었던 1929년 6월에 기차를 통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유럽에서 보낸 11년의 청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으나, 고향과는 정반대인 대도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9년 6월 말에 이의경(이미륵)을 만나기 위해 뮌헨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를 실행으로 옮긴 지 이틀이 지나서 그를 만나 장래 계획을 논의할 수 있었다.[7] 이를 계기로 독일어를 익히기 시작했고, 그의 조언으로 독일의 뮌헨 대학에서 배울 전공으로 교육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8] 이후 질병•자금 부족•독일 사회의 혼란 등의 변수들로 고생한 끝에 1934년 봄에 교육학과 최종 시험 합격에 성공하지만, 당시 한국의 불안정한 정세와 함께 '진정한 배움'의 부족함을 느꼈기에 엘세 부인의 조언에 따라 1935년 6월에 벨기에로 이동했다.[9] 안트워프에서 켄트대학 출신의 헨체(Hentze, C.) 교수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6년간 그의 조수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독일어와 동양 고고학을 매우 세세히 습득할 수 있었다.[10] 1936년에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두 국가의 사회적 간극으로 인한 적응 실패로 1년 후에 다시 독일로 건너갔고,193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헨체 교수 부부를 다시 만나 3년 동안 같이 지냈다. [11] 1940년 5월 5일, 언론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안트워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독일 선배의 추천으로 당해 11월부터 보성전문학교의 독일어 촉탁 강사로 봉직했었다.[12]


국립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다

해방 직후인 1945년(당시 나이 36살)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첫 관장으로 임명됨. 1970년에 정년퇴임 – 이제 막 등장한 박물관을 관리해야 하는 대표로서, 박물관의 획기적인 체제 확립(경주, 부여, 공주, 개성의 분관 체제 확립•국립민속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을 국립박물관 소속으로 통합)•한국의 국보를 전후 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 쇄신 용도로 사용•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 발굴 및 보전에 심혈을 기울임.


정년 퇴임한 이후

1970년 9월, 미국 뮬렌버그대학으로 이동 후 1971년 6월까지 교수로써 활동 – 6월 중순에 유럽 관광을 위해 파리로 이동 – 1972년 10월, 일본•북한과 함께 고고학 자회 운영 – 1977년, 아테네에서 개최한 국제학술원연맹에서 대한민국학술원을 회원국으로 가입 성공 이후 국제학술원연맹에서 한국대표로 활동 – 1988년 6월, 국제고전고고학대회에 참석함 – 1990년 4월 12일에 별세.


제목5





연구


국립 박물관의 초대 관장


고고학자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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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김재원(金載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4-15쪽.
  3.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8쪽.
  4.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25~29쪽.
  5.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한국의 名家』online, 주간조선, 작성일: 2012.01.04.
  6. 김재원(金載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김인혜,「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아무튼, 주말』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
  8. 김인혜, 「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아무튼, 주말』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
  9.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46-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