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원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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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金載元)
고고학자 김재원의 모습.jpg
출처 : 김재원,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208쪽
 
한글명 김재원인물 한자명 金載元 영문명 Kim Jae-won 가나명 이칭 여당[藜堂]
성별 생년 1909년 몰년 1990년 출신지 함경남도 함주 전공 독일 뮌헨대학 철학부 - 교육학과(학부와 석사) & 고고학(박사)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고고학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약 11년 동안 독일과 벨기에에서 교육학•독일어•동양 고고학을 배웠다. 1945년 9월 27일, 정식으로 국립박물관장에 임명된 후 자그마치 20년 동안 박물관의 발전과 함께 고고학•미술학의 부흥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이에 대한 공로로 학술원 공로상(1965년), 5•16 문화상(1966년), 한국출판문화상(1962년)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1]


생애


어두웠던 유년시절

1909년 2월 22일 함경남도 함주에서 아버지 김학호인물(鶴鎬)와 어머니 전주 이씨인물(全州李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2] 3살 때,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었으며, 동생마저 홍역으로 잃어야 했다.[3] 심지어 함흥으로의 이사 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출가로 고아가 되었다.[4] 이 때문에 친척들이 모여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초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함흥고등보통학교기관를 다니던 중에, 장티푸스에 걸렸고, 1년 유급과 함께 숙부를 비롯한 일부 친척들이 병으로 죽는 난리를 겪어야 했다.[5] 이러한 비극 속에서 한 가지 진귀한 경험을 얻는데, 바로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친척을 만난 것이었다. 친척과의 교류 과정에서 서양의 발전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다.[6] 이후 1927년, 18살의 나이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는 데 성공한다.[7] 고향을 벗어나 폭넓은 경험을 얻기 원했기에, 20살이었던 1929년 6월에 기차를 통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유럽에서 보낸 11년의 청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적응하는 것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929년 6월 말에 이의경(이미륵)을 만나기 위해 뮌헨으로 장소를 옮겼고, 이틀 후에 그를 만나 장래 계획을 논의할 수 있었다.[8] 이를 계기로 같이 독일어를 익히기 시작했고, 그의 조언으로 뮌헨 대학기관에서 배울 전공으로 교육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9] 이후 질병•자금 부족•독일 사회의 혼란 등의 변수들로 고생한 끝에 1934년 봄에 교육학과 최종 시험 합격에 성공하지만, 당시 한국의 불안정한 정세와 함께 '진정한 배움'의 부족함을 느꼈기에 엘세 부인의 조언에 따라 1935년 6월에 벨기에로 이동했다.[10] 안트워프에서 켄트대학 출신의 헨체(Hentze, C.) 교수인물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6년간 그의 조수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독일어와 동양 고고학을 매우 세세히 습득할 수 있었다.[11] 1936년에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두 국가의 사회적 간극으로 인한 적응 실패로 1년 후에 다시 독일로 건너갔고,193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헨체 교수 부부를 다시 만나 3년 동안 같이 지냈다. [12] 1940년 5월 5일, 언론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안트워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독일에서 친하게 지낸 한 선배의 추천으로 당해 11월부터 보성전문학교기관의 독일어 촉탁 강사로 봉직했었다.[13] 동창의 중매로 경성제대부속병원의 의사였던 이채희인물를 만났으며, 1941년 4월 6일에 천향각호텔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14]


국립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곧바로 한국 내 여러 박물관(예: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박물관)을 들러 각 기관의 상황을 파악했다.[15] 이후 언론인이었던 홍종인 씨 등의 권유로 직접 미 군정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독일에서 얻은 박사 학위가 당시 문교부장인 록카드 대위의 눈에 띔으로써, 36살의 나이에 최초의 국립(중앙)박물관기관장에 임명되었다.[16] 이제 막 새롭게 출발한 박물관을 관리해야 하는 대표였기에, 박물관의 기존 질서를 깨야만 했다. 이를 위해 획기적인 체제 수립부터 경복궁 내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궁 근처의 관사로 이사 • 부여와 경주에 소장한 전시품을 서울로 이송 등을 진행했다.[17] 1946년, 경주의 호우총과 은령총에서 진행한 첫 발굴 사업에서 호우명 그릇과 같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물들을 발견했고, 당시 발굴의 모든 과정과 이에 대한 결과를 『호우총과 은령총』서적이라는 하나의 단행본으로 정리했다.[18] 1949년 2월, 호놀롤루 미술관의 관장인 그리핑과 협력하여 미국에 첫 한국 미술 전시회 개장을 시도했으나, 6•25 전쟁의 발생으로 성공하지 못했다.[19] 6•25 전쟁 당시,박물관이 보관하던 유물들을 지키기 위해 피 나는 사투 등(예: 문화재들이 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북한 군과의 숨 막히는 지연 작전•부산에 임시 보관한 박물관의 소장품을 철저히 보호)을 벌어야 했다.[20]


박물관에 모든 것을 쏟아붇다

전쟁의 양상이 호전되던 1953년, 상부의 명령으로 기존의 일자리인 경복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위기 속에서 인맥과 말재주를 이용해 덕수궁 석조전을 새로운 활동 공간으로 삼을 수 있었다.[21] 이로부터 1년 후인 1954년 5월 31일, 방대한 범위의 한국사를 책으로 정리•편찬하기 위해 진단 학회단체의 업무를 대리하기로 하였고, 이후 록펠러 재단과의 교섭을 계기로 12월 20일에 《한국사》 프로젝트사건를 출발시켰다.[22] 이를 계기로 1955년부터 1980년 11월 사이에 49권의 진단 학보학술지를 간행할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는 여러 난항으로 인해 1965년에 『한국사』서적를 완결시킬 수 있었다.[23] 1956월 9월 말, 전쟁으로 인해 악회된 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환시킬 목적의 한국 미술전사건을 개최하기 위해 2명의 외국 박물관장을 서울로 데려온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의 의견 충돌과 비용 문제 등을 딛고 준비한 끝에, 1957년 12월 17일부터 1959년 3월 1일까지는 미국 전역에, 1961년 3월 23일부터 1962년 6월 30일에는 런던•파리 등의 일부 지역에 한국 미술을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24] 1968년에 하버드•옌칭학사 서울지부 동아문화연구위원회기관 회장에 취임하며 한국고고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25]


정년 퇴임한 이후

1970년 9월부터 1971년 6월까지 미국의 뮬렌버그대학기관에서 교수로 활동했었다.[26] 1972년 10월에는 일본•북한과 함께 운영한 고고학 자회에서 단장으로 일했으며,[27] 1977년에는 아테네에서 개최한 국제학술원연맹에서 대한민국학술원을 회원국으로 가입시키는데 성공한 후 국제학술원연맹기관에서 한국대표로 활동했다.[28] 1988년 6월, 국제고전고고학대회에 참석했다.[29] 1990년 4월 12일에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30]





연구


국립 박물관의 초대 관장

박물관의 체계를 정리하는 과정을 하나씩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분관된 경주•부여•공주의 박물관에 분관장을 1명씩 파견했으며, 1946년 4월, 개성 부립박물관을 시작으로 이왕직 미술관(= 지금의 덕수궁미술관)과 시정기념관(=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을 국립박물관에 통합시켰다.[31] 이 뿐만 아니라 당시 국가 상황으로는 고고학•미술사학 전공자를 찾는 것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려워서 박물관에 이홍직, 민천식 등의 역사 전공 연구원을 대거 모집했으며, 박물관을 지탱해줄 고고학•미술사학자의 양성을 위해 자신의 두 딸을 포함하여 안휘준•정영화 등의 해외 유학 장려를 넘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32] 한국에 관한 서양의 부정적인 인식을 지우기 위해 한국의 고유 문화를 널리 알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1957년 12월부터 1959년 6월까지는 미국을 1961년 3월부터 1962년 6월까지는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문화 전시회를 진행한 일이 가장 대표적이다.[33]


고고학•미술학자

첫 번째로, 1946년에 호우총과 은령총을 대상으로 첫 발굴 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2개의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광개토대왕의 호(壺))이 찍힌 호우명 그릇와 같은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다. 당시 조사 과정은 『호우총과 은령총』이라는 단행본으로 정리했다. 1947년에는 단군 신화와 중국 산둥성에 위치한 '무씨사당 석실의 화상석' 속 일부 벽화의 연관성을 정리한 『단군 신화의 신연구』서적를 작성했다.[34] 진단 학회의 기존 업무를 계승해 「진단 학보」 발행을 활성화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1959년 10월 7일부터 12월 2일까지 감은사지와 금강사지 발굴 조사를 추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탑의 배치 및 규모•서탑의 사리장엄구 등을 발견했으며, 호우총 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당시 발견 과정과 결과를 『감은사』라는 보고서로 정리했다.[35] 일본 최대의 출판사인 강담사에서 일하던 직원과의 협업을 기반으로 첫째 딸인 리나와 함께 3권의 『한국미술』서적을 외국어로 집필했다.[36]


참고 자료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학호 Person: 김재원 A hasSon B
Person: 전주 이씨 Person: 김재원 A hasSon B
Person: 김재원 Institution: 함흥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재원 Institution: 뮌헨대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재원 Person: 헨체(Hentze, C.)교수 A hasMaster B
Person: 김재원 Institution: 보성전문학교 A worksAt B
Person: 김재원 Person: 이채희 A hasSpouse B
Person: 김재원 Institution: 국립박물관 A worksAt B
Book: 『호우총과 은령총』 Person: 김재원 A creator B
Person: 김재원 Group: 진단학회 A isMemberOf B
Journal: 진단학보 Group: 진단학회 A publisher B
Event: 《한국사》 프로젝트 Person: 김재원 A isRelatedTo B
Book: 『한국사』 Person: 김재원 A creator B
Event: 한국 미술전 Person: 김재원 A isRelatedTo B
Person: 김재원 Institution: 하버드•옌칭학사 서울지부 동아문화연구위원회 A worksAt B
Person: 김재원 Institution: 뮬렌버그대학 A worksAt B
Person: 김재원 Group: 국제학술원연맹 A isMemberOf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김재원,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
정무정 「《한국 국보전》 전사(前史): 불발된 1947년 한국미술전 계획」, 『미술사학』47,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4
안휘준, 「김재원, 박물관의 아버지, 고고학·미술사학의 선각자」, 『한국사 시민강좌』50, 일조각, 2012.02,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김인혜,「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
"김재원(金載元) Kim, Che Won", 인문사회과학부, 『대한민국 학술원』online, 대한민국학술원.
김재원(金載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박물관장 金載元, 경주고분 발굴동기와 일반의 의혹 언급」,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accessed 2024. 11. 20)
재봉틀의 국어방, "고고학자 김재원(金載元)", 『네이버 블로그 - 재봉틀의 국어방』online, 작성일: 2007년 07월 29일.
염화미소, "무씨사당 화상석을 통해 본 단군신화", 『네이버 블로그 - 염화미소』online, 작성일: 2014년 11월 15일.
흐름과 변화, 「경주 감은사지 (慶州 感恩寺址)」, 『네이버 블로그 - 흐름과 변화』online, 작성일: 2023년 6월 27일.






주석


  1. "김재원(金載元) Kim, Che Won", 인문사회과학부, 『대한민국 학술원』online, 대한민국학술원.
  2. 김재원(金載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4-15쪽.
  4.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8쪽.
  5.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25~29쪽.
  6.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7. 김재원(金載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김인혜,「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
  9. 김인혜, 「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
  10.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46-53쪽.
  11.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12.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63~68쪽.
  13.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14.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74-75쪽.
  15. 김재원,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 7-8쪽.
  16. 김재원,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 8-9쪽.
  17. 김재원,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 10~14쪽.
  18. 국립박물관장 金載元, 경주고분 발굴동기와 일반의 의혹 언급」, 『조선일보』, 1946. 06.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accessed 2024. 11. 20)
  19. 정무정 「《한국 국보전》 전사(前史): 불발된 1947년 한국미술전 계획」, 『미술사학』47,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4, 277 ~ 300쪽.
  20.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21. 김재원,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 86~89쪽.
  22.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42-143쪽.
  23. 안휘준, 「김재원, 박물관의 아버지, 고고학·미술사학의 선각자」, 『한국사 시민강좌』50, 일조각, 2012.02, 260쪽.
  24. 김재원,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 109 ~ 151쪽.
  25. 재봉틀의 국어방, "고고학자 김재원(金載元)", 『네이버 블로그 - 재봉틀의 국어방』online, 작성일: 2007년 07월 29일.
  26.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243~245쪽.
  27.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423쪽.
  28. 재봉틀의 국어방, "고고학자 김재원(金載元)", 『네이버 블로그 - 재봉틀의 국어방』online, 작성일: 2007년 07월 29일.
  29.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423쪽.
  30.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31.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87~89쪽.
  32. 안휘준, 「김재원, 박물관의 아버지, 고고학·미술사학의 선각자」, 『한국사 시민강좌』50, 일조각, 2012.02, 25 257•261쪽.
  33. 김재원,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 121~151쪽.
  34. 염화미소, "무씨사당 화상석을 통해 본 단군신화", 『네이버 블로그 - 염화미소』online, 작성일: 2014년 11월 15일.
  35. 흐름과 변화, 「경주 감은사지 (慶州 感恩寺址)」, 『네이버 블로그 - 흐름과 변화』online, 작성일: 2023년 6월 27일.
  36. 김재원(金載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