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풍납리 토성과 백제시대의 사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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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번= {{TagSpage|145-1}}지금 漢江의 廣壯津(舊名廣津)은 龍山方面의 鷺梁津에 다음가는 南北交通의 要津으로, 역시 近年에 宏大한 人道橋의 架設을 보게 되였지만, 옛날 특히 廣州를 中心으로 하든 百濟時代에 있어서의 이곳의 任務와 意義는 더욱 重大하여 決코 漢江의 다른 渡津의 比가 아니었다. 廣壯津背 後에 不等邊方形의 輪郭을 나타내고 있는 廣壯山城―즉 峨嵯山城은 일즉이 이 要津을 江北에서 扼守하든 城鎭으로, {{TagRef|1}}그것이 百濟時代(乃至 新羅所有時代)의 有名한 阿旦城地임에 틀림없음은 茶山 丁若鏞先生이 임이 이를 說破<ref>疆域考卷三, 漢城考.</ref>한 以來 今日 學者의 共認하는 바이다. (輿地勝覽 漢城府 古跡條에 󰡔長漢城在漢江上, 新羅時, 置重鎭 後爲高句麗所據 羅人擧兵復之 作長漢城歌 以紀其功󰡕이라 한 長漢城도 이 山城의 指稱인 것을 역시 丁茶山先生이 이를 말하였다.) 但, 󰡔阿旦󰡕은 書에 따라 {{TagRef|2}}阿且<ref>같은 三國史記에도 百濟紀 責稽王元年條 및 蓋鹵王二十一年條에는 阿且로 되어 있으나, 地理志四, 三國有名未詳地中, 及列傳 溫達傳에는 分明히 阿旦으로 보여 있다. 이러한 例는 󰡔乙阿旦󰡕(永春)에서도 볼 수 있으니, 三國史記 地理志二 奈城郡條, 及同志四(高句麗州郡縣一百六十四中)와 世宗實錄 地理志 永春縣條에는 乙阿且로 되어 있음에 對하야 輿地勝覽(卷十四) 永春縣條에는 또한 分明히 乙阿旦으로 되어 있다. 何如間 旦과 且의 字形上類似로 因하야 寫本 板本에는 訛傳을 生하기 쉬운 것인즉 以上 諸書의 異同으로는 何者가 옳고 그른 것을 判斷하기 어렵지만, 有名한 高句麗 好太王(廣開土王) 陵碑의 百濟征服地名中에 보이는 󰡔阿旦城󰡕에 依하야 決定的 斷案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陵碑는 當時 史料의 絶對的 價値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旦은 頓, 呑과 한 가지 高句麗地名 끝에 흔히 붙는 字로 谷(タニ)을 意味한 말 같고(例하면 水谷城을 一云買旦忽, 十谷城을 一云德頓忽, 𢈴谷縣을 一云首乙呑, 於支呑을 一云翼谷이라고 함과 같은 것), 阿는 阿利水(漢江)의 略稱인 듯하니, 그렇다고 하면 阿旦은 즉 阿利水의 洞谷이란 말로 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야 南漢江의 上流인 永春을 乙阿旦이라 한 것도 이 本阿旦에 對한 對稱으로 乙은 上을 意味하는 󰡔우󰡕 󰡔웃󰡕의 音譯이 아닌가 한다.</ref>로 된 곳도 많고, 또 그로 因하야 後世에 󰡔峨嵯󰡕란 山名을 얻게까지 되었지만 元名은 阿旦이 옳다고 생각한다. 丁先生은 이에 對하여는 一言의 辨證이 없는 것을 보면 역시 阿且를 阿旦의 誤로 보지 못한 모양이다. 어떻든 阿旦은 廣津北岸에 있는 三國時代의 重鎭으로, 특히 百濟所有 時代에는 國都 漢城(廣州古邑, 春宮里)을 防衛함에 江北 第一의 要塞로 되여있던 것은 의심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廣壯山城(阿旦城)의 마즌 쪽, 즉 廣津南</br>{{TagPage|146-1}}岸, 人道橋 下側가까이에 風納里란 작은 部落이 있거니와 이 部落周圍에 一大土城의 遺址가 있어, 近來 學者들은 이를 風納里土城이라고 이름하게 되였다. (現今 行政區域으로는) 風納里는 廣州郡 九川面에 屬하야, 西는 漢江에 直面하고 北은 京忠間大路를 隔하야 店村의 沙場에 連接하고 東은 現名 曲橋里 城內里에 이웃하고 南은 조그만 내를 隔하야 中垈面의 夢村 及松坡里에 길이 通하여 있으며, 또 西北으로는 江을 隔하야 阿旦城址를 눈앞에 바라보고, 東으로는 東部面 春宮里의 二聖山城, 東南으로는 멀리 南漢山城을 바라보고 있다. 이 風納里의 土城은 그 規模가 比較的 雄大하야 周圍一里 弱(舊朝鮮里程七八里), 南北約十二三町, 東西約 六七町, 高二三十尺의 楕圓形에 가까운 土城으로서, 東側城壁에는 數處의 城門址가 뚜렷이 남아 있거니와, 西北隅와 西側城壁의 大部分은 漢江의 水魔로 因하야 거의 자최를 잃고 있다. 지나간 乙丑年(大正十四年) 여름 大洪水에는 激流가 土城의 北部一帶를 斜斷하야 그 곳에 있던 人家까지 全部 휩쓸어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土城의 東北隅와 東쪽 部分은 比較的 完全한 자최를 남기어 있고 西南隅와 南쪽 部分도 그 城址를 認할 만큼 뚜렷이 남아있다. 筆者는 이 土城에 就하야 數三次의 實地踏査를 行하였으나 遺物로는 아직 그럴듯한 것을 發見치 못하였고, 오직 城內田畝間에서 百濟時代에 屬한듯한 土器의 破片을 若干 주서온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年前에 總督府博物館에서는 風納里南端 土沙 中에서 出土되였다고 하는 所謂 (支那)六朝式의 鐎斗 二箇와 金環 等을 購入所藏한 것이 있고, {{TagRef|3}}또 鮎貝房之進도 일즉이 이 土城址를 踏査하다가 一老婆에게(城內에서 拾得하였다고 하는) 紫紺色의 瑠璃玉十數箇를 사서 一行과 共分하였다고 한다.<ref>雜誌 󰡔朝鮮󰡕 第二百三十四號(昭和九年十一月號) 所載 󰡔百濟古都案內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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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번= {{TagSpage|146-2}}그러면 이 土城은 어느 時代 어떤 나라의 遺蹟이라고 볼 수 있을까? 近來 學者는 이를 百濟時代의 土城이라고 함이 普通이니, 筆者도 이에 對하여는 何等의 異議가 없는 바이다. 그러나 이 土城을 대담하게 百濟의 一都城으로 看做하는―심지어 百濟初期의 都城인 慰禮城에 比定하는 一部學者의 說이 있는데, 거기 對하여는 贊同하기 어렵다. 百濟의 一都城이었으리라고 主張하는 派의 意{{TagPage|147-1}}見을 들으면, 첫째 그곳이 百濟의 領內에 屬하고, 둘째 土城의 規模가 훌륭하고, 셋째 遺物로 宗廟祭器用의 鐎斗가 出土되였다는 것이 그 唯一한 論證이며, 또 百濟初期의 慰禮城에 比定하는 派의 說을 들으면, 右의 理由外에 文獻上으로 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祖傳說 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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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번= {{TagSpage|147-2}}<blockquote no="01">十臣諫曰 惟此漢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中略) 溫祚都河南慰禮城</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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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4번= {{TagSpage|147-3}}云云의 一節을 들어, 特히 其中의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의 句가 이 風納里의 地理와 相應하다고 함에 있다. 우에 말한 鮎貝房之進氏는 역시 風納里慰禮城說을 主張하는 一人으로, 右句를 解釋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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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5번= {{TagSpage|147-4}}<blockquote no="02">{{TagRef|4}}東高岳に據るは 晝長山(卽ち南漢山) 山脈を指したので, 南沃澤を望むは屯骨堤の沃田を指したので, 其地形も風納里として正に 恰當して居るからであります. 若しも漢山(廣州古邑)の方と見んか, 南高岳に據り北沃澤を望むとあるべきであります<ref>同 上.</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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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6번= {{TagSpage|147-5}}라 하고, 氏는 更히 上記載外에 溫祚十三年 五月條의 󰡔予昨出巡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云云󰡕의 一節을 이끄러 가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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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7번= {{TagSpage|147-6}}<blockquote no="03">{{TagRef|5}}又十三年の遷都の時に 「昨出て, 漢山の南を巡觀するに」とあります. 此の昨は甚だ近距離たるを證據立てられ, 一日の中に優に往復さるるところなれば, 初年の都城も十三年の遷都城も同慰禮城內たりしことを間接に證據立てらるゝのであります<ref>同 上.</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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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8번= {{TagSpage|147-7}}라고 하였다. 氏의 後說中에는 印刷의 誤植이 더러 있는 듯하니, 󰡔漢山の南󰡕 云云은 즉 󰡔漢水の南󰡕 云云으로 고쳐 봐야 하겠고, 󰡔同慰禮城內󰡕 云云은 󰡔同慰禮國內󰡕 云云의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며, 按컨대 氏의 要領은―百濟最初의 慰禮城은 즉 風納里土城이요 溫祚十三年에 漢山下(春宮里)에 遷都하였다는 都城은 史記의 所謂 漢城으로 두 都城은 同一한 慰禮國內에 있는 相距不遠의 地라고 함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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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9번= {{TagSpage|147-8}}먼저 이 鮎貝氏等의 (風納里) 慰禮城說에 대하야 批判을 내리면, 氏等은 前記 三國史記의 文을 너무도 無批判的으로 引用 解釋하려는 큰 缺陷을 犯하였으니, 史記{{TagPage|148}}의 文中에는 서로 矛盾撞着되는 곳이 있어, 이를 考正하여 노치 않고는 그대로 믿기 어려운 까닭이다. {{TagRef|6}}이에 關하여는 일즉이 丁茶山先生의 明快한 考說이<ref>疆城考卷三, 慰禮考.</ref> 있는 터이지만, 溫祚建國傳說 中에 보이는 所謂 十臣의 諫言이란 것은 실상 本紀十三年條에 나타나는 漢山下遷都時에 關한 說話로―史官의 그릇된 追記라고―보지 아니하면 아니되고, 따라 百濟의 最初慰禮城의 位置가 河南 즉 漢水의 南쪽에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아니한다. 만일 建國傳說條의 記載와 같이 百濟가 當初부터 河南慰禮城에 都邑을 定하였던 것이라고 하면 本紀十三年五月條에 󰡔予昨出巡觀{{ruby|漢水之南|○○○○}}󰡕 云云의 句를 善解할 道理가 없는 것이다. 漢水의 南을 巡觀하야 遷都의 地를 求하였다고 할진댄 遷都의 脅威를 當한 最初의 慰禮城은 ―茶山의 說과 같이― 河北 즉 漢水 北쪽에 位置하였든 것이 分明치 아니한가. 왜 그러냐하면 漢水南에서 「漢水의 南을 巡觀하였다」는 것 보다 그 北쪽에서 그 南을 巡觀하였다는 것이 自然스럽고 合理的인 까닭이다. 그뿐만 아니라 十三年條에 보이는 遷都의 理由가 󰡔東(北?)有樂浪 北(東?)有靺鞨(濊?)侵軼疆境 少有寧日󰡕 云云의 事情에 있은즉, 이 역시 茶山의 說과 같이 慰禮城이 漢水北쪽에 있어 樂浪•靺鞨(濊)의 二宼와 連陸하야 자조 그 侵害를 입는 까닭에 漢水의 南으로 移都하려든 것이 分明하다. (과연 遷都前後의 記載中에는 󰡔靺鞨賊……來圍慰禮城󰡕이라, 󰡔樂浪來侵焚慰禮城󰡕이라 하는 것이 보이니, 이 來圍 來侵은 慰禮城의 位置가 河北에 있음으로 해서 잦고 쉬었든 것이었을 것이다.) 河南慰禮城의 名稱은 河北慰禮城의 對稱으로, 北에 있든 慰禮城의 民戶를 河南 新都에 옮김으로 말미암아 생긴 別稱이리라 하는 茶山先生의 意見을 또한 尊重한다. 北慰禮城의 位置에 就하여는 아직 뚜렷한 發見이 없다. 茶山先生의 京城東北 (東小門外十里의 地)說이 있으나, 거기에는 어떠할지? 確保하기 어렵고, 但 漢水近北의 地였든 것만은 疑心없다고 생각되며, 南慰禮城은 즉 漢山下 廣州古邑, 지금의 廣州郡 東部面 春宮里 一帶에 不外하다고 본 丁先生의 說을, 역시 鐵案으로 삼지 아니할 수 없다. 春宮里 一帶는 漢山(南漢山)下의 唯一한 要地로, 屛風 속 같이 山岳에 둘려있으니, 南漢山은 그때{{TagPage|149-1}}로부터 重視하든 第一의 山城地였을 것이며, 春宮里 背後의 二聖山城도 그에 다음가는 軍事的 要害이었을 것이다. 이 南慰禮城의 正名은 즉 漢城이니, 漢城은 漢山에서 얻은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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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0번= {{TagSpage|149-2}}우에 말함과 같이 溫祚傳說條의 所謂 十臣의 說을 後의 南慰禮(漢城) 擇定時의 說話로 본다고 하면 그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云云은 勿論 이 漢山에 올라(遠視眼的으로) 周圍를 바라보고 한 말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리고 보면 其中 󰡔東據高岳󰡕은 黔丹山一帶의 謂요, 󰡔西阻大海󰡕는 西海로 通한 漢江下流, 󰡔南望沃澤󰡕은 炭川流域의 屯田里方面을 가리킨 것이 分明하다. 鮎貝氏는 이에 對하야 󰡔しも漢山(廣州古邑)の方と見んか, 南高岳に據り北沃澤を望むとあるべまであます󰡕(見上)라고 하였지만, 이는 너무도 遠景을 無視한 近視眼的인 批判이라 하겠다. 鮎貝氏는 丁茶山說에 좇아 廣州古邑(春宮里)을 百濟의 第二都城(漢城)에 認定하면서, 茶山의 河北慰禮城說이라든지 溫祚傳說의 十臣說을 이 第二都城 擇地時의 事實로 考定하는 그 意見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 듯하야, 畢竟 第一慰禮城을 風納里土城에 比定하였거니와, 風納里는 以上 論述한 南北二慰禮中 何者에든지 屬할 수 없는 것이다. 風納里를 氏等의 說과 같이 最初의 慰禮로 본다면 後의 遷都地擇定時의 󰡔昨出巡觀漢水之南󰡕의 句가 큰 障碍가 되며 또 이를 南慰禮로 본쟌즉 󰡔就漢山下立柵󰡕의 記事가 이를 許容치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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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1번= {{TagSpage|149-3}}그뿐만 아니라 筆者는 風納里의 地理로 보아 그곳이 都城에는 不適合하다고 생각한다. 古來로 朝鮮式의 都城은 대개 山岳을 背景으로 하거나 혹은 丘陵에 依據함이 普通이니, 三國의 例를 들면 高句麗의 國內城(通溝), 平壤城, 百濟後期의 都城인 熊津城(公州) 泗沘城(扶餘) 新羅의 月城(慶州) 等이 다 그러한 條件을 갖추어있다. (其他 高麗時代의 開京, 李朝의 京城이 역시 그러하다). 이들 都城은 特히 背山(或은 依陵)臨水의 地로서, 更히 非常時의 所用인 山城을 背後 혹은 近距里의 地에 가지고 있거니와, 山城이야말로 朝鮮式 都城에는 必須條件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風納里로 말하면 臨水의 條{{TagPage|150-1}}件만은 가지고 있으나―그 臨水란 것도 그때의 漢水河道가 어떠하였는지 모르지만, 水害를 超越할만한 程度의 것이라 하기 어렵고―重要한 背山(혹은 依陵) 또는 山城의 條件을 缺하여 있다. 너무도 헤심심한 平地河邊에 동떨어져 있는 感이 없지 않다. 혹은 말하기를 風納里 越便에 廣壯山城(阿旦城)이 있고 東便에 二聖山城이 있고 또 東南方에 南漢山이 있지 않느냐고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廣壯山城은 漢江을 隔하야 건너 쪽에 있을 뿐더러 그것은 規模가 작아, 危急時 最後 根據地로서의 避難用의 山城이라기보다 外敵防禦의 前線的 要塞쯤 되어 있어 王都所屬의 山城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또 二聖山城은 역시 조그만 山城이나 그 方向과 入口로 보아 春宮里쪽의 山城이요, 이 風納里쪽을 爲한 山城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 다음 南漢山은 百濟以來의 有名한 山城地로 볼 수 있지만, 이 역시 距離로 보아 春宮里쪽에 密接하여 있고, 風納里와는 相距二三十里(朝鮮里數)나 되는 먼 곳으로서 그 中間을 連絡하는 谿谷 혹은 山脈이 통이 끊어져 있다. 國都의 山城이란, 대개 國都와의 最近 距里에 있거나 혹 相距가 稍遠하더라도 山脈 혹 谿谷으로 連接되야 兩地間의, 地理的 關係가 緊密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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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2번= {{TagSpage|150-2}}이와 같이 風納里는 國都를 이룰만한 地理的 條件을 갖추지 못한 缺陷이 있으므로, 이를 漠然히 百濟의 一都城이었으리라고 보는 一派의 說에 대하여도 勿論 不服從이다. 土城의 規模가 훌륭하다고 그곳이 반드시 都城이라는 理由는 없다. 都城이 아니고라도 어떠한 必要로 因하야 훌륭한 城을 쌓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거기서 祭器의 一種인 鐎斗二箇가 出土된 理由로 해서 그곳이 都城이었으리라고 하는 것도 너무 速斷에 지나친다고 할 수밖에 없다. 鐎斗는 반드시 宗廟祭器에만 使用되는 것도 아니지만, 設令 그렇다 하더라도 遺物이란 이곳저곳으로 流動되는 것이므로 그것으로써 都城與否를 論할거리는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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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3번= {{TagSpage|150-3}}그러면 風納里土城은 대체 百濟時代에 무엇에 所用된 城이었든가? 都城이 아니라면 普通의 城鎭으로 볼 수밖에 없거니와, 나는 첫째 그 地理로 보아 더욱 그러함을 {{TagPage|151-1}}主張하나니, 즉 이 土城은 越便의 阿旦城과 같이 廣津이란 要津을 戍守하든 河南第一의 重鎭이라고 斷定하야 의심 없다고 생각한다. 東國文獻備考 輿地考 城郭 廣州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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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4번= {{TagSpage|151-2}}<blockquote no="04">{{ruby|坪古城|○○○}} 在廣津上野中 世傳百濟防戍處 土築(周七里今廢)</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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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5번= {{TagSpage|151-3}}이라 하고, 또 楊州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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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6번= {{TagSpage|151-4}}<blockquote no="05">楊津古城(備局謄錄作廣津城) 在南峨嵯山東崖 土築 俯臨漢水 與廣州{{ruby|坪古城|○○○}} 隔江相對 三國時{{ruby|防戌處|●●●}}(今 皆廢)</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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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7번= {{TagSpage|151-5}}라고 한 記事가 있는데, 後節의 所謂 楊津古城이란 것은 지금의 廣壯山城 즉 (三國時代의) 阿旦城을 指稱한 것이 分明하고, 前後文中의 이른바 坪古城은 바로 우리의 問題中에 있는 風納里土城 그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또한 明白하다. 더욱 그 土城의 周圍가 七里라고 한 것에 있어 風納里土城임을 證明하며, 󰡔世傳百濟防戍處󰡕라고 함은 우의 卑見을 旁證하여 준다. 坪古城이란 이름은 平野에 있는 古城이란 뜻으로, 後世의 俗稱일 것이요 百濟時代의 元名은 아닐 것이다. {{TagRef|7}}鮎貝氏는 이 坪古城의 遺址를 風納里의 北쪽 店村一帶에 있는 양으로 말하였으나,<ref>註(3)과 同함.</ref> 나의 實地踏査한 바로는 그곳에서 何等의 土城의 遺蹟을 發見하지 못하였다. 이는 氏의 어떠한 誤察로 因함인 듯하므로 거기 對하여는 더 追窮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土城이 百濟時代의 元名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一言을 費치 아니할 수 없다. 百濟의 漢江沿岸의 城砦로 史記에 나타난 것은, 우의 阿旦城 外에 또 虵城이란 것이 있으니, 虵城의 名은 三國史記 百濟紀에 두 곳밖에 더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는 責稽王元年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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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8번= {{TagSpage|151-6}}<blockquote no="06">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中略)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旦)城•{{ruby|虵城|○○}} 備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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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9번= {{TagSpage|151-7}}라고 한 것이 그것이요, 또 하나는 蓋鹵王二十一年條에 高句麗의 間諜者 道琳의 言에 從하야 城郭을 쌓고 宮樓臺閣을 짓고 先王의 陵을 修하고 또 漢江의 水害를 防止키 爲하야 堤防을 築하는 등 大規模의 土木을 일으켰다는 有名한 記事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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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0번= {{TagSpage|151-8}}<blockquote no="07">緣河樹堰 自{{ruby|虵城|○○}}之東 至崇山之北</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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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1번= {{TagSpage|151-9}}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의 󰡔緣河樹堰󰡕은 말할 것도 없이 漢江南岸의 堤防工事를 말한 것이어니와, 그 때 築{{TagPage|152-1}}造한 堤防이 虵城東에서 시작하야 崇山北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堤防은 지금 자취도 없지만, 崇山은 우에 말한 󰡔東據高岳󰡕의 高岳 그것으로서, 其北은 바로 黔丹山의 後麓인 倉隅里附近에 不外할 것이다. 虵城은 역시 漢江南岸에 있어 江北의 阿旦城과 並出됨을 보면, 이것이 바로 風納里土城에 相當한 것을 暗示하여 준다. 前文中의 󰡔修阿且(旦)城•虵城 備之󰡕의 句는 자못 注意를 要할 者것니, 阿旦城과 虵城이 當時 廣津方面을 防戍하는 重大한 任務와 意義를 가졌던 것을 더욱 알 수 있는 同時에 虵城이 坪古城 즉 風納里土城의 元名인 것을 明言할 수 있다. {{TagRef|8}}鮎貝氏도 虵城을 坪古城에 比定하기는<ref>同 上.</ref> 하였으나 氏의 본바 坪古城의 位置는 風納里土城 以外 딴 곳에 求하였으므로 나와는 結論을 달리한다. 나는 다시 一步를 내키어 言語上으로 風納里란 地名과 虵城의 名稱을 考察하야 兩者의 關係를 論하려 한다. 風納里는 俗名 󰡔바람드리󰡕의 漢譯名으로, 村民은 지금도 󰡔바람드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俗名을 들을 때 나는 直覺的으로 虵城의 名稱을 聯想하야 󰡔바람드리󰡕가 󰡔배암드리󰡕의 訛傳이 아닌가하는 推測을 일으켰다. 虵(蛇)는 즉 朝鮮語로 배암이니, 󰡔배암󰡕과 󰡔바람󰡕과는 音이 자못 近似하야 속히 發音하면 거의 混同할 程度이다. 그 다음 󰡔드리󰡕는 納의 뜻이 아니라 즉 平野의 義인 󰡔들󰡕로서, 坪古城이란 名稱도 여기서 생긴 듯하거니와, 󰡔들󰡕은 󰡔벌󰡕과 같이 古代에는 平野의 義로부터 또한 人民聚落의 城邑을 意味한 語로도 되야, 그 發音은 󰡔들󰡕 以外에 󰡔들󰡕 󰡔드라󰡕 󰡔드래󰡕 󰡔다라󰡕 󰡔달래󰡕 󰡔드르󰡕等, 種種의 方音이 있다. 그리하야 이를 漢字로 寫音할 때에도 種種의 글자를 쓰게 된다. 즉 訓音混用하야 突(돌) 達(달) 梁(돌) 喙(古訓돌) 珍(古訓돌) 珍兮(돌애) 珍也(돌아) 月(달) 月良(달라) 月羅(달라) 等(들) 等良(들라) 刀良(도라) 刀臘(도라) 刀乃(도래) 都羅(도라) 都里(도리) 多羅(다라) 等字로 나타낸다. 마치 󰡔벌󰡕을 伐(벌) 火(불) 弗(불) 卑離(비리) 夫里(부리) 等字로 나타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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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2번= {{TagSpage|152-2}}梁書 百濟傳을 보면 百濟의 言語 法俗을 적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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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3번= {{TagSpage|152-3}}<blockquote no="08">謂邑曰{{ruby|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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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4번= {{TagSpage|152-4}}고 한 것이 있으니, 여기 󰡔檐魯󰡕는 곧 이 󰡔드르󰡕 󰡔다라󰡕의 音{{TagPage|153-1}}譯인 것이 분명하며, 또 日本史上에는 百濟를 󰡔クダラ󰡕라고 稱하거니와 󰡔ダラ󰡕는 역시 󰡔다라󰡕로서 城邑의 義요, 󰡔ク󰡕는 大의 義인 󰡔크󰡕 󰡔큰󰡕의 寫音으로―クダラ는 즉 大城(國城)의 義니―百濟側 稱呼를 그대로 表音한 것이라고 나는 解釋한다. 그러면 虵城은 方言으로 󰡔배암다라󰡕 󰡔바암드르󰡕인 것이 의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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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5번= {{TagSpage|153-2}}요컨대 󰡔바람드리󰡕(風納)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訛轉인 同時에, 虵城은 바로 後者의 譯名이며, 百濟當時에는 漢字로는 虵城이라 썼지만 口頭로는 흔히 方言을 使用하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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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7일 (목) 19:1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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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풍납리 토성과 백제시대의 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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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 廣州風納里土成과 百濟時代의 蛇城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0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4월
시작쪽 145쪽 종료쪽 153쪽 전체쪽 009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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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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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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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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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5-1지금 漢江의 廣壯津(舊名廣津)은 龍山方面의 鷺梁津에 다음가는 南北交通의 要津으로, 역시 近年에 宏大한 人道橋의 架設을 보게 되였지만, 옛날 특히 廣州를 中心으로 하든 百濟時代에 있어서의 이곳의 任務와 意義는 더욱 重大하여 決코 漢江의 다른 渡津의 比가 아니었다. 廣壯津背 後에 不等邊方形의 輪郭을 나타내고 있는 廣壯山城―즉 峨嵯山城은 일즉이 이 要津을 江北에서 扼守하든 城鎭으로, 원문주1▶그것이 百濟時代(乃至 新羅所有時代)의 有名한 阿旦城地임에 틀림없음은 茶山 丁若鏞先生이 임이 이를 說破[1]한 以來 今日 學者의 共認하는 바이다. (輿地勝覽 漢城府 古跡條에 󰡔長漢城在漢江上, 新羅時, 置重鎭 後爲高句麗所據 羅人擧兵復之 作長漢城歌 以紀其功󰡕이라 한 長漢城도 이 山城의 指稱인 것을 역시 丁茶山先生이 이를 말하였다.) 但, 󰡔阿旦󰡕은 書에 따라 원문주2▶阿且[2]로 된 곳도 많고, 또 그로 因하야 後世에 󰡔峨嵯󰡕란 山名을 얻게까지 되었지만 元名은 阿旦이 옳다고 생각한다. 丁先生은 이에 對하여는 一言의 辨證이 없는 것을 보면 역시 阿且를 阿旦의 誤로 보지 못한 모양이다. 어떻든 阿旦은 廣津北岸에 있는 三國時代의 重鎭으로, 특히 百濟所有 時代에는 國都 漢城(廣州古邑, 春宮里)을 防衛함에 江北 第一의 要塞로 되여있던 것은 의심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廣壯山城(阿旦城)의 마즌 쪽, 즉 廣津南
▶P146-1岸, 人道橋 下側가까이에 風納里란 작은 部落이 있거니와 이 部落周圍에 一大土城의 遺址가 있어, 近來 學者들은 이를 風納里土城이라고 이름하게 되였다. (現今 行政區域으로는) 風納里는 廣州郡 九川面에 屬하야, 西는 漢江에 直面하고 北은 京忠間大路를 隔하야 店村의 沙場에 連接하고 東은 現名 曲橋里 城內里에 이웃하고 南은 조그만 내를 隔하야 中垈面의 夢村 及松坡里에 길이 通하여 있으며, 또 西北으로는 江을 隔하야 阿旦城址를 눈앞에 바라보고, 東으로는 東部面 春宮里의 二聖山城, 東南으로는 멀리 南漢山城을 바라보고 있다. 이 風納里의 土城은 그 規模가 比較的 雄大하야 周圍一里 弱(舊朝鮮里程七八里), 南北約十二三町, 東西約 六七町, 高二三十尺의 楕圓形에 가까운 土城으로서, 東側城壁에는 數處의 城門址가 뚜렷이 남아 있거니와, 西北隅와 西側城壁의 大部分은 漢江의 水魔로 因하야 거의 자최를 잃고 있다. 지나간 乙丑年(大正十四年) 여름 大洪水에는 激流가 土城의 北部一帶를 斜斷하야 그 곳에 있던 人家까지 全部 휩쓸어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土城의 東北隅와 東쪽 部分은 比較的 完全한 자최를 남기어 있고 西南隅와 南쪽 部分도 그 城址를 認할 만큼 뚜렷이 남아있다. 筆者는 이 土城에 就하야 數三次의 實地踏査를 行하였으나 遺物로는 아직 그럴듯한 것을 發見치 못하였고, 오직 城內田畝間에서 百濟時代에 屬한듯한 土器의 破片을 若干 주서온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年前에 總督府博物館에서는 風納里南端 土沙 中에서 出土되였다고 하는 所謂 (支那)六朝式의 鐎斗 二箇와 金環 等을 購入所藏한 것이 있고, 원문주3▶또 鮎貝房之進도 일즉이 이 土城址를 踏査하다가 一老婆에게(城內에서 拾得하였다고 하는) 紫紺色의 瑠璃玉十數箇를 사서 一行과 共分하였다고 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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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6-2그러면 이 土城은 어느 時代 어떤 나라의 遺蹟이라고 볼 수 있을까? 近來 學者는 이를 百濟時代의 土城이라고 함이 普通이니, 筆者도 이에 對하여는 何等의 異議가 없는 바이다. 그러나 이 土城을 대담하게 百濟의 一都城으로 看做하는―심지어 百濟初期의 都城인 慰禮城에 比定하는 一部學者의 說이 있는데, 거기 對하여는 贊同하기 어렵다. 百濟의 一都城이었으리라고 主張하는 派의 意▶P147-1見을 들으면, 첫째 그곳이 百濟의 領內에 屬하고, 둘째 土城의 規模가 훌륭하고, 셋째 遺物로 宗廟祭器用의 鐎斗가 出土되였다는 것이 그 唯一한 論證이며, 또 百濟初期의 慰禮城에 比定하는 派의 說을 들으면, 右의 理由外에 文獻上으로 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祖傳說 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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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7-2

十臣諫曰 惟此漢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中略) 溫祚都河南慰禮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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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7-3云云의 一節을 들어, 特히 其中의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의 句가 이 風納里의 地理와 相應하다고 함에 있다. 우에 말한 鮎貝房之進氏는 역시 風納里慰禮城說을 主張하는 一人으로, 右句를 解釋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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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7-4

원문주4▶東高岳に據るは 晝長山(卽ち南漢山) 山脈を指したので, 南沃澤を望むは屯骨堤の沃田を指したので, 其地形も風納里として正に 恰當して居るからであります. 若しも漢山(廣州古邑)の方と見んか, 南高岳に據り北沃澤を望むとあるべきでありま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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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疆域考卷三, 漢城考.
  2. 같은 三國史記에도 百濟紀 責稽王元年條 및 蓋鹵王二十一年條에는 阿且로 되어 있으나, 地理志四, 三國有名未詳地中, 及列傳 溫達傳에는 分明히 阿旦으로 보여 있다. 이러한 例는 󰡔乙阿旦󰡕(永春)에서도 볼 수 있으니, 三國史記 地理志二 奈城郡條, 及同志四(高句麗州郡縣一百六十四中)와 世宗實錄 地理志 永春縣條에는 乙阿且로 되어 있음에 對하야 輿地勝覽(卷十四) 永春縣條에는 또한 分明히 乙阿旦으로 되어 있다. 何如間 旦과 且의 字形上類似로 因하야 寫本 板本에는 訛傳을 生하기 쉬운 것인즉 以上 諸書의 異同으로는 何者가 옳고 그른 것을 判斷하기 어렵지만, 有名한 高句麗 好太王(廣開土王) 陵碑의 百濟征服地名中에 보이는 󰡔阿旦城󰡕에 依하야 決定的 斷案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陵碑는 當時 史料의 絶對的 價値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旦은 頓, 呑과 한 가지 高句麗地名 끝에 흔히 붙는 字로 谷(タニ)을 意味한 말 같고(例하면 水谷城을 一云買旦忽, 十谷城을 一云德頓忽, 𢈴谷縣을 一云首乙呑, 於支呑을 一云翼谷이라고 함과 같은 것), 阿는 阿利水(漢江)의 略稱인 듯하니, 그렇다고 하면 阿旦은 즉 阿利水의 洞谷이란 말로 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야 南漢江의 上流인 永春을 乙阿旦이라 한 것도 이 本阿旦에 對한 對稱으로 乙은 上을 意味하는 󰡔우󰡕 󰡔웃󰡕의 音譯이 아닌가 한다.
  3. 雜誌 󰡔朝鮮󰡕 第二百三十四號(昭和九年十一月號) 所載 󰡔百濟古都案內記󰡕.
  4. 同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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