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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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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4일 (화) 17: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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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文一平)
문일평.jpg
출처 : 조선일보 1939년 1월 1일자 기사[1]
 
한글명 문명회 한자명 文明會 영문명 가나명 이칭 일평(一平), 호암(湖巖)
성별 남성 생년 1888년 몰년 1939년 출신지 평안북도 의주부 주내면 서부동 (現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전공 정치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문일평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생애


유년기 및 초기 교육 (1888-1905)

문일평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공간군에서 아버지 문천두인물(文天斗)와 어머니 해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여 어려서부터 한학자 최해산인물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888년 12세에 김은재인물와 결혼하여 이후 부인에게서 한글을 배우는 대신 부인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었다.


일본 유학과 계몽 활동 (1905-1911)

이후 일본 도쿄공간로 유학을 떠나 1905년 아오야마학원기관 중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일어를 몰라 중퇴하고, 태극학회단체의 일어강습소인 태극학교기관에 입학하여 일어를 학습하였다. 1906 도쿄공간 간다 세이소쿠 학교기관에서 학습을 이어갔다. 이사한 새 하숙집 옥진관(玉津館)에서 홍명희인물, 이광수인물와 만나 함께 생활하였다. 이후 메이지 학원기관 중학부(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이광수인물와 동급생이 되었다. 1906년부터 1908년까지 태극학회단체의 기관지 『태극학보』를 비롯하여 『대한흥학보』 등에 계몽주의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1910년 메이지 학원기관를 졸업하고, 1910년 23세에 평양공간 대성(大成)학교기관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1년 와세다 대학기관 고등예과에 입학하여 유학생 친목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운동과 학문 활동 (1912-1920)

1912년 4월 『학계보』 창간호에 세 편의 글을 기고하면서, ‘호암(虎巖)’과 ‘호암산인(虎巖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7월 고등예과 수료 후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1912년 말 광문회단체 도쿄공간 출판지부 설립 추진 중 갑작스럽게 상하이공간(上海)로 떠났다. 와세다대학기관에서 일본 우익학생들의 언동에 민족적 비애를 느끼고 중국행을 선택했다.

1913년 1월 상하이공간에 도착한 며칠 뒤 난징공간(南京)으로 가서 신규식인물, 박은식인물, 홍명희인물, 정인보인물 등을 만나 자유당사(自由黨舍) 사택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1913년 봄 신규식인물의 주선으로 상하이공간 대공화일보사기관(大共和日報社)에 취직하였다. 그리고 신규식인물이 주도한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단체(同濟社)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단체는 표면상으로는 동포들의 상호 부조 기관이란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적으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여 복국復(國)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 단체였다. 동제사단체는 장차 독립운동에 중추가 될 인재 양성을 위해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공간 프랑스 조계 지역의 밍떠리(明德里)에 박달학원기관(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과정은 1년 반이었고, 교과목은 영어·중국어·지리·역사·수학 등이었다. 1914년 귀국 후 고향에 은거하였으나, 1917년 일제 경찰의 갑종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1918 계몽구락부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만세운동사건으로 민족대표들이 체포되자 3월 8일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독립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애원서(哀願書)」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3월 12일 보신각에서 「애원서」를 직접 낭독하여 다시 한 번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불을 붙이고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미결수로 감옥에 있던 기간이 계산되어 1920년 3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지만, 실제로는 만 1년간 수감 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 (1920-1928)

1920년 출옥 이후 문일평은 학교 교원생활을 하면서도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 8월 한성도서주식회사기관 출판부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그 해 8월 13일에 개최된 조선노동대회단체(朝鮮勞働大會)에서 교육부장에 피선되었다. 9월 『서울』 제6호에 「일본인이 저술한 이충무전」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역사 저술가로 활약하였다. 이때부터 호암(虎巖)이라는 호 대신 호암(湖巖)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6월 계명구락부단체에서 발행하는 『신민공론(新民公論)』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2월 금연을 통한 저축으로 학문 권장에 힘 쓸 것을 규약한 단연동맹회단체(斷煙同盟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동학교기관 역사담당 교사로 근무하면서 우리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길러주었다. 1923년 1월 14일 『동명(東明)』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을 발표하면서, 역사에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월 21일자 『동명』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속)」을 발표하여 계급투쟁론적 민중사관을 드러내었다. 1924년부터 1925년 4월 초순까지 송도고등보통학교 역사담당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경 세 번째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제국대학기관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 청강생으로 입학하였으나, 학비 문제로 포기하고 1926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27년 2월 국내 민족유일당 운동의 결과로 발기된 신간회단체(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중앙위원과 간사에 선출되었다. 『고려개사(高麗槪史)』를 집필하여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중세사 왜곡에 대응하였다. 이 글은 민족주의사학에서 고려사를 단대사(斷代史)로 정리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 문일평은 1927년 8월 15일에 개최된 조선물산장려회단체 이사회에서 이사(선전부 상무이사)로 보선되었으며, 그 기관지 <자활(自活)>의 주필로도 선임되었다.


후반기 학술 및 언론 활동 (1928-1939)

1928년 5월 『별건곤(別乾坤)』에 「조선심 차진 조선문학서적」을 발표하여 ‘조선심’을 강조하였다. 민족주의사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실증사학이나 사회경제사학의 방법론까지 모두 흡수하여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항한 민족사학자적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28년 말 조선일보기관사에 입사하였다. 1929년 5월 22일부터 6월 27일까지 『조선일보기관』에 「조선인과 국제안서적」을 발표하여 조선 성리학과 맹목적 존화주의를 비판하고, 관념적 명분과 외형적 의리보다 실리 우선의 국가외교를 강조하였다. 6월부터 『조선일보기관』에 「최영과 조선정신서적」을 연재하여 한국사의 전개를 ‘대조선정신’과 ‘소조선정신’의 대립과 갈등으로 설명하였다. 11월 13일부터 11월 17일까지 『조선일보기관』에 「조선문화에 대한 일고찰서적」을 발표하여 귀족문명에 대비되는 민중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30년 9월 21일에서 10월 10일까지 『조선일보기관』에 「조선반란사론서적」을 연재하여 한국사는 제왕들의 역사만이 아니라 반역자의 역사임에 주목하였다. 독립전선에 과감히 뛰어드는 데는 혁명가의 기개가 요구되었고, 그것을 반역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기대한 때문이었다. 1931년 초 조선일보기관사를 사직하였다. 1930년 청구(靑丘)학회단체에 가입하였다가 1932년에 탈퇴하였다. 청구(靑丘)학회단체를 단순한 학술단체로 알았다가 일제 관변 식민사학의 중심임을 인식하고 곧바로 탈퇴한 것 같다. 1934년 5월 7일에는 청구(靑丘)학회단체진단학회(震檀學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3년 1월에 방응모인물조선일보기관사를 인수하자, 그 해 4월에 편집고문으로 초빙되어 조선일보기관사에 재입사하였다. 『조선일보기관』에 일주일에 몇 차례 사론(史論)과 사화(史話), 그리고 수필 등을 실었다. 전문적인 학술 논문이 아니라 민중을 상대로 다양한 소재를 우리 역사와 연결시켜 소개한 계몽적인 것이었다. 1933년 4월 26일부터 5월 16일까지 『조선일보기관』에 「사안(史眼)으로 본 조선서적」을 발표하여 ‘이조’ 문명이 훈민정음서적을 창제함으로써 미래의 민중 문명을 배태한 진보적 시기로 평가하였다. 1934년부터 모습을 드러낸 조선학운동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조선의 문화에 주목하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조선의 마음(朝鮮心)을 강조하였다. 1934년 9월 10일 『조선일보기관』에 사설 「정다산(丁茶山)의 위적(偉績)-99년기(九十九年忌)에 제(際)하야」를 발표하여 조선학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시켰다. 1938년 1월 3일부터 1월 5일까지 『조선일보기관』에 「이조문화사의 별혈(別頁)」을 게재하여 실사구시 학풍을 강조하였다. 1938년 12월 16일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76책의 완간 출판기념회를 개최하는 데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9년 4월 3일 문일평은 경기도 경성부 내수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에서 지병이던 급성단독(急性丹毒)이 재발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연구


한국사 연구

민족주의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사학은 국가라는 외형은 없어졌으나 정신만 살아 있으면 민족은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낭가사상’(郎家思想, 신채호인물)을 비롯하여 ‘혼’(박은식인물)이나 ‘얼’(정인보인물) 등 민족정신을 강조한 정신사관이었다. 선생 역시 1930년 전후 한국사의 전개를 ‘대조선정신’과 ‘소조선정신’의 대립과 갈등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대조선정신이란 대륙경략과 관련된 북진정책의 수행을 의미하고, 소조선정신은 한반도 내에 머무는 것이었다. 특히 선생은 고구려와 고려가 외침을 막아낸 사실을 여러 차례 서술하며, 삼국통일을 고구려의 대조선운동의 실패이며 신라의 소조선운동의 성공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신채호인물가 한국사의 전개를 낭가사상과 유학사상의 대립으로 설명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정신 역시 정신사관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조선정신과 아울러 ‘조선심’이나 ‘조선사상’도 내세웠는데, ‘훈민정음서적(訓民正音)’이 민중 본위의 문자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조선사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언급하였으며, 세종대왕은 민중본위의 정치를 시행하고 훈민정음서적을 제정하였으므로 조선심의 대표자로 파악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심·조선사상의 핵심은 민중본위의 실제적인 민중문명이었다. 선생이 역사의 원동력을 민중에서 찾은 것은 특히 3.1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선생은 3.1운동사건동학농민전쟁사건 이래 최대의 민중운동이었음을 지적하였고, 그 결과로 민족과 여성의 각성이 이루어졌음을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한국의 역사와 민족에 대한 자긍에서 조선심·조선정신·조선학을 강조하면서도, 역사에 있어서 국수주의적인 요소는 배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서술하고 엄정한 비판을 통하여, 그 장점에는 더욱 힘쓰고 단점은 제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즉 국수주의를 비판하면서, 아울러 우리 역사에 대한 비하도 배격하였다. 사실 그대로를 밝히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역사학의 대중화

또다른 관심은 역사학의 대중화였다. 선생은 한국사의 통속화·취미화·과학화·미문화(美文化)를 주장하며, 신문에 계몽적인 사론이나 사화를 쉬운 문체로 쓰고 어린이를 상대로도 연재한 것도 역사학 대중화의 실천이었다. 일부에서 선생이 전문적인 학술논문을 쓰지 않고 계몽적인 글로 일관하였음이 안타까운 일로 이야기하지만, 이윤재인물(李允宰)가 선생의 사학을 소개하며, “심오한 학설이나 번쇄한 고증은 일체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일반대중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통속적 문장으로 쓰기를 힘썼”다고 지적한 것이 오히려 올바른 인식이었다. 바로 그것이 오랫동안 선생이 추구한 역사의 대중화였고, 그것은 동시에 문화운동의 형태로 드러난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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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출처 : 문일평,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