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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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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ref>Korean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KAPF,카프):1925년에 결성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문학가들의 실천단체.</ref>을 결성하여 지주나 공장주에 조직적으로 맞서는 농민과 노동자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계급문학<ref>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노동자 · 농민 등을 대상으로 삼는 계몽적 성격의 문학.</ref>운동에 참가하고「농민」(『조선지광』, 1929.6)·「재출발」(『비판』, 1931.7∼8)·「그 여자」(『신인문학』, 1935.8)·「색등 밑에서」(『신인문학』, 1935.10)·「항간사」(『신인문학』, 1935.12)·「화초」(『신조선』, 1935.12)·「추야장」(『신인문학』, 1936.1)·「풍경」(『신조선』, 1936.1)·「백골」(『비판』, 1936.9) 등의 소설을 지었으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과정을 전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평단에서 활동하며 비평가로서 굳은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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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28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한 후 일본의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사상 문제로 퇴학당하였다. 퇴학 후 귀국하였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맹하는 한편, 수원 평택 지방에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관계하여 3년여의 감옥 생활을 하였다. 박승극은 중학 4년 때부터 프로문학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 운동의 확대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때문에 대학을 중퇴했을 정도의 사상성을 지닌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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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wank99/220908127235 (재봉틀의 국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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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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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2일 (목) 00:32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곽아랑(KNU2024))이 작성했습니다.




박승극(朴勝極)
박승극.jpg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글명 박승극 한자명 朴勝極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909년 몰년 출신지 경기도 수원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1]을 결성하여 지주나 공장주에 조직적으로 맞서는 농민과 노동자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계급문학[2]운동에 참가하고「농민」(『조선지광』, 1929.6)·「재출발」(『비판』, 1931.7∼8)·「그 여자」(『신인문학』, 1935.8)·「색등 밑에서」(『신인문학』, 1935.10)·「항간사」(『신인문학』, 1935.12)·「화초」(『신조선』, 1935.12)·「추야장」(『신인문학』, 1936.1)·「풍경」(『신조선』, 1936.1)·「백골」(『비판』, 1936.9) 등의 소설을 지었으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과정을 전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평단에서 활동하며 비평가로서 굳은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생애


일본 대학 입학과 퇴학

1928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한 후 일본의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사상 문제로 퇴학당하였다. 퇴학 후 귀국하였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맹하는 한편, 수원 평택 지방에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관계하여 3년여의 감옥 생활을 하였다. 박승극은 중학 4년 때부터 프로문학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 운동의 확대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때문에 대학을 중퇴했을 정도의 사상성을 지닌 인물이다.


문학활동의 시작

1929년 소설 「농민」을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프로 문화운동에 대한 감상」이라는 평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평론활동을 전개한다. 1930년대 중반에는 ‘서화(鼠火)’와 ‘물’ 을 둘러싼 논쟁과 창작방법논쟁[3]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비평가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해방 후의 문학비평 가운데 「농민문학의 신과업(新課業)」은 토지개혁 등 농촌개혁을 주제로 하고 있는 점이 특색을 이룬다.


농민문학관

박승극은 농민운동에 참여하며 얻은 산체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그의 문학에 생생한 사실성을 더할 수 있었다. 박승극은 조선문제의 해결은 토지문제의 해결에 있다고 보았으며 나아가‘농민문학가동맹'과 같은 독립된 농민문학단체를 결성할 것을 제안하면서, 농민문학을 서울 한 복판에서 할 것이 아니라‘농촌으로! 농민 속으로!’ 들어가서 할 것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러한 농민문학관을 실천한 작품으로 단편소설 「떡」과 중편소설 「밥」이 있다.


소설세계

박승극의 소설은 주로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현실적 상황으로 인해 신음하던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제재로 하고 있다. 지주나 공장주에 조직적으로 맞서는 노동자 농민의 투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카프의 창작 경향과는 구분되는 점이 있기는 하나, 자신만의 고유한 소설세계를 만들어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박승극의 문학사적 의미는 소설보다는 비평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박승극 비평의 핵심적인 개념은 리얼리즘을 통한 전형성의 창조이다. 그는 리얼리즘의 길로 창작기술 문제에 대한 관심의 제고와 당대 경향문학의 특성을 이루던 낭만주의적 경향으로부터의 탈피를 제시하였는 바, 이러한 박승극의 비평체계는 한국문학비평사의 리얼리즘론 형성, 발전에 큰 의미를 지닌다.


월북

해방 이후 1948년, 월북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 경기도 사마국 차장 겸 선전부장, 중앙위원,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상무위원, 문화선전성 문학예술부장, 국립출판사 사장으로 사업하였다.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승극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박승극 Institution: 배재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승극 Institution: 국립출판 A worksAt B
Person: 박승극 Group: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A isMemberOf B
Book: 「농민」(『조선지광』, 1929.6) Person: 박승극 A creato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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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 Graph






참고자원


https://blog.naver.com/kwank99/220908127235 (재봉틀의 국어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주석


  1. Korean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KAPF,카프):1925년에 결성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문학가들의 실천단체.
  2.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노동자 · 농민 등을 대상으로 삼는 계몽적 성격의 문학.
  3.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해산을 전후하여 문단에서 벌어진 문학의 세계관과 창작방법에 관한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