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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 (1920-1930))
(후반기 학술 및 언론 활동 (1931-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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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청구학회와 진단학회에 참여하여 역사학의 실증주의 방법론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조선일보사 편집고문으로 재입사하여 다양한 역사적 글을 발표하였다. 민중문명과 반역자들의 역사를 강조하며, 역사 서술의 과학화를 주장하였다.

2024년 6월 4일 (화) 12: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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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文一平)
문일평.jpg
출처 : 조선일보 1939년 1월 1일자 기사
 
한글명 문명회 한자명 文明會 영문명 가나명 이칭 일평(一平), 호암(湖巖)
성별 남성 생년 1888년 몰년 1939년 출신지 평안북도 의주부 주내면 서부동 (現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전공 정치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문일평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생애


유년기 및 초기 교육 (1888-1905)

문일평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아버지 문천두(文天斗)와 어머니 해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여 어려서부터 한학자 최해산인물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888년 12세에 김은재인물와 결혼하여 이후 부인에게서 한글을 배우는 대신 부인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었다.


일본 유학과 계몽 활동 (1905-1911)

이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1905년 아오야마학원기관 중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일어를 몰라 중퇴하고, 태극학회의 일어강습소인 태극학교기관에 입학하여 일어를 학습하였다. 1906 도쿄 간다 세이소쿠 학교기관에서 학습을 이어갔다. 이사한 새 하숙집 옥진관(玉津館)에서 홍명희인물, 이광수인물와 만나 함께 생활하였다. 이후 메이지 학원기관 중학부(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이광수인물와 동급생이 되었다. 1906년부터 1908년까지 태극학회의 기관지 『태극학보』를 비롯하여 『대한흥학보』 등에 계몽주의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1910년 메이지 학원기관를 졸업하고, 1910년 23세에 평양 대성(大成)학교기관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1년 와세다 대학기관 고등예과에 입학하여 유학생 친목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운동과 학문 활동 (1912-1920)

1912년 4월 『학계보』 창간호에 세 편의 글을 기고하면서, ‘호암(虎巖)’과 ‘호암산인(虎巖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7월 고등예과 수료 후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1912년 말 광문회 도쿄 출판지부 설립 추진 중 갑작스럽게 상하이(上海)로 떠났다. 와세다대학에서 일본 우익학생들의 언동에 민족적 비애를 느끼고 중국행을 선택했다.

1913년 1월 상하이에 도착한 며칠 뒤 난징(南京)으로 가서 신규식인물, 박은식인물, 홍명희인물, 정인보인물 등을 만나 자유당사(自由黨舍) 사택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1913년 봄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하이 대공화일보사(大共和日報社)에 취직하였다. 그리고 신규식이 주도한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표면상으로는 동포들의 상호 부조 기관이란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적으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여 복국復(國)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 단체였다. 동제사는 장차 독립운동에 중추가 될 인재 양성을 위해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의 밍떠리(明德里)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과정은 1년 반이었고, 교과목은 영어·중국어·지리·역사·수학 등이었다. 1914년 귀국 후 고향에 은거하였으나, 1917년 일제 경찰의 갑종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1918 계몽 구락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만세운동사건으로 민족대표들이 체포되자 3월 8일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독립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애원서(哀願書)」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3월 12일 보신각에서 「애원서」를 직접 낭독하여 다시 한 번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불을 붙이고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미결수로 감옥에 있던 기간이 계산되어 1920년 3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지만, 실제로는 만 1년간 수감 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 (1920-1928)

1920년 출옥 이후 문일평은 학교 교원생활을 하면서도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 8월 한성도서주식회사 출판부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그 해 8월 13일에 개최된 조선노동대회(朝鮮勞働大會)에서 교육부장에 피선되었다. 9월 『서울』 제6호에 「일본인이 저술한 이충무전」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역사 저술가로 활약하였다. 이때부터 호암(虎巖)이라는 호 대신 호암(湖巖)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6월 계명구락부에서 발행하는 『신민공론(新民公論)』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2월 금연을 통한 저축으로 학문 권장에 힘 쓸 것을 규약한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동학교 역사담당 교사로 근무하면서 우리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길러주었다. 1923년 1월 14일 『동명(東明)』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을 발표하면서, 역사에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월 21일자 『동명』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속)」을 발표하여 계급투쟁론적 민중사관을 드러내었다. 1924년부터 1925년 4월 초순까지 송도고등보통학교 역사담당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경 세 번째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 청강생으로 입학하였으나, 학비 문제로 포기하고 1926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27년 2월 국내 민족유일당 운동의 결과로 발기된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중앙위원과 간사에 선출되었다. 『고려개사(高麗槪史)』를 집필하여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중세사 왜곡에 대응하였다. 이 글은 민족주의사학에서 고려사를 단대사(斷代史)로 정리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 문일평은 1927년 8월 15일에 개최된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이사(선전부 상무이사)로 보선되었으며, 그 기관지 <자활(自活)>의 주필로도 선임되었다. 사회주의 운동과 민중사관을 피력하며 다양한 글을 발표하였고, 중동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하며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


후반기 학술 및 언론 활동 (1928-1934)

청구학회와 진단학회에 참여하여 역사학의 실증주의 방법론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조선일보사 편집고문으로 재입사하여 다양한 역사적 글을 발표하였다. 민중문명과 반역자들의 역사를 강조하며, 역사 서술의 과학화를 주장하였다.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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