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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조선력사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연구회]]’가 설립되었다. 1952년 3월 내각 결정 제57호로 교육성 산하의 두 조직을 각각 ‘[[조선력사연구소]]’와 ‘[[조선언어학연구소]]’로 개편하여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로 이관했다.<ref>「조선력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어문연구회를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에 이관함에 관하여(1952.3.27. 내각 결정 제57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99~100쪽, 수록).</ref>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는 1949년 12월 8일 내각 결정에 따라 1950년 1월 10일에 창립되고 2월 1일에 개교한 정치인, 관료 재교육기관이었다.<ref>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88쪽.</ref> 두 조직의 이관은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를 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2월 과학원이 설립되면서 두 연구소는 다시 과학원 소속으로 이관되었다.<br/> | 1947년 ‘[[조선력사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연구회]]’가 설립되었다. 1952년 3월 내각 결정 제57호로 교육성 산하의 두 조직을 각각 ‘[[조선력사연구소]]’와 ‘[[조선언어학연구소]]’로 개편하여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로 이관했다.<ref>「조선력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어문연구회를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에 이관함에 관하여(1952.3.27. 내각 결정 제57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99~100쪽, 수록).</ref>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는 1949년 12월 8일 내각 결정에 따라 1950년 1월 10일에 창립되고 2월 1일에 개교한 정치인, 관료 재교육기관이었다.<ref>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88쪽.</ref> 두 조직의 이관은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를 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2월 과학원이 설립되면서 두 연구소는 다시 과학원 소속으로 이관되었다.<br/> | ||
한편, 1946년 10월 17일에 ‘조선 과학자, 기술자 대회’가 열렸다.<ref>「(북조선과학기술인대회)결정서」, 『공업지식』(46.11), 81~82쪽(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95~130, 109쪽에서 재인용.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102쪽.</ref> 1947년 2월 7일에 ‘[[북조선중앙연구소]]’가 세워졌다. 소장은 [[신건희]]였다.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자립적 민족공업 발전을 위한 과학 기술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풀고 가장 중요한 기술 자재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 해결하고 선진 과학 기술을 광범하게 섭취 도입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ref>「북조선중앙연구소 설치에 관한 결정서」, 『북한법령집 4』, 242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5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2쪽.</ref>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지질, 광업, 금속, 섬유, 기계, 전기, 화학의 7개 연구부서를 두고, 행정관리부서로 서무부, 부서별 연구활동을 조정하는 기구로서 연구위원회를 두었다. 하지만 북조선중앙연구소는 계획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연구원이 설립되면서 그곳으로 관련 기능 및 설비들이 이관되었다.<ref>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116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3쪽.</ref> | 한편, 1946년 10월 17일에 ‘조선 과학자, 기술자 대회’가 열렸다.<ref>「(북조선과학기술인대회)결정서」, 『공업지식』(46.11), 81~82쪽(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95~130, 109쪽에서 재인용.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102쪽.</ref> 1947년 2월 7일에 ‘[[북조선중앙연구소]]’가 세워졌다. 소장은 [[신건희]]였다.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자립적 민족공업 발전을 위한 과학 기술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풀고 가장 중요한 기술 자재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 해결하고 선진 과학 기술을 광범하게 섭취 도입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ref>「북조선중앙연구소 설치에 관한 결정서」, 『북한법령집 4』, 242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5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2쪽.</ref>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지질, 광업, 금속, 섬유, 기계, 전기, 화학의 7개 연구부서를 두고, 행정관리부서로 서무부, 부서별 연구활동을 조정하는 기구로서 연구위원회를 두었다. 하지만 북조선중앙연구소는 계획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연구원이 설립되면서 그곳으로 관련 기능 및 설비들이 이관되었다.<ref>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116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3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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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립=== | ||
1952년 4월 27일에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전국 과학자 대회’가 열렸다. [[국가계획위원회]](위원장 [[정준택]]) 과학연구국이 소집한 대회에는 전국에서 190여 명의 과학자 대표와 정부·당 고위 인사, 각 대학과 연구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정준택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에서 교육상 [[백남운]]은 ‘1951년 공화국 과학연구 사업의 총결과 1952년 당면 과업’을 발제 보고했다.<ref>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192~193쪽.</ref>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과학원 설립을 처음으로 제안했다.<ref>윤명수, 『조선 과학기술 발전사 1』, 50쪽. 김일성, 「우리나라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과학자대회에서 한 연설, 1952년 4월 27일)」, 『김일성저작집 7』, 182~20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7쪽.</ref> 29일과 30일에는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초이론, 공업, 농업, 의학 등 5개 분과의 연구 보고회가 진행되었다.<br/> | 1952년 4월 27일에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전국 과학자 대회’가 열렸다. [[국가계획위원회]](위원장 [[정준택]]) 과학연구국이 소집한 대회에는 전국에서 190여 명의 과학자 대표와 정부·당 고위 인사, 각 대학과 연구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정준택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에서 교육상 [[백남운]]은 ‘1951년 공화국 과학연구 사업의 총결과 1952년 당면 과업’을 발제 보고했다.<ref>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192~193쪽.</ref>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과학원 설립을 처음으로 제안했다.<ref>윤명수, 『조선 과학기술 발전사 1』, 50쪽. 김일성, 「우리나라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과학자대회에서 한 연설, 1952년 4월 27일)」, 『김일성저작집 7』, 182~20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7쪽.</ref> 29일과 30일에는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초이론, 공업, 농업, 의학 등 5개 분과의 연구 보고회가 진행되었다.<br/> | ||
1952년 5월 7일에 내각 결정 제86호로 ‘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가 채택되고 ‘조선과학아카데미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홍명희]], 부위원장은 정준택과 백남운이었다.<ref>「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1952.5.7. 내각 결정 제86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8~239쪽, 수록).</ref> 같은 해 10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조직에 관하여’가 내각 결정 제183호로 채택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10.9. 내각 결정 제183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40~243쪽, 수록).</ref> 이에 따라 과학원 조직에 관한 규정이 최종 확정되었고 10명의 원사와 15명의 후보원사, 원장, 부원장, 서기장 및 각 부문 위원회 위원장이 선출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09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9쪽.</ref> 11월 5일에 ‘1차 과학원 총회’를 열어 1기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연구소 소장을 인선하는 등 세부적인 인선 작업을 마쳤다. 1952년 12월 1일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개원식이 열렸다. 사회과학, 공학, 자연과학, 의학, 농학을 포괄하는 명실공히 북한 최고의 전문연구기관이 설립된 것이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5쪽.</ref><br/> | 1952년 5월 7일에 내각 결정 제86호로 ‘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가 채택되고 ‘조선과학아카데미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홍명희]], 부위원장은 정준택과 백남운이었다.<ref>「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1952.5.7. 내각 결정 제86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8~239쪽, 수록).</ref> 같은 해 10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조직에 관하여’가 내각 결정 제183호로 채택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10.9. 내각 결정 제183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40~243쪽, 수록).</ref> 이에 따라 과학원 조직에 관한 규정이 최종 확정되었고 10명의 원사와 15명의 후보원사, 원장, 부원장, 서기장 및 각 부문 위원회 위원장이 선출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09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9쪽.</ref> 11월 5일에 ‘1차 과학원 총회’를 열어 1기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연구소 소장을 인선하는 등 세부적인 인선 작업을 마쳤다. 1952년 12월 1일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개원식이 열렸다. 사회과학, 공학, 자연과학, 의학, 농학을 포괄하는 명실공히 북한 최고의 전문연구기관이 설립된 것이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5쪽.</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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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근로 인민들에게 과학지식을 계획적으로 보급시키며 그들의 문화수준 향상을 촉진시킨다. | 6. 근로 인민들에게 과학지식을 계획적으로 보급시키며 그들의 문화수준 향상을 촉진시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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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1952~1955)=== | ===제1기(1952~19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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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와 후보원사==== | ====원사와 후보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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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952년 선출된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0쪽.</ref> | <표> 1952년 선출된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0쪽.</ref>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 ||
!style="width:10%"| || style="width:45%"| 원사 || style="width:45%"| 후보원사 | !style="width:10%"| || style="width:45%"| 원사 || style="width:45%"| 후보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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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회과학 || 김두봉(언어학, 48.7. 어문학박사), 홍명희(문학, 월북), 백남운(경제학, 월북), 박시형(역사학, 월북, 50.2. 력사학박사) || 김광진(경제학), 도유호(고고학, 월북), 리청원(역사학, 월북), 최창익(경제학), 장주익(경제학), 리극로(언어학, 월북) | + | | 사회과학 || 김두봉(언어학, 48.7. 어문학박사), 홍명희(문학, 월북), 백남운(경제학, 월북), 박시형(역사학, 월북, 50.2. 력사학박사) || [[김광진]](경제학), [[도유호]](고고학, 월북), [[이청원|리청원]](역사학, 월북), [[최창익]](경제학), [[장주익]](경제학), [[이극로|리극로]](언어학, 월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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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연, 기술과학 || 최삼열( | + | | 자연, 기술과학 || [[최삼열]](화학, 월북, 48.7. 공학박사), [[김지정]](수학, 월북), [[리승기]](화학, 월북, 52.9. 공학박사), [[도상록]](물리학, 월북) || [[신건희]](물리학), [[김인식]](공학), [[원홍구]](생물학, 48.7. 생물학학사), [[려경구]](화학, 월북) |
|- | |- | ||
− | | 의학 || 최명학(외과학) || 최응석(내과학, 월북, 49.11. 의학박사), 리호림(이비인후과, 월북, 49.7. 의학박사), 도봉섭(생약학, 월북) | + | | 의학 || [[최명학]](외과학) || [[최응석]](내과학, 월북, 49.11. 의학박사), [[리호림]](이비인후과, 월북, 49.7. 의학박사), [[도봉섭]](생약학, 월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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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농학 || 계응상(잠사학, 월북, 48.7. 농학박사) || 김량하(농예과학, 월북), 김종희(축산학, 월북, 48.7. 수의학학사) | + | | 농학 || [[계응상]](잠사학, 월북, 48.7. 농학박사) || [[김량하]](농예과학, 월북), [[김종희]](축산학, 월북, 48.7. 수의학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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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원사 10명 중에서 월북한 사람은 8명으로 80%였다. 후보원사 15명 중에서는 월북한 사람은 9명으로 60%였다. 여전히 연구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과학원 구성원들은 대부분 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과학원 구성원이 전임을 보장받는 것은 1956년이 되어야 가능했다.<ref>『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 103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1~3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1쪽.</ref> | 전체 원사 10명 중에서 월북한 사람은 8명으로 80%였다. 후보원사 15명 중에서는 월북한 사람은 9명으로 60%였다. 여전히 연구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과학원 구성원들은 대부분 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과학원 구성원이 전임을 보장받는 것은 1956년이 되어야 가능했다.<ref>『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 103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1~3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1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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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1956~1958)=== | ===제2기(1956~19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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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문위원장 || 사회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청원(후보원사, 역사학), 자연 및 기술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승기(원사, 공업화학), 의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최명학(원사, 외과학) | | 부문위원장 || 사회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청원(후보원사, 역사학), 자연 및 기술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승기(원사, 공업화학), 의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최명학(원사, 외과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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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보다 2개월 늦은 1956년 1월에 과학원 원장은 [[홍명희]]에서 [[백남운]]으로 교체되었고 21일에 열린 ‘4차 과학원 총회’에서 2기 상무위원회가 구성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6쪽.</ref> 백남운은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교원을 지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1948년 9월부터 1956년 1월까지 내각 교육상을 지냈다. 서기장 [[신건희]]는 [[교토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원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공학부장을 맡았고 월북 과학자가 중심이 돼 설립된 [[흥남공업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부위원장과 부문 위원장은 유임됐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7쪽.</ref><br/> | 예정보다 2개월 늦은 1956년 1월에 과학원 원장은 [[홍명희]]에서 [[백남운]]으로 교체되었고 21일에 열린 ‘4차 과학원 총회’에서 2기 상무위원회가 구성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6쪽.</ref> 백남운은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교원을 지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1948년 9월부터 1956년 1월까지 내각 교육상을 지냈다. 서기장 [[신건희]]는 [[교토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원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공학부장을 맡았고 월북 과학자가 중심이 돼 설립된 [[흥남공업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부위원장과 부문 위원장은 유임됐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7쪽.</ref><br/> | ||
2기 상무위원회 기간 동안 과학원 본사 청사가 마련되었다. 1956년 11월 착공하여 1958년 상반기에 완공하였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ref> | 2기 상무위원회 기간 동안 과학원 본사 청사가 마련되었다. 1956년 11월 착공하여 1958년 상반기에 완공하였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ref> | ||
122번째 줄: | 120번째 줄: | ||
| 연구소 || 소장 | | 연구소 || 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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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역사연구소 || 김석형 | + | | 역사연구소 || [[김석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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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민속학연구소 || 도유호 | | 고고학·민속학연구소 || 도유호 | ||
140번째 줄: | 138번째 줄: | ||
| 생물학연구실 || 원홍구(겸임) | | 생물학연구실 || 원홍구(겸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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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학연구소가 농업성 직속 ‘[[농업과학연구원]]’으로 확대, 분리됨으로써 8개 연구소와 1개 독립연구실로 구성되었다. 각 연구소 소속 연구실에도 변화가 있었다. [[경제법학연구소]]는 남조선경제연구실을, [[력사연구소]]는 [[철학연구실]]을, [[언어문학연구소]]는 [[외국어문연구실]]을 새로 여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밖에 [[고전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자개혁위원회]]도 새로 설치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93~9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ref> | 농학연구소가 농업성 직속 ‘[[농업과학연구원]]’으로 확대, 분리됨으로써 8개 연구소와 1개 독립연구실로 구성되었다. 각 연구소 소속 연구실에도 변화가 있었다. [[경제법학연구소]]는 남조선경제연구실을, [[력사연구소]]는 [[철학연구실]]을, [[언어문학연구소]]는 [[외국어문연구실]]을 새로 여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밖에 [[고전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자개혁위원회]]도 새로 설치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93~9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ref> | ||
<br/><br/> | <br/><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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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1959~1961)=== | ===제3기(1959~196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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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위원회==== | ====상무위원회==== | ||
<br/> | <br/> | ||
− | 1958년 11월 7일에 ‘과학원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고 3기 상무위원회와 부문위원회를 예정보다 앞서 조직했다. 총회, 상무위원회, 부문위원회 등의 역할구분이 명확해졌다. 원사나 후보원사, 명예원사 칭호를 박탈할 수 있는 조건을 명시한 조항이 들어간 것은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들이 연루된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창익]], [[리청원]], [[김두봉]], [[김정도]], [[김원규]], [[손군창]], [[최정환]] 등이 [[8월 전원회의 사건]]에 연루되어 과학원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김두봉]]은 원사 칭호를 박탈 당하였고, [[최창익]]과 [[리청원]]은 후보원사 칭호를 박탈당했다.<ref>백남운,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보고」, 『과학원 통보』 1958-1, 3~11쪽. 「과학 대열의 순결성을 위하여」, 『과학원 통보』 1958-3, 5~10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5쪽.</ref> | + | 1958년 11월 7일에 ‘과학원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고 3기 상무위원회와 부문위원회를 예정보다 앞서 조직했다. 총회, 상무위원회, 부문위원회 등의 역할구분이 명확해졌다. 원사나 후보원사, 명예원사 칭호를 박탈할 수 있는 조건을 명시한 조항이 들어간 것은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들이 연루된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창익]], [[리청원]], [[김두봉]], [[김정도]], [[김원규]], [[손군창]], [[최정환]] 등이 [[8월 전원회의 사건]]에 연루되어 과학원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김두봉]]은 원사 칭호를 박탈 당하였고, [[최창익]]과 [[이청원|리청원]]은 후보원사 칭호를 박탈당했다.<ref>백남운,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보고」, 『과학원 통보』 1958-1, 3~11쪽. 「과학 대열의 순결성을 위하여」, 『과학원 통보』 1958-3, 5~10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5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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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과학원 3기 상무위원회(1959년)<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2쪽.</ref> | <표> 과학원 3기 상무위원회(1959년)<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2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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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 || 정준택(48.7. 공학 학사), 강영창(공학), 리승기(공학), 배기영, 강혜구(공학), 김광진, 도유호, 오동욱(공학), 김석형(55.3. 역사학 학사), 김덕모(공학) | | 위원 || 정준택(48.7. 공학 학사), 강영창(공학), 리승기(공학), 배기영, 강혜구(공학), 김광진, 도유호, 오동욱(공학), 김석형(55.3. 역사학 학사), 김덕모(공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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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에 [[강영창]]이 과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2월 17일에 [[경제법학연구소]]와 [[언어문학연구소]] 등은 [[경제연구소]], [[법학연구소]], [[력사연구소]], [[철학연구소]], [[언어학연구소]], [[문학연구소]],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고전연구소]] 등 8개의 연구소를 가진 ‘[[사회과학원]]’으로 분리 독립되었다.<ref>『조선중앙연감 1964』(조선중앙통신사, 1964), 207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331쪽.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3~234쪽.</ref> | 1961년 3월에 [[강영창]]이 과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2월 17일에 [[경제법학연구소]]와 [[언어문학연구소]] 등은 [[경제연구소]], [[법학연구소]], [[력사연구소]], [[철학연구소]], [[언어학연구소]], [[문학연구소]],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고전연구소]] 등 8개의 연구소를 가진 ‘[[사회과학원]]’으로 분리 독립되었다.<ref>『조선중앙연감 1964』(조선중앙통신사, 1964), 207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331쪽.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3~234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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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 #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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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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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7일 (일) 18:27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역사
전사
1947년 ‘조선력사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연구회’가 설립되었다. 1952년 3월 내각 결정 제57호로 교육성 산하의 두 조직을 각각 ‘조선력사연구소’와 ‘조선언어학연구소’로 개편하여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로 이관했다.[1]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는 1949년 12월 8일 내각 결정에 따라 1950년 1월 10일에 창립되고 2월 1일에 개교한 정치인, 관료 재교육기관이었다.[2] 두 조직의 이관은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를 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2월 과학원이 설립되면서 두 연구소는 다시 과학원 소속으로 이관되었다.
한편, 1946년 10월 17일에 ‘조선 과학자, 기술자 대회’가 열렸다.[3] 1947년 2월 7일에 ‘북조선중앙연구소’가 세워졌다. 소장은 신건희였다.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자립적 민족공업 발전을 위한 과학 기술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풀고 가장 중요한 기술 자재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 해결하고 선진 과학 기술을 광범하게 섭취 도입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4]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지질, 광업, 금속, 섬유, 기계, 전기, 화학의 7개 연구부서를 두고, 행정관리부서로 서무부, 부서별 연구활동을 조정하는 기구로서 연구위원회를 두었다. 하지만 북조선중앙연구소는 계획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연구원이 설립되면서 그곳으로 관련 기능 및 설비들이 이관되었다.[5]
창립
1952년 4월 27일에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전국 과학자 대회’가 열렸다. 국가계획위원회(위원장 정준택) 과학연구국이 소집한 대회에는 전국에서 190여 명의 과학자 대표와 정부·당 고위 인사, 각 대학과 연구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정준택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에서 교육상 백남운은 ‘1951년 공화국 과학연구 사업의 총결과 1952년 당면 과업’을 발제 보고했다.[6]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과학원 설립을 처음으로 제안했다.[7] 29일과 30일에는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초이론, 공업, 농업, 의학 등 5개 분과의 연구 보고회가 진행되었다.
1952년 5월 7일에 내각 결정 제86호로 ‘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가 채택되고 ‘조선과학아카데미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홍명희, 부위원장은 정준택과 백남운이었다.[8] 같은 해 10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조직에 관하여’가 내각 결정 제183호로 채택되었다.[9] 이에 따라 과학원 조직에 관한 규정이 최종 확정되었고 10명의 원사와 15명의 후보원사, 원장, 부원장, 서기장 및 각 부문 위원회 위원장이 선출되었다.[10] 11월 5일에 ‘1차 과학원 총회’를 열어 1기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연구소 소장을 인선하는 등 세부적인 인선 작업을 마쳤다. 1952년 12월 1일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개원식이 열렸다. 사회과학, 공학, 자연과학, 의학, 농학을 포괄하는 명실공히 북한 최고의 전문연구기관이 설립된 것이다.[11]
‘과학원 규정’에 따르면 과학원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12]
1. 전체 과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문제, 특히 전국적 의의를 가진 과학적 문제에 집중한다.
2. 국내의 자연부원 및 생산력과 쏘베트 동맹의 과학을 위시한 인류의 과학적 성과를 연구하며 전국적 의의를 가진 과업에 대한 학술적 계획을 수립한다. 이 과업은 과학원의 조직 자체 또는 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과학원에 소속되어 있는 학술연구소에서 수행한다.
3. 공화국 과학기관의 사업개선과 과학 활동가들의 력량 제고에 협력한다.
4. 공화국 정부의 자문에 응한다.
5. 학술연구의 제 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보고회를 조직하며, 잡지를 출판하며, 외국학자들의 권위 있는 로작들을 번역 출판하며 매년 자기 사업을 총결하여 출판한다. 출판물은 조선어로 출판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외국어로도 출판할 수 있다.
6. 근로 인민들에게 과학지식을 계획적으로 보급시키며 그들의 문화수준 향상을 촉진시킨다.
제1기(1952~1955)
원사와 후보원사
<표> 1952년 선출된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13]
원사 | 후보원사 | |
---|---|---|
사회과학 | 김두봉(언어학, 48.7. 어문학박사), 홍명희(문학, 월북), 백남운(경제학, 월북), 박시형(역사학, 월북, 50.2. 력사학박사) | 김광진(경제학), 도유호(고고학, 월북), 리청원(역사학, 월북), 최창익(경제학), 장주익(경제학), 리극로(언어학, 월북) |
자연, 기술과학 | 최삼열(화학, 월북, 48.7. 공학박사), 김지정(수학, 월북), 리승기(화학, 월북, 52.9. 공학박사), 도상록(물리학, 월북) | 신건희(물리학), 김인식(공학), 원홍구(생물학, 48.7. 생물학학사), 려경구(화학, 월북) |
의학 | 최명학(외과학) | 최응석(내과학, 월북, 49.11. 의학박사), 리호림(이비인후과, 월북, 49.7. 의학박사), 도봉섭(생약학, 월북) |
농학 | 계응상(잠사학, 월북, 48.7. 농학박사) | 김량하(농예과학, 월북), 김종희(축산학, 월북, 48.7. 수의학학사) |
전체 원사 10명 중에서 월북한 사람은 8명으로 80%였다. 후보원사 15명 중에서는 월북한 사람은 9명으로 60%였다. 여전히 연구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과학원 구성원들은 대부분 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과학원 구성원이 전임을 보장받는 것은 1956년이 되어야 가능했다.[14]
상무위원회
과학원의 최고 기관은 ‘총회’이다.[15] 총회는 원사, 명예원사, 후보원사로 구성되고 1년에 한 번 소집되는 ‘정기총회’와 상무위원회 결정에 따라 개최되는 임시총회가 있다.[16] 총회에서는 “상무위원회 총결보고를 청취 승인하며 과학원 및 그의 각 구성부문의 일반 로선을 수립하며, 조직적 성질의 기본 문제를 해결하며, 예산안을 승인하며, 과학원의 각 기관 및 개인의 보고를 청취하며, 과학-기술적 및 과학-사회적 성질을 띤 제 문제를 토의하며, 과학원 원사, 명예원사 및 상무위원을 선거하며 또 후보원사를 승인”하게 된다.[17]
상무위원회는 “총회 휴회 중에 있어서 과학원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 “과학원의 활동을 지도하며, 과학원 각 기관의 사업계획을 검토 승인하며, 각 기관의 보고를 청취하며, 과학사업 조직문제를 심의 해결하며, 과학원의 매년도 예산안을 작성하며, 재정을 감독하며, 국가기관, 협동단체 및 사회단체와 련계를 가지며, 과학원 편집-출판 위원회의 사업을 지도하며, 과학원 총회를 소집하며, 각 부문 회의 및 위원회의 결정을 승인”하는 기구로 정의되어 있다. 상무위원회는 1개월에 1차 이상 소집되어야 한고, 위원장(과학원 원장), 부위원장(과학원 부원장), 서기장(과학원 서기국 서기장), 각 부문위원장 및 기타 위원 3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다. 상무위원 임기는 3년이다.[18]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확대상무위원회’가 열렸다. 이 때는 과학원 상무위원들뿐만 아니라 각 연구소장, 원사, 후보원사가 모두 모였다.[19]
부문위원회는 “과학적 보고와 제의를 청취하며, 그들의 관하에 있는 과학기관에 대한 지도를 하며, 분기마다 자기 사업에 대하여 상무위원회에 보고하며, 부문의 활동방향을 결정하며 그 부문의 학습 연구 계획을 준비하여 부문 회의에 제출하며 자기 부문사업에 관계되는 각종 예산안을 작성하며 그 실행을 보장한다”고 되어 있다. 임기는 3년이고 1개월에 1차 이상 소집되어야 했다.[20] 상무위원회는 정책적 차원에서 과학원 전체를 관리하는 조직이었고 부문위원회는 소속 연구소들의 실제 연구 내용을 직접 관리하는 조직이었다.[21]
1기 상무위원회는 과학원이 창립된 1952년 12월부터 1956년 1월까지 활동하였고, 2기 상무위원회는 1956년 2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활동했다. 과학원 3기 상무위원회는 언제까지 활동했는지 명확치 않으나 적어도 1961년 하반기에는 새로운 상무위원회가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상무위원의 임기는 원칙적으로 3년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1기 상무위원들은 3년 2개월 동안 재임했다. 2기 상무위원들은 2년 10개월 동안 재임했다.[22]
<표> 과학원 제1기 상무위원회(1952년)
직위 | 이름 및 전공 |
---|---|
위원장 | 홍명희(문학) |
부위원장 | 최삼열(화학) |
서기장 | 장주익(경제학) |
부문위원장 | 사회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청원(후보원사, 역사학), 자연 및 기술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승기(원사, 공업화학), 농학 및 의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최명학(원사, 외과학) |
1대 원장은 홍명희였다. 1948년부터 북한 내각 부수상을 맡고 있던 그를 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과학원이 북한 최고의 학술기관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조치였다.[23] 그를 보좌하여 과학기술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사람은 부원장 최삼열이었다. 최삼열은 도호쿠제국대학 화학과 출신으로 이화학연구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월북한 후 김일성종합대학의 화학부장을 역임했다.[24] 과학원 사업을 검열하는 서기장은 사회주의 체제와 이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장주익이 담당했다.[25]
소속 연구소
1952년 11월 총회에서는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8개로 결정했는데, 1952년 12월 29일에 열린 상무위원회에서 ‘공학연구소’ 추가 설치를 결정했다. 이로써 과학원 초기 연구조직은 9개 연구소와 43개 연구실 및 편찬실로 구성되었다.
<표> 과학원 연구소 현황(1952~1953)[26]
연구소 | 소장 | 연구실 수 | 연구실 | 연구사 상황 | 부속시설 | 소재지 |
---|---|---|---|---|---|---|
연구소 | 소장 | 연구실 수 | 연구실 | 연구사 상황 | 부속 기수 | 소재지 |
물리수학연구소 | 김지정 | 3 | 수학연구실, 실험물리연구실, 이론물리연구실 | 전임·겸임 연구사(9명), 보조성원 확보 | 도서실, 공작부 | 평남 순천(1지구) |
화학연구소 | 려경구 | 7 | 일반화학연구실, 생물화학연구실, 고분자화학연구실, 분석화학연구실, 연료화학연구실, 유기합성연구실, 건재화학연구실 | 겸임연구사(화학건재공업성 중앙연구소) 리승기 연구시작 |
도서실, 공작부 청수화학공장에 있는 화학건재공업성(화학공업성으로 이름 바꿈) 중앙연구소 설비 활용" |
평북 삭주군(3지구) |
공학연구소 | 김인식 | 6 | 지질연구실, 광업연구실, 금속연구실, 기계연구실, 전기연구실, 건설연구실 | 전임연구사(11명), 겸임연구사(14명), 보조성원(14명) 확보 | 도서실. 실험실 거의 갖추지 못함. | 평북 피현군(2지구) |
농학연구소 | 계응상 | 7 | 생물학연구실, 농산학연구실, 축산수의학연구실, 잠학연구실, 농림화학연구실, 림산학연구실, 수산학연구실 | 계응상 연구시작 | 시험장, 동물실, 도서실 | 평북 정주와 차령관(2지구) |
의학연구소 | 이호림 | 7 | 실험의학연구실, 임상의학연구실, 위생학연구실, 생약학연구실, 제약학연구실, 군진 내과학 연구실, 군진 외과학 연구실 | 처음부터 연구실 실장과 연구사들의 절반 이상을 전임, 겸임으로 해결 | 다른 대학과 병원, 야전병원 활용 | 평북 의주, 영변, 정주(2지구) |
경제법학연구소 | 김광진 | 6 | 정치경제학연구실, 조선인민경제연구실, 외국경제연구실, 법학연구실 등 | 겸임연구사(8명), 보조성원 겨우 확보 | 도서실 | 평남 순천군(1지구) |
역사연구소 | 박시형 | 3 | 조선고대사연구실, 조선중세사연구실, 조선근세 및 최근세사연구실, 자료편찬실 | 전임, 겸임 연구사(8명), 상급 편찬원(4명), 보조성원 확보 | 도서실 정치경제학 아까데미야 역사연구소가 이관된 것." |
평남 순천군(1지구) |
물질문화사연구소 | 도유호 | 3 | 고고학연구실, 민족학연구실, 미술사연구실 | 연구사(3명) | 도서실. | 중앙역사박물관(평양) |
조선어·조선문학연구소 | 리극로 | 3 | 조선어학연구실, 조선문학연구실, 사전편찬실 | 언어학연구실: 겸임연구사(7명), 보조성원 사전편찬실: 상급편찬원(4명), 보조성원 |
정치경제학 아까데미야 조선언어학연구소가 이관된 것 | 평남 승호군(1지구) |
도서관 | 모란봉 중앙역사박물관 청사의 일부 사용 |
제2기(1956~1958)
상무위원회
<표> 과학원 제2기 상무위원회(1956년)
직위 | 이름 및 전공 |
---|---|
위원장 | 백남운(경제학) |
부위원장 | 최삼열(화학, 1대 부원장) |
서기장 | 신건희(물리학) |
기타위원 | 홍명희(문학, 1대 원장), 장주익(경제학, 1대 서기장), 려경구(화학) |
부문위원장 | 사회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청원(후보원사, 역사학), 자연 및 기술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승기(원사, 공업화학), 의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최명학(원사, 외과학) |
예정보다 2개월 늦은 1956년 1월에 과학원 원장은 홍명희에서 백남운으로 교체되었고 21일에 열린 ‘4차 과학원 총회’에서 2기 상무위원회가 구성되었다.[27] 백남운은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교원을 지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1948년 9월부터 1956년 1월까지 내각 교육상을 지냈다. 서기장 신건희는 교토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원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공학부장을 맡았고 월북 과학자가 중심이 돼 설립된 흥남공업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부위원장과 부문 위원장은 유임됐다.[28]
2기 상무위원회 기간 동안 과학원 본사 청사가 마련되었다. 1956년 11월 착공하여 1958년 상반기에 완공하였다.[29]
소속 연구소
<표> 과학원 연구소 현황(1956)[30]
연구소 | 소장 |
---|---|
연구소 | 소장 |
역사연구소 | 김석형 |
고고학·민속학연구소 | 도유호 |
언어·문학연구소 | 김병제 |
경제법학연구소 | 윤행중 |
물리수학연구소 | 리재곤 |
화학연구소 | 려경구 |
공학연구소 | 김덕모 |
의약학연구소 | 최명학 |
생물학연구실 | 원홍구(겸임) |
농학연구소가 농업성 직속 ‘농업과학연구원’으로 확대, 분리됨으로써 8개 연구소와 1개 독립연구실로 구성되었다. 각 연구소 소속 연구실에도 변화가 있었다. 경제법학연구소는 남조선경제연구실을, 력사연구소는 철학연구실을, 언어문학연구소는 외국어문연구실을 새로 여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밖에 고전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자개혁위원회도 새로 설치되었다.[31]
제3기(1959~1961)
상무위원회
1958년 11월 7일에 ‘과학원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고 3기 상무위원회와 부문위원회를 예정보다 앞서 조직했다. 총회, 상무위원회, 부문위원회 등의 역할구분이 명확해졌다. 원사나 후보원사, 명예원사 칭호를 박탈할 수 있는 조건을 명시한 조항이 들어간 것은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들이 연루된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창익, 리청원, 김두봉, 김정도, 김원규, 손군창, 최정환 등이 8월 전원회의 사건에 연루되어 과학원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김두봉은 원사 칭호를 박탈 당하였고, 최창익과 리청원은 후보원사 칭호를 박탈당했다.[32]
<표> 과학원 3기 상무위원회(1959년)[33]
직위 | 이름 및 전공 |
---|---|
위원장 | 백남운(경제학) |
부위원장 | 박성욱(52.1. 지질광물학 학사) |
서기장 | 전두환(공학) |
위원 | 정준택(48.7. 공학 학사), 강영창(공학), 리승기(공학), 배기영, 강혜구(공학), 김광진, 도유호, 오동욱(공학), 김석형(55.3. 역사학 학사), 김덕모(공학) |
부문 위원회와 소속 연구소
<표> 과학원 제3기 부문위원회(1959년)[34]
사회과학부문 | 자연과학부문 | 기술과학부문 | |
---|---|---|---|
위원장 | 김석형(상무위원) | 박성욱(상무위 부위원장) | 김덕모(상무위원) |
부위원장 | 남춘화 | 최재오 | 한순덕 |
위원 | 홍명희(문학 원사), 백남운(경제학 원사, 상무위원), 리극로(언어학 후보원사), 박시형(역사원사), 김광진(경제학 후보원사, 상무위원), 도유호(고고학 후보원사, 상무위원), 배기영(상무위원), 김경인, 김병제, 김한주, 채희정(경제학, 54.2. 경제학 학사), 김시중, 황장엽(53.10. 철학 학사), 김후선 | 도상록(물리학 원사), 김지정(수학 원사), 신건희(물리학 후보원사), 원홍구(생물학 후보원사), 신상국, 한기만, 박태훈, 리세훈, 김재길(55.6. 화학 학사), 최여구 | 정준택(상무위원), 강영창(상무위원), 리승기(화학 원사, 상무위원), 최삼열(화학 원사), 김인식(공학 후보원사), 전두환(서기장, 상무위원), 강혜구(상무위원), 최성세, 오동욱(상무위원), 곽대홍, 김정희(53.7. 건축학 학사), 김종성, 김응상(52.7. 공학 학사), 박인빈(53.11. 공학 학사), 박명초(53.11. 공학 학사), 리재우(55.10. 공학 학사), 최제식(54.11. 공학 학사), 김운집(김은집?, 54.4. 공학 학사), 송정기, 박찬희 |
<표> 과학원 연구소 현황(1959)[35]
연구소 | 소장 |
---|---|
역사연구소 | 김석형 |
고고학·민속학연구소 | 도유호 |
언어·문학연구소 | 김병제 |
경제법학연구소 | 김광진 |
물리수학연구소 | 리재곤 |
화학연구소 | 려경구 |
공학연구소 | 김덕모 |
자연조사연구소 | 박태훈? |
생물학연구실 | 원홍구(겸임) |
사회과학원 설립
1961년 3월에 강영창이 과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2월 17일에 경제법학연구소와 언어문학연구소 등은 경제연구소, 법학연구소, 력사연구소, 철학연구소, 언어학연구소, 문학연구소,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고전연구소 등 8개의 연구소를 가진 ‘사회과학원’으로 분리 독립되었다.[36]
데이터
참고문헌
-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주석
- ↑ 「조선력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어문연구회를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에 이관함에 관하여(1952.3.27. 내각 결정 제57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99~100쪽, 수록).
- ↑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88쪽.
- ↑ 「(북조선과학기술인대회)결정서」, 『공업지식』(46.11), 81~82쪽(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95~130, 109쪽에서 재인용.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102쪽.
- ↑ 「북조선중앙연구소 설치에 관한 결정서」, 『북한법령집 4』, 242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5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2쪽.
- ↑ 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116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3쪽.
- ↑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192~193쪽.
- ↑ 윤명수, 『조선 과학기술 발전사 1』, 50쪽. 김일성, 「우리나라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과학자대회에서 한 연설, 1952년 4월 27일)」, 『김일성저작집 7』, 182~20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7쪽.
- ↑ 「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1952.5.7. 내각 결정 제86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8~239쪽, 수록).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10.9. 내각 결정 제183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40~243쪽, 수록).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09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9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5쪽.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07~18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1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0쪽.
- ↑ 『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 103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1~3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1쪽.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4조.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6조.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5조.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31~33조.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쪽.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37조.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114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4쪽.
- ↑ 박성래, 「한국 과학기술자의 형성」(한국과학재단, 1995), 부록.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5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5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7쪽.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11~212쪽.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6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7쪽.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5쪽.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93~9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
- ↑ 백남운,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보고」, 『과학원 통보』 1958-1, 3~11쪽. 「과학 대열의 순결성을 위하여」, 『과학원 통보』 1958-3, 5~10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5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2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3쪽.
-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2쪽.
- ↑ 『조선중앙연감 1964』(조선중앙통신사, 1964), 207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331쪽.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3~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