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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어두웠던 유년시절)
(국립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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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09년 2월 22일 함경남도 함주에서 아버지 {{TagPerson|학호}}(鶴鎬)와 어머니 {{TagPerson|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0346 김재원(金載元)]』<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3살 때,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었으며, 동생마저 홍역으로 잃어야 했다.<ref> 김재원, 『<small>초대박물관장자서전</small>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4-15쪽.</ref> 심지어 함흥으로의 이사 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출가로 고아가 되었다.<ref> 김재원, 『<small>초대박물관장자서전</small>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8쪽.</ref> 이 때문에 친척들이 모여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초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함흥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장티푸스에 걸리면서 1년 유급과 함께 숙부를 비롯한 일부 친척들이 병으로 죽는 난리를 겪어야 했다.<ref> 김재원, 『<small>초대박물관장자서전</small>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25~29쪽.</ref> 이러한 비극 속에서 한 가지 진귀한 기회를 얻는데, 바로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친척을 만난 것이었다. 친척과의 교류 과정에서 서양의 발전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다.<ref>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88 김재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주간조선』<sup>online</sup></online></html>,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ref> 이후 1927년, 18살의 나이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는 데 성공한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0346 김재원(金載元)]』<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고향을 벗어나 폭넓은 경험을 얻기 원했기에, 20살이었던 1929년 6월에 기차를 통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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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보낸 11년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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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독일에 도착한 후, 초창기에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뮌헨에서 이의경(이미륵)을 만나 독일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의 조언으로 독일의 뮌헨대학에서 배울 전공으로 교육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후 내•외부로 발생하던 변수들로 고생한 끝에 1934년 봄에 교육학과 최종 시험에 합격했다. 진정한 배움을 얻기 위해 1935년 6월에 벨기에로 이동한다. 안트워프에서 켄트대학 출신의 헨체(Hentze, C.) 교수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6년간 그의 조수로 활동한다. 과정 덕분에 독일어와 함께 동양 고고학을 매우 세세히 습득할 수 있었다. 1936년에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극명히 다른 환경에 대한 적응 실패로 1년 후에 다시 독일로 건너갔다. 1940년 11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봉직 + 1941년 4월에 병원의 의사였던 이채희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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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으나, 고향과는 정반대인 대도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9년 6월 말에 이의경(이미륵)을 만나기 위해 뮌헨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를 실행으로 옮긴 지 이틀이 지나서 그를 만나 장래 계획을 논의할 수 있었다.<ref> 김인혜,「[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2/11/5MVRVYLHUVCORLTSC4ZLATVIJE/ 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ref> 이를 계기로 독일어를 익히기 시작했고, 그의 조언으로 독일의 뮌헨 대학에서 배울 전공으로 교육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ref> 김인혜,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2/11/5MVRVYLHUVCORLTSC4ZLATVIJE/ 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ref> 이후 질병•자금 부족•독일 사회의 혼란 등의 변수들로 고생한 끝에 1934년 봄에 교육학과 최종 시험 합격에 성공하지만, 당시 한국의 불안정한 정세와 함께 '진정한 배움'의 부족함을 느꼈기에 엘세 부인의 조언에 따라 1935년 6월에 벨기에로 이동했다.<ref> 김재원, 『<small>초대박물관장자서전</small>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46-53쪽.</ref> 안트워프에서 켄트대학 출신의 헨체(Hentze, C.) 교수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6년간 그의 조수로 활동했고, 과정에서 독일어와 동양 고고학을 매우 세세히 습득할 수 있었다.<ref>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88 김재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주간조선』<sup>online</sup></online></html>,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ref> 1936년에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두 국가의 사회적 간극으로 인한 적응 실패로 1년 후에 다시 독일로 건너갔고,193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헨체 교수 부부를 다시 만나 3년 동안 같이 지냈다. <ref> 김재원, 『<small>초대박물관장자서전</small>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63~68쪽.</ref> 1940년 5월 5일, 언론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안트워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독일 선배의 추천으로 당해 11월부터 보성전문학교의 독일어 촉탁 강사로 봉직했었다.<ref>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88 김재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주간조선』<sup>online</sup></online></html>,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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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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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해방 직후인 1945년(당시 나이 36살)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첫 관장으로 임명됨. 1970년에 정년퇴임 – 이제 막 등장한 박물관을 관리해야 하는 대표로서, 박물관의 획기적인 체제 확립(경주, 부여, 공주, 개성의 분관 체제 확립•국립민속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을 국립박물관 소속으로 통합)•한국의 국보를 전후 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 쇄신 용도로 사용•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 발굴 및 보전에 심혈을 기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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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해방 직후인 1945년, 곧바로 한국 내 여러 박물관<small>(예: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박물관)</small>을 들러 각 기관의 상황을 파악했다.<ref> 장상훈,『[https://webzine.museum.go.kr/sub.html?amIdx=12941 해방공간 국립박물관의 소장품과 그 관리]』, 2018. 07.01. 18면, <html><online style="color:purple"> 『박물관 신문』<sup>online</sup></online></html>, 국립중앙박물관.</ref> 이후 언론인이었던 홍종인 씨 등의 권유로 직접 미 군정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독일에서 얻은 박사 학위가 당시 문교부장인 록카드 대위의 눈에 띔으로써, 36살의 나이에 최초의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되었다.<ref> </ref> 이제 막 새롭게 출발한 박물관을 관리해야 하는 대표였기에, 박물관의 기존 질서를 깨야만 했다. 이를 위해 획기적인 체제 수립부터 경복궁 내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궁 근처의 관사로 이사 • 부여와 경주에 소장한 전시품을 서울로 이송 등을 진행했다.<ref> 안휘준, 「[https://www-dbpia-co-kr.libra.cnu.ac.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2104771&dbid=edspia&an=edspia.NODE02104771&text=Full+Text+%28DBPIA%29 김재원, 박물관의 아버지, 고고학·미술사학의 선각자]」, 『한국사 시민강좌』50, 일조각, 2012.02, 256~260쪽.</ref> 1946년, 경주의 호우총과 은령총에 가서 첫 발굴 사업을 진행했는데, 호우명 그릇과 같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물 상당수를 발견했다.<ref> </ref> 워낙 많은 면에서 뜻 깊은 일이었기에 당시 발굴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호우총과 은령총』이라는 하나의 단행본으로 정리했을 정도였다.<ref> </ref> 1948년 5월, 송악산 사건을 겪어야했다.<ref> </ref> 1949년 2월 박물관을 중심으로 미술 전시회 진행 시도<ref> </ref> 6•25 전쟁 당시,박물관이 보관하던 유물들을 지키기 위해 피 나는 사투 등<small>(예: 문화재들이 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북한 군과의 숨 막히는 지연 작전•부산에 임시 보관한 박물관의 소장품을 철저히 보호)</small>을 벌어야 했다.<ref>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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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53년, 전쟁의 양상이 호전됨에 따라 서울로 돌아왔으나, 상부의 명령으로 기존의 일자리인 경복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맥과 말재주로 대통령에게 당시 상황을 전달한 덕에 덕수궁 석조전을 새로운 활동 공간으로 삼을 수 있었다.<ref> </ref> 이로부터 1년 후인 1954년 5월 31일, 한국사를 정리해 책으로 편찬하기 위해 진단 학회의 업무를 대리하기로 하였고, 이후 서울대에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12월 20일에 한국사 프로젝트를 출발시켰다.<ref> </ref> 이를 계기로 1955년 ~1980년 11월 사이에 49권의 진단 학보를 간행할 수 있었다.<ref> </ref> 다만 진행 중에 여러 난항을 겪은 탓에, 1965년이 되어서야 책을 완결시킴.<ref> </ref> 1956월 9월 말, 2명의 외국 박물관장을 서울로 불러 전쟁 전에 준비하던 한국 미술전을 다시 이어가려고 했다.<ref> </ref> 비록 여러 번의 의견 충돌과 비용 문제 등으로 고생했지만, 결국 1957년 12월 17일부터 1959년 3월 1일까지 해외 곳곳에 한국 미술을 선보이는 데 성공한다.<ref> </ref>(+ 1957년 12월 17일, 워싱턴시의 국립미술관에서 전시회 개최 이후는 뉴욕에서 진행 > 화제가 됨) 이후 1959년 6월 15일, 헤르츠 대사의 알선 덕분에, 한국 미술을 유럽에도 보여줄 수 있었다.<ref> </ref> 1968년에 하버드•옌칭학사 서울지부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에 취임하며 한국고고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에 취임<ref>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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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6일 (화) 12:20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조승아(CNU2024))이 작성했습니다.




김재원(金載元)
바바파파.jpg
출처 :
 
한글명 김재원 한자명 金載元 영문명 Kim Jae-won 가나명 이칭 여당[藜堂]
성별 생년 1909년 몰년 1990년 출신지 함경남도 함주 전공 독일 뮌헨대학 철학부 - 교육학과(학부와 석사) & 고고학(박사)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생애


어두웠던 유년시절

1909년 2월 22일 함경남도 함주에서 아버지 학호인물(鶴鎬)와 어머니 전주 이씨인물(全州李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1] 3살 때,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었으며, 동생마저 홍역으로 잃어야 했다.[2] 심지어 함흥으로의 이사 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출가로 고아가 되었다.[3] 이 때문에 친척들이 모여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초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함흥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장티푸스에 걸리면서 1년 유급과 함께 숙부를 비롯한 일부 친척들이 병으로 죽는 난리를 겪어야 했다.[4] 이러한 비극 속에서 한 가지 진귀한 기회를 얻는데, 바로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친척을 만난 것이었다. 친척과의 교류 과정에서 서양의 발전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다.[5] 이후 1927년, 18살의 나이에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는 데 성공한다.[6] 고향을 벗어나 폭넓은 경험을 얻기 원했기에, 20살이었던 1929년 6월에 기차를 통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유럽에서 보낸 11년의 청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으나, 고향과는 정반대인 대도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9년 6월 말에 이의경(이미륵)을 만나기 위해 뮌헨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를 실행으로 옮긴 지 이틀이 지나서 그를 만나 장래 계획을 논의할 수 있었다.[7] 이를 계기로 독일어를 익히기 시작했고, 그의 조언으로 독일의 뮌헨 대학에서 배울 전공으로 교육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8] 이후 질병•자금 부족•독일 사회의 혼란 등의 변수들로 고생한 끝에 1934년 봄에 교육학과 최종 시험 합격에 성공하지만, 당시 한국의 불안정한 정세와 함께 '진정한 배움'의 부족함을 느꼈기에 엘세 부인의 조언에 따라 1935년 6월에 벨기에로 이동했다.[9] 안트워프에서 켄트대학 출신의 헨체(Hentze, C.) 교수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6년간 그의 조수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독일어와 동양 고고학을 매우 세세히 습득할 수 있었다.[10] 1936년에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두 국가의 사회적 간극으로 인한 적응 실패로 1년 후에 다시 독일로 건너갔고,193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헨체 교수 부부를 다시 만나 3년 동안 같이 지냈다. [11] 1940년 5월 5일, 언론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안트워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독일 선배의 추천으로 당해 11월부터 보성전문학교의 독일어 촉탁 강사로 봉직했었다.[12]


국립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곧바로 한국 내 여러 박물관(예: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박물관)을 들러 각 기관의 상황을 파악했다.[13] 이후 언론인이었던 홍종인 씨 등의 권유로 직접 미 군정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독일에서 얻은 박사 학위가 당시 문교부장인 록카드 대위의 눈에 띔으로써, 36살의 나이에 최초의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되었다.[14] 이제 막 새롭게 출발한 박물관을 관리해야 하는 대표였기에, 박물관의 기존 질서를 깨야만 했다. 이를 위해 획기적인 체제 수립부터 경복궁 내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궁 근처의 관사로 이사 • 부여와 경주에 소장한 전시품을 서울로 이송 등을 진행했다.[15] 1946년, 경주의 호우총과 은령총에 가서 첫 발굴 사업을 진행했는데, 호우명 그릇과 같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물 상당수를 발견했다.[16] 워낙 많은 면에서 뜻 깊은 일이었기에 당시 발굴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호우총과 은령총』이라는 하나의 단행본으로 정리했을 정도였다.[17] 1948년 5월, 송악산 사건을 겪어야했다.[18] 1949년 2월 박물관을 중심으로 미술 전시회 진행 시도[19] 6•25 전쟁 당시,박물관이 보관하던 유물들을 지키기 위해 피 나는 사투 등(예: 문화재들이 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북한 군과의 숨 막히는 지연 작전•부산에 임시 보관한 박물관의 소장품을 철저히 보호)을 벌어야 했다.[20]


박물관에 모든 것을 쏟아붇다

1953년, 전쟁의 양상이 호전됨에 따라 서울로 돌아왔으나, 상부의 명령으로 기존의 일자리인 경복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맥과 말재주로 대통령에게 당시 상황을 전달한 덕에 덕수궁 석조전을 새로운 활동 공간으로 삼을 수 있었다.[21] 이로부터 1년 후인 1954년 5월 31일, 한국사를 정리해 책으로 편찬하기 위해 진단 학회의 업무를 대리하기로 하였고, 이후 서울대에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12월 20일에 한국사 프로젝트를 출발시켰다.[22] 이를 계기로 1955년 ~1980년 11월 사이에 49권의 진단 학보를 간행할 수 있었다.[23] 다만 진행 중에 여러 난항을 겪은 탓에, 1965년이 되어서야 책을 완결시킴.[24] 1956월 9월 말, 2명의 외국 박물관장을 서울로 불러 전쟁 전에 준비하던 한국 미술전을 다시 이어가려고 했다.[25] 비록 여러 번의 의견 충돌과 비용 문제 등으로 고생했지만, 결국 1957년 12월 17일부터 1959년 3월 1일까지 해외 곳곳에 한국 미술을 선보이는 데 성공한다.[26](+ 1957년 12월 17일, 워싱턴시의 국립미술관에서 전시회 개최 이후는 뉴욕에서 진행 –> 화제가 됨) 이후 1959년 6월 15일, 헤르츠 대사의 알선 덕분에, 한국 미술을 유럽에도 보여줄 수 있었다.[27] 1968년에 하버드•옌칭학사 서울지부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에 취임하며 한국고고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에 취임[28]

전용 보관함들


정년 퇴임한 이후

1970년 9월, 미국 뮬렌버그대학으로 이동 후 1971년 6월까지 교수로써 활동 – 6월 중순에 유럽 관광을 위해 파리로 이동 – 1972년 10월, 일본•북한과 함께 고고학 자회 운영 – 1977년, 아테네에서 개최한 국제학술원연맹에서 대한민국학술원을 회원국으로 가입 성공 이후 국제학술원연맹에서 한국대표로 활동 – 1988년 6월, 국제고전고고학대회에 참석함 – 1990년 4월 12일에 별세.





연구


국립 박물관의 초대 관장


고고학자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재원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김재원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Timeline


  • [▶Time라인스프레드시트URL삽입 Timeline Google Spreadsheet]

▶Timeline임베딩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김재원(金載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4-15쪽.
  3.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18쪽.
  4.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25~29쪽.
  5.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6. 김재원(金載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김인혜,「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
  8. 김인혜, 「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21.12.12.
  9.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46-53쪽.
  10.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11.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1992, 63~68쪽.
  12. 김덕형(저자)•이수완(사진)「김재원」, 『주간조선』online, (주)조선뉴스프레스, 작성일: 2012.01.04.
  13. 장상훈,『해방공간 국립박물관의 소장품과 그 관리』, 2018. 07.01. 18면, 『박물관 신문』online, 국립중앙박물관.
  14. 안휘준, 「김재원, 박물관의 아버지, 고고학·미술사학의 선각자」, 『한국사 시민강좌』50, 일조각, 2012.02, 256~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