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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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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2일 (수) 16:3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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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한자명)
박은식님.jpeg
출처 :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1]online, 공훈전자사료관.
 
한글명 박은식 한자명 朴殷植 영문명 가나명 이칭 박기정(朴箕貞)
성별 남성 생년 1859년 몰년 1925년 출신지 밀양(密陽)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때, 황성신문 및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통사』 등을 저술한 유학자 · 언론인 · 독립운동가.


생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 젊은 시절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1882년에 상경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7월의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해 낙향,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독립협회의 영향을 받다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한 후인 1898년에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되다

1919년 8월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한 9월의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하였다. 뒤이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의 거듭되는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을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였다.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은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튿날인 3월 24일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였다.





연구


교육진흥책을 논구하다

독립협회가 강제해산 당한 후에는 1900년부터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 때 교육진흥책을 논구하는 『겸곡문고(謙谷文稿)』와 『학규신론(學規新論)』를 저술하였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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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