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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지식인)
(Data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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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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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학사. 역사학자.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나서 민족학교와 관립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본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조수 및 부수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경제학 교원으로 교육 및 연구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북한 정권 건설에 참여하여 김일성종합대학 및 과학원 등에서 근무하였다. 한국사의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조선에도 적용되었다는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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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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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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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상학사. 역사학자.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나서 민족학교와 관립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본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조수 및 부수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경제학 교원으로 교육 및 연구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북한 정권 건설에 참여하여 김일성종합대학 및 과학원 등에서 근무하였다. 한국사의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조선에도 적용되었다는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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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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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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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민족학교와 관립학교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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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은 1903년 6월 23일<ref> 김광진의 출생일과 사망일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위치한 김광진 묘비에 기록된 정보이며, 직접 현지를 조사한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님이 제공한 정보이다.</ref> 평양 대동강변에서 땔감 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김광진은 공립보통학교가 아니라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수학하였다.<ref> 장지연(張志淵)의 청원으로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私立學校’로 인허된 곳이다. 「日新認許」『皇城新聞』, 1906.4.25.</ref> 일신학교에서는 '구한국 시대 교과서'를 사용하고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창가를 가르쳤으며, 김광진의 재학 중에도 학교와 경찰 사이의 충돌이 이어졌으며 결국 그가 졸업하기 직전 학교는 문을 닫았다.<ref>金洸鎭, 「學究四O年の道」,『今日の朝鮮』, 外國文出版社, 1965.3(任正赫,『現代朝鮮の科學者たち』, 彩流社, 1997, 수록), 169-170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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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학교와 관립학교 수학'''===
1917년 김광진은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홍종인(洪鍾仁)]]과 [[노동규(盧東奎)]]가 동기생이었으며, [[함석헌(咸錫憲)]]이 1년 선배였다. 이후 1919년 김광진은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울에서 온 학생과 연락을 취하면서 비밀리에 봉기를 준비했다. 우리는 며칠 밤 철야로 수천 장의 국기를 만들고 호신용 단도를 갖춘 채 드디어 3월 1일을 맞이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60 가까웠던 아버지도 연행되었다".<ref>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1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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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김광진은 {{TagInstitution|[[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TagPerson|[[홍종인|홍종인(洪鍾仁)]]}}{{TagPerson|[[노동규|노동규(盧東奎)]]}}가 동기생이었으며, {{TagPerson|[[함석헌|함석헌(咸錫憲)]]}}이 1년 선배였다. 이후 1919년 김광진은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울에서 온 학생과 연락을 취하면서 비밀리에 봉기를 준비했다. 우리는 며칠 밤 철야로 수천 장의 국기를 만들고 호신용 단도를 갖춘 채 드디어 {{TagEvent|[[삼일운동|3월 1일을 맞이]]}}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60 가까웠던 아버지도 연행되었다".<ref>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1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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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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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22년 4월 1일 김광진은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 예과에 입학한다. 이듬해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나자 김광진은 직접적인 피해를 겪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였고 강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조선인 혐오 발언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쿄상과대학에는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오쓰카 긴노스케(大塚金之助)]] 등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김광진 스스로의 회고에 따르면, 항의사건 이후 "학교 강의에 흥미를 잃고 혼자서 맑스·레닌주의 공부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비합법 독서회에도 참가하고 또한 비합법인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이나 발행 금지 서적의 배포 등에도 관계했다".<ref>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3-174쪽.</ref> 1925년 3월 김광진은 예과를 졸업한다. [[백남운]](白南雲)은 김광진의 도쿄상과대학 3년 선배였으며, 본과 동기는 [[강석천(姜錫天)]], [[김선형(金善炯)]], [[윤원상(尹元上)]], [[윤인상(尹仁上)]], [[이완조(李玩朝)]] 등이었다. 윤인상의 회고에 따르면, 김광진은 "미남"이었고 화술에 능했"으며 스스럼없이 주변 농가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며, 평양 출신 도쿄 유학생 모임인 [[기성학생회(箕城學生會)]]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ref> 尹仁上,『90을 바라보며』, 光林社, 1991, 69~103·406~417쪽.「東京箕城學友 卒業生送別式, 임원도 새로히 선거」,『東亞日報』, 1926.2.7(5).</ref> 본과 3학년 시절 김광진은 윤인상, 김선형 등과 시오바라(鹽原)와 닛코(日光)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1928년 3월 김광진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여 상학사(商學士) 학위를 받는다.<ref> 『東京商科大學一覧(昭和三年度)』, 1928.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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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KimKJ Nikk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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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닛코(日光) 여행(오른쪽부터 김광진, 김선형, 윤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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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尹仁上, 『90을 바라보며』, 光林社,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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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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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지식인'''===
[[파일:KimKJ Nikko.png|200px|right|닛코(日光) 여행 (출처: 尹仁上, 『90을 바라보며』, 光林社, 1991. 오른쪽부터 김광진, 김선형, 윤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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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4월 1일 김광진은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 예과에 입학한다. 이듬해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나자 김광진은 직접적인 피해를 겪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였고 강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조선인 혐오 발언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쿄상과대학에는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오쓰카 긴노스케(大塚金之助)]] 등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김광진 스스로의 회고에 따르면, 항의사건 이후 "학교 강의에 흥미를 잃고 혼자서 맑스·레닌주의 공부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비합법 독서회에도 참가하고 또한 비합법인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이나 발행 금지 서적의 배포 등에도 관계했다".<ref>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3-174쪽.</ref> 1925년 3월 김광진은 예과를 졸업한다. [[백남운(白南雲)]]은 김광진의 도쿄상과대학 3년 선배였으며, 본과 동기는 [[강석천(姜錫天)]], [[김선형(金善炯)]], [[윤원상(尹元上)]], [[윤인상(尹仁上)]], [[이완조(李玩朝)]] 등이었다. 윤인상의 회고에 따르면, 김광진은 <font color="#2E2EFE">"'''미남'''"</font>이었고 화술에 능했"으며 스스럼없이 주변 농가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며, 평양 출신 도쿄 유학생 모임인 [[기성학생회(箕城學生會)]]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ref> 尹仁上,『90을 바라보며』, 光林社, 1991, 69~103·406~417쪽.「東京箕城學友 卒業生送別式, 임원도 새로히 선거」,『東亞日報』, 1926.2.7(5).</ref> 본과 3학년 시절 김광진은 윤인상, 김선형 등과 시오바라(鹽原)와 닛코(日光)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1928년 3월 김광진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여 상학사(商學士) 학위를 받는다.<ref> 『東京商科大學一覧(昭和三年度)』, 1928.10.</ref><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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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28년 11월 김광진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법문학부(法文學部)]] 부수(副手)로 임명되었고 1929년도에는 같은 곳의 조수(助手)로 근무하였다.<ref> 「昭和三年十月二日 金洸鎭 法文學部副手ヲ命ス(大學)」,『京城帝國大學學報』 20, 1928.11.5.</ref> 김광진은 경성제대 [[조선경제연구소(朝鮮經濟硏究所)]]가 [[『조선경제의_연구-경성제국대학_법문학회_제1부논집_제2책(朝鮮經濟の硏究-京城帝大學法文學會第一部論集第二冊-)』]]을 간행할 당시 사무를 담당하였다. 경성제대 경제학 교원이었던 [[시카다 히로시(四方博)]]는 후일 "조수나 부수는 경제관계는 거의 조선인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교육 받은 이들과 그 당시 말로 '내지(內地)'의 대학을 나와 갈 곳이 없어 돌아온 이들이 꽤 와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ref>「京城帝大の社会経済史研究」, 旗田巍 編,『シンポジウム 日本と朝鮮』, 勁草書房, 1969, 51쪽.</ref> 김광진은 경성제대 조수 근무를 계기로 [[성대 그룹]] <ref> '성대 그룹'은 식민지기와 해방정국에 걸쳐 활약한 경성제국대학 출신 사회주의 지식인·운동가들이다. </ref> 특히 그 중에서도 [[유진오(兪鎭午)]]와 교유하였다. 이후 1931년 9월 김광진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생들이 설립한 [[조선사회사정연구소(朝鮮社會事情硏究所)]]에 참여한 경성제대 졸업생이 아닌 유일한 인물이었다. 유진오는 "김광진 군은 동경상대 출신이었지만 나이와 생활태도나 사상 경향이 우리들과 비슷해서 죽이 잘 맞았다"<ref> 兪鎭午,『나의 人生觀, 젊음이 깃 칠 때』, 徽文出版社, 1978, 111쪽.</ref> 1934년 [[미야케(三宅) 교수 적화운동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으로 김광진도 증인으로 조사를 받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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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던 김광진은 [[김성수(金性洙)]]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후인 1932년 4월 전임강사로 부임한다. 유진오는 "인촌(仁村)은 세 사람의 신진(新進)을 이끌고 등장하였는데, 세 사람이란 [[오천석(吳天錫)]], 김광진 양 씨와 나였다"라고 회고하였다.<ref> 兪鎭午,『養虎記 - 普專·高大, 三十年의 回顧-』, 高麗大學校出版部, 1977, 5쪽.</ref> 김광진은 처음에는 상업학을 강의하였으며, 1936년 이후에는 상업학과 경제사를 담당하였다. 당시 신문에서는 김광진을 <font color="#2E2EFE">"'''호신사(好紳士)'''"</font>로 소개하면서, "밤이 새도록 공부를 계속(繼續)하는" '독학자(篤學者)'인 동시에 "학생들이 씨(氏)를 방문하면 씨는 과제를 권하고 권하고 차를 권하고 선생이 학담(學談)에 취하면 술까지 권하는 때가 있"을 정도로 학생들과 관계도 좋았다고 기록하였다.<ref> G記者,「敎授·講師打令 普成專門篇(七) 商科敎授 金洸鎭氏」,『朝鮮日報』, 1933.5.11 석(2).</ref> 1934년 3월 보성전문학교는 [[『보성전문학교연구연보_보전학회논집(普成專門學校硏究年報_普專學會論集)』]]를 창간하는 데, 실제 편집은 김광진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ref>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역사학보』 232, 역사학회, 2016, 297쪽. </ref> 당시 언론에서는 "이러한 <font color="#2E2EFE">''''순전한 연구논문집의 발행은 조선에서 처음이니만큼''''</font> 조선문화사상에 찬연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소개하였으며, 후일 유진오는 "일본 모 사대(私大) 신문에서는 『보전논집』의 내용을 소개하고 나서, 이제 경성에서는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한 '관학파(官學派)'에 대항하여 <font color="#2E2EFE">''''사학파(私學派)''''</font>가 대두되었다고 논평하였다."<ref> 「硏究의 一端을 學界에 提供, 普專學會論文集發刊」,『每日申報』, 1934.3.8.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41700209205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4-17&officeId=00020&pageNo=5&printNo=16166&publishType=00020 兪鎭午,「片片夜話㊵ 金性洙 校長의 의욕」,『東亞日報』, 1974.4.17(5)].</ref><br/>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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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김광진은 극예술연구회의 앵화원(櫻花園) 공연을 보러 갔다가 [[노천명(盧天命)]]을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1939년 2월 [[『문장(文章)』]] 창간호에 유진오는 소설 [[「이혼(離婚)」]]을 싣는데, 이 소설은 노천명과 김광진의 연애를 다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다.<ref> 朴鳳宇,「孤獨과 生活환 女流詩人 盧天命」『女苑』, 1959년 8월; 朴致遠,「盧天命 그 文學과 生涯 - 살을 깎듯 했던 孤獨의「化身」-」『 隨筆文學』, 1978.5. 황금찬,「황금찬의 문단 반세기(20) 유진오 편」, 『문학세계』, 2008.9.</ref> 1939년 김광진은 보성전문학교를 사직하고 평양으로 귀향하여 1940년 1월 평안상사주식회사(平安商社株式會社) 전무이사(專務取締役)로 취임하며 같은 해 10월 조선제정공업주식회사(朝鮮製釘工業株式會社) 감사로 취임하여 사업가로 전신한다. 평양에서 김광진은 [[왕수복(王壽福)]]을 만나며, 해방 이후 이들은 부부로 지낸다.
1928년 11월 김광진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법문학부(法文學部)]] 부수(副手)로 임명되었고 1929년도에는 같은 곳의 조수(助手)로 근무하였다.<ref> 「昭和三年十月二日 金洸鎭 法文學部副手ヲ命ス(大學)」,『京城帝國大學學報』 20, 1928.11.5.</ref> 김광진은 경성제대 [[조선경제연구소(朝鮮經濟硏究所)]]가 [[『조선경제의_연구-경성제국대학_법문학회_제1부논집_제2책(朝鮮經濟の硏究-京城帝大學法文學會第一部論集第二冊-)』]]을 간행할 당시 사무를 담당하였다. 경성제대 경제학 교원이었던 [[시카다 히로시(四方博)]]는 후일 "조수나 부수는 경제관계는 거의 조선인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교육 받은 이들과 그 당시 말로 '내지(內地)'의 대학을 나와 갈 곳이 없어 돌아온 이들이 꽤 와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ref>「京城帝大の社会経済史研究」, 旗田巍 編,『シンポジウム 日本と朝鮮』, 勁草書房, 1969, 51쪽.</ref> 김광진은 경성제대 조수 근무를 계기로 [[성대 그룹]] <ref> '성대 그룹'은 식민지기와 해방정국에 걸쳐 활약한 경성제국대학 출신 사회주의 지식인·운동가들이다. </ref> 특히 그 중에서도 [[유진오(兪鎭午)]]와 교유하였다. 이후 1931년 9월 김광진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생들이 설립한 [[조선사회사정연구소(朝鮮社會事情硏究所)]]에 참여한 경성제대 졸업생이 아닌 유일한 인물이었다. 유진오는 "김광진 군은 동경상대 출신이었지만 나이와 생활태도나 사상 경향이 우리들과 비슷해서 죽이 잘 맞았다"<ref> 兪鎭午,『나의 人生觀, 젊음이 깃 칠 때』, 徽文出版社, 1978, 111쪽.</ref> 1934년 [[미야케(三宅) 교수 적화운동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으로 김광진도 증인으로 조사를 받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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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던 김광진은 [[김성수(金性洙)]]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후인 1932년 4월 전임강사로 부임한다. 유진오는 "인촌(仁村)은 세 사람의 신진(新進)을 이끌고 등장하였는데, 세 사람이란 [[오천석(吳天錫)]], 김광진 양 씨와 나였다"라고 회고하였다.<ref> 兪鎭午,『養虎記 - 普專·高大, 三十年의 回顧-』, 高麗大學校出版部, 1977, 5쪽.</ref> 김광진은 처음에는 상업학을 강의하였으며, 이후에는 상업학과 경제사를 담당하였다. 당시 신문에서는 김광진을 <font color="#2E2EFE">"'''호신사(好紳士)'''"</font>로 소개하면서, "밤이 새도록 공부를 계속(繼續)하는" '독학자(篤學者)'인 동시에 "학생들이 씨(氏)를 방문하면 씨는 과제를 권하고 권하고 차를 권하고 선생이 학담(學談)에 취하면 술까지 권하는 때가 있"을 정도로 학생들과 관계도 좋았다고 기록하였다.<ref> G記者,「敎授·講師打令 普成專門篇(七) 商科敎授 金洸鎭氏」,『朝鮮日報』, 1933.5.11 석(2).</ref> 1934년 3월 보성전문학교는 [[『보성전문학교연구연보_보전학회논집(普成專門學校硏究年報_普專學會論集)』]]를 창간하는 데, 실제 편집은 김광진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ref>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역사학보』 232, 역사학회, 2016, 297쪽. </ref> 당시 언론에서는 "이러한 <font color="#2E2EFE">''''순전한 연구논문집의 발행은 조선에서 처음이니만큼''''</font> 조선문화사상에 찬연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소개하였으며, 후일 유진오는 "일본 모 사대(私大) 신문에서는 『보전논집』의 내용을 소개하고 나서, 이제 경성에서는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한 '관학파(官學派)'에 대항하여 <font color="#2E2EFE">''''사학파(私學派)''''</font>가 대두되었다고 논평하였다."<ref> 「硏究의 一端을 學界에 提供, 普專學會論文集發刊」,『每日申報』, 1934.3.8.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41700209205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4-17&officeId=00020&pageNo=5&printNo=16166&publishType=00020 兪鎭午,「片片夜話㊵ 金性洙 校長의 의욕」,『東亞日報』, 1974.4.17(5)].</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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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학자'''===
1934년 김광진은 극예술연구회의 앵화원(櫻花園) 공연을 보러 갔다가 [[노천명(盧天命)]]을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1939년 2월 [[『문장(文章)』]] 창간호에 유진오는 소설 [[「이혼(離婚)」]]을 싣는데, 이 소설은 노천명과 김광진의 연애를 다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다.<ref> 朴鳳宇,「孤獨과 生活환 女流詩人 盧天命」『女苑』, 1959년 8월; 朴致遠,「盧天命 그 文學과 生涯 - 살을 깎듯 했던 孤獨의「化身」-」『 隨筆文學』, 1978.5. 황금찬,「황금찬의 문단 반세기(20) 유진오 편」, 『문학세계』, 2008.9.</ref> 1939년 김광진은 보성전문학교를 사직하고 평양으로 귀향하여 1940년 1월 평안상사주식회사(平安商社株式會社) 전무이사(專務取締役)로 취임하며 같은 해 10월 조선제정공업주식회사(朝鮮製釘工業株式會社) 감사로 취임하여 사업가로 전신한다. 평양에서 김광진은 [[왕수복(王壽福)]]을 만난다.<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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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45년 8월 17일 김광진은 [[조만식(曺晩植)]]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지부 결성에 참가하여 [[무임소위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건준 평남지부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는데, 김광진은 민족주의 계열의 한 사람으로 합류하여 상공위원장을 맡는다. 다만, 김광진은 당시 이미 조선공산당원이었다.<ref>韓載德『, 金日成을 告発한다―朝鮮労動黨働治下의 北韓回顧録―』, 內外文化社, 1965, 52쪽.</ref> 1946년 1월 중순 김광진은 인재 유치의 임무를 가지고 1946년 1월 중순에 서울로 내려와 백남운을 만나 지식인의 월북문제를 깊숙이 논의하였다.<ref>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박병엽 증언록2,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247쪽.</ref><br/>
===북한의 학자===
 
1945년 8월 17일 김광진은 [[조만식(曺晩植)]]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지부 결성에 참가하여 [[무임소위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건준 평남지부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는데, 김광진은 민족주의 계열의 한 사람으로 합류하여 상공위원장을 맡는다. 다만, 김광진은 당시 이미 조선공산당원이었다.<ref>韓載德『, 金日成을 告発한다―朝鮮労動黨働治下의 北韓回顧録―』, 內外文化社, 1965, 52쪽.</ref> 1946년 1월 중순 김광진은 인재 유치 특명을 띠고 1946년 1월 중순에 서울로 내려와 백남운을 만나 지식인의 월북문제를 깊숙이 논의하였다.<ref>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박병엽 증언록2,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247쪽.</ref><br/>
 
 
1946년 8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명이 되며, 1947년 1월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부장을 맡았다.<ref> 「敎職員任命에 關한 件 申請」(北朝鮮金日成大學總長 金枓奉→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敎育局長, 1947.1, SA2006 12/35, RG242, Captured Korean Documents, NARA). 이 자료에는 1947년 1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철도공학부, 이학부, 농학부, 법학부, 문학부, 공학부 등 7개 학부 전체 교원 235명의 이름, 소속, 임명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김광진의 임명일이 가장 빠르다. 법학부는 이듬해 경제법학부로 변경되었다가 1949년 경제학부와 법학부로 분리된다.『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김일성 종합 대학, 1956.9, 30·42∼44쪽.</ref> 1951년 김광진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5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5년 동안 대학 사업을 위하여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기 훈장과 공로 메달'을 수여받는다.<ref>『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87쪽.</ref> 1947년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는 이는 "경제사를 전공한 김광진 교수의 마르크스 강론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라고 회고하였다.<ref>「한겨레통일문화재단 설립 캠페인‘분단50년’이젠 통일로」『한겨레신문』, 1996.1.20(2).</ref><br/>
 
1946년 8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명이 되며, 1947년 1월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부장을 맡았다.<ref> 「敎職員任命에 關한 件 申請」(北朝鮮金日成大學總長 金枓奉→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敎育局長, 1947.1, SA2006 12/35, RG242, Captured Korean Documents, NARA). 이 자료에는 1947년 1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철도공학부, 이학부, 농학부, 법학부, 문학부, 공학부 등 7개 학부 전체 교원 235명의 이름, 소속, 임명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김광진의 임명일이 가장 빠르다. 법학부는 이듬해 경제법학부로 변경되었다가 1949년 경제학부와 법학부로 분리된다.『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김일성 종합 대학, 1956.9, 30·42∼44쪽.</ref> 1951년 김광진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5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5년 동안 대학 사업을 위하여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기 훈장과 공로 메달'을 수여받는다.<ref>『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87쪽.</ref> 1947년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는 이는 "경제사를 전공한 김광진 교수의 마르크스 강론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라고 회고하였다.<ref>「한겨레통일문화재단 설립 캠페인‘분단50년’이젠 통일로」『한겨레신문』, 1996.1.20(2).</ref><br/>
[[파일: KimWang19650510.jpg|200px|left|판문점을 방문한 김광진과 왕수복 (출처: 『동아일보』196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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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과학원]]이 개원하면서 김광진은 [[후보원사]]로 임명되어 과학원 [[연구사]]를 겸임하게 된다.<ref>『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103쪽.</ref> 이후 김광진은 고대사에서 식민지 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분야를 다룬 논문과 단행본을 다수 발표하였다. 특히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중반 노예제 유무 및 삼국시대 사회성격을 둘러싸고 김광진, [[김석형]] 등의 봉건제론과 [[도유호]], [[임건상]], 백남운 등의 노예제론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후 김광진은 [[정약용]]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실학 연구로 옮겨갔다. 1964년 과학원이 [[사회과학원]]으로 개편될 때 김광진은 [[원사]]로 승격하였고 사회과학원 산하 [[경제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964년 9월에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교원 오쓰카 긴노스케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광진은 그와 재회한다. 김광진은 "도쿄 유학 시절에 배운 적 있는 오쓰카 긴노스케 교수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나는 40년 만에 교수를 뵐 수 있었다. 교수는 나의 자그마한 성과를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며 조선의 과학의 눈부신 발전 모습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셨다."라고 회고하였다.<ref> 金洸鎭,「學究四〇年の道」, 175쪽. 히토쓰바시대학 도서관의 '大塚金之助 關係資料' 컬렉션에는 당시 평양에서 김광진과 찍은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ref><br/>
1952년 [[과학원]]이 개원하면서 김광진은 [[후보원사]]로 임명되어 과학원 [[연구사]]를 겸임하게 된다.<ref>『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103쪽.</ref> 이후 김광진은 고대사에서 식민지 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분야를 다룬 논문과 단행본을 다수 발표하였으며, [[시대구분논쟁]]을 주도하는 등 역사학자로서 활동하였다. 1964년 과학원이 [[사회과학원]]으로 개편될 때 김광진은 [[원사]]로 승격하였고 사회과학원 산하 [[경제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964년 9월에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교원 오쓰카 긴노스케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광진은 그와 재회한다. 김광진은 "도쿄 유학 시절에 배운 적 있는 오쓰카 긴노스케 교수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나는 40년 만에 교수를 뵐 수 있었다. 교수는 나의 자그마한 성과를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며 조선의 과학의 눈부신 발전 모습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셨다."라고 회고하였다.<ref> 金洸鎭,「學究四〇年の道」, 175쪽. 히토쓰바시대학 도서관의 '大塚金之助 關係資料' 컬렉션에는 당시 평양에서 김광진과 찍은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ref><br/>
 
 
김광진은 학자로 활약하는 한 편,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961년 5월 그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1972년 12월 [[최고인민위원회]] 제5기 대의원을 역임하였다. 1965년 5월 10일 김광진과 왕수복 부부는 판문점을 방문하였다. 당시 한국의 신문은 김광진이 "[[최호진(崔虎鎭)]] 교수는 내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며 유진오 박사와 [[이인기(李寅基) 교수]]와는 친한 사이이니 안부를 전해 달라"라고 하였으며, "유진오와 홍종인 씨 등이 자기 친구라고 자랑"했다고 보도하였다.<ref> 「李蘭影 씨가 作故했다니, 板門店에 나타난 北傀 女歌手」, 『東亞日報』, 1965.5.11. 「板門店에 나타난 王壽福」, 『朝鮮日報』, 1965.5.11.</ref> 1973년 7월 김광진은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1년 9월 10일 타계하였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후 2003년 왕수복이 합장되었다.
 
김광진은 학자로 활약하는 한 편,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961년 5월 그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1972년 12월 [[최고인민위원회]] 제5기 대의원을 역임하였다. 1965년 5월 10일 김광진과 왕수복 부부는 판문점을 방문하였다. 당시 한국의 신문은 김광진이 "[[최호진(崔虎鎭)]] 교수는 내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며 유진오 박사와 [[이인기(李寅基) 교수]]와는 친한 사이이니 안부를 전해 달라"라고 하였으며, "유진오와 홍종인 씨 등이 자기 친구라고 자랑"했다고 보도하였다.<ref> 「李蘭影 씨가 作故했다니, 板門店에 나타난 北傀 女歌手」, 『東亞日報』, 1965.5.11. 「板門店에 나타난 王壽福」, 『朝鮮日報』, 1965.5.11.</ref> 1973년 7월 김광진은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1년 9월 10일 타계하였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후 2003년 왕수복이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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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KimWang1965051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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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판문점을 방문한 김광진과 왕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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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동아일보』1965년 5월 10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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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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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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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의 경제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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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식민지 시기 김광진이 발표한 글 중 경제사 관련 글은 4편이고 나머지는 총독부의 경제 정책 및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일본 및 세계 경제 동향 분석, 소련 경제 정책의 소개, 인플레이션 및 금본위제 문제, 전쟁과 경제 등에 관한 글이었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학술지가 아닌 신문과 잡지에 실렸으며 내용도 시사평론에 가까웠다. 이른바 학술 논문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것은 경제사 관련 글이었다. 도쿄상과대학에서 배웠을 실물 경제에 관한 지식은 학문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채, 독학으로 익힌 맑스주의 경제사 연구에서 학문적 성과를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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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결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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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김광진은 {{TagPerson|[[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改造社, 1933)에 대하여 "본서(本書)는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조선사회의 발전법칙을 과학적으로 규정한 점에 있어서 종래의 조선사에 일대청산을 필(畢)한 것이라고 볼 수 잇다"고 평가하면서도, "이 시대의 노예계급(奴隸階級)이 중요한 직접생산계급이엿엇음에는 틀림없으나 (중략) 경제기구의 특징을 간단히 '노예국가'로써 단정하여 버림이 반다시 정당한 견해일가를 나는 다소 의심하는 바"라고 비판하였다.<ref>金洸鎭,「新刊評 白南雲敎授의 新著 『朝鮮社會經濟史』」, 『東亞日報』, 1933.9.21.</ref> 이후 김광진은 자신의 첫 고대사 논문인 「[[고구려 사회의 생산양식 -국가의 생산과정을 중심으로서(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普專學會論集』 3, 1937.2)에서 "하호는 대체로 피정복=씨족공동체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下戸」를 백남운 씨는 「奴隷」로 규정하여 노예제도가 성대했음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앞서 나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노예의 존재를 가지고 바로 「노예소유자적 구성」 운운하는 것은 조급하다"라고 비판하면서 "제3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고구려는 씨족사회를 아직 벗어나지 않았"고 "호태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내노예제보다도 수취관계로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봉납제(貢納制)"라고 주장하였다.<ref>金洸鎭,「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 『普專學會論集』 3, 1937.2, 8·3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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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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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삼국시대 사회성격논쟁'''===
===논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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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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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55년 김광진은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제도의 발생 과정-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력사과학』 1955-8/1955-9)를 통해 조선은 원시공산제에서 봉건제로 직접 이행했다는 노예제 결여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도유호는 [[「조선력사상에는 과연 노예제 시대는 없었는가」]](『력사과학』 1956-3)에서 조선에도 노예제가 존재했다고 비판하였고, 다시 김광진은 [[「삼국시대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력사과학』 1956-5/1956-6)로 재비판하였다. 과학원 력사연구소는 1956년 10월 토론회를 개최하여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집』]](1957.6)을 간행하였다. 노예제의 존재 유무를 둘러싸고 시작된 논쟁은 삼국 시대의 사회 성격을 묻는 논쟁으로 전화되면서 김광진, 김석형의 봉건제론과 도유호, 임건상, 백남운의 노예제론이 대립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팽팽한 논쟁을 이어가던 쌍방의 논자들은 1960년에 들어 서면서 고조선을 '노예 소유자 사회(고대 동방형의)'로 규정하는 데 합의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삼국 시대는 봉건제로 규정되며 이는 노예제를 고조선, 부여, 진국 시대에 설정함으로써 가능해진 셈이다. 1962년에 나온 [[『조선통사 상』]] 개정판은 이러한 내용을 담았다. 1960∼62년에 걸쳐 스무 차례에 달하는 학술토론회가 개최된 뒤, 1963년에 [[『고조선에 관한 토론 론문집』]]과 더불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출간되었다. 삼국 시대만 놓고 보면 김광진의 봉건제설이 채택된 것처럼 보이나, 논쟁의 발단이 ‘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를 놓고 김광진이 노예제 결여를 주장한 데 대해 도유호가 ‘과연 노예제 시대는 없었는가’라고 비판한 데 있었던 것을 떠올린다면, 〈고조선=노예제〉설은 김광진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북한의 역사학은 노예제의 결여라는 조선적 특수성을 강조하기보다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조선에도 관철되었음을 인정하는 방향을 채택한 것이다.
!style="width:50%"| 제목 || style="width:20%"| 지면·출판사 || style="width:10%"| 권·호 || style="width:10%"| 간행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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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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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0년대 이후 [[최익한]]은 정약용에 대한 많은 연구를 발표하면서 정약용 사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였으며, 그는 북한 역사학을 주도하면서 [[『실학파와 정다산』]](1955)을 간행하였다.<ref>정종현, 「‘茶山’의 초상과 남·북한의 ‘實學’ 전유 -1950년대 최익한과 홍이섭의 정약용 연구를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42, 2015.4, 참조.</ref> 김광진이 정약용을 "반봉건적 혁명 사상가"<ref>김광진, 「토지 문제에 대한 정 다산의 사상」, 『경제연구』 1961-4, 1961, 41쪽.</ref> 혹은 "탁월한 경제 사상가이며 애국적인 정치 활동가"<ref>김광진, 『정 다산의 경제 사상』, 과학원출판사, 1962.8, 291쪽.</ref>로 인정한 것 역시 최익한의 정약용 평가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 김광진은 내재적 발전의 사상적 자원으로서 실학에 주목하였지만, 자본주의 맹아론과는 거리를 유지하는 입장이었다. 김광진은 "해당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맹아의 발생은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감촉되지 못 하리 만큼 극히 미약"했다고 하면서, "어떠한 나라의 사상 발전과 그 나라의 경제적 발전과의 사이에는 일견 모순되게 보이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는바 이러한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오직 경제적 유물론자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약한 자본주의적 요소에서 계몽 사상이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ref>김광진, 「토지 문제에 대한 정 다산의 사상」, 45·32쪽.</ref> 하지만 1973년 김광진이 [[정영술]], [[손전후]]와 함께 간행한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에서는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맹아론을 받아들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의 머리말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민족허무주의와 민족배타주의를 철저히 극복하고 종래 제국주의자들과 일제어용학자들이 부르죠아적독단론에 기초하여 떠벌이던 《아세아적정체론》, 《후진국개발론》과 《자본주의이식론》, 《식민지통치유익설》 등을 견결히 반대배격"한다고 그 입장을 표명하였고,<ref>김광진·정영술·손전후,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 사회과학출판사, 1973, 머리말 참조.</ref> 19세기 조선 사회가 ‘공장제 수공업’ 즉 매뉴팩쳐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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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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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식민지기 아시아적 정체성론에 입각하여 조선적 특수성을 주장하던 김광진은 해방 이후에도 조선사에서의 노예제 결여를 주장하고, 실학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본주의 맹아론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북한 역사학계에서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이 굳게 뿌리를 내리게 됨에 따라 점차 자신의 설을 철회 혹은 수정해 가는 모습이 확인된다. 1945년 이후 동아시아에 국경을 넘어 존재했던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지=아시아〉의 주체성을 옹호하고자 한 일련의 역사학적 실천에 보조를 맞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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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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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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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face="함초롬돋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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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ortable" style="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F0F8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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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7%;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연번 !! style="width:48%;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논문명 !! style="width:15%;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학술지&출판사 !! style="width:10%;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권호 !! style="width:20%;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간행연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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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1|| 朝鮮取引所政策を中心として || 大學と社会 || - || 19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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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2|| 인플레이션 정책의 경과와 전망 || 東方評論 || 1(3) || 19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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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3|| (死線에 선 農村과 그 對策) 朝鮮農村의 病源診斷 || 東光 || 36 || 19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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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4|| 폴록크著 森谷克己譯 「쏘베-트聯邦計劃經濟史論」 || 新興 || 7 || 193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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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5|| 世界를 震撼하는 金融恐慌의 樣相 : 그 原因과 밋 發展을 論述함(一)∼(三) || 朝鮮日報 ||  || 1933.4.26-28(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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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6|| 資本主義經濟의 再建運動, 國際經濟會議豫診(一)∼(四) || 朝鮮日報 ||  || 1933.6.9, 10, 11, 13(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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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7|| 新刊評 白南雲敎授의 新著 『朝鮮社會經濟史』 || 東亞日報 ||  || 193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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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8|| 인플레 進展과 朝鮮經濟界(上)(中)(下) || 東亞日報 ||  || 1934.01.0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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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取引所政策を中心として || 大學と社会 || || 19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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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09|| 戰爭經濟와 非常生活, 豫想되는 將來戰爭 그 影響을 中心으로(一)(二) || 朝鮮日報 || || 1934.1.1新年號其二(3)<br/>2新年號其十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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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플레이션 정책의 경과와 전망 || 東方評論 || 1(3) || 19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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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0|| (朝鮮米穀問題는 어디로?)<br/>小作料輕減하고 水利組合은 國營-農民의 모든 負擔을 輕減하라- || 東亞日報 || || 193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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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死線에 선 農村과 그 對策] 朝鮮農村의 病源診斷 || 東光 || 36 || 19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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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1|| 李朝末期における朝鮮の貨幣問題 || 普專學會論集 || || 193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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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록크著 森谷克己譯 「쏘베-트聯邦計劃經濟史論」 || 新興 || 7 || 193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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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2|| 科學의 黨派性=歷史性 || 靑年朝鮮 || || 19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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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界를 震撼하는 金融恐慌의 樣相 : 그 原因과 밋 發展을 論述함(一)∼() || 朝鮮日報 || || 1933.4.26∼28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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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3|| 膨脹日本經濟의 正體(一)∼() || 朝鮮日報 || || 1934.10.04.-7·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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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資本主義經濟의 再建運動, 國際經濟會議豫診()() || 朝鮮日報 || || 1933.6.9·10·11·13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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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4|| 뿔럭經濟의 動向, 自由貿易主義 解體와 國民主義의 强化()() || 朝鮮日報 || || 1935.01.0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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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刊評 白南雲敎授의 新著 『朝鮮社會經濟史』 || 東亞日報 || || 193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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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5|| (世界經濟의 回顧展望) 인풀레의 內面에 發展하는 諸矛盾 || 東亞日報 || || 193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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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플레 進展과 朝鮮經濟界(上)()() || 東亞日報 || || 193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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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6|| 資本의 放浪과 金本位制의 危機()() || 東亞日報 || || 1935.07.1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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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戰爭經濟와 非常生活, 豫想되는 將來戰爭 그 影響을 中心으로(一)(二) || 朝鮮日報 || || 1934.1.1新年號其二(3)·2新年號其十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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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7|| 世界經濟戰 || 新東亞 || 5(8) || 193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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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米穀問題는 어디로?] 小作料輕減하고 水利組合은 國營-農民의 모든 負擔을 輕減하라- || 東亞日報 || || 193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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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8|| 蘇聯을 風靡하는 스타하-노프 運動(一)∼(四) || 東亞日報 || || 1936.02.1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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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朝末期における朝鮮の貨幣問題 || 普專學會論集 || 1 || 193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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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9|| 朝鮮歷史學 硏究의 前進을 爲하여 || 朝鮮日報 ||  || 1937.01.03.新年號其十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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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科學의 黨派性=歷史性 || 靑年朝鮮 || 1 || 19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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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0|| 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 || 普專學會論集 || 3 || 193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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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膨脹日本經濟의 正體(一)∼() || 朝鮮日報 || || 1934.10.4∼7·9∼14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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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1|| 世界景氣의 動向(一)∼() || 東亞日報 || || 1938.01.0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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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뿔럭經濟의 動向, 自由貿易主義 解體와 國民主義의 强化(上)(下) || 朝鮮日報 || || 193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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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2|| 농민전쟁으로서의 홍경래란 || 조선력사연구론문집 || || 194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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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界經濟의 回顧展望] 인풀레의 內面에 發展하는 諸矛盾 || 東亞日報 || || 19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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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3|| [[이조말기의 화폐유통과 화폐정리|李朝末期의 貨幣流通과 日帝의 强奪的 貨幣整理]] || 歷史諸問題 || 2 || 194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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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資本의 放浪과 金本位制의 危機(一)∼(八) || 東亞日報 || || 1935.7.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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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4|| 朝鮮民族解放鬪爭史 제3장 제1절 및 제2절 || 金日成綜合大學 || || 194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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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界經濟戰 || 新東亞 || 5(8) || 19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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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5||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제도의 발생 과정<br/>-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상)(하) || 력사과학 || 1955(8)(9) ||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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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蘇聯을 風靡하는 스타하-노프 運動()() || 東亞日報 || || 1936.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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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6|| 삼국시대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 력사과학 || 1956(5)(6) ||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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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歷史學 硏究의 前進을 爲하여 || 朝鮮日報 || || 1937.1.3.新年號其十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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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7|| 조선원시사회 붕괴의 특수성과 봉건적 우크라드의 발생과정<br/>(『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 || 과학원출판사 || ||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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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 || 普專學會論集 || 3 || 193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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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8|| 1920∼1930년대의 조선 사회 경제 형편과 계급 관계 || 조선로동당 || ||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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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界景氣의 動向(一)∼(四) || 東亞日報 || || 1938.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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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9|| 토지 문제에 대한 정 다산의 사상 || 경제연구 || 1961(4) ||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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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전쟁으로서의 홍경래란 || 조선력사연구론문집 || || 194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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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0|| 정 다산의 경제 사상 || 과학원출판사 || || 196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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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朝末期의 貨幣流通과 日帝의 强奪的 貨幣整理 || 歷史諸問題 || 2 || 1948.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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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1|| 土地問題に関する丁茶山の思想<br/>(『朝鮮の偉大な思想家-丁若鏞 : 茶山丁若鏞生誕二百周年を記念して』) || 朝鮮大學校 || || 196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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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民族解放鬪爭史 제3장 제1절 및 제2절 || 金日成綜合大學 || || 194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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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2|| 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사상(『다산 정약용 탄생 200주년 기념 논문집』) || 과학원 철학연구소 || ||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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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제도의 발생 과정-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상)(하) || 력사과학 || 1955(8)(9) ||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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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3|| 우리 나라 계몽 사상의 발생에 관한 몇 가지 문제 || 경제연구 || 1963(2) ||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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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상)(하) || 력사과학 || 1956(5)(6) ||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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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4|| 정다산의 《경세유표》 || 경제지식 || 1963(1) ||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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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원시사회 붕괴의 특수성과 봉건적 우크라드의 발생과정(『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 || 과학원출판사 || ||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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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5|| [[《경세유표(1)》에 대하여]] || 력사과학 || 4 ||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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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1930년대의 조선 사회 경제 형편과 계급 관계 || 조선로동당 || ||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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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6|| 조선 경제 사상사(상)(김광순, 변락주와 공저) || 과학원출판사 || || 196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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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 문제에 대한 정 다산의 사상 || 경제연구 || 1961(4) ||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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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7|| 学究四〇年の道 || 今日の朝鮮 || || 196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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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다산의 경제 사상 || 과학원출판사 || || 1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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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8|| 「韓日会談」が南朝鮮經濟におよぼす結果 || 世界政治資料 ||223  || 196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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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土地問題に関する丁茶山の思想(『朝鮮の偉大な思想家-丁若鏞 : 茶山丁若鏞生誕二百周年を記念して』) || 朝鮮大學校 || || 196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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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39||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예속화 정책과 통치의 특성 || 근로자 || 1966(6) ||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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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사상(『다산 정약용 탄생 200주년 기념 논문집』) || 과학원 철학연구소 || ||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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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40|| 남조선에 대한 침략을 은페하는 미제의 신식민주의정책 || 근로자 || 1967(6)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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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계몽 사상의 발생에 관한 몇 가지 문제 || 경제연구 || 1963(2) ||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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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41||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정영술, 손전후와 공저) || 사회과학출판사 ||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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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다산의 《경세유표》 || 경제지식 || 1963(1) ||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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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세유표(1)》에 대하여 || 력사과학 || 4 ||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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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001 || 冬期學術大講演會<br/><small>(李昌輝, 金洸鎭, 金賢準, 李大偉)</small> || 1930.1213.<br/>(19:00) || 경성(京城)<br/>〔天道敎記念館〕 || 朝鮮學生科學硏究會<br/>(東亞日報學藝部) || 会費<br/>普通15銭 學生10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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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경제 사상사()(김광순, 변락주와 공저) || 과학원출판사 || || 19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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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002 || 夏期特別大講演會<br/><small>●朝鮮 말과 글의 合理化(經濟學博士 李克魯)<br/>●婚, 喪, 祭란 무엇인가(法學士 金炳魯)<br/>●貧困의 經濟學(商學士 金洸鎭)</small> || 1932.0702.<br/>(20:00) || 경성(京城)<br/>〔中央基督敎青年會館〕 || 普成專門學校學生會<br/>(東亞日報學藝部) || 入場料<br/>普通20銭 學生10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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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学究四〇年の道 || 今日の朝鮮 || || 19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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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003 || 經濟問題大講演會<br/><small>●世界金融恐慌에 對하야(普成専門教授 金洸鎭)<br/>●今日의 經濟恐慌과 對策을 打診함(延禧専門教授 盧東奎)</small> || 1933.0318.<br/>(20:00) || 개성(開城)<br/>〔高麗青年會會館大講堂〕 || 高麗青年會<br/>(-) ||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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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日会談」が南朝鮮經濟におよぼす結果 || 世界政治資料 || 223 || 196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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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004 || 初冬學術講演會<br/><small>●朝鮮文學의 古典解釋(金台俊)<br/>●韓末의 貨幣改革을 中心으로(金洸鎭)<br/>●兩海軍條約 改正問題(徐椿)</small> || 1934.1105.<br/>(19:00) || 경성(京城)<br/>〔中央基督敎青年會館〕 || 普成專門學校學生會<br/>(朝鮮中央日報社) || 入場料<br/>20銭 10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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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예속화 정책과 통치의 특성 || 근로자 || 1966(6) ||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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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선에 대한 침략을 은페하는 미제의 신식민주의정책 || 근로자 || 1967(6)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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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007 || 夏期巡廻講座 關北隊<br/><small>●經濟(普專 金洸鎭), ●衛生(世專 尹日善)</small> || 1935.0731.<br/>(15:00) || 함흥(咸興)<br/>〔永新普校講堂〕 || 東亞日報社<br/><small>(民間六大男女專門學校聯合)</small> || 聴講料 40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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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008 || 夏期巡廻講座 關北隊<br/><small>●經濟(普專 金洸鎭), ●衛生(世專 尹日善)</small> || 1935.0802.<br/>(14:00) || 청진(清津)<br/>〔共樂館〕 || 東亞日報社<br/><small>(民間六大男女專門學校聯合)</small> ||聴講料 30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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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정영술, 손전후와 공저) || 사회과학출판사 ||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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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青年會 || || 經濟問題大講演會 || 開城 || 1933.03.18. || 世界金融恐慌에 對하야(普成専門教授 '''金洸鎭''')<br/>今日의 經濟恐慌과 對策을 打診함(延禧専門教授 盧東奎) || 高麗青年會會館大講堂 || 밤8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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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84143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역사학보』 232, 역사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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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5일 (금) 09:55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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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金洸鎭)
KimKwangjin.png
출처 : 동아일보 1935년 1월 2일자 기사
 
한글명 김광진 한자명 金洸鎭 영문명 Kim Kwang-Jin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03년 몰년 1981년 출신지 평양 전공 역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상학사. 역사학자.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나서 민족학교와 관립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본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조수 및 부수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경제학 교원으로 교육 및 연구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북한 정권 건설에 참여하여 김일성종합대학 및 과학원 등에서 근무하였다. 한국사의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조선에도 적용되었다는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으로 옮겨갔다.




생애


민족학교와 관립학교 수학

김광진은 1903년 6월 23일[1] 평양 대동강변에서 땔감 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김광진은 공립보통학교가 아니라 일신학교(日新學校)기관에서 수학하였다.[2] 일신학교에서는 '구한국 시대 교과서'를 사용하고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창가를 가르쳤으며, 김광진의 재학 중에도 학교와 경찰 사이의 충돌이 이어졌으며 결국 그가 졸업하기 직전 학교는 문을 닫았다.[3]
1917년 김광진은 평양고등보통학교기관에 입학하였다. 홍종인(洪鍾仁)인물노동규(盧東奎)인물가 동기생이었으며, 함석헌(咸錫憲)인물이 1년 선배였다. 이후 1919년 김광진은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울에서 온 학생과 연락을 취하면서 비밀리에 봉기를 준비했다. 우리는 며칠 밤 철야로 수천 장의 국기를 만들고 호신용 단도를 갖춘 채 드디어 3월 1일을 맞이사건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60 가까웠던 아버지도 연행되었다".[4]


일본 유학

1922년 4월 1일 김광진은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 예과에 입학한다. 이듬해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나자 김광진은 직접적인 피해를 겪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였고 강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조선인 혐오 발언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쿄상과대학에는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오쓰카 긴노스케(大塚金之助) 등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김광진 스스로의 회고에 따르면, 항의사건 이후 "학교 강의에 흥미를 잃고 혼자서 맑스·레닌주의 공부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비합법 독서회에도 참가하고 또한 비합법인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이나 발행 금지 서적의 배포 등에도 관계했다".[5] 1925년 3월 김광진은 예과를 졸업한다. 백남운(白南雲)은 김광진의 도쿄상과대학 3년 선배였으며, 본과 동기는 강석천(姜錫天), 김선형(金善炯), 윤원상(尹元上), 윤인상(尹仁上), 이완조(李玩朝) 등이었다. 윤인상의 회고에 따르면, 김광진은 "미남"이었고 화술에 능했"으며 스스럼없이 주변 농가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며, 평양 출신 도쿄 유학생 모임인 기성학생회(箕城學生會)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6] 본과 3학년 시절 김광진은 윤인상, 김선형 등과 시오바라(鹽原)와 닛코(日光)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1928년 3월 김광진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여 상학사(商學士) 학위를 받는다.[7]


KimKJ Nikko.png
닛코(日光) 여행(오른쪽부터 김광진, 김선형, 윤인상)
출처 : 尹仁上, 『90을 바라보며』, 光林社, 1991.〕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지식인

1928년 11월 김광진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법문학부(法文學部) 부수(副手)로 임명되었고 1929년도에는 같은 곳의 조수(助手)로 근무하였다.[8] 김광진은 경성제대 조선경제연구소(朝鮮經濟硏究所)『조선경제의_연구-경성제국대학_법문학회_제1부논집_제2책(朝鮮經濟の硏究-京城帝大學法文學會第一部論集第二冊-)』을 간행할 당시 사무를 담당하였다. 경성제대 경제학 교원이었던 시카다 히로시(四方博)는 후일 "조수나 부수는 경제관계는 거의 조선인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교육 받은 이들과 그 당시 말로 '내지(內地)'의 대학을 나와 갈 곳이 없어 돌아온 이들이 꽤 와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9] 김광진은 경성제대 조수 근무를 계기로 성대 그룹 [10] 특히 그 중에서도 유진오(兪鎭午)와 교유하였다. 이후 1931년 9월 김광진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생들이 설립한 조선사회사정연구소(朝鮮社會事情硏究所)에 참여한 경성제대 졸업생이 아닌 유일한 인물이었다. 유진오는 "김광진 군은 동경상대 출신이었지만 나이와 생활태도나 사상 경향이 우리들과 비슷해서 죽이 잘 맞았다"[11] 1934년 미야케(三宅) 교수 적화운동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으로 김광진도 증인으로 조사를 받는다.

1929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던 김광진은 김성수(金性洙)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후인 1932년 4월 전임강사로 부임한다. 유진오는 "인촌(仁村)은 세 사람의 신진(新進)을 이끌고 등장하였는데, 세 사람이란 오천석(吳天錫), 김광진 양 씨와 나였다"라고 회고하였다.[12] 김광진은 처음에는 상업학을 강의하였으며, 1936년 이후에는 상업학과 경제사를 담당하였다. 당시 신문에서는 김광진을 "호신사(好紳士)"로 소개하면서, "밤이 새도록 공부를 계속(繼續)하는" '독학자(篤學者)'인 동시에 "학생들이 씨(氏)를 방문하면 씨는 과제를 권하고 권하고 차를 권하고 선생이 학담(學談)에 취하면 술까지 권하는 때가 있"을 정도로 학생들과 관계도 좋았다고 기록하였다.[13] 1934년 3월 보성전문학교는 『보성전문학교연구연보_보전학회논집(普成專門學校硏究年報_普專學會論集)』를 창간하는 데, 실제 편집은 김광진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14] 당시 언론에서는 "이러한 '순전한 연구논문집의 발행은 조선에서 처음이니만큼' 조선문화사상에 찬연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소개하였으며, 후일 유진오는 "일본 모 사대(私大) 신문에서는 『보전논집』의 내용을 소개하고 나서, 이제 경성에서는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한 '관학파(官學派)'에 대항하여 '사학파(私學派)'가 대두되었다고 논평하였다."[15]

1934년 김광진은 극예술연구회의 앵화원(櫻花園) 공연을 보러 갔다가 노천명(盧天命)을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1939년 2월 『문장(文章)』 창간호에 유진오는 소설 「이혼(離婚)」을 싣는데, 이 소설은 노천명과 김광진의 연애를 다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다.[16] 1939년 김광진은 보성전문학교를 사직하고 평양으로 귀향하여 1940년 1월 평안상사주식회사(平安商社株式會社) 전무이사(專務取締役)로 취임하며 같은 해 10월 조선제정공업주식회사(朝鮮製釘工業株式會社) 감사로 취임하여 사업가로 전신한다. 평양에서 김광진은 왕수복(王壽福)을 만나며, 해방 이후 이들은 부부로 지낸다.


북한의 학자

1945년 8월 17일 김광진은 조만식(曺晩植)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지부 결성에 참가하여 무임소위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건준 평남지부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는데, 김광진은 민족주의 계열의 한 사람으로 합류하여 상공위원장을 맡는다. 다만, 김광진은 당시 이미 조선공산당원이었다.[17] 1946년 1월 중순 김광진은 인재 유치의 임무를 가지고 1946년 1월 중순에 서울로 내려와 백남운을 만나 지식인의 월북문제를 깊숙이 논의하였다.[18]

1946년 8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명이 되며, 1947년 1월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부장을 맡았다.[19] 1951년 김광진은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5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5년 동안 대학 사업을 위하여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기 훈장과 공로 메달'을 수여받는다.[20] 1947년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는 이는 "경제사를 전공한 김광진 교수의 마르크스 강론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라고 회고하였다.[21]
1952년 과학원이 개원하면서 김광진은 후보원사로 임명되어 과학원 연구사를 겸임하게 된다.[22] 이후 김광진은 고대사에서 식민지 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분야를 다룬 논문과 단행본을 다수 발표하였다. 특히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중반 노예제 유무 및 삼국시대 사회성격을 둘러싸고 김광진, 김석형 등의 봉건제론과 도유호, 임건상, 백남운 등의 노예제론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후 김광진은 정약용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실학 연구로 옮겨갔다. 1964년 과학원이 사회과학원으로 개편될 때 김광진은 원사로 승격하였고 사회과학원 산하 경제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964년 9월에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교원 오쓰카 긴노스케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광진은 그와 재회한다. 김광진은 "도쿄 유학 시절에 배운 적 있는 오쓰카 긴노스케 교수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나는 40년 만에 교수를 뵐 수 있었다. 교수는 나의 자그마한 성과를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며 조선의 과학의 눈부신 발전 모습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셨다."라고 회고하였다.[23]

김광진은 학자로 활약하는 한 편,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961년 5월 그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1972년 12월 최고인민위원회 제5기 대의원을 역임하였다. 1965년 5월 10일 김광진과 왕수복 부부는 판문점을 방문하였다. 당시 한국의 신문은 김광진이 "최호진(崔虎鎭) 교수는 내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며 유진오 박사와 이인기(李寅基) 교수와는 친한 사이이니 안부를 전해 달라"라고 하였으며, "유진오와 홍종인 씨 등이 자기 친구라고 자랑"했다고 보도하였다.[24] 1973년 7월 김광진은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1년 9월 10일 타계하였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후 2003년 왕수복이 합장되었다.


KimWang19650510.jpg
판문점을 방문한 김광진과 왕수복
출처 : 동아일보』1965년 5월 10일자 기사.〕





연구


식민지 시기의 경제평론

식민지 시기 김광진이 발표한 글 중 경제사 관련 글은 4편이고 나머지는 총독부의 경제 정책 및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일본 및 세계 경제 동향 분석, 소련 경제 정책의 소개, 인플레이션 및 금본위제 문제, 전쟁과 경제 등에 관한 글이었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학술지가 아닌 신문과 잡지에 실렸으며 내용도 시사평론에 가까웠다. 이른바 학술 논문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것은 경제사 관련 글이었다. 도쿄상과대학에서 배웠을 실물 경제에 관한 지식은 학문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채, 독학으로 익힌 맑스주의 경제사 연구에서 학문적 성과를 남긴 셈이다.


노예제 결여론

김광진은 백남운인물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改造社, 1933)에 대하여 "본서(本書)는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조선사회의 발전법칙을 과학적으로 규정한 점에 있어서 종래의 조선사에 일대청산을 필(畢)한 것이라고 볼 수 잇다"고 평가하면서도, "이 시대의 노예계급(奴隸階級)이 중요한 직접생산계급이엿엇음에는 틀림없으나 (중략) 경제기구의 특징을 간단히 '노예국가'로써 단정하여 버림이 반다시 정당한 견해일가를 나는 다소 의심하는 바"라고 비판하였다.[25] 이후 김광진은 자신의 첫 고대사 논문인 「고구려 사회의 생산양식 -국가의 생산과정을 중심으로서(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普專學會論集』 3, 1937.2)에서 "하호는 대체로 피정복=씨족공동체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下戸」를 백남운 씨는 「奴隷」로 규정하여 노예제도가 성대했음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앞서 나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노예의 존재를 가지고 바로 「노예소유자적 구성」 운운하는 것은 조급하다"라고 비판하면서 "제3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고구려는 씨족사회를 아직 벗어나지 않았"고 "호태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내노예제보다도 수취관계로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봉납제(貢納制)"라고 주장하였다.[26]


북한의 삼국시대 사회성격논쟁

1955년 김광진은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제도의 발생 과정-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력사과학』 1955-8/1955-9)를 통해 조선은 원시공산제에서 봉건제로 직접 이행했다는 노예제 결여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도유호는 「조선력사상에는 과연 노예제 시대는 없었는가」(『력사과학』 1956-3)에서 조선에도 노예제가 존재했다고 비판하였고, 다시 김광진은 「삼국시대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력사과학』 1956-5/1956-6)로 재비판하였다. 과학원 력사연구소는 1956년 10월 토론회를 개최하여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집』(1957.6)을 간행하였다. 노예제의 존재 유무를 둘러싸고 시작된 논쟁은 삼국 시대의 사회 성격을 묻는 논쟁으로 전화되면서 김광진, 김석형의 봉건제론과 도유호, 임건상, 백남운의 노예제론이 대립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팽팽한 논쟁을 이어가던 쌍방의 논자들은 1960년에 들어 서면서 고조선을 '노예 소유자 사회(고대 동방형의)'로 규정하는 데 합의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삼국 시대는 봉건제로 규정되며 이는 노예제를 고조선, 부여, 진국 시대에 설정함으로써 가능해진 셈이다. 1962년에 나온 『조선통사 상』 개정판은 이러한 내용을 담았다. 1960∼62년에 걸쳐 스무 차례에 달하는 학술토론회가 개최된 뒤, 1963년에 『고조선에 관한 토론 론문집』과 더불어 리지린『고조선 연구』가 출간되었다. 삼국 시대만 놓고 보면 김광진의 봉건제설이 채택된 것처럼 보이나, 논쟁의 발단이 ‘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를 놓고 김광진이 노예제 결여를 주장한 데 대해 도유호가 ‘과연 노예제 시대는 없었는가’라고 비판한 데 있었던 것을 떠올린다면, 〈고조선=노예제〉설은 김광진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북한의 역사학은 노예제의 결여라는 조선적 특수성을 강조하기보다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조선에도 관철되었음을 인정하는 방향을 채택한 것이다.


정약용 연구

1930년대 이후 최익한은 정약용에 대한 많은 연구를 발표하면서 정약용 사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였으며, 그는 북한 역사학을 주도하면서 『실학파와 정다산』(1955)을 간행하였다.[27] 김광진이 정약용을 "반봉건적 혁명 사상가"[28] 혹은 "탁월한 경제 사상가이며 애국적인 정치 활동가"[29]로 인정한 것 역시 최익한의 정약용 평가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 김광진은 내재적 발전의 사상적 자원으로서 실학에 주목하였지만, 자본주의 맹아론과는 거리를 유지하는 입장이었다. 김광진은 "해당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맹아의 발생은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감촉되지 못 하리 만큼 극히 미약"했다고 하면서, "어떠한 나라의 사상 발전과 그 나라의 경제적 발전과의 사이에는 일견 모순되게 보이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는바 이러한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오직 경제적 유물론자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약한 자본주의적 요소에서 계몽 사상이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30] 하지만 1973년 김광진이 정영술, 손전후와 함께 간행한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에서는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맹아론을 받아들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의 머리말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민족허무주의와 민족배타주의를 철저히 극복하고 종래 제국주의자들과 일제어용학자들이 부르죠아적독단론에 기초하여 떠벌이던 《아세아적정체론》, 《후진국개발론》과 《자본주의이식론》, 《식민지통치유익설》 등을 견결히 반대배격"한다고 그 입장을 표명하였고,[31] 19세기 조선 사회가 ‘공장제 수공업’ 즉 매뉴팩쳐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사 연구

식민지기 아시아적 정체성론에 입각하여 조선적 특수성을 주장하던 김광진은 해방 이후에도 조선사에서의 노예제 결여를 주장하고, 실학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본주의 맹아론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북한 역사학계에서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이 굳게 뿌리를 내리게 됨에 따라 점차 자신의 설을 철회 혹은 수정해 가는 모습이 확인된다. 1945년 이후 동아시아에 국경을 넘어 존재했던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지=아시아〉의 주체성을 옹호하고자 한 일련의 역사학적 실천에 보조를 맞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논저 목록

연번 논문명 학술지&출판사 권호 간행연월일
A001 朝鮮取引所政策を中心として 大學と社会 - 1931.08.
A002 인플레이션 정책의 경과와 전망 東方評論 1(3) 1932.07.
A003 (死線에 선 農村과 그 對策) 朝鮮農村의 病源診斷 東光 36 1932.08.
A004 폴록크著 森谷克己譯 「쏘베-트聯邦計劃經濟史論」 新興 7 1932.12.14.
A005 世界를 震撼하는 金融恐慌의 樣相 : 그 原因과 밋 發展을 論述함(一)∼(三) 朝鮮日報 1933.4.26-28(조)12
A006 資本主義經濟의 再建運動, 國際經濟會議豫診(一)∼(四) 朝鮮日報 1933.6.9, 10, 11, 13(조)1
A007 新刊評 白南雲敎授의 新著 『朝鮮社會經濟史』 東亞日報 1933.09.21.
A008 인플레 進展과 朝鮮經濟界(上)(中)(下) 東亞日報 1934.01.01.-01.03
A009 戰爭經濟와 非常生活, 豫想되는 將來戰爭 그 影響을 中心으로(一)(二) 朝鮮日報 1934.1.1新年號其二(3)
2新年號其十一(2).
A010 (朝鮮米穀問題는 어디로?)
小作料輕減하고 水利組合은 國營-農民의 모든 負擔을 輕減하라-
東亞日報 1934.02.13.
A011 李朝末期における朝鮮の貨幣問題 普專學會論集 1934.03.16.
A012 科學의 黨派性=歷史性 靑年朝鮮 1934.01.
A013 膨脹日本經濟의 正體(一)∼(十) 朝鮮日報 1934.10.04.-7·9∼14(조)1
A014 뿔럭經濟의 動向, 自由貿易主義 解體와 國民主義의 强化(上)(下) 朝鮮日報 1935.01.01, 01.02.
A015 (世界經濟의 回顧展望) 인풀레의 內面에 發展하는 諸矛盾 東亞日報 1935.01.02.
A016 資本의 放浪과 金本位制의 危機(一)∼(八) 東亞日報 1935.07.10-07.21.
A017 世界經濟戰 新東亞 5(8) 1935.08.
A018 蘇聯을 風靡하는 스타하-노프 運動(一)∼(四) 東亞日報 1936.02.11-02.15.
A019 朝鮮歷史學 硏究의 前進을 爲하여 朝鮮日報 1937.01.03.新年號其十五(1)
A020 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 普專學會論集 3 1937.02.28.
A021 世界景氣의 動向(一)∼(四) 東亞日報 1938.01.01-01.07.
A022 농민전쟁으로서의 홍경래란 조선력사연구론문집 1947.11.25
A023 李朝末期의 貨幣流通과 日帝의 强奪的 貨幣整理 歷史諸問題 2 1948.08.30.
A024 朝鮮民族解放鬪爭史 제3장 제1절 및 제2절 金日成綜合大學 1949.11.07.
A025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제도의 발생 과정
-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상)(하)
력사과학 1955(8)(9) 1955
A026 삼국시대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상)(하) 력사과학 1956(5)(6) 1956
A027 조선원시사회 붕괴의 특수성과 봉건적 우크라드의 발생과정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
과학원출판사 1958
A028 1920∼1930년대의 조선 사회 경제 형편과 계급 관계 조선로동당 1961
A029 토지 문제에 대한 정 다산의 사상 경제연구 1961(4) 1961
A030 정 다산의 경제 사상 과학원출판사 1962.08.
A031 土地問題に関する丁茶山の思想
(『朝鮮の偉大な思想家-丁若鏞 : 茶山丁若鏞生誕二百周年を記念して』)
朝鮮大學校 1962.08.10.
A032 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사상(『다산 정약용 탄생 200주년 기념 논문집』) 과학원 철학연구소 1962
A033 우리 나라 계몽 사상의 발생에 관한 몇 가지 문제 경제연구 1963(2) 1963
A034 정다산의 《경세유표》 경제지식 1963(1) 1963
A035 《경세유표(1)》에 대하여 력사과학 4 1963
A036 조선 경제 사상사(상)(김광순, 변락주와 공저) 과학원출판사 1963.06.
A037 学究四〇年の道 今日の朝鮮 1965.03.
A038 「韓日会談」が南朝鮮經濟におよぼす結果 世界政治資料 223 1965.09.10.
A039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예속화 정책과 통치의 특성 근로자 1966(6) 1966
A040 남조선에 대한 침략을 은페하는 미제의 신식민주의정책 근로자 1967(6) 1967
A041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정영술, 손전후와 공저) 사회과학출판사 1973



강연회 목록

연번 강연명(연자 및 연제) 개최일(시간) 개최지역〔강연장〕 주최(후원) 회비
L001 冬期學術大講演會
(李昌輝, 金洸鎭, 金賢準, 李大偉)
1930.1213.
(19:00)
경성(京城)
〔天道敎記念館〕
朝鮮學生科學硏究會
(東亞日報學藝部)
会費
普通15銭 學生10銭
L002 夏期特別大講演會
●朝鮮 말과 글의 合理化(經濟學博士 李克魯)
●婚, 喪, 祭란 무엇인가(法學士 金炳魯)
●貧困의 經濟學(商學士 金洸鎭)
1932.0702.
(20:00)
경성(京城)
〔中央基督敎青年會館〕
普成專門學校學生會
(東亞日報學藝部)
入場料
普通20銭 學生10銭
L003 經濟問題大講演會
●世界金融恐慌에 對하야(普成専門教授 金洸鎭)
●今日의 經濟恐慌과 對策을 打診함(延禧専門教授 盧東奎)
1933.0318.
(20:00)
개성(開城)
〔高麗青年會會館大講堂〕
高麗青年會
(-)

L004 初冬學術講演會
●朝鮮文學의 古典解釋(金台俊)
●韓末의 貨幣改革을 中心으로(金洸鎭)
●兩海軍條約 改正問題(徐椿)
1934.1105.
(19:00)
경성(京城)
〔中央基督敎青年會館〕
普成專門學校學生會
(朝鮮中央日報社)
入場料
20銭 10銭
L005 第一回 夏期大學
●世界經濟戰(普專敎授 金洸鎭)
1935.0622.
16:00-17:30
경성(京城)
〔東亞日報社 3층홀〕
新東亞社
(-)
聴講料
六日間通用券 30銭
L006 夏期巡廻講座 關北隊
●經濟生活의 歷史的 發展(普專 金洸鎭)
●最近醫學의 進步(世專 尹日善)
1935.0730.
16:00
원산(元山)
〔光明普校講堂〕
東亞日報社
(民間六大男女專門學校聯合)
聴講料30銭
L007 夏期巡廻講座 關北隊
●經濟(普專 金洸鎭), ●衛生(世專 尹日善)
1935.0731.
(15:00)
함흥(咸興)
〔永新普校講堂〕
東亞日報社
(民間六大男女專門學校聯合)
聴講料 40銭
L008 夏期巡廻講座 關北隊
●經濟(普專 金洸鎭), ●衛生(世專 尹日善)
1935.0802.
(14:00)
청진(清津)
〔共樂館〕
東亞日報社
(民間六大男女專門學校聯合)
聴講料 30銭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광진 Person: 왕수복 A isSpouseOf B
Person: 김광진 Person: 오쓰카 긴노스케 A hasMaster B
Person: 김광진 Institution: 평양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광진 Institution: 일신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광진 Institution: 김일성대학 A worksAt B
Person: 김광진 group: 조선경제학회 A isMemberOf B
Person: 김광진 group: 기성학생회 A isMemberOf B



Timeline




Map




Data Network






참고자원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역사학보』 232, 역사학회, 2016




주석


  1. 김광진의 출생일과 사망일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위치한 김광진 묘비에 기록된 정보이며, 직접 현지를 조사한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님이 제공한 정보이다.
  2. 장지연(張志淵)의 청원으로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私立學校’로 인허된 곳이다. 「日新認許」『皇城新聞』, 1906.4.25.
  3.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今日の朝鮮』, 外國文出版社, 1965.3(任正赫,『現代朝鮮の科學者たち』, 彩流社, 1997, 수록), 169-170쪽.
  4.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1쪽.
  5.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3-174쪽.
  6. 尹仁上,『90을 바라보며』, 光林社, 1991, 69~103·406~417쪽.「東京箕城學友 卒業生送別式, 임원도 새로히 선거」,『東亞日報』, 1926.2.7(5).
  7. 『東京商科大學一覧(昭和三年度)』, 1928.10.
  8. 「昭和三年十月二日 金洸鎭 法文學部副手ヲ命ス(大學)」,『京城帝國大學學報』 20, 1928.11.5.
  9. 「京城帝大の社会経済史研究」, 旗田巍 編,『シンポジウム 日本と朝鮮』, 勁草書房, 1969, 51쪽.
  10. '성대 그룹'은 식민지기와 해방정국에 걸쳐 활약한 경성제국대학 출신 사회주의 지식인·운동가들이다.
  11. 兪鎭午,『나의 人生觀, 젊음이 깃 칠 때』, 徽文出版社, 1978, 111쪽.
  12. 兪鎭午,『養虎記 - 普專·高大, 三十年의 回顧-』, 高麗大學校出版部, 1977, 5쪽.
  13. G記者,「敎授·講師打令 普成專門篇(七) 商科敎授 金洸鎭氏」,『朝鮮日報』, 1933.5.11 석(2).
  14.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역사학보』 232, 역사학회, 2016, 297쪽.
  15. 「硏究의 一端을 學界에 提供, 普專學會論文集發刊」,『每日申報』, 1934.3.8. 兪鎭午,「片片夜話㊵ 金性洙 校長의 의욕」,『東亞日報』, 1974.4.17(5).
  16. 朴鳳宇,「孤獨과 生活환 女流詩人 盧天命」『女苑』, 1959년 8월; 朴致遠,「盧天命 그 文學과 生涯 - 살을 깎듯 했던 孤獨의「化身」-」『 隨筆文學』, 1978.5. 황금찬,「황금찬의 문단 반세기(20) 유진오 편」, 『문학세계』, 2008.9.
  17. 韓載德『, 金日成을 告発한다―朝鮮労動黨働治下의 北韓回顧録―』, 內外文化社, 1965, 52쪽.
  18.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박병엽 증언록2,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247쪽.
  19. 「敎職員任命에 關한 件 申請」(北朝鮮金日成大學總長 金枓奉→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敎育局長, 1947.1, SA2006 12/35, RG242, Captured Korean Documents, NARA). 이 자료에는 1947년 1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철도공학부, 이학부, 농학부, 법학부, 문학부, 공학부 등 7개 학부 전체 교원 235명의 이름, 소속, 임명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김광진의 임명일이 가장 빠르다. 법학부는 이듬해 경제법학부로 변경되었다가 1949년 경제학부와 법학부로 분리된다.『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김일성 종합 대학, 1956.9, 30·42∼44쪽.
  20. 『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87쪽.
  21.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설립 캠페인‘분단50년’이젠 통일로」『한겨레신문』, 1996.1.20(2).
  22. 『김일성 종합 대학 10년사』, 103쪽.
  23. 金洸鎭,「學究四〇年の道」, 175쪽. 히토쓰바시대학 도서관의 '大塚金之助 關係資料' 컬렉션에는 당시 평양에서 김광진과 찍은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24. 「李蘭影 씨가 作故했다니, 板門店에 나타난 北傀 女歌手」, 『東亞日報』, 1965.5.11. 「板門店에 나타난 王壽福」, 『朝鮮日報』, 1965.5.11.
  25. 金洸鎭,「新刊評 白南雲敎授의 新著 『朝鮮社會經濟史』」, 『東亞日報』, 1933.9.21.
  26. 金洸鎭,「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 『普專學會論集』 3, 1937.2, 8·34쪽.
  27. 정종현, 「‘茶山’의 초상과 남·북한의 ‘實學’ 전유 -1950년대 최익한과 홍이섭의 정약용 연구를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42, 2015.4, 참조.
  28. 김광진, 「토지 문제에 대한 정 다산의 사상」, 『경제연구』 1961-4, 1961, 41쪽.
  29. 김광진, 『정 다산의 경제 사상』, 과학원출판사, 1962.8, 291쪽.
  30. 김광진, 「토지 문제에 대한 정 다산의 사상」, 45·32쪽.
  31. 김광진·정영술·손전후,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 사회과학출판사, 1973, 머리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