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18주석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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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민족의 웅계신앙과 그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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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支那民族의 雄鷄信仰과 그傳說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손진태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5년09월
시작쪽 076쪽 종료쪽 092쪽 전체쪽 017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민속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주석1▶손진태의 「지나민족의 웅계신앙과 그 전설」은 『진단학보』 3권(1935.9.)에 실린 글이다.[해제 1]




목차







본문


본문1: 웅계에 관한 신앙


한(漢) 응소(應劭)인물의 「풍속통의(風俗通義)서적」(한위서총서본(漢魏叢書本)) 제8 웅계조에
쪽수▶P76-1 漢 應劭의 「風俗通義」(漢魏叢書本) 卷八 雄雞條에
俗說, 雞鳴將旦, 爲人起居, 門亦昏閉談開, 扞難守固, 禮貴報功, 故門戶用雞也, 青史子書說, 雞者東方之牲也, 歲終更始, 辨秩東作, 萬物觸戶而出, 故以雞祀祭也, 太史氶鄧平說, 臘者所以迎刑送德也, 大寒至, 常恐陰勝, 故以成日臘, 戍者溫氣也, 用其氣日, 殺雞以謝刑德, 雄著 門, 雌著戶, 以和陰陽, 調寒配水, 節風雨也, 蓮按, 春秋左氏傳, 周大夫賓孟適郊, 見雄雞、自斷其尾, 歸以告景王曰, 惲其爲犧也, 山海經日, 祠鬼神, 皆以雄雞, 魯郊祀, 常以丹雞祀日, 以其朝聲赤羽, 去魯候之咎, 今人卒得鬼剌排, 悟殺雄雞以傳其心上, 病賊風者, 作雞散東門, 雞頭可以治蠱, 由此言之, 雞主以禦死壁惡也
쪽수▶P76-2 俗說, 雞鳴將旦, 爲人起居, 門亦昏閉談開, 扞難守固, 禮貴報功, 故門戶用雞也, 青史子書說, 雞者東方之牲也, 歲終更始, 辨秩東作, 萬物觸戶而出, 故以雞祀祭也, 太史氶鄧平說, 臘者所以迎刑送德也, 大寒至, 常恐陰勝, 故以成日臘, 戍者溫氣也, 用其氣日, 殺雞以謝刑德, 雄著 門, 雌著戶, 以和陰陽, 調寒配水, 節風雨也,▶P77 蓮按, 春秋左氏傳, 周大夫賓孟適郊, 見雄雞、自斷其尾, 歸以告景王曰, 惲其爲犧也, 山海經日, 祠鬼神, 皆以雄雞, 魯郊祀, 常以丹雞祀日, 以其朝聲赤羽, 去魯候之咎, 今人卒得鬼剌排, 悟殺雄雞以傳其心上, 病賊風者, 作雞散東門, 雞頭可以治蠱, 由此言之, 雞主以禦死壁惡也
라 하야 한대(漢代) 민간에서 엽일(臘日)에 웅계를 죽이어 문호의 제(祭)에 저용(著用)한 습속에 취(就)하야 그것을 설명하는 당시의 속설과 청사자설(靑史子說), 등평설(鄧平說) 등 소개한 후 응소 자신의 설을 끝으로 기록하였다. 그 소위 속설에 의하면 닭(계명장단(鷄鳴將旦) 이러한 것을 보면 웅계을 가러침이다)과 문호는 인간생활에 대하야 서로 유사한 성질의 공헌을 하는 것이므로 문호의 제사에 닭을 쓴다는 것이다. 청사자(靑史子)인물의 설은 명백히 오행설(五行說)이니 원단(元旦)으로부터는 봄이 시작되고 봄은 농작물 산출 최시(最始) 준비기이므로 이것은 마치 만물의 촉출(觸出)하는 문호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었다. 그런대 춘(春)은 오행설로 보면 동방에 속하는 계절이오 (예하면 동(東)을 동춘(東春), 춘풍을 동풍(東風), 춘작(春作)을 동작(東作)이라고도 한다) 닭도 동방의 생(牲)이므로 문호의 제에 닭을 쓴다는 것이다. 이 설을 쫓는다면 문제용계(門祭用雞)의 습속은 오행설이 생긴 이후의 것이라고 보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 등평설은 음양설적(陰陽說的) 해석이오 그 논지는 명확을 결(缺)하였으나 엽일에 닭을 쓰는것은 사형덕(謝刑德) 화음양(和陰陽) 조한배수(調寒配水) 절풍우(節風雨) 등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따른다면 문제용계는 음양설이 상당히 발달된 이후의 이론상 산물이리라고 볼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기종(斯種)의 민간신앙의 기원을 그러한 철학 상에 구할 수는 없다. 끝으로 보이는 응력(應力)의 설을 보면 그는 당시 민간에 있던 삼종(三種)의 주술적(咒術的) 행위용어 를 예거하야 전(前) 삼설(三說)에 반대하고 문금용계는 요컨대 어사벽악(禦死辟惡)의 주술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쪽수▶P76-3 라 하야 漢代民間에서 臘日에 雄雞를 죽이어 門戶의 祭에 著用한 習俗에 就하야 그것을 說明하는 當時의 俗說과 靑史 子說 鄧平說 等 紹介한 後 應劭 自身의 說을 끝으로 紀錄하였다. 그 所謂 俗說에 依하면 닭(鷄鳴將旦 이러한 것을 보면 雄雞을 가러침이다)과 門戶는 人間生活에 對하야 서로 類似한 性質의 功獻을 하는 것이므로 門戶의 祭祀에 닭을 쓴다는 것이다.靑史子의 說은 明白히 五行說이니 元旦으로부터는 봄이 시작되고 봄은 農作物 產出 最始 準備期이므로 이것은 마치 萬物의 觸出하는 門戶와 類似한 性質을 가지었다. 그런대 春은 五行說로 보면 東方에 屬하는 季節이오 (例하면 東을 東春, 春風을 東風 春作을 東作이라고도 한다) 닭도 東方의 牲이므로 門戶의 祭에 닭을 쓴다는 것이다. 이 說을 쫓는다면 門祭用雞의 習俗은 五行說이 생긴 以後의 것이라고 보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 鄧平說은 陰陽說的 解釋이오 그 論지는 明確을 缺하였으나 臘日에 닭을 쓰는것은 謝刑德 和陰陽 調寒配水 節風雨 等의 意味를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따른다면 門祭用雞는 陰陽說이 相當히 發達된 以後의 理論上 産物이리라고 볼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斯種의 民間信仰의 起源을 그러한 哲學上에 求할 수는 없다. 끝으로 보이는 應力의 說을 보면 그는 當時 民間에 있던 三種의 咒術的 行爲을 例舉하야 前三說에 反對하고 門禁用雞는 要컨대 禦死辟惡의 咒術的 行爲에 不過하다고 하였다.
응소의 기록한 한대의 민간주술을 좀 더 자세히 생각하여 보면 귀자비(鬼刺痱)라 함은 귀자(鬼刺)로 하야 생기는 비질(痱疾)이란 의미일 것이오, 비(痱)는 「설문(說文)서적」에 풍병(風病)이라고 하였으며, 당대(唐代)의 의서이라고 추측되는 「영추경(靈樞經)서적」 열병편(熱病篇)에 보면 「痱之爲病也 身無痛者 四肢不收 智亂不甚 其言微知 可治 甚則不能言 不可治也 云々」이라 하야 일봉의 중풍인 듯하나 이시진(李時珍)인물의 「본초강목(本草綱目)서적」 48 계혈(鷄血)의 조는 응소의 문(文)을 「鬼排卒死 用烏雄鷄血 塗心下 即甦風俗通」이라고 해석하야 비(痱)를 비(排)로 짓고 그것은 무슨 졸도하는 병인 듯이 말하였다. 어느 설이 옳은지는 고사(故捨)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한 대인(漢代人)이 비병(痱病)을 귀자 또는 귀비(鬼排)의 소위라고 하야 그 병에 웅계를 사용한 주술행위를 알 수 있으며, 또 적풍(賊風)에 대하야 「영추경」 적풍편(賦風篇)을 보면 「痛痺也」라 하야 역시 일종의 중풍(中風)으로 생각하야 작계산동문(作雞散東門)하는 주술행위를 하였으며, 고(蠱)는 「설문(說文)」에 「腹中蟲也」라 하고 또 梟磔死之鬼 亦爲蠱」라고도 하였다. 그러면 한대에 있어서는 중풍 적품 복중고(腹中蟲) 등 병을 웅계 조계(造谿) 계두(雞頭) 등으로 치료하는 주술적 민간용법이 횡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민간신앙까지가 음양오행설에서부터 출발되었으리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우므로, 문호(門戶)의 책계(磔鷄)는 차라리 응소의 설을 좇아 고(古)의 민간습속이라고 생각할 바이며 청사자나 등평의 설 등은 그러한 민간신앙을 음양오행설서 이론화하였음에 불과하는 것이다. 습속이라고 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우리는 그 증적(證迹)을 발견할 수 있으니, 즉 OOO의 「배씨신언(裴氏新言)서적」(수(隋) 처세남일북당서초(處世南一北堂書鈔) 1155 원정조(元正條) 소인(所引))에
쪽수▶P77-2 應劭의 記錄한 漢代의 民間咒術을 좀 더 仔細히 생각하여 보면 鬼刺痱라 함은 鬼刺로 하야 생기는 痱疾이란 意味일 것▶P78 이오, 痱는 「說文」에 風病이라고 하였으며, 唐代의 醫書이라고 推測되는 「靈樞經」 熱病篇에 보면 痱之爲病也 身無痛者 四肢不收 智亂不甚 其言微知 可治 甚則不能言 不可治也 云々」이라 하야 一種의 中風인 듯하나 李時珍의 「本草綱目」 四八 鷄血의 條는 應劭의 文을 鬼排卒死 用烏雄鷄血 塗心下 即甦風俗通이라고 解釋하야 痱를 排로 짓고 그것은 무슨 卒倒하는 病인드키 말하였다. 어느 說이 옳은지는 故捨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漢代人이 痱 病을 鬼刺 또는 鬼排의 所爲라고 하야 그 病에 雄鷄를 使用한 咒術行爲를 알 수 있으며, 또 賊風에 대하야 「靈樞經」 賦風篇을 보면 「痛痺也」라 하야 亦是 一種의 中風으로 생각하야 作雞散東門하는 咒術行爲를 하였으며, 蠱는 「說文」에 「腹中蟲也」라 하고 또 梟磔死之鬼 亦爲蠱」라고도 하였다. 그러면 漢代에 있어서는 中風 賊風 腹中蟲 等 病을 雄鷄 造谿 雞頭 等으로 治療하는 咒術的 民間療法이 廣行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民間信仰까지가 陰陽五行說에서부터 出發되였으리고는 到底히 想像하기 어려우므로, 門戶의 磔鷄는 차라리 應劭의 說을 쪼차 古 의 民間俗習이라고 생각할 바이며 靑史子나 鄧平의 說 等은 그러한 民間信仰을 陰陽五行說로서 理論化하였음에 不過하는 것이다. 習俗이라고 三國時代의 記錄에서도 우리는 그 證迹을 發見할 수 있으니, 即 OOO의 「裴氏新言」(隋 處世南一北堂書鈔一一五五 元正條所引)에
현대문주1▶元旦, 縣官殺羊, 縣其頭於門, 又磔鷄以副之, 俗說以厭癘氣, 元以間河南代君, 伏君曰, 是月也, 主氣上升, 草木萌動, 齧百草, 鶴啄五穀, 故殺之, 以助生氣[a 1]
쪽수▶P78-2원문주1▶元旦, 縣官殺羊, 縣其頭於門, 又磔鷄以副之, 俗說以厭癘氣, 元以間河南代君, 伏君曰, 是月也, 主氣上升, 草木萌動, 齧百草, 鶴啄五穀, 故殺之, 以助生氣[1]
라고 보이는 것으로 소위 하남복군(河南伏君)의 설은 한대의 음양오행설과 달라 양계(羊鷄)는 생생지기(生生之氣)를 조해(阻害)하므로써 이것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드래도 당시의 학자들이 고래의 민간신앙 논화코저 다방(多方)으로 각자의 견해를 토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명백히 여기(癘氣)를 염주(厭咒)함이라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후한말(後漢末) 위초(魏初)의 동훈(董勛)인물의 「간례속(間禮俗)서적」 (태평어람(太平御覽) 29 소인)에도
쪽수▶P78-3라고 보이는 것으로 所謂 河南伏君의 說은 漢代의 陰陽五行說과 달라 羊鷄는 生生之氣를 阻害하므로써 이것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드래도 當時의 學者들이 古來의 民間信仰 論化코저 多方으로 各自의 見解를 吐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民間에서는 明白히 癘氣를 厭咒함이라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後漢末 魏初의 董勛의▶P79 「間禮俗」 (太平御覽二九所引)에도
魏時人, 問議即董勛云, 今正臘日,門前作煙火桃絞索松栢, 殺鷄著門戶, 逐疫, 禮與, 云云
쪽수▶P79-2魏時人, 問議即董勛云, 今正臘日, 門前作煙火桃絞索松栢, 殺鷄著門戶, 逐疫, 禮與, 云云
이라고 보이어 저계(著鷄)에 관한 동씨의 답은 보이지 아니하나 이렇게 위초의 민간에서도 저계는 축역(逐疫)의 주술이라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계(磔鷄)의 속(俗)이 진대(晋代)에 이르러서는 당사(宮寺)의 문(門)에는 전대(前代)와 같이 계(鷄)를 사용하였던 모양이나 민간에서는 화계(畵雞)를 많이 대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주술의식으로서 그것을 하였다. 예하면 「진서(晋書)」 19에
쪽수▶P79-3이라고 보이어 著鷄에 關한 董氏의 答은 보이지 안이하나 이렇게 魏初의 民間에서도 著鷄는 逐疫의 咒術이라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磔鷄의 俗이 晋代에 이르러서는 宮寺의 門에는 前代와 가치 鷄를 使用하였던 모양이나 民間에서는 畵雞를 많이 代用하게 되었다. 그러나 亦是 咒術意識으로서 그것을 하였다. 例하면 「晋書」 一九에
歲旦, 常設葦茭桃梗磔鷄於宮及百寺之門, 以禳惡氣
쪽수▶P79-4歲旦, 常設葦茭桃梗磔鷄於宮及百寺之門, 以禳惡氣
라 하고, 진(晋) 종률(宗慄)의 「형초세시기(荆楚歲時記)」 정월1일조에
쪽수▶P79-5라 하고, 晋 宗慄의 「荆楚歲時記」 正月一日條에
현대문주2▶帖畫雞戶上, 懸葦索於其上, 插桃符其傍, 百鬼畏之[a 2]
쪽수▶P79-6원문주2▶帖畫雞戶上, 懸葦索於其上, 插桃符其傍, 百鬼畏之[2]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해제 주석


  1. 김태준은 「『진단학보』 제3권을 읽고」(『조선중앙일보』, 1935.11.15~19.)에서 이 글이 천계전설이 조선 고유의 전설이 아니라 이웃나라와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았고, 조선문화의 연구를 위해 세계문화 일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원문 주석


  1. 唐 歐陽詢 「藝文類聚」 卷四 及 宋 李昉의 「太平御覽」 卷二九와 卷九一八 等에도 大同小異의 引文이 보이고 伏君은 藝文類聚에 任君으로 되어 있다.
  2. 「說郛」 所收 「四時贇鏡」에도 同樣의 記事가 보인다.






해독문 주석


  1. 당(唐) 구양수(歐陽詢) 「예문유취(藝文類聚)」 권4 급(及) 송(宋) 이방(李昉)의 「태평어람(太平御覽)」 권29와 권918 등에도 대동소이의 인문(引文)이 보이고 복군(伏君)은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임군(任君)으로 되어 있다.
  2. 「설부(說郛)」 소수(所收) 「사시윤경(四時贇鏡)」에도 동양(同樣)의 기사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