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조혼 및 그 기원에 대한 일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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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조혼 및 그 기원에 대한 일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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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의 早婚과 및 그 起源에 對한 一考察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2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두헌 역자 @ 집필일자 1935년1월6일 게재연월 1935년4월
시작쪽 046쪽 종료쪽 086쪽 전체쪽 041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一


혼인은 특정의 남녀가 애정과 신뢰로써, 영속적으로 결합하려고 하는 내부적 공동 관계이다. 그것은 상호 간에 심적 장벽을 두지 않고, 긴밀히 합일화하려고 하는 정신적 결합의 관계이다. 따라서 양자의 간에는, 의식적으로 불가 분리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번 결합된 부부의 관계는, 본능적인 성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더 나아가 산아를 예기(豫期)하고 동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부부의 결합은 더욱 강하여지고, 가족의 관계가 확보되어 써 사회생활의 기초를 굳게 하는 것이다. 이같이 보건대 혼인은 정신 상으로 또 육체 상으로 성년기에 달한 남녀의 간에 비로소 성립될 바이다. 만약 그 성혼기에 달하지 않은 남녀의 간에 혼인이 생긴다 하면, 그것은 곧 기형적 사회 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쪽수▶P46-1婚姻은 特定의 男女가 愛情과 信賴로써, 永續的으로 結合하려고 하는 內部的 共同關係이다. 그것은 相互 間에 心的 障壁을 두지 않고, 緊密히 合一化 하려고 하는 精神的 結合의 關係이다. 따라서 兩者의 間에는, 意識的으로 不可分離의 關係를 갖는 것이다. 그리하야 한번 結合된 夫婦의 關係는, 本能的인 性的 要求를 充足시키는 同時에, 더 나아가 産兒를 豫期하고 同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매암아 夫婦의 結合은 더욱히 强하여지고, 家族의 關係가 確保되어 써 社會生活의 基礎를 굿개하는 것이다. 이같이 보건대 婚姻은 精神 上으로 또 肉體 上으로 成年期에 達한 男女의 間에 비로소 成立될 바이다. 萬若 그 成婚期에 達하지 않은 男女의 間에 婚姻이 생긴다 하면, 그것은 곧 奇型的 社會現象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형적 혼인형태 즉 조혼의 폐해는, 즉금(即今) 여기에 누누이 논할 바가 아니리라. 다만 그 일단을 말하건대, 우선 당사자의 건강에 위해를 주고 그간에 생산된 자녀의 심신을 열약(劣弱)하게 할 것이며, 또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여 흔히 그 자녀의 양육 보호의 임무를 완전히 이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러한 것은 그 가장 현저한 폐단이라 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허다하게 이 유년 결혼은, 본인의 상호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연히 부조의 의사로 인하여 성립된 것이므로 그들이 성년기에 이르러서는 부합의 결과를 이루어 일생동안 불행한 배우가 되고 마는 경우가 불선(不尠)하다. 과연 이러한 조혼의 유행은, 단지 개인의 신심을 쇠퇴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의 활동 역량을 감소하게 하는 영향이 또한 막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국가에 있어서든지 가혼 연령의 법제가 제정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조혼의 속이 있었음은 누구나 주지의 사실이다. 이조(李朝) 국초의 법전에 벌써 조혼 금지의 법령이 제정되었으니, 경국대전 혼가 조(婚嫁 條)에,

男年十五 女年十四 方許婚嫁. 子女年滿十三歲 許議婚. 若兩家父母中一人 有宿疾. 或年滿五十 而子女年 十二 以上. 告官婚嫁.
○宗室 則其其子女年齒及定婚家主職姑名 告宗薄寺. (補)宗簿寺檢覈啓聞 兩家子女滿十歲 方許議婚. 年六歲 相害 而非特願者 勿許相婚. 加減隱諱後視者家長以爲婚妾冒律論.

이라 하였다. 이래 조선혼인법제가 문공가례와 당률 예제를 기초로 삼아 누차 조혼금제의 논의가 위정당국에 높았으니, 그 중에도 세종 시대에는 전후 수 회에 긍(亘)하야 예조의 의견이 있었다. 이제 그 일단을 보건대 상당히 중요한 국종법제륜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현대문주1▶丁未秋七月壬寅. 禮曹啓 謹案朱文公家禮云. 男子年十六 至三十 女子年十四 至二十. 身及主婚者, 無朞以上喪乃可成婚. 註曰 古者 男三十而娶 女二十而嫁. 今令文 男年十五 女十三以上 並聽婚嫁. 今爲此說 所以 參古今之 道 酌禮令之中. 順天地之理 合人情之宜也. 我國家 慮貧乏之人, 或有過時 不能婚嫁者. 令中外攸司 嚴加訪問, 使不失時 違者罪之. 載在禮典. 然 年限不定, 故大小婚姻之家 無汲汲欲速之意. 而中外攸司 亦無所據 考察陵夷 以致失時. 非唯有乖於陰陽之和. 至有女子或爲人所汚, 風俗不美. 誠爲未便 自今 一依文公家禮. 女子年自十四 至二十歲內 幷皆成婚. 如有故不得已過限者. 具其事由. 京中 則告于漢城府. 外方 則告于其官. 中外攸司更加覈實 如有無故過限者 其應主昏 者註依律論罪. 從之.[a 1]

쪽수▶P46-2이러한 奇型的 婚姻形態 即 早婚의 弊害는, 即今 여기에 累累어 論할 배가 아니리라. 다만 그 一端을 말하건대, 于 先 當事者의 健康에 危害를 주고 그間에 生產된 子女의 心身을 劣弱하게 할 것이며, 또한 經濟的 自由를 얻지 못 하야 흔이는 그 子女의 養育 保護의 任務를 完全히 履行하지 못할 것이니, 이러한 것은 그 가장 顯著한 弊端이라 할 ▶P47-1것이다. 그 뿐 아니라 許多히 이 幼年 結婚은, 本人의 相互 意思에 依한 것이 아니고 全然히 父祖의 意思로 因하야 成立된 것이므로 그들이 成年期에 이르러서는 不合意의 結果를 이루어 一生동안 不幸한 配偶가 되고 마는 境遇가 不尠하다. 果然 이러한 早婚의 流行은, 單只 個人의 身心을 衰頹하게 할뿐 아니라, 社會의 活動力量을 減少하게 하는 影響이 또한 莫大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國家에 있어서든지 可婚年齡의 法制가 制定되어 있는 것이다. 朝鮮에 있어서, 이미 오랜 歷史를 가지고 早婚의 俗이 있었음은 누구나 周知의 事實이다. 李朝 國初의 法典에 벌서 早婚禁止의 法令이 制定되었으니, 經國大典 婚嫁條에,

男年十五 女年十四 方許婚嫁. 子女年滿十三歲 許議婚. 若兩家父母中一人 有宿疾. 或年滿五十 而子女年 十二 以上. 告官婚嫁.
○宗室 則其其子女年齒及定婚家主職姑名 告宗薄寺. (補)宗簿寺檢覈啓聞 兩家子女滿十歲 方許議婚. 年六歲 相害 而非特願者 勿許相婚. 加減隱諱後視者家長以爲婚妾冒律論.

이라 하였다. 爾來 朝鮮婚姻法制가 文公家禮와 唐律禮制를 基礎로삼아 累次 早婚禁制의 論議가 爲政當局에 놉핫스니, 그中에도 世宗 時代에는 前後 數回에 亘하야 禮曹의 意見이 있었다. 이제 그 一端을 보건대. 相當히 重要한 國宗法制綸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원문주1▶丁未秋七月壬寅. 禮曹啓 謹案朱文公家禮云. 男子年十六 至三十 女子年十四 至二十. 身及主婚者, 無朞以上喪乃可成婚. 註曰 古者 男三十而娶 女二十而嫁. 今令文 男年十五 女十三以上 並聽婚嫁. 今爲此說 所以 參古今之 道 酌禮令之中. 順天地之理 合人情之宜也. 我國家 慮貧乏之人, 或有過時 不能婚嫁者. 令中外攸司 嚴加訪問, ▶P48-1使不失時 違者罪之. 載在禮典. 然 年限不定, 故大小婚姻之家 無汲汲欲速之意. 而中外攸司 亦無所據 考察陵夷 以致失時. 非唯有乖於陰陽之和. 至有女子或爲人所汚, 風俗不美. 誠爲未便 自今 一依文公家禮. 女子年自十四 至二十歲內 幷皆成婚. 如有故不得已過限者. 具其事由. 京中 則告于漢城府. 外方 則告于其官. 中外攸司更加覈實 如有無故過限者 其應主昏 者註依律論罪. 從之.[1]

이 외에 조혼금지령이 반포된 것은, 이조사상(李朝史上)을 통하여 한두 번이 아닌 일이었다. 그중에 개국 503년 7월의 의안에는 "男女早婚 函宜嚴禁. 男子二十歲 女子十六歲以後 始許婚事"라 하여 가혼(可婚) 연령을 상당히 높이 하였으며 또 융희 원년 8월 조칙에는 자못 준열히 논한 바 있었다.
쪽수▶P48-2 이 外에 早婚禁止令이 頒布된 것은, 李朝史上을 通하야 한두 번이 아닌 일이었다. 그 中에 開國 503年 7月의 議案에는, 「男女早婚 函宜嚴禁. 男子二十歲 女子十六歲以後 始許婚事.」라 하야 可婚 年齡을 相當히 높이 하였으며 또 隆熙 元年 8月 詔勅에는 자못 峻烈히 論한 바 있었다.

詔曰. 人生三十而有室 二十而嫁. 古昔 三代盛法이어날, 輓近早婚의 弊가 國民의 病源이 莫甚한故로, 年前禁 令이 有하되 近未實施하니 豈非有司之過리요. 今에 維新의 秋를 際하야. 風俗을 改良함이 最良急勢라. 不容 不 參古的今하야 男年滿十七 女滿十五以上으로 始許嫁娶하야 懷遵無違케하라.

이렇듯 역대의 법제 상 조혼금지령은 중요한 것이었으나 의연 조혼의 풍이 존속하였음은 우리의 주지한 바이다. 거기에는 본래 불가피할 사유가 잠복하여 있었던 것이거니와 당초에 이 법제 상 가혼(可婚) 연령을 가지고 논의할 바가 아님은 물론이다. 현대문주2▶본래, 법률 상의 혼인적령(Ehemundigkeit) 이라 힘은, 남녀가 혼인을 할 최적의 연령을 말함이 아니라, 남녀가 혼인할 수 있는 최저 한도의 연령을 말한 것이다.[a 2] 즉 남녀는 이 혼인 적령에 도달해야 비로소 혼인하기를 허인(許認)하는 것이다. 이 연령에 도달한 몇 년 후에 성혼함이 가하다 함은 상관할 바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방면으로 이 혼인 적령을 과도히 제정할 시에는, 오히려 만혼(晩婚)의 풍속을 이루어 사통의 성행이 생기고, 사생아를 증가하게 하여, 사회의 풍속을 퇴폐케 함이 불선(不尠)할 것이다. 이에 적혼 연령은 각국의 기후·풍속·전설·관습 등 제반 사정을 참작하고, 도의상·위생상·국민 경제상의 관점에 입각하여 제정되어야 할 바이다. 따라서 각국의 결혼 연령의 법제는, 다 다른 것이다. 이제 현하(現下) 열국의 적혼 연령을 비교하여 보리라.
쪽수▶P48-3

詔曰. 人生三十而有室 二十而嫁. 古昔 三代盛法이어날, 輓近早婚의 弊가 國民의 病源이 莫甚한故로, 年前禁 令이 有하되 近未實施하니 豈非有司之過리요. 今에 維新의 秋를 際하야. 風俗을 改良함이 最良急勢라. 不容 不 參古的今하야 男年滿十七 女滿十五以上으로 始許嫁娶하야 懷遵無違케하라.

如斯히 歷代의 法制上 早婚禁止令은 重要한 것이었으나 依然 早婚의 風이 存續하엿음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다. 거기에는 本來 不可避할 事由가 潛伏하여 있었던 것이어니와 當初에 이 法制上 可婚年齡을 가지고 論議할 바가 아님은 勿論이다. 원문주2▶本來, 法律上의 婚姻適齡(Ehemundigkeit) 이라 힘은, 男女가 婚姻을 할 最適의 年齡을 말함이 아니라, 男女가 婚姻할 수 있는 最低限度의 年齡을 말한 것이다.[2] 即 男女는 이 婚姻適齡에 達하야 비로소 婚姻하기를 許認하는 것이다. 이 年齡에 達한 幾年 後에 成婚함이 可하다 함은 所關事가 아니다. 그러나 他方으로 이 婚姻▶P49-1適齡을 過度히 制定할 時에는, 오히려 晩婚의 風을 이루어 私通의 盛行이 생기고, 私生兒를 增加하게하야, 社會의 風俗을 頹廢케 함이 不尠할 것이다. 이에 適婚年齡은 各國의 氣候·風土·傳說‧慣習等 諸般 事情을 參酌하고, 道義上·衛生上·國民 經濟上의 觀點에 立脚하야 制定되어야 할바이다. 따라서 各國의 結婚年齡의 法制는, 다 다른 것이다. 이제 現下 列國의 適婚年齡율 比較하여 보리라
현대문주3▶ (제 1표)[a 3]
국가
일본(다이호령) 만 17 만 15
일본(현행법) 15 13
로마법 14 12
사원법 14 12
영국 14 12
스페인 14 12
그리스 14 12
독일 21 16
스위스 20 18
프랑스 18 15
이탈리아 18 15
벨기에 18 15
루마니아 18 15
네덜란드 18 15
포르투갈 18 15
헝가리 18 15
러시아(신구) 18 15
오스트리아 14 14
스웨덴(구) 20 18
스웨덴(신) 21 18
덴마크 21 18
노르웨이(구) 20 16
노르웨이(신) 20 18
프로이센 18 14
불가리아 19 17
평균 18.2 15.6
즉 서양에 있어서는 라마법에 준칙된 영길리(西班牙,영국)‧서반아(英吉利, 스페인)의 남자 14세 여 12세가 최저요, 서서(瑞西, 스위스)의 남자 21세 여자 18세의 경우가 최고이다. 이에 대하여, 동양에 있어서는 즉 중국 법제에 기본하여 있는 것이나, 조선에 있어서는 시대에 따라서 다소 변천이 있는 것이다.
쪽수▶P49-2원문주3▶(第一表)[3]
國家
日本(大寶令) 滿 17 滿 15
日本(現行法) 15 13
羅馬法 14 12
寺院法 14 12
英吉利 14 12
西班牙 14 12
希臘 14 12
獨逸 21 16
瑞西 20 18
佛蘭西 18 15
伊太利 18 15
白耳義 18 15
루─마니아 18 15
和蘭 18 15
포르터가르 18 15
헝가리 18 15
露西亞(新舊) 18 15
오─스트리아 14 14
瑞典(舊) 20 18
仝(新) 21 18
丁株 21 18
諸威(舊) 20 16
諸威(新) 20 18
포로시아 18 14
브르가리아 19 17
平均 18.2 15.6
即 西洋에 있어서는 羅馬法에 準則된 英吉利‧西班牙의 男 14 女 12가 最低요, 瑞西의 男 21 女 18의 境遇가 最高이다. 이에 對하야, 東洋에 있어서는 即 中國 法制에 基本되여 있는 것이나, 朝鮮에 있어서는 時代에 따라서 多少 變遷이 있는 것이다.
시대
경국대전(시대) 15 14
대전회통(시대) 15 14
세종시대 16 14
개국 503년 20 16
융희 원년 17 15
이것을 보면 법제상 가혼연령은, 오히려 세계 최저의 경우보다 훨씬 고졸(高卒)로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로 조선에 조혼이 현저하였음은, 이 법제상 가혼연령이 조혼방지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음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일방으로 보면 관제의 불철저한 것에 의함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나, 그보다 더 견인(堅靭)한 사유가 잠재하여 있음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쪽수▶P50-1
經國大典(時代) 15 14
大典會通(時代) 15 14
世宗時代 16 14
開國 503年 20 16
隆熙 元年 17 15
이것을 보면 法制上 可婚年齡은, 오히려 世界 最低의 境遇보다 훨씬 高卒로 되어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從來로 朝鮮에 早婚이 顯著하였음은, 이 法制上 可婚年齡이 早婚防止에 아무런 效果가 없었음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一方으로 보면 官制의 不徹底한 것에 依함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나, 그보다 더 堅靭한 事由가 潜在하여 있음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본문2: 二


그러면 과연 조선의 조혼의 정도는 얼만 한 것인가? 이조(李朝) 시대에 있어서는 그것을 숫자적으로 표시할 자료가 없으므로 말할 것 없거니와, 근년에 있어서 대정 10년부터 소화 5년까지의 10년간, 법정연령(남 17세 여 15세)에 달하지 않은 자의 결혼자 수를 조사해보건대, 결혼자 총수에 대하여 평균 남자 7.1%, 여자 6.2%에 이른 것이다.
쪽수▶P50-2 그러면 果然 朝鮮의 早婚의 程度는 얼만 한 것인가? 李朝 時代에 있어서는 그것을 數字的으로 表示할 資料가 없음으로 말할 것 없거니와, 近年에 있어서 大正 10年부터 昭和 5年까지의 10年間, 法定年齡(男 17 女 15)에 達하지 않은 者의 結婚者 數을 調査하야보건대, 結婚者 總數에 對하야 平均 男 7.1%,女 6.2%에 이른 것이다.
현대문주4▶ (제 2표)[a 4]
남편 아내
실수 총수에 대한 % 실수 총수에 대한 %
대10년 11.756 7.6 10.489 6.7
11년 13.422 6.9 13.401 6.9
12년 13.777 5.3 11.748 4.6
13년 13.479 7.2 8.521 4.5
14년 31.415 7.8 11.664 6.8
쇼와 원년 12.752 7.6 11.197 6.7
2년 13.016 7.5 11.659 6.7
3년 14.791 7.7 12.243 6.4
4년 13.467 7 12.011 6.2
5년 13.059 6.6 10.683 5.4
평균 7.1 6.2
더욱이 소화 5년도에 한해, 법정연령에 달하지 않은 자의 결혼 수를 지방별로 보면 다소의 차이가 있다.
쪽수▶P51-1원문주4▶(第 二表)[4]
實數 總數에 대한 % 實數 總數에 대한 %
大10年 11.756 7.6 10.489 6.7
11年 13.422 6.9 13.401 6.9
12年 13.777 5.3 11.748 4.6
13年 13.479 7.2 8.521 4.5
14年 31.415 7.8 11.664 6.8
昭元年 12.752 7.6 11.197 6.7
2年 13.016 7.5 11.659 6.7
3年 14.791 7.7 12.243 6.4
4年 13.467 7 12.011 6.2
5年 13.059 6.6 10.683 5.4
平均 7.1 6.2
더욱이 昭和 5年度에 限하야, 法定年齡에 達하지 않은 者의 結婚 數를 地方別로 보면 多少의 差異가 있다.
현대문주5▶(제 3표) [a 5]
實數 總數에 대한 % 實數 總數에 대한 %
충북 610 2.7 470 4.4
충남 1.011 7.8 869 6.7
전북 679 6.4 700 6.6
전남 257 1.0 484 1.9
경북 1.860 8.8 1.451 6.9
경남 720 6.3 375 3.2
남한 5.137 5.6 4.349 4.7
경기 987 5.2 814 4.3
강해 1.268 8.3 1.063 6.9
경원 854 5.1 872 5.2
중부 3.109 6.1 2.736 5.4
평남 1.440 9.6 1.413 9.4
평북 1.214 7.4 1.035 6.2
함남 1.552 9.2 1.016 6.0
함북 577 8.3 131 1.8
북한 4.813 8.7 3.595 6.6
전국 13.053 6.6 10.683 5.4
즉 남자는 전남의 1.0%가 최소이고, 평남의 96%가 최다함에 대하여, 여자는 함북의 1.9%가 최소이고, 평남 96%가 최다이다, 대체로 법정연령에 달하지 않은 남자가 많은 지방은 여자도 또한 많으나, 함북만은 남자 8.3%에 대하여 여자 1.9%임은, 곧 이 지방에 특히 남자의 조혼률이 많음을 말함이다. 이것을 남부, 북부 및 중부 조선으로 본다면, 남부 조선에 적고 북부 조선에 많고 중부 조선은 그 중간이 되는 것이다.
쪽수▶P51-2 원문주5▶(第 三表)[5] <<<표3>>> ▶P52-1即 男은 全南의 1.0%가 最少하고, 平南의 9.6%가 最多함에 對하여, 女는 咸北의 1.9% 最少하고, 平南 9.6%가 最多하다. 大體로 法定年齡에 達하지 않은 男子가 많은 地方은 女子도 또한 많으나, 咸北만은 男 8.3% 對하여 女 1.9임은, 곧 이 地方에 特히 男子의 早婚率이 많음을 말함이다. 이것을 南部, 北部, 및 中部 朝鮮으로 본다면, 南部 朝鮮에 적고 北部 朝鮮에 많고 中部 朝鮮은 그 中間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연령 계급에 있어서, 일단으로 결혼이 많이 되는가를 보기 위하여 현대문주6▶대정 원년 대정 14년 소화 7년의 대략 십년 격한 3개년간의 결혼 수를 표시하리라. [a 6]
김두헌 조선조혼-1.jpg
김두헌 조선조혼-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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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헌 조선조혼-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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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면 남녀 20세 전후가 최다를 점하고, 총 결혼 수의 반분 이상을 이루었으며, 그중에도 20 미만의 경우가 대다수로 되어있다. 이제 20세 미만의 경우만을 취하여 총 결혼 수의 백분비로 표시하건대.
김두헌 조선조혼-6.jpg
이와 같이 결혼 연령이 20세 미만인 자의 결혼 수가 다수로 되어있음은 아마 인도를 제하고는 세계에 유례가 없으리라. 이제 세계 열국의 평균 결혼 연령은 다음과 같다.
쪽수▶P51-3그러면 어느 年齡 階級에 있어서, 一般으로 結婚이 많이 되는가를 보기 爲하야 원문주6▶大正 元年 大正 14年 昭和 7年의 大路 10年隔한 3箇年間의 結婚 數를 表示하리라.[6]
김두헌 조선조혼-1.jpg
김두헌 조선조혼-2.jpg
▶P53-2
김두헌 조선조혼-3.jpg
김두헌 조선조혼-4.jpg
▶P54-2
김두헌 조선조혼-5.jpg
▶P55-2이것을 보면 男女 20歲 前後가 最多를 占하고, 總 結婚 數의 半分 以上을 이루었으며, 그中에도 20 未滿의 境遇가 大多數로 되어있다. 이재 20歲 未滿의 境遇만을 取하야 總結婚數의 百分比로 表示하건대. ▶P56-1
김두헌 조선조혼-6.jpg
▶P56-2이와 같이 婚姻年齡이 20歲 未滿者의 結婚數가 多數로 되어 있음은 아마 印度 除하고는 世界에 類例가 없으리라. 이제 世界 列國의 平均 婚姻年齡은 다음과 같다.
현대문주7▶
연도
일본 1932 28.9 24.2 4.6
불가리아 1928 26.5 25.3 1.1
폴란드 1927 26.6 23.3 3.1
터키 1931 26.6 24.1 3.5
벨기에 1927 26.8 25.6 1.1
멕시코 1929 27.9 26.7 1.2
프랑스 1930 28.1 26.9 1.2
스페인 1930 28.1 25.9 2.2
헝가리 1930 28.3 24.2 4
뉴질랜드 1930 28.4 26.1 2.3
룩셈부르크 1929 28.8 26.7 2
이탈리아 1932 28.9 23.8 5
독일 1931 28.9 26 2.9
콜롬비아 1928 28.9 26.8 2.1
영국 1931 28.9 26.4 2.5
호주 1931 28.9 25.3 3.6
핀란드 1928 29 27.1 1
캐나다 1930 29.2 25 4.2
덴마크 1926 29.2 29.6 2.6
엘살바도르 1930 29.4 27.5 1.9
남아프리카 연방 1931 29.4 24.6 4.7
그리스 1931 29.7 25.9 3.8
리투아니아 1929 30 27.8 2.1
스위스 1931 30.1 27.2 2.9
우루과이 1930 30.2 25.9 4.3
노르웨이 1928 30.4 27.7 2.7
에스토니아 1929 30.4 27.6 2.8
스웨덴 1930 30.4 26.8 2.6
라트비아 1930 30.6 28 2.6
평균 28.8 26 2.8
[a 7] 이것을 총 평균하면 남 28.8세 여 26.0세가 되고 최저의 경우는 파란(波蘭, 폴란드)의 남 26.6세 여 23.3세이다. 이제 현대문주8▶ 조선 주의 평균 혼인 연령을 보건대.[a 8]
대정 원년부터 10년 격의 삼개년을 보면,
소7(1932) 대12(1923) 대원(1912)
23.7 23.3 18.2
17.7 19.9 19.5
소화 7년까지 계속 삼개년을 보면,
소5(1930) 소6(1931)
2.36 23.3
2.03 2.05
이상 5개년간의 평균 연령은 남 22-2세, 여 19-7세가 열국의 최저의 경우에 비하야 남자 2.2세, 여자 3.6세의 차이가 있는 것이겠다.
쪽수▶P56-3
年次
日本 1932 28.9 24.2 4.6
부르가리아 1928 26.5 25.3 1.1
波蘭 1927 26.6 23.3 3.1
土耳其 1931 26.6 24.1 3.5
白耳義 1927 26.8 25.6 1.1
맥시코 1929 27.9 26.7 1.2
佛蘭西 1930 28.1 26.9 1.2
西班牙 1930 28.1 25.9 2.2
洪牙利 1930 28.3 24.2 4
新西蘭 1930 28.4 26.1 2.3
루크센붉 1929 28.8 26.7 2
伊太利 1932 28.9 23.8 5
獨逸 1931 28.9 26 2.9
코럼비아 1928 28.9 26.8 2.1
英吉利 1931 28.9 26.4 2.5
濠洲 1931 28.9 25.3 3.6
芬蘭 1928 29 27.1 1
加奈陀 1930 29.2 25 4.2
丁株 1926 29.2 29.6 2.6
사루바돌 1930 29.4 27.5 1.9
南亞聯邦 1931 29.4 24.6 4.7
希臘 1931 29.7 25.9 3.8
리스아니아 1929 30 27.8 2.1
瑞西 1931 30.1 27.2 2.9
우루가이 1930 30.2 25.9 4.3
諾威 1928 30.4 27.7 2.7
에스토니아 1929 30.4 27.6 2.8
瑞典 1930 30.4 26.8 2.6
라토뷔아 1930 30.6 28 2.6
平均 28.8 26 2.8

[7] ▶P57-1 이것을 總 平均하면 男 28.8歲 女 26.0歲가 되고 最低의 境遇는 波蘭의 男 26.6 女 23.3歲이다. 이제 원문주8▶朝鮮 註의 平均婚姻 年齡을 보건대,[8]


大正 元年부터 10年 隔의 2箇年을 보면,
昭七(1932) 大十二(1923) 大元(1912)
23.7 23.3 18.2
17.7 19.9 19.5
昭和 7年까지 繼續 3箇年을 보면,
昭五(1930) 昭六(1931)
2.36 23.3
2.03 2.05
以上 五箇年間의 平均 年齡은 男 22.2歲, 女 19.7歲이 列國의 最低의 境遇에 比하야 男 4.2 歲, 女 3.6 錢의 差異가 있는 것이겠다.





































본문3: 三


근래, 조혼의 경향이 점차로 감소하여감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조혼의 풍속이 남아있음은, 또한 부인치 못할 현상이다. 필자는 이 경향을 더욱이 밝히려 하여 금년 6월, 현대문주9▶현금 조선 중등학교 생도 가족 상황의 조사를 시(試)하고[a 9] 그중에 생도의 혼인 관계에 대하여 고사한 결과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하려 한다. 본 조사에 당하여서는, 생도 자신들이 자기의 결혼 사실을 말하기를 꺼리는 사정이 있어, 각 학교 당국에게 만단(萬端)의 주의를 부탁하였음에 불구하고, 정확한 보고를 진술치 않은 결과로, 전반에 걸친 조사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나, 그중에 비교적 정확한 듯한 한 학교(진주고보)에 취하여 얻은 결과는 이러하다. 보고자 360여 명 중 29명의 결혼자가 표시되었다. 중등학교 생도로서 이만한 결혼자가 있다는 것 만도, 그것은 조선 특유의 현상이라 하겠으나, 필자가 일찍이 중등교시 대(거금 16, 17년 전)를 회상하면 전교 생도의 대다수가 기혼자였던 사실에 비하여, 금일은 그 당시보다는 중등학교 생도 평균 연령이 훨씬 저율로 되어있는 관계도 있겠지만, 여하간 조혼의 경향이 감소하여진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제 상기 29명의 결혼 당시 연령을 조사하여 본즉 남녀 평균 16세인 것이다.
(a) 18 19
(b) 19 17
(c) 16 17
(d) 17 16
(e) 17 18
(f) 15 16
(g) 17 17
(h) 16 17
(i) 16 16
(j) 12 15
(k) 17 17
(l) 19 17
(m) 17 17
(n) 17 16
(o) 17 17
(p) 17 16
(q) 17 17
(r) 18 15
(s) 18 17
(t) 17 17
(u) 14 14
(v) 17 19
(w) 17 18
(x) 15 16
(y) 17 16
(z) 17 17
(a) 16 17
(b) 15 15
(c) 18 16
평균 16.58 16.65
즉 남편 12세 아내 14세의 경우가 최저요, 또한 아내의 연령이 남편의 연령보다 높은 경우가 허다함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조선 특유의 현상일 것이다. 이제 29명 가족 상황 일반을 보건대 대개 이러하다.
쪽수▶P57-2近來, 早婚의 傾向이 漸次로 減少되어감은 事實이다. 그러나 아직도 早婚의 風이 남아있음은, 또한 否認치 못할 現象이다. 筆者는 이 傾向을 더욱이 밝히려 하야 今年 6月, 원문주9▶今 朝鮮 中等學校 生徒 家族 狀況 調査를 試하고 [9] 그中에 生徒의 婚姻關係에 對하야 考查한 結果一部 여기에 紹介하려한다。本調査에 當하야서는,生徒 自身 ▶P58-1들이 自己의 婚姻 事實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事情이 有하야, 各 學校 當局에게 萬端의 注意를 付托하엿음에 不拘하고、正確한 報告를 陳述치 않은 結果로, 全般에 亘한 調査는 失敗에 歸한 셈이나 그中에 比較的 正確한 듯한 一 校(晋州高音)에 就하여 얻은 結果는 이러하다。報告者 360餘 名 中 29名의 結婚者가 表示되었다 中等學校 生徒로서 이만한 結婚者가 있다는 것만도, 그것은 朝鮮 特有의 現象이라 하겠으나, 筆者가 일즉 中等校時 代 (距今 167年前) 를 回想하면 全校 生徒의 大多數가 旣婚者이였던 事實에 比하야, 今日은 그 當時보다는 中等 學校 生徒 平均 年齡이 훨씬 低率로 되어있는 關係도 있겠지만, 如何間 早婚의 傾向이 減少하여진 것만은 確實한 事實이라하겠다. 이제 上記 29名의 結婚 當時 年齡을 調査하여본즉 男女 平均 十六 인 것이다.
(a) 18 19
(b) 19 17
(c) 16 17
(d) 17 16
(e) 17 18
(f) 15 16
(g) 17 17
(h) 16 17
(i) 16 16
(j) 12 15
(k) 17 17
(l) 19 17
(m) 17 17
(n) 17 16
(o) 17 17
(p) 17 16
(q) 17 17
(r) 18 15
(s) 18 17
(t) 17 17
(u) 14 14
(v) 17 19
(w) 17 18
(x) 15 16
(y) 17 16
(z) 17 17
(a) 16 17
(b) 15 15
(c) 18 16
平均 16.58 16.65
即 夫 12歲 妻 14歲의 境遇가 最低요, 또한 妻의 年齡이 夫의 年齡보다 높은 境遇가 許多함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朝鮮 特有의 現象일 것이다, 이제 29名 家族 狀況 一般을 보건대 大概 이러하다.
1. 종교관계
기독교 3인
천주교 1인
불교 4인
무종교 10인
이 중 무종교라함은 조선 사회에 한하여 유교로 볼 수 있으리니, 그렇다면 유교의 가족이 절대 다수임을 알 것이다.
2. 처의 거주
자기의 동거 2인(자기는 부모와 동거)
자기 부모와 동거 13인(자기는 재학중 타처에 가 있는 경우)
처부모 동거 10인
기타 (재학 중) 3인
그러면 결국 독립 가정을 이룬 자는 없고, 부모의 가정에 아직 동거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3. 처의 교육 정도
보통학교졸업 16인
여자고보교재학 5인
학교교육무 7인
부명 1인
4. 자여수
여아를 가진 자 1인(결혼 후 3개년 5개월 초산)
남아를 가진 자 1인(사망)
5. 결혼의 경과
전부 부모의 지정 명령에 의함. 6. 이혼관계
이혼자 1인
이혼기 결혼후 4개년 후.
이유. 「보기 싫다, 그리고 또 다른 사정이 있다.」고 하였다.
일반으로 조혼자의 심리는 우리가 다 모를 바가 아니다. 문자상 참고를 위하여 이상 결혼자의 감상기를 게시하노니 이것은 오직 50인의 실례이나 아마 일반의 경우를 대표한 것인가 생각한다.
쪽수▶P58-21. 宗敎關係
▶P59基督敎 3人
天主敎 1人
佛敎 4人
無宗敎 10人
이 中 無宗敎라함은 朝鮮 社會에 限하야 儒敎로 볼 수 있으리니、그렇다면 儒敎의 家族이 絕對多數임을 알 것이다.
2. 妻의 居住
自己의 同居 2人(自己는 父母와 同居)
自己 父母와 同居 13人(自己는 在學中 他處에 가 있는 境遇)
妻父母 同居 10人
其他 (在學中) 3人
그러면 結局 獨立 家庭을 이룬 者는 없고, 父母의 家庭에 아직 同居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3. 妻의 敎育 程度
普通學校卒業 16人
女子高普校在學 5人
學校教育無 7人
不明 1人
▶P60-14. 子女數
女兒를 가진者 1人(結婚後三箇年五箇月初產)
男兒를 가진者 1人(死亡)
5. 結婚의 經過
全部 父母의 指定命令에 依함. 6. 離婚關係
離婚者 1人
離婚期 結婚後 四箇年後.
理由.「보기슬타, 그리고 또 다른 事情이있다.」고하였다.
一般으로 早婚者의 心理는 우리가 다 모를 바가 아니다. 文字上 參考를 爲하여 以上 結婚者의 感想記를 揭示하노니 이것은 오직 50人의 實例이나 아마 一般의 境遇를 代表한 것인가 생각한다.

A. 자기의 반대가 부족하였음을 후회할 뿐,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선해하려고 노력한다.
B. 자기의 결혼을 회상하면, 조혼인 것이 분명하나, 일개월 이상 동거한 일이 없으므로, 그 해를 통감하지는 않는다. 이후 내 자신이 부모가 될 때는 모름지기 자녀 자신의 선택을 승낙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C. 전연 맹목적인 결혼이었다. 아이의 사후 3년에 아무 것도 모르고 명령대로만 결혼하였다. 그 후 시일을 지남에 따라, 상호 의견의 차이가 심하고, 따라서 불화한 일이 많고 전도양양한 나로서 장래가 걱정되어 홀로 암루(暗淚)를 이기지 못할 지경이다.
D. 우선 조혼의 누습을 일시라도 속히 살폐할 일.
E. 전래의 풍습인 조혼은 일리 없고 백해 없다고 생각한다. 허다한 이혼의 폐단은 여기서 발출한 것이다. 당국자는 이 조사에 의하여, 일반 학생의 혼인을 절금할지어다.
F. 조혼은 일반으로 좋지 못한 것이나 나 개인에 있어서는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다만 가정 사정에 좇았을 뿐이다.
G. 이렇다 싶은 감상은 없으나, 다만 처의 무식이 유감이다.
H. 처음에는 좋게 생각하였더니, 차차 후회가 났다. 그러나 조혼은 고풍으로 좋은 점도 있다. 왜 그런가 하면 후계자가 얼른 생겨서 부모를 안심시킬 것인 까닭이다.
I. 세상에는 흔히 조혼자는 건강을 해하고, 학업에 방해된 것이라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나 하면 일단 처를 갖게 되면, 다른 이성에 주하여 생각함이 없음으로, 오히려 청년 시대의 타락을 방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J. 현재 생도의 신분으로서, 너무 일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명령으로 할 수 없었고, 또한 독자의 나로서는 마지 못할 일이였다. 원컨대 성년에 이르러 결혼함이 좋다.
K. 너무 일렀으나 부모의 명령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서 처가 마음에 맞지 않아서, 이혼하고 말았다. 현대에는 자기의 선택한 처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L. 처는 타처에서 재학 중인데, 어쩐지 마음이 낙착(落着)하여 뒷날이 그립게 생각된다.
M. 숙부가 억지로 권하여 성혼하였으나, 마음에 맞지 않은 그대로 일생을 지낼 작정이다.
N. 너무 빨랐다고 생각한다.
(기타는 기술한 바 없다.)

이와 같은 사실에 의하면, 그 대다수가 부모의 지정 명령에 의한 것, 배우에 대하여 불만인 것, 조혼의 비를 자인(自認)한 것 또 그를 변호하려는 것 등의 사정을 살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취처 후의 생활 상에 경제적 사정을 조금도 관심 두지 않음을 보면, 그들은 다 경제 생활에 조금도 곤란이 없는 가정의 자제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쪽수▶P60-2

A. 自己의 反對가 不足하였음을 後悔할 뿐, 그러나 至今에 있어서 나는 될 수 있는대로 善解하려고 努力한다.
B. 自己의 結婚을 回想하면, 早婚인 것이 分明하나, 一箇月 以上 同居한 일이 없으므로, 그 害를 痛憾하지는 않는다. 今後 내 自身이 父母가 될 때는 모름지기 子女 自身의 選定을 承諾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C. 全然 盲目的인 結婚이었다. 兒의 死後 3年에 아무 것도 모르고 命令대로만 結婚하였다. 그 後 時日을 지남에 따라, 相互 意見의 差異가 甚하고, 따라서 不和한 일이 많고 前途洋洋한 나로서 將來가 걱정되어 홀로 暗淚를 ▶P61이기지 못할 지경이다.
D. 于先 早婚의 陋習을 一時라도 速히 撒廢할 일.
E. 傳來의 風習인 早婚은 一利 없고 百害 없다고 생각한다. 許多한 離婚의 弊端은 여기서 〿出한 것이다. 當局者는 이 調查에 依하여,一般 學生의 婚姻을 絕禁할지어다.
F. 早婚은 一般으로 좋지 못한 것이나 나 個人에 있어서는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다만 家庭事情에 좇았었을 뿐이다.
G. 이렇다 싶은 感想은 없으나, 다만 妻의 無識이 遺憾이다.
H. 처음에는 좋게 생각하였더니, 次次 後悔가 났다. 그러나 早婚은 古風으로 좋은 點도 있다. 왜 그런고 하면 後繼者가 얼른 생겨서 父母를 安心시킬 것인 까닭이다.
I. 世上에는 흔히 早婚者는 健康을 害하고, 學業에 妨害된 것이라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나 하면 一旦 妻를 갖게 되면, 다른 異姓에 就하여 생각함이 없음으로, 오히려 青年 時代의 墮落을 防止할 수 있는 까닭이다.
J. 現在 生徒의 身分으로서, 너무 일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父母의 命令으로 할 수 없었고, 또한 獨子의 나로서는 마지 못할 일이였다. 願컨대 成年에 이르러 結婚함이 좋다.
K. 너무 일렀으나 父母의 命令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서 妻가 마음에 맞지 않아서,離婚하고 말았다. 現代에는 自己의 選定한 妻가 第一 좋다고 생각한다.
▶P62-1L. 妻는 他處에서 在學 中인데, 어쩐지 마음이 落着하여 뒷날이 그립게 생각된다.
M. 叔父가 억지로 勸하여 成婚하였으나, 마음에 맞지 않은 그대로 一生을 지낼 作定이다.
N. 너무 빨랐다고 생각한다.
(其他는 記述한 바 없다.)

이와 같은 事實에 依하면, 그 多大數가 父母의 指定 命令에 依한것, 配偶에 對하야 不滿한 것, 早婚의 非를 自認한 것 또 그를 辯護하려는 것 等의 事情을 察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娶妻 後의 生活 上에 經濟的 事情을 조금도 關心치 않음을 보면, 그들은 다 經濟 生活에 조금도 困難이 없는 家庭의 子弟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문4: 四


일찍이 세종시대에 조혼금제론의 일단을 보건대,

현대문주10▶ 近者 士大夫之家婚姻之事. 不遵禮制. 男女之年 纔過十年 則便令婚嫁. 至有年未十歲而納. 未納幣假爲婚姻. 謂之預壻. 非徒有違於聖人之制. 抑亦有乖於陰陽之理也. 乞自今一依聖人之制. 男十六 女十四以上者 方許婚嫁. 違者痛繩以法.[a 10]

이라 하였으니, 往時에 사대부의 상류 계급에도 널리 조혼의 현상이 있음이 명료하다. 현대문주11▶일찍이 정동유의 말에 "지방소민의 간에 예부의 습관이 있는 것만도 누속으로 조소할 만한 일인데, 재상의 집에 예부의 속예혼속이 있음에는 가소할 일이다」 [a 11] 함을 보면, 일반 민중은 물론이요 또한 상류 계급에 그러함을 잘 아는 것이다.
쪽수▶P62-1일찍이 世宗時代에 早婚禁制論의 一端을 보건대,

원문주10▶ 近者 士大夫之家婚姻之事. 不遵禮制. 男女之年 纔過十年 則便令婚嫁. 至有年未十歲而納. 未納幣假爲婚姻. 謂之預壻. 非徒有違於聖人之制. 抑亦有乖於陰陽之理也. 乞自今一依聖人之制. 男十六 女十四以上者 方許婚嫁. 違者痛繩以法.[10]

이라 하였으니, 往時에 士大夫의 上流 階級에도 널리 早婚의 現象이 있음이 明瞭하다. 원문주11▶일찍이 鄭東愈의 言에 「地方小民의 間에 預婦의 習慣이 있는것만도 陋俗으로 嘲笑할만한일인대, 宰相의 家에 豫婦의 俗預婚俗이 잇음에는 可笑할 일이다」[11] 함을 보면, 一般 民衆은 勿論이요 또한 上流 階級에 그러함을 잘 아는 것이다.
그러면 옛날의 조혼형태이던 예혼 또는 예부라 함은, 어떠한 유래로 된 것인가? 오늘에 있어서도 '데릴사위' 또는 '밋메누리' 라는 말에 보아서 잘 알 바이나, 그 유래는 상당히 오랜 것이다. 먼저 예반 (또는 솔혼)의 속을 보건대 고려사, 원종세가에, 『國俗 納年幼者 養于家 待年. 謂之預婚』 라 하였다. 현대문주12▶ 이 습속은 원시적 혼인형태의 하나로 있었던 봉사서의 유적인 것을 성대 추엽륭 교수의 지적한 바요[a 12]현대문주13▶손진태 씨가 여러 실증에 의하여 같은 의견을 발표한 바 [a 13] 있었다. 다음에 예부(또는 양부)의 속은 위략에 동옥저의 습속을 말하되, 『其嫁娶之法. 女年十歲而已相設許婚家迎之. 長養以爲婦』라 하였다. 이 습속은 흔히 하층 빈민 계급에 있는 바요, 현대문주14▶ 역시 원시적 혼인 형태인 구매혼의 유적이라 하여 혼전을 소액으로 하려는 요구에 기본된 것이라 함이 일반 견해이다.[a 14] 이제 그 본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는 별 문제로 하고, 그 성립의 경과만을 말하건대, 어느 것이나 다 결혼 당사자의 의사에 의함이 아니라 전연히 그 부모의 의사로 된 것임이 유의할만한 점이다. 옛적에 예혼제의 한 표시이던 「혼옥」의 속을 보건대, 역시 그러하다.

현대문주15▶ 其俗 作婚姻 言語旣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婿屋. 婿暮至女家戶外 自名跪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 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己長大 乃將婦歸家.[a 15]

쪽수▶P63-1그러면 往時의 早婚形態이던 預婚 또는 預婦라 함은, 어떠한 由來로 된 것인가? 오늘에 있어서도 「데릴사위」 또는「밋메누리」라는 말에 보아서 잘 알 바이나, 그 由來는 相當히 오랜 것이다. 먼저 預蟠 (또는 率婚)의 俗을 보건대 高麗史, 元宗世家에,『國俗 納年幼者 養于家 待年. 謂之預婚』 라 하였다.원문주12▶이 習俗은 原始的 婚姻形態의 하나로 있었던 奉仕婿의 遺跡임을 城大 秋葉隆 敎授의 指摘한 바요 [12]원문주13▶孫晉泰 氏가 여러 實證에 依하여 같은 意見을 發表한 바[13] 있었다. 다음에 預婦(또는 養婦)의 俗은 魏畧에 東沃沮의 習俗을 말하되, 『其嫁娶之法. 女年十歲而已相設許婚家迎之. 長養以爲婦』라 하였다. 이 習俗은 흔히 下層 貧民 階級에 있는 바요, 원문주14▶亦是 原始的 婚姻 形態인 購買婚의 遺跡이라하여 婚錢을 小額으로 하려는 要求에 基本된 것이라 함이 一般 見解이다.[14] 이제 그 本來가 어떤 것인가에 對하여는 別 問題로 하고, 그 成立의 經過만을 말하건대, 어느 것이나 다 結婚 當事者의 意思에 依함이 아니라 全然히 그 父母의 意思로 된 것임이 留意할만한 點이다. 옛적에 預婚制의 한 表示이던「婚屋」의 俗을 보건대, 亦是 그러하다.

원문주15▶其俗 作婚姻 言語旣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婿屋. 婿暮至女家戶外 自名跪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 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己長大 乃將婦歸家.(ref>三國志, 高句麗傳.</ref>

그러면 어찌하여 조혼이란 것이 생겼는가? 그것은 일언으로써 하건대 가장권제도의 점차 발전됨에 따라, 가계 존속의 요구에 기본된 가장의 임무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원래, 부가장권가족의 기초는 가계의 존속에 있다. 「고대도시」의 저자, '쿠─란쥬'의 설에 의하면, 고대인은, 사자의 행복이 생전에 하던 바 행위에 있다 하지 않고 다만 사자의 자손이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공물을 올리는 데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식을 남기어, 사후에 가계의 존속을 얻게 함이 절대로 필요하였고 이것은 또한 조상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其俗 作婚姻 言語旣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婿屋. 婿暮至女家戶外 自名跪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 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己長大 乃將婦歸家.

쪽수▶P63-2그러면 어찌하여 早婚姻이란것이 생겼는가? 그것은 一言으로써 하건대 家長權制度의 漸次 發展됨에 따라, 家系 存續의 要求에 基本된 家長의 任務에 依한 것이라 하겠다. 元來, 父家長權家族의 基礎는 家系의 存續에 있다. 「古代都市」의 著者, 「쿠─란쥬」의 說에 依하면, 古代人은, 死者의 幸福이 生前에 하던 바 行爲에 있다 하지 않고 다만 死者의 子孫이 그를 爲하여 끊임없이 供物을 올리어 는주대 있다고 信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들은 予息을 남기어, 死後에 家系의 存續을 얻게 함이 絕對로 必要하엿고 이것은 또한 祖先에 對한 義務라고 생각하였다.

"현대문주16▶그들의 경건한 마음이 저어한 최대의 부등은, 곧 가계의 단절이었다. 그것은 가계가 단절하면,집(家)의 종교는 없어지고,그 노화는 소실하여 모든 조선은 망각되야 영겁의 참고에 빠지고만 까닭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대사는 제사를 하기 위하여 후예를 남긴 일이었다" [a 16]

즉 이러한 사상 신앙의 결과로서, 독신이라는 것은 일대불경사인 동시에 불행한 일일뿐 아니라, 법률은 이것을 죄악이라고까지 보고, 청년남녀에게 혼인을 강제로 시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보건대, 소위 대가족제도의 사회에 있어서는 누구나 다 자식을 구하고 또 그 후 계자가 될 손자를 구하려는 욕망은 지대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하여, 그 자식의 혼기를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하려는 욕구를 가짐은, 또한 자연적 경향이라 하겠다.
쪽수▶P64-1

원문주16▶ 『그들의 敬虔한 마음이 저어한 最大의 不等은, 곧 家系의 斷絕이였다. 그것은 家系가 斷絶하면,집(家)의 宗敎는 없어지고,그 爐火는 消失하여 모든 祖先은 忘却되야 永劫의 慘苦에 빠지고만 까닭이다. 그러므로 人生의 大事는 祭祀를 하기 爲하여 後裔를 남긴 일이엿다』[15]

即 이러한 思想信仰의 結果로서, 獨身이라는 것은 一大不敬事인 同時에 不幸한 일일뿐 아니라, 法律은 이것을 罪惡이라고까지 보고, 靑年男女에게 婚姻을 强制로 시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보건대, 所謂 大家族制度의 社會에 있어서는 누구나 다 子息을 求하고 또 그 後 系者가 될 孫子를 求하려는 欲望은 至大한 것일 것이다. 그럼으로 因하여, 그 子息의 婚期를 될 수 있는대로 速히 하려는 欲求를 가짐은, 또한 自然的 傾向이라 하겠다. 목차4원문5번= 쪽수▶P64-2 그러나 사람의 欲情, 그 自然的 情態에 있어서 都是 無制約的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人情의 自然的 傾向性을 抑制하고, 그로써 正常의 길에 就하게 하려고 하여 여기서 禮敎的 規範이 必要하게 된 것이다. 支那의「家禮」는 곧 이와 같이하여 생긴 것이다. 이 家禮는 곧 支那의 家族制度를 잘 支持케 한 것이요, 또한 朝鮮의 家族制度史上에 影響한 바 不勘한 것이였다. 일찍 李朝國初 以來로, 結婚法制는 文公 家禮를 主로 삼고, 漢唐의 法制에 準則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法制에 있어서나, 禮制에 있어서나, 家族의 繼承을 斷絕치 않게 하려고 充分한 配慮가 있었음은 明白한 事實이다. 일찍이 經國大典 婦嫁條에, 「男年十五 女年十四 方許嫁婚」이라 制定하였고, 그 附則으로 「若兩家父母中一人 有宿疾. 或年五十而子女十二以上者. 告官婚嫁」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이러한 事情을 잘 말한 것이겠다. 그 後로는 이 附則은 子女의 婚期를 早速히 하려하는 사람들에게,事實 그렇지 않은 境遇라도, 至極히 좋은 口實의 資料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욕정, 그 자연적 정태에 있어서 도시는 무제약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인정의 자연적 경향성을 억제하고, 그로써 정상의 길에 주하게 하려고 하여 여기서 예교적 규범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지나의 「가례」는 곧 이와 같이하여 생긴 것이다. 이 가례는 곧 지나의 가족제도를 잘 지지케 한 것이요, 또한 조선의 가족제도사상에 영향한 바 불감한 것이었다. 일찍 이조국초 이래로, 결혼법제는 문공 가례를 주로 삼고, 한당의 법제에 준칙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법제에 있어서나, 예제에 있어서나, 가족의 계승을 단절치 않게 하려고 충분한 배려가 있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찍이 경국대전 부가조에, "男年十五 女年十四 方許嫁婚"이라 제정하였고, 그 부칙으로 "若兩家父母中一人 有宿疾. 或年五十而子女十二以上者. 告官婚嫁"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한 것이겠다. 그 후로는 이 부칙은 자녀의 혼기를 조속히 하려하는 사람들에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지극히 좋은 구실의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조선의 가장 일반적인, 또 가장 이상적인 혼인 형태로 되어있는 중매혼에 의하여, 자녀의 조혼이 더욱 촉진되었음은 간과치 못할 사실일 것이다. 이 중매혼은 대가족조직의 사회에 있어서 더욱이 지나를 비롯하여 동아의 제민족에 있어서는 가장 보편적인 혼인 형태이었다. 문공가례 의혼조에는, "必先使媒氏往來通信 俟女氏許之 然後納采"라 하여, 혼인에는 반드시 매개인이 필요하다 하였다. 이제 이 중매혼의 유래를 살피건대, 그것은 남녀유별의 예속에 기본된 것일 것이다. 일찍이 예기 내칙편에 「禮始於謹夫婦. 爲宮室辨內外. 男子居外. 女子居內深宮固門閣寺守之. 男不入女不出. (中暑) 男不言內女不言外」라 하였고, 혹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며, 혹은 남녀불수수라 하여, 남녀의 내외유별은 자못 엄격한 예절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남녀 내외의 습속은 일찍이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래로, 조선에 있어서 또한 준엄한 것이었다. 이조의 국초 태종 8년에 당시의 대사헌 남재의 상소에 말하기를

현대문주17▶ 古者 旣嫁者父母歿 則無歸寧之義. 其嚴肅如此. 前朝之季 風俗頹敗. 士大夫之妻 趨謁權門 恬不爲愧 識者恥之. 願自今文武兩班婦女 除父母親弟娣妹親伯叔舅姑外 不許相他. 以上風俗[a 17]

이라 하였고, 또 정조시대의 예론가 이덕무의 예설에,

현대문주18▶ 世有謁見妻之姉妹者. 此雖出於通家之厚誼. 然不可頻頻接見. 雖有相關之事 不可以書札相通也.
見姉妹姑姨等于其家 不可久坐絮言. 以其家他婦女閉門久避 事務機墬故也. 且暑月尤不可久坐.[a 18]

라 하였으니, 과연 남녀내외의 별을 얼마나 중요한 예절로 삼았던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실생활의 형식상, 혹은 내방외사의 가옥구조를 엄중히 한 것이라든지, 혹은 렴폭·나올의 장이와 옥교·장의 등 습속에 나타나있는 부녀외출의 불자유한 것이라든지, 식사·노동·유희·오락 등에 있어서, 남녀내외의 별은 엄존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녀의 교제, 더구나 혼기에 있는 남녀 간의 왕래는, 곧 중매인을 통하여 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 중매인이라는 것은, 원래 신성한, 그리고 정당한 매개의 직무를 다할 지위에 있을 사람일 것이다. 사실 또 허다한 경우에, 경험과 견식 있는 장로 또는 노파가 중매임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이 중매는 어느 사이인지 직업적 또는 정서적으로 되어, 오직 그 보수를 얻고자 양가에 개재하여 쌍방의 장점미점을 고취함으로써, 성혼을 촉진케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중매혼으로 말미암아 양출된 희비극의 사실은 우리의 주지한 바이다.「韓山모수(苧)街道布의 草笠童이 願했더니 웬일인가 五十白髮』 이라는 속요는, 부자집 신랑에게 시집가기를 원했던 것이 의외에 백발노인에게 가고 말게 된 시골처녀의 탄식을 호소함이다.
쪽수▶P65그 뿐 아니라 朝鮮의 가장一般的인, 또 가장 理想的인 婚姻形態로 되어있는 仲媒婚에 依하여, 子女의 早婚이 더욱 促進되었음은 看過치 못할 事實일것이다. 이 仲媒婚은 大家族組織의 社會에 있어서 더욱히 支那를 비롯하여 東亞의 諸民族에 있어서는 가장 普遍的인 婚姻形態이었다. 文公家禮 議昏條에는,「必先使媒氏往來通信 俟女氏許之 然後納采」라 하여, 婚姻에는 반드시 媒介人이 必要하다하였다. 이제 이 仲媒婚의 由來를 살피건대, 그것은 男女有別의 禮俗에 基本된 것일 것이다. 일찍이 禮記 內則篇에「禮始於謹夫婦. 爲宮室辨內外. 男子居外. 女子居內深宮固門閣寺守之. 男不入女不出. (中暑) 男不言內女不言外」라 하였고, 或은 男女七歲 不同席이라 하며, 或은 男女不授受라하여, 男女의 內外有別은 자못 嚴格한 禮節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男女內外의 習俗은 일찍이 儒敎文化의 影響을 받은 以來로, 朝鮮에 있어서 또한 峻嚴한 것이었다. 李朝의 國初 太宗 8年에 當時의 大司憲南在의 上疏에 말하기를

古者 旣嫁者父母歿 則無歸寧之義. 其嚴肅如此. 前朝之季 風俗頹敗. 士大夫之妻 趨謁權門 恬不爲愧 識者恥之. 願自今文武兩班婦女 除父母親弟娣妹親伯叔舅姑外 不許相他. 以上風俗(주석17)

이라 하였고,또 正祖時代의 禮論家 李德懋의 禮說에,

世有謁見妻之姉妹者. 此雖出於通家之厚誼. 然不可頻頻接見. 雖有相關之事 不可以書札相通也.
見姉妹姑姨等于其家 不可久坐絮言. 以其家他婦女閉門久避 事務機墬故也. 且暑月尤不可久坐.(주석18)

라 하였으니, 果然 男女內外의 別을 얼마나 重要한 禮節로 삼았던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實生活의 形式上, 或은 內房外舍의 家屋構造를 嚴重히 한 것이라든지, 或은 簾幅·羅兀의 藏而과 屋橋·長衣 等 習俗에▶P66-1 나타나있는 婦女外出의 不自由한 것이라든지, 食事·勞働·遊戲·娛樂 等에 있어서, 男女內外의 別은 嚴存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男女의 交際, 더구나 婚期에 있는 男女間의 往來는, 곧 仲媒人을 通하여 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 仲媒人이라는 것은, 元來 神聖한, 그리고 正當한 媒介의 職務를 다할 地位에 있을 사람일 것이다. 事實 또 許多한 境遇에, 經驗과 見識있는 長老 또는 老婆가 仲媒임을 原則으로한다. 그러나 이 仲媒는 어느 사이인지 職業的 또는 政署的으로 되어, 오직 그 報酬를 얻고자 兩家에 介在하여 雙方의 長所美點을 鼓吹함으로써, 成婚을 促進케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仲媒婚으로 말미암아 釀出된 喜悲劇의 事實는 우리의 周知한 바이다. 「韓山모수(苧)街道布의 草笠童이 願했더니 웬일인가 五十白髮』 이라는 俗謠는, 富者집 新郎에게 시집가기를 願했던 것이 意外에 白髮老人에게 가고 말게된 시골處女의 歎息을 呼訴함이다.
이와 같이하여 자녀의 결혼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부조의 권한과 가계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후예의 욕구는, 곧 중매제도의 촉진에 의하여 여기에 조혼의 경향을 양성한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이미 성대 현대문주19▶추엽륭 교수가 언급한 바 있으니, 즉 조선에 있어서의 중매혼, 남녀별의 관념, 가장권의 전단은, 어느 것이나 다 대가족주의에서 나온 필연의 결과로, 현대 조선의 일대두통거리인 조혼의 풍도, 그 근본적 요인은 실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였다. [a 19]
쪽수▶P66-2이와 같이하여 子女의 結婚을 絕對的으로 支配하는 父祖의 權限과 家系存續을 爲하여 必要한 後裔의 欲求는, 곧 仲媒制度의 促進에 依하여 여기에 早婚의 傾向을 釀成한 것이다. 이 點에 關하여 이미 城大 秋葉隆 敎授가 論及한 바 있으니,即 朝鮮에 있어서의 仲媒婚, 男女別의 觀念, 家長權의 專壇는, 어느 것이나 다 大家族主義에서 나온 必然 의 結果로,現代朝鮮의 一大頭痛거리인 早婚의 風도, 그 根本的 要因은 實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였다.(주석19)











































본문5: 五


이와 같이 조혼의 요인이 만약 대가족주의의 중에 배태하여 있는 것이라 하면, 대가족 조직을 기초로 한 다른 민족사회에 있어서도, 역시 조혼의 경향이 있음을 추찰할 수 있는 일이다. 세계의 역사상으로 보면, 이 조혼의 현상은 결코 조선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현대문주20▶'웨수타마─크'에 의하면, 제다미개민족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남녀가 발정기(Puberty)에 달하자마자 곧 결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한다[a 20]. 인디안 제족, 아프리칸 제족, 남북 아메리카 인디안 제족 등 모두가 다 조기 혼인을 하는 것이나, 다만 이러한 경우에 한하여 예외로 되어 있다. 즉 다처주의에 기본하여 부권계급의 독점한 바 되어 여자를 구하기 곤란한 경우, 구매혼이 심하여 신부가 너무 고가임으로 여자를 구하기 곤란한 경우, 족외혼(Exogamy)의 제도가 엄격하여 배우자를 구하기 곤란한 경우, 승려 또는 마법사가 되기 위하여 취처할 필요가 없는 경우, 군사상의 필요로 취처를 금제하여 있는 경우 등에 있어서는, 그다지 조혼이 아닌 것 같다.
쪽수▶P66-3 如斯히 早婚의 要因이 萬若 大家族主義의 中에 胚胎하여 있는 것이라하면, 大家族 組織을 基礎로 한 다른 民族社會에 있어서도, 亦是 早婚의 傾向이 있음을 推察할수 있는 일이다. 世界의 歷史上으로보면, 이 早婚의 現象은 決▶P67-1코 朝鮮에만 限한 것이 아니다. 「웨수타마─크」에 依하면, 諸多未開民族에 있어서는 거반 모든 男女가 發情期(Puberty)에 達하자마자 곧 結婚하는것을 原則으로 삼는다 한다(주석20). 인디안 諸族,아프리칸 諸族, 南北 아메리카 인디안諸族 等 모두가 다 早期 婚姻을 하는 것이나, 다만 이러한 境遇에 限하여 例外로 되어있다. 即 多妻主義에 基本하여 富權階級의 獨占한 바 되어야 女子를 求하기 困難한 境遇, 購買婚이 甚하여 新婦가 너무 高價임으로 女子를 求하기 困難한 境遇, 族外婚(Exoganmy)의 制度가 嚴格하여 配偶를 求하기 困難한 境遇, 僧侶 또는 魔法師가 되기 爲하여 娶妻할 必要가 업는 境遇, 軍事上의 必要로 娶妻를 禁制하여있는 境遇 等에 있어서는, 그다지 早婚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미개사회에 있어서의 조혼의 원인은 미개사회의 특수한 사정에 의한 것이요, 그것은 소위 대가족제 조직의 사회에 있어서와 별이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현대문주21▶이제 일반 미개사회에 있어서, 조혼의 원인을 찾건대[a 21]
1. 성인의 혼인이 일반으로 곤란한 것.
2. 여녀를 취한 것이 안가한 것.
3. 신부의 처녀성이 고가로 평가된 것.
4. 특난계급에 있는 양가의 간에, 특히 친밀의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 것 등등.
이에 대하여 대가족조직의 문명사회에 있어서는, 이와 다른 사정이 있다.
쪽수▶P67-2그러나 이러한 未開社會에 있어서의 早婚의 原因, 未開社會의 特殊한 事情에 依한 것이요, 그것은 所謂 大家族制組織의 社會에 있어서와 別異한 事情이 있는 것이다. 이제 一般 未開社會에 있어서, 早婚의 原因을 찾건대(주석21)
1. 成人의 婚姻이 一般으로 困難한 것.
2. 幼女를 娶한 것이 安價한 것.
3. 新婦의 處女性이 高價로 評價된 것
4. 特楠階級에 있는 兩家의 間에, 特히 親密의 關係를 맺을 必要가 있는 것 等等.
이에 對하여 大家族組織의 文明社會에 있어서는, 이와 다른 事情이 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대가족제도의 가장 발달된 문명민족으로서는 먼저 로마 민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가장권은 여기에 설명할 것이 없이 지극히 강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가족의 생살여탈권이 전연가장에게 있었으니 자식의 결혼이 또한 부권의 의사에 매였던 것은 물론이다. 현대문주22▶ 그리고 가계의 존속이란 것이 그들의 혼인의 기본 조건이었다.[a 22] 그러므로 로마법은, 가계를 계승할 자손을 단절치 않도록 유의하였으니 그들의 법제상 가혼연령이 남자 14세 여자 12세로 되어 있음은 또한 로마 사회의 사정을 잘 말만 한 것이었다.
쪽수▶P67-3古代社會에 있어서 大家族制度의 가장 發達된 文明民族으로서는 먼저 로─마 民族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家長權은 여기에 說明할 것이 없이 至極히 强大한 것이었다. 그들은 家族의 生殺與奪權이 全然家長에게 있었으▶P68-1니 子息의 結婚이 또한 父權의 意思에 매였던 것은 無論이다. 그리고 家系의 存績이란 것이 그들의 婚姻의 基本 條件이었다.(주석22) 그러므로 로─마法은, 家系를 繼承할 子孫을 斷絕치 않도록 留意하였으니 그들의 法制上 可婚年齡이 男子 14歲 女子 12歲로 되어있음은 또한 로─마 社會의 事情을 잘 말만 한 것이었다.
유대민족에 있어서는 로마의 가족제도와 다소 별이한 형식의 것이었으나, 역시 혼인의 기본 요구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 있어서는, 자손 없이 죽는 것이 인생 최대의 불행사요 이러한 불행을 면하기 위하여 결혼함이 그들의 중요한 종교적 의무였다. 현대문주23▶그러므로 유대에 있어서는 중세기를 통하여 널리 유년결혼이 유행되었으니 10세 미만의 남녀가 결혼한 일도 드물지 않았었다[a 23]. 유대의 타르무드 법전에는, 남자 13세 여자 12세로 제정되어 있어 그 이하의 유년 결혼은 금제되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허다히 그 이하의 연령에도 혼약이 부권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만약 법정연령에 달하여 부권으로써 혼약을 결정할 때, 그 자녀가 반대할 경우에는 곧 파약할 것이라고 법제상 규정이 있으니, 이 점은 그리스·로마의 혼인법제에 비하여 일단 진보된 것이라 하겠으나, 역시 실제에 있어서는, 현대문주24▶가장권의 절대적 지배로 인하여 자녀의 의사대로 될 바가 아니었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무후를 제일 불효로 삼았고, 무자손을 일생의 최대 불행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부모가 불치의 병이 있을 경우에는, 근친 일동은 그가 아직 약년임을 불문하고, 그의 성혼을 강요한 일도 불감한 것이다. 이같이 자식의 혼기를 잃지 않으려 함은, 그들의 사회 생활상 불가결할 의무이었다. 지나의 풍속에 서서·충양식부·지복혼 등이 있었음은 곧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한 것이라 하겠다. 일본에 있어서는 일찍이 대보율령에 가독상속자의 독신이 법금되어 있음에 의하면, 역시 가계존적이 가족제도의 기초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왕시에 얼만한 정도로 조혼의 경향이 있었던가는 확실히 알 수 없는 길이요, 다만 메이지 이전의 사회에는 상당히 조혼의 사실이 많았을 것이라고 억측할 뿐이다. 현대문주26▶최근에 있어서 법정연령에 달하지 않는 자의 결혼수를 보건대[a 24]
소화 5년 소화 4년 소화 3년 소화 2년 소화 원년
남자(17세 말 기준) 64 68 123 141 161
결혼 1,000건당 0.1 0.1 0.2 0.3 0.3
여자(15세 말 기준) 34 27 27 62 1.16
결혼 1,000건당 0.1 0.1 0.1 0.1 0.2
쪽수▶P68-2 猶太民族에 있어서는 로─마의 家族制度와 多少 別異한 形式의 것이었으나, 亦是 婚姻의 基本 要求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 있어서는, 子孫 없이 죽는 것이 人生 最大의 不幸事요 이러한 不幸을 免하기 爲하여 結婚함이 그들의 重要한 宗敎的 義務이엿다. 그러므로 猶太에 있어서는 中世紀를 通하여 널리 幼年結婚이 流行되었으니 10歲 未滿의 男女가 結婚한 일도 드물지 않았었다.(주석23) 猶太의 타르무─드 法典에는, 男子 13歲 女子 12歲로 制定되어있어 그 以下의 幼年 結婚은 禁制되었으나, 實際에 있어서는 許多히 그 以下의 年齡에도 婚約이 父權에 依하여 決定되었다. 그리하여 萬若 法定年齡에 達하여 父權으로써 婚約을 決定할때, 그 子女가 反對할 境遇에는 곧 破約할 것이라고 法制上 規定이 있으니, 이 點은 希臘·羅馬의 婚姻法制에 比하여 一段 進步된 것이라 하겠으나, 亦是 實際에 있어서는, 家長權의 絕對的 支配로 因하여 子女의 意思대로 될 바가 아니었다.(주석24)
인도에 있어서는 소위 아리안 제족을 통하여, 인생의 행복은 남자의 후계자에 의하여 향사를 받을 일이라고 신하여 내려왔고, 그러므로 일반이 자녀의 결혼을 조달하게 하는 풍습이 이루어졌더니 현금에 있어서 역시 그러함은 우리의 잘 아는 일이다. 그들에 있어서는 미만자를 '사회상으로 거의 무용인으로 보는 것이요, 현대문주27▶더군다나 상급 힌두인에게 있어서는 가혼기를 지난 미혼의 자녀를 가짐은 세인의 심히 비난하는 일로 되어 있다[a 25]. 이러한 미혼의 자녀를 가진 가족은 신의 노화를 받을 일이요, 현대문주28▶그 미혼상태는 삼대조 이래의 죄업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a 26]. 그러므로 그들이 자녀의 혼인을 조속히 하려 함은, 자연의 정세라 할 것이다. 물론 인도에 있어서는 지리적 영향에 의하여 생리적으로 조숙한 사정도 있거니와 역시 그들의 근원적 요구는 후계자를 얻고자 하는 데 기인할 것이요, 현대문주29▶1911년의 인도국세조사에 의하면[a 27] 15세 미만의 결혼자 수는 다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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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부부동거가 요건인 것이 아니요, 발정기에 달하여 적어도 최초의 Menstruation을 지난 후에라야 동거할 것이라 한다. 그것은 고사하고 이같이 다수한 조혼의 풍은, 무식하류의 계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로 상류계급의 간에 있었던 것이, 점차 사회 전반에 전파된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 현대문주30▶리스레─경은 말하되 "사회적 필요에 응하여 가혼기에 있는 자녀를 가진 허다한 상급민간에 그 혼기를 조속히 하는 습속을 이루었던 것이, 점차 일종의 유행이 되어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이것에 추종하였다"[a 28] 한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상급민간에 조혼의 속을 이루었던가? 이에 대하여 일찍이 현대문주31▶웨스타마르크는 가장권의 증대와 그에 수반한 자녀의 종속이란 것이 그 근본 요인이라고 진술하였다[a 29]. 그리하여 그들의 사회에 있어서는 외적의 침서이 빈빈하고 또 그 습래의 시기를 전연 예기할 수 없는 사실이 더 일층 이 조혼의 경향을 촉진하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일반으로 독신을 혐기하고, 또 처녀성을 극도로 존숭하는 일종의 종교적 신앙이 있어 이것이 또한 그 경향을 더욱 현저히 한 것이었다.
쪽수▶P69-2印度에 있어서는 所謂 아─리안 諸族을 通하여, 人生의 幸福 男子의 後繼者에 依하여 亨祀를 받을 일이라고 信하여 내려왔고, 그러므로 一般이 子女의 結婚을 早達하게하는 風習이 이루어졌더니 現今에 있어서 亦然함은 우리의 잘 아는 일이다. 그들에 있어서는 未滿者를 '社會上으로 거반 無用人으로 보는 것이요, 더군다나 上級 힌두─人에게 있어서는 可婚期을 지난 未婚의 子女를 가짐은 世人의 甚히 非難하는 일로 되어있다.(주석27) 이러한 未婚의 子女를 가진 家族은 神의 怒禍를 받을 일이요, 그 未婚狀態는 三代祖 以來의 罪業에 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子女의 婚姻을 早速히 하려 함은, 自然의 情勢라 할 것이다. 勿論 印度에 있어서는 地理的 影響에 依하여 ▶P70-1生理的으로 早熟한 事情도 있거니와 亦是 그들의 根源的 要求는 後繼者를 얻고자 하는데 基因할 것이요, 1911年의 印度國勢調査에 依하면(주석29) 15歲 未滿의 結婚者數는 多數한 것이었다.
김두헌 조선조혼-7.jpg
無論 이런 境遇에는 반드시 夫婦同居가 要件인것이 아니요, 發情期에 達하여 적어도 最初의 Menstruation 을 지난 後에라야 同居할 것이라 한다. 그것은 姑捨하고 이같이 多數한 早婚의 風은, 無識下流의 階級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主로 上流階級의 間에 있었던 것이, 漸次 社會 全般에 傳播된 것이었다. 이에 關하여 리스레─卿은 말하되 『社會的 必要에 應하여 可婚期에 있는 子女를 가진 許多한 上級民間에 그 婚期를 早速히 하는 習俗을 이루엇던 것이, 漸次 一種의 流行이 되어 모든 階級의 사람들이, 盲目的으로 이것에 追從하였다』(주석30) 한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上級民間에 早婚의 俗을 이루었던가? 이에 對하여 일찍이 웨스타마르크는 家長權의 增大와 그에 隨伴한 子女의 從屬이란 것이 그 根本 要因이라고 陳述하였다(주석31). 그리하여 그들의 社會에 있어서는 外敵의 侵署이 頻頻하고 또 그 襲來의 時期를 全然 豫期할 수 없는 事實이 더 一層 이 早婚의 傾向을 促進하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P71-1은 一般으로 獨身을 嫌忌하고,또 處女性을 極度로 尊崇하는 一種의 宗敎的 信仰이 있어 이것이 또한 그 傾向을 더욱 顯殊히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보건대 대가족조직의 민족사회에 있어서는, 다같이 조기혼인의 경향이 있음을 알 것이다. 물론 이상에 거시한 제민족 간에 조선과 같이(인도는 예외로 치고) 조혼의 풍이 심하였다 함은 아니다. 또한 대가족제도의 기구 그 자신이 필연적으로 조혼의 원인을 이룬 것이라고 극언함도 아니다. 다만 조혼의 맹아는 벌써 대가족조직에 배태하였던 것이, 그 부자연한 발달의 결과로 어떤 조건에 조장되고 촉진되어 조혼의 속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다.
쪽수▶P69-2이와 같이 보건대 大家族組織의 民族社會에 있어서는, 다같이 早期婚姻의 傾向이 있음을 알 것이다. 無論 以上에 擧示한 諸民族間에 朝鮮과 같이(印度는 例外로 치고)早婚의 風이 甚하였다함은 아니다. 또한 大家族制度의 機構 그 自身이 必然的으로 早婚의 原因을 이룬 것이라고 極言함도 아니다. 다만 早婚의 萌芽는 벌서 大家族組織에 胚胎하엿던 것이, 그 不自然한 發達의 結果로 어떤 條件에 助長되고 促進되어 早婚의 俗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문6: 六


조선에 있어서는 과연 조혼의 속을 촉진한 이대 특수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대원(몽고) 외교 상의 필요로 생긴 이 헌녀(獻女)정책과 왕가동택의 필요로 된 민가처녀금혼의 법제이다. 이제 이 이대사실이 조혼에 영향한 경과를 고찰하리라.
쪽수▶P71-3朝鮮에 있어서는 果然 早婚의 俗을 促進한 二大特殊事情이 있었다. 그것은 對元 (蒙古) 外交上의 必要로 생긴 이 獻女政策과 王家棟擇의 必要로 된 民家處女禁婚의 法制이다. 이제 이 二大史實이 早婚에 影響한 經過를 考察하리라.
먼저 원에 대한 공녀정책에 대하여 보건대, 그것은 벌써 고려시대의 일이다. 고려는 원과의 수교에 의하여 문화 갱신상에 소득이 결코 적지 않은 바였다. 그러나 이 공녀의 일에 있어서는 전연 치명상이었다. 일찍이 고려의 왕가에 있어서는, 원의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처음 동안은 친밀한 국교를 유지하였다. 현대문주32▶고려 원종조에는 왕세자가 원경에 재류할 동안, 원제(세조)의 황녀 홀도루결리속실을 맞았으니, 곧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왕이었다[a 30]. 고려 충숙왕 15년엔 화평군 심의 딸 현대문주33▶김씨가 원에 영입되어 옥후가 되었고[a 31], 기타 수많은 예가 사상에 요연하다. 그렇더니 고려는 고종·원종 시대 이래로 자주 원의 내공을 받아 매년 공녀를 강요됨에 이르렀다. 고려 원종 15년 원의 매빙사가 내조하여, 송의 항인 만자의 부를 구함에 당하여, 정부는 결혼도감이라는 관제를 설치해 이에 응하였고, 충렬왕 2년, 원사 양중신이 내조하여 미혼녀를 구함에 당하여, 또 정부는 과부처녀추고별감 정랑 김응문 등 5인을 각도로 파견하여, 이에 응하였다. ─단 이때에는 사정에 의하여 실현하지 못하였으나, 그러면 왜 이같이 다수 미혼녀를 필요로 삼았든가는 한번 살펴볼 만한 일이나, 이제 여기에는 논외의 문제로 삼거니와, 여하간 원의 주구에 응하여 수십 인 내지 수백 인의 처녀를 탐색하였고 또한 정부가 자진하여 원에 헌녀한 사실이 고려사상에 역연하여, 이것을 매거(枚擧)하기에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할 때마다 전국에 금혼령이 반포되었으니 그 한둘의 예를 기록에 보건대

현대문주35▶忠烈王二年十月壬子. 以將獻處女于元. 禁國中婚嫁[a 32]

현대문주36▶同三十三年九月癸酉. 前王命都評議司 女年十六歲下 十三歲以上 母得擅嫁. 必須申聞而後許婚. 違者罪之 [a 33]

쪽수▶P71-4먼저 元에 對한 貢女政策에 就하여 보건대, 그것은 벌서 高麗時代의 일이다. 高麗는 元과의 修交에 依하여 文化更新上에 所得이 決코 不尠한 바였다. 그러나 이 貢女의 일에 있어서는 全然 致命傷이엿다. 일찍이 高麗의 王家에 있어서는, 元의 王室과 婚姻 關係를 맺어 처음 동안은 親密한 國交를 保持하였다. 高麗 元宗朝에는 王世子가 元京에 在留할 동안, 元帝(世祖)의 皇女 忽都魯揭里速失을 마쳤으니, 곧 忠烈王妃 濟國大長公王이였고(주석32) 高麗 忠肅王 15年엔 化平君 深의 女 金氏가 元에 迎入되어 玉后가 되었고(주석33) 其他 數多한 例가 史上에 瞭然하다. 그렇더니 高麗▶P72-1는 高宗·元宗 時代 以來로 자주 元의 來攻을 받아 每年 貢女를 强要됨에 이르렀다. 高麗 元宗 15年 元의 媒聘使가 來朝하여, 宋의 降人 蠻子의 婦를 求함에 當하여, 政府는 結婚都監이라는 官制를 設하여 이에 應하였고, 忠烈王 2年,元使楊仲信이 來朝하여 未婚女를 求함에 當하여, 또 政府는 寡婦處女推考別監 正郞 金應文 等 5人을 各道로 派遣하여, 이에 應하였다. ─但 이때에는 事情에 依하여 實現하지 못하였으나, 그러면 왜 이같이 多數 未婚女를 必要로 삼았든가는 한번 살펴 볼만한 일이나, 이제 여기에는 論外의 問題로 삼거니와, 如何間 元의 誅求에 應하여 數十人 乃至 數百人의 處女를 探索하였고 또한 政府가 自進하여 元에 獻女한 事實이 高麗史 上에 歷然하여, 이것을 枚擧하기에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할 때마다 全國에 禁婚令이 頒布되었으니 그 一二의 例를 記錄에 보건대,

忠烈王二年十月壬子. 以將獻處女于元. 禁國中婚嫁(주석35)

同三十三年九月癸酉. 前王命都評議司 女年十六歲下 十三歲以上 母得擅嫁. 必須申聞而後許婚. 違者罪之 (주석36)

이와 같이 금혼령이 반포할 동안 직접 그 임에 당한 선녀감찰관의 전단은 지극히 기혹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민간에 있어서는, 연소한 여식일지라도, 혹은 이것을 은닉하며, 혹은 이것을 결혼시키는 등, 실로 참상을 극함이 있었던 것이다.

현대문주39▶忠烈王二十四年壬寅. 命巡馬所 選良家女 將以進帝. 所及使恇百僚密疏有女家投主司.於是 有睚眦之怨者. 雖無女 亦指之 以致騒擾. 鷄犬不得寧焉. 潜納婚者頰多.[a 34]

라 하였으니, 그 정세를 가히 알 수 있다. 본래 이에 선택될 여자는 허다히 동녀였으나, 그곳에는 여정의 독녀, 역적의 처, 승인의 딸 등을 궁수할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쪽수▶P72-2이와 같이 禁婚令이 頒布할 동안 直接 그 任에 當한 選女監察官의 專壇은 至極奇酷한 것이었음은 無論이다. 그러므로 民間에 있어서는, 年少한 女媳일지라도, 或은 이것을 隱匿하며, 或은 이것을 結婚시키는 等, 實로 慘狀을 極함이 있었던 것이다.

忠烈王二十四年壬寅. 命巡馬所 選良家女 將以進帝. 所及使恇百僚密疏有女家投主司.於是 有睚眦之怨者. 雖無女 亦指之 以致騒擾. 鷄犬不得寧焉. 潜納婚者頰多.(주석39)

라 하였으니, 그 情勢를 可知이다. 本來 이에 選擇될 女子는 許多히 童女이었으나, 그곳에는 閭井의 獨女, 逆賊▶P73-1의 妻 僧人의 女 等을 窮搜할 境遇도 不尠하였던 것이다.
이에 그 사회적 폐단은 점차로 식자 간에 논의됨에 이르러 그 방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충렬왕 원년에는 대부 경박유의 상소에,

현대문주38▶異國人 來娶妻 無定限. 臣恐人物皆將北流. 請許臣僚之庶妻婚嫁以備人物之北流[a 35]

라 하였고 또 충숙왕 시에, 전의부령 이곡은, 원의 인종제에 향하여 신극한 항의문으로써 직접 단판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 소문을 보건대, 현대문주39▶또한 당시의 참경을 규지하기에 족함이 있으므로 다소 장문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인용하는 것이다.[a 36]

古之聖王 治其天下也 一視同仁. (中略)高麗本在海外 別作一國 苟非中國有聖人 邈然不與相通中 (中略) 歲取童女。絡繹輦來。夫其取人之女以媚於上。爲己之利。此雖高麗自取之也。旣稱有旨。豈不爲國朝之累乎. (中略) 奪人室女 甚爲不可. 夫人之生子 鞠之育之 將以望其反哺也 無尊卑之別·華夷之閒 其爲天性一也. 抑彼風俗 寧使男異居 女則不出 若爲秦之贅壻然. 凡致養于父母者 有女之尸焉故 其生女也 恩斯勤斯 日夜望其長 能有以奉養. 而一朝奪之懷抱之中 送之四千里外 足一出門 終身不返 其爲情何如也 今高麗婦女 在后妃之列 配王侯之貴 而公卿大臣 多出於高麗外甥者. 此其本國王族及閥閱豪富之家 特蒙詔旨 或情願自來 且有媒聘之禮焉 固非常事 而好利者 援以爲例. 凡今使其國者 皆欲妻妾 非但取童女而已. 夫使于四方 將以宣布上恩 詢咨民隱 詩不云乎 周爰咨詢 周爰咨諏. 今乃使于外國 貨色是黷 不可不禁也. 側聞 高麗之人 生女者卽秘之 惟慮不密 雖比隣不得見. 每有使臣至自中國 便失色相顧曰 ‘胡爲乎來哉 非取童女者耶 非取妻妾者耶’ 已而軍吏四出 家搜戶捫 若或匿之 則繫累其隣里 縛束其親族 鞭撻困苦 見而後已. 一遇使臣 國中騷然 雖雞犬不得寧焉. 及其聚而選之 姸醜不同 或啖其使臣而飽其欲 雖美而舍之. 舍之而他求 每取一女 閱數百家. 唯使臣之爲聽 莫或敢違何者 稱有旨也. 如此者 歲再焉或一焉閒歲焉 其數多者 至四五十. 旣在其選 則父母宗族相聚 哭泣日夜聲不絶. 及送于國門 牽衣頓仆 欄道呼號 悲痛慣懣. 有投井而死者 有自縊者 有憂愁絶倒者 有血泣喪明者 如此之類 不可殫記. 其取爲妻妾者 雖不若此 逆其情取其怨 則無不同也. 書曰 ‘匹夫匹婦 不獲自盡 民主罔與成厥功.’ 恭惟 國朝德化所及 萬物咸遂 高麗之人 獨有何罪而受此苦乎 昔東海有寃婦 三年大旱 今高麗有幾寃婦乎 比年其國水旱相仍 民之飢莩者甚衆 豈其怨歎能傷和氣乎 今以堂堂天朝 豈不足於後庭 而必取之外國乎 雖承恩於朝夕 猶懷父母鄕黨 人之至情也 而乃置之宮掖 愆期虛老 時或出之 而歸之寺人 終無嗣者十之五六 其怨氣傷和 又何如也 事有小弊而爲國之利者 容或有之 然不若無弊之爲愈也. 况無益於國家 取怨於遠人 其爲弊不小者哉 伏望 渙發德音 敢有冒干內旨 上瀆聖聽 下爲己利而取童女者 及使于其國而取妻妾者 明示條禁 絶其後望. 以彰聖朝同仁之化 以慰外國慕義之心 消怨致和 萬物育焉 不勝幸甚

쪽수▶P73-2이에 그 社會的 弊端은 漸次로 識者間에 論議됨에 이르러 그 防止策을 講究하게 되었다. 忠烈王 元年에는 大府 卿朴褕의 上疏에.

異國人 來娶妻 無定限. 臣恐人物皆將北流. 請許臣僚之庶妻婚嫁以備人物之北流(주석38)

라 하였고 또 忠肅王時에, 典儀副令 李穀은, 元의 仁宗帝에 向하여 辛棘한 抗 議文으로써 直接 斷判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 疏文을 보건대, 또한 當時의 慘況을 窺知하기에 足함이 있으므로 多少 長文임에도 不顧하고 여기에 引用하는 것이다.(주석39)

古之聖王 治其天下也 一視同仁. (中略)高麗本在海外 別作一國 苟非中國有聖人 邈然不與相通中 (中略) 歲取童女。絡繹輦來。夫其取人之女以媚於上。爲己之利。此雖高麗自取之也。旣稱有旨。豈不爲國朝之累乎. (中略) 奪人室女 甚爲不可. 夫人之生子 鞠之育之 將以望其反哺也 無尊卑之別·華夷之閒 其爲天性一也. 抑彼風俗 寧使男異居 女則不出 若爲秦之贅壻然. 凡致養于父母者 有女之尸焉故 其生女也 恩斯勤斯 日夜望其長 能有以奉養. 而一朝奪之懷抱之中 送之四千里外 足一出門 終身不返 其爲情何如也 今高麗婦女 在后妃之列 配王侯之貴 而公卿大臣 多出於高麗外甥者. 此其本國王族及閥閱豪富之家 特蒙詔旨 或情願自來 且有媒聘之禮焉 固非常事 而好利者 援以爲例. 凡今使其國者 皆欲妻妾 非但取童女而已. 夫使于四方 將以宣布上恩 詢咨民隱 詩不云乎 周爰咨詢 周爰咨諏. 今乃使于外國 貨色是黷 不可不禁也. 側聞 高麗之人 生女者卽秘之 惟慮不▶P74-1密 雖比隣不得見. 每有使臣至自中國 便失色相顧曰 胡爲乎來哉 非取童女者耶 非取妻妾者耶 已而軍吏四出 家搜戶捫 若或匿之 則繫累其隣里 縛束其親族 鞭撻困苦 見而後已. 一遇使臣 國中騷然 雖雞犬不得寧焉. 及其聚而選之 姸醜不同 或啖其使臣而飽其欲 雖美而舍之. 舍之而他求 每取一女 閱數百家. 唯使臣之爲聽 莫或敢違何者 稱有旨也. 如此者 歲再焉或一焉閒歲焉 其數多者 至四五十. 旣在其選 則父母宗族相聚 哭泣日夜聲不絶. 及送于國門 牽衣頓仆 欄道呼號 悲痛慣懣. 有投井而死者 有自縊者 有憂愁絶倒者 有血泣喪明者 如此之類 不可殫記. 其取爲妻妾者 雖不若此 逆其情取其怨 則無不同也. 書曰 ‘匹夫匹婦 不獲自盡 民主罔與成厥功. 恭惟 國朝德化所及 萬物咸遂 高麗之人 獨有何罪而受此苦乎 昔東海有寃婦 三年大旱 今高麗有幾寃婦乎 比年其國水旱相仍 民之飢莩者甚衆 豈其怨歎能傷和氣乎 今以堂堂天朝 豈不足於後庭 而必取之外國乎 雖承恩於朝夕 猶懷父母鄕黨 人之至情也 而乃置之宮掖 愆期虛老 時或出之 而歸之寺人 終無嗣者十之五六 其怨氣傷和 又何如也 事有小弊而爲國之利者 容或有之 然不若無弊之爲愈也. 况無益於國家 取怨於遠人 其爲弊不小者哉 伏望 渙發德音 敢有冒干內旨 上瀆聖聽 下爲己利而取童女者 及使于其國而取妻妾者 明示條禁 絶其後望. 以彰聖朝同仁之化 以慰外國慕義之心 消怨致和 萬物育焉 不勝幸甚

이와 같이 공녀의 폐는 자못 큰 것이었더니, 고려말 공민왕 시대부터 명태조 즉위함에 이르러, 원과의 관계가 차차 단절된 이래로, 그 폐해는 감소된 것이었다. 이조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공녀의 난을 면한 것이었으나, 명 또는 청과의 간에 혼인 관계는 자주 있었던 듯하다.
쪽수▶P74-2이와 같이 貢女의 弊는 자못 큰 것이였더니, 高麗末 恭愍王 時代부터 明太祖 即位함에 이르러, 元과의 關係가 潮次 斷絶된 以來로, 그 弊害는 減少된 것이었다.李朝時代에 이르러서는 이미貢女의 難을 免한 것이었으나, 明 또는 淸과의 間에 婚姻關係는 자주 있었는 듯하다.
인조 15년 9월 경오, 청장용마 2인이 심관재신을 초하여 전일의 약조에 따라, 양국인의 통혼을 구하고, 또 명조의 찬진여인의 규에 의하여, 현대문주40▶여색을 헌진하기를 요구하였다[a 37].

현대문주41▶同年九月辛卯, 備局, 婚婦女子 六人을 抄啓하다. 右議政 申景祺妾孫女를 養女로 하니, 年十二歲. 前判書 李溟妾女 年八歲. 工曹判書 李時白養女 年八歲. 前僉知 李厚根妾女 十二歲前判書 沈器遠妾 女年十一歲. 宗室女 一人이 또 그 中에 있었으니 上이 命하여 이를 가게 하고, 디디어 平安兵使 李時英妾女를 그選에充하다.[a 38]

하였으니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쪽수▶P75-1仁祖 15年 9月 庚午,淸將龍馬2人 瀋舘宰臣을 招하여 前日의 約條에 從하여, 兩國人의 通婚을 求하고, 또 明朝의 撰進女人의 規에 依하여, 女色을 獻進하기를 要求하였다.(주석40)

同年九月辛卯, 備局, 婚婦女子 六人을 抄啓하다. 右議政 申景祺妾孫女를 養女로 하니, 年十二歲. 前判書 李溟妾女 年八歲. 工曹判書 李時白養女 年八歲. 前僉知 李厚根妾女 十二歲前判書 沈器遠妾 女年十一歲. 宗室女 一人이 또 그 中에 있었으니 上이 命하여 이를 가게 하고, 디디어 平安兵使 李時英妾女를 그選에充하다.(주석41)

하였으니 그 一端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7: 七


다음에 왕가동택에 의한 처녀금혼제에 대하여 보건대, 연려실 이긍익의 말에,"현대문주42▶自恭定朝(太宗) 行之. 將四百年 尙未奏正. 甚可概也"[a 39]라 하였으니, 벌써 이조 국초 이래의 일인 것이 분명하다. 대체 간택이라 함은 왕실 구혼의 예비제이니, 왕가 자녀의 배우자를 얻기 위하여 전국에 금혼령을 선포하고, 이를 선택하여 초간·재간을 지나 삼간에 이르러 결정한 후, 금혼령이 비로소 해제되는 것이었다. 즉 이제 이것을 태종 시대에 보자.

현대문주43▶置進獻色採童女. 禁中外婚嫁. (中畧) 分遣敬差官于各道 選處女. 除公私賤隷外 良家十三歲以上二十五歲以下 皆令選取尋下旨. 無奴婢兩班及庶人之女. 勿幷刷出. 旣而 又遣敬差內官于各道 選揀. 於是中外洶動. 潛相婚嫁者甚衆.(中畧) 如有犯令人及隱匿不現者 幷罪. (下畧)[a 40]

현대문주44▶黃儼等 選京外處女于景福宮. 京外處女 總三百人. 擇留 四十四人. 餘悉遣還[a 41]

▶P76-1현대문주45▶分遣各道巡察司更選處女. (中略) 百姓各戶. 如有姿色. 一皆採擇. 竝令精潔梳粧. 以待天使之閱視. 如有隱匿女子. 不肯見出. 或有針灸斷髮帖藥. 多方作謀. 規避選擇者. 通政以下直斷. 嘉善以上申聞. 竝以王旨不從論. 職牒收取. 籍沒家産.[a 42]

이와 같이 금혼령이 한번 내리자, 그에 불응한 자가 있으면 엄벌에 처한 것이니, 그것은 택부뿐 아니라 택혼의 경우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역시 현대문주46▶태종 때에 왕은 이속이라는 자의 자를 기마(왕혼)로 삼으려 하여, 고매지화라는 자로 하여금 그의 가를 방문하게 하였더니, 속이 불응한 까닭으로 왕은 분노하여 속의 자로 하여금 종세에 처처하지 못하게 하였었다.[a 43] 그리하여 이 간택의 제도는 태종 이래로 세종, 세조의 시대를 경하여, 선조 시대에 이르러 가장 심혹한 바가 있었다.
쪽수▶P75다음에 王家棟擇에 依한 處女禁婚制에 就하여 보건대, 燃藜室 李肯翊의 言에, 현대문주42▶自恭定朝(太宗) 行之. 將四百年 尙未奏正. 甚可概也」(주석42)라 하였으니, 벌써 李朝國初 以來의 일인 것이 分明하다. 大抵 揀擇이라 함은 王室 求婚의 豫備制이니 王家 子女의 配偶를 얻기 爲하여 全國에 禁婚令을 宣布하고, 이를 選擇하여 初揀再揀을 지나 三揀에 이르러 決定한 後, 禁婚令이 비로소 解除되는 것이었다. 即今 이것을 太宗時代에 보자.

置進獻色採童女. 禁中外婚嫁. (中畧) 分遣敬差官于各道 選處女. 除公私賤隷外 良家十三歲以上二十五歲以下 皆令選取尋下旨. 無奴婢兩班及庶人之女. 勿幷刷出. 旣而 又遣敬差內官于各道 選揀. 於是中外洶動. 潛相婚嫁者甚衆.(中畧) 如有犯令人及隱匿不現者 幷罪. (下畧)(주석43)

黃儼等 選京外處女于景福宮. 京外處女 總三百人. 擇留 四十四人. 餘悉遣還(주석44)

▶P76-1分遣各道巡察司更選處女. (中略) 百姓各戶. 如有姿色. 一皆採擇. 竝令精潔梳粧. 以待天使之閱視. 如有隱匿女子. 不肯見出. 或有針灸斷髮帖藥. 多方作謀. 規避選擇者. 通政以下直斷. 嘉善以上申聞. 竝以王旨不從論. 職牒收取. 籍沒家産.(주석45)

이와 같이 禁婚令이 한번 내리자, 그에 不應한 者가 있으면 嚴罰예 處한 것이니, 그것은 擇婦뿐이 아니라 擇婚의 境遇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亦是 太宗時에 王은 李續이라는 者의 子를 騎馬(王婚)로 삼으려 하여, 瞽媒池和라는 者로 하여금 그의 家를 訪하게 하였더니, 續이 不應한 까닭으로 王은 憤怒하여 續의 子로 하여금 終世 娶妻치 못하게 하였었다.(주석46) 그리하여 이 揀擇의 制는 太宗 以來로 世宗, 世祖의 時代를 經하여, 宣祖時代에 이르러 가장 甚酷한 바가 있었다.

현대문주47▶宜朝三十四年 十一月甲辰. 禮曹啓曰 (上略) 請自今月十一日 爲始. 京外 一切禁婚事 掛榜知悉. 且令五部及各道 處女單子 急速捧入. 此外 節目及定限 則憑考規例. 更爲禀 旨舉行 何如. 大臣之意 亦然. 敢啓 傳日允. 自十四歲以上. 且選擇時. 着尹家常服之服. 慎勿着奢侈之衣事 井預爲知悉[a 44]

현대문주48▶同十一月癸卯. 禮曹啓曰. 中外 一切禁婚事 今日爲始. 已爲掛榜知悉. 庶孽下賤 當不在禁婚中. 而如宗室之女. 姓李之女. 寡婦之女. 外及未禁婚前已爲納弊云. 此言出於傳聞 非謄錄可據. 臣等之意. 宗室女. 姓李女. 寡婦女分明易知 雖許婚 可也. 至如已納幣之人 則雖不可捧單 而若使呈本曹許婚. 則不無混淆紛擾之弊. 何以爲之. 敢禀. 傳曰允. 不多日間矣. 已納幣人 姑爲井禁. 俾勿紛擾不妨.[a 45]

이것을 보면 이미 혼약을 맺은 후 납폐를 필한 자에게까지 선택하게 하니, 그 폐단이 극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요, 그 국에 처한 관속의 단견은 가히 증오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선녀관이 일차 민가에 도착하면, 본인은 물론이요, 그 부모는 낙부를 불문하고 그 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례를 들건대.

현대문주49▶英廟朝(世宗). 光廟(世祖) 以首陽大君在潛邸. 吉禮未定 初以貞熹王后之兄議婚. 監察可氏在其家. 主夫人奉處女而出. 與之對坐. 貞熹年向少 短衣童髮 隱於夫人之後而觀之. 主夫人 推入之曰. 汝之坐次尙遠 何敢出頭乎. 可氏告主夫人曰. 其阿只氣像不凡. 非常之非. 請更觀之. 嘉歎不已. 入闢啓之 遂與定禮. 可氏知人之鑑 至今稱之. [a 46]

쪽수▶P76-2

宜朝三十四年 十一月甲辰. 禮曹啓曰 (上略) 請自今月十一日 爲始. 京外 一切禁婚事 掛榜知悉. 且令五部及各道 處女單子 急速捧入. 此外 節目及定限 則憑考規例. 更爲禀 旨舉行 何如. 大臣之意 亦然. 敢啓 傳日允. 自十四歲以上. 且選擇時. 着尹家常服之服. 慎勿着奢侈之衣事 井預爲知悉(주석47)

同十一月癸卯. 禮曹啓曰. 中外 一切禁婚事 今日爲始. 已爲掛榜知悉. 庶孽下賤 當不在禁婚中. 而如宗室之女. 姓李之女. 寡婦之女. 外及未禁婚前已爲納弊云. 此言出於傳聞 非謄錄可據. 臣等之意. 宗室女. 姓李女. 寡婦女分明易知 雖許婚 可也. 至如已納幣之人 則雖不可捧單 而若使呈本曹許婚. 則不無混淆紛擾之弊. 何以爲之. 敢禀. 傳曰允. 不多日間矣. 已納幣人 姑爲井禁. 俾勿紛擾不妨.(주석48)

이것을 보면 이미 婚約을 맺은 後 納幣를 畢한 者에게까지 選擇하게하니, 그 弊端이 極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요 ▶P77-1그 局에 處한 官屬의 短見은 可히 憎惡할만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選女官이 一次 民家에 到함에는, 本人은 勿論이요, 그 父母는 諾否를 不問하고 그 命에 服從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一例를 들건대.

英廟朝(世宗). 光廟(世祖) 以首陽大君在潛邸. 吉禮未定 初以貞熹王后之兄議婚. 監察可氏在其家. 主夫人奉處女而出. 與之對坐. 貞熹年向少 短衣童髮 隱於夫人之後而觀之. 主夫人 推入之曰. 汝之坐次尙遠 何敢出頭乎. 可氏告主夫人曰. 其阿只氣像不凡. 非常之非. 請更觀之. 嘉歎不已. 入闢啓之 遂與定禮. 可氏知人之鑑 至今稱之. (주석49)

상식적으로 보면, 민가의 자녀로서 왕가에 가취함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도 같다. 사실상 사대부가의 혹자는 왕가와 인척 관계에 있는 일이 그들의 권세를 유지하기에 소원이었음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진하여 자기의 자녀가 선택되도록 책동한 자도 불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곧 정쟁의 요인이 되었던 사실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모든 민가에 있어서는, 이러한 강제적 성질을 가진 혼인 관계를 소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간택에 의한 금혼령은 언제 내려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있는 사람이면 그 연령을 불문하고 성혼시키려 함은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쪽수▶P77-2常識的으로 보면, 民家의 子女로서 王家에 嫁娶함을 光榮으로 생각할 것도 같다. 事實上 士大夫家의 或者들은 王家와 姻戚 關係에 있는 일이 그들의 權勢를 維持하기에 所願이었음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自進하여 自己의 子女가 選擇되도록 策動한 者도 不勘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곧 政爭의 要因이 되었던 史實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모든 民家에 있어서는, 이러한 强制的 性質을 가진 婚姻關係를 所望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揀擇에 依한 禁婚令은 언제 내려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므로 子女가 있는 사람이면 그 年齡을 不問하고 成婚시키려 함은 無理가 아니었던 것이다.

현대문주50▶孝宗四年 九月丙辰. 國法 宮人例 選各司之婢. 今反侵及良民 使宦寺主之. 聞者竊嘆焉. 命内需司. 選入良家之女 爲宮女. 於是 內司之人 搜括民間. 累日不己. 閭里騷擾. 十歲以上者 爭相婚嫁避之. [a 47]

이것은 궁녀 선입의 경우이나, 이것으로써 일반 민간의 심리는 넉넉히 찰지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같이 불합리한 왕가 전단의 정치적 시설에 대하여, 민간의 원성은 자못 높았을 것이다. 식자의 간에는 점차 그 폐단을 논의하게 되고, 더구나 유자들은 그것이 비례임을 갈파하게 되었다. 이제 순조시인 이긍익의 간택타파론의 일단을 들건대

현대문주51▶我朝揀擇之非. 栗谷己言之功. 而宣祖不果用. 附馬之揀 己甚不可 而妃嬪之擇 尤乖於禮. 王姬之下嫁 帝乙之婦妹 自有正禮. 爲一女子 盡聚國內童男而選擇. 己極違禮意. 初擇若干人. 再擇三人.卜日 更選一人 名三棟擇. 禮義之邦 萬萬不可有此事. 况王妃及世子 嬪大君王子夫人之選 皆如此. 待士族處子之道 斷不宜如此. 云云[a 48]

그러나 간택의 제도는 여전히 잔속하여 이조 400년간을 통하여 조혼을 촉진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왕실 자녀 간에 이미 조혼의 경향이 현저하였음은 습속의 유포성에 의하여 더욱 그 효과를 크게 한 것이었다. 현종 시인 유흥원의 말은 곧 이것을 잘 설파함이었다.

현대문주52▶凡男女昏娶. 年歲必從禮制 禁早婚者. 古禮 男子三十而娶 女子二十而嫁. 後賢叉的禮令 男自十六 至三十 女自十四, 至二十. 其參酌人情 亦至矣. 今王子女 婚娶太早. 貴或慕倣之 因以成風 傷敎化 致疾天之本. 宜自國家一從禮制 申禁在下之違者也.[a 49]

쪽수▶P77-3

孝宗四年 九月丙辰. 國法 宮人例 選各司之婢. 今反侵及良民 使宦寺主之. 聞者竊嘆焉. 命内需司. 選入良家之女 爲宮女. 於是 內司之人 搜括民間. 累日不己. 閭里騷擾. 十歲以上者 爭相婚嫁避之. (주석50)

이것은 宮女 選入의 境遇이나, 이것으로써 一般 民間의 心理는 넉넉히 察知할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같이 不合理한 王家 專壇의 政治的 施設에 對하여, 民間의 怨聲은 자못 높았을 것이다. 識者의 間에는 漸次 그 弊端을 論議하▶P78-1게 되고 더구나 儒者들은 그것이 非禮임을 喝破하게 되었다. 이제 純祖時人 李肯翊의 揀擇打破論의 一端을 들건대

我朝揀擇之非. 栗谷己言之功. 而宣祖不果用. 附馬之揀 己甚不可 而妃嬪之擇 尤乖於禮. 王姬之下嫁 帝乙之婦妹 自有正禮. 爲一女子 盡聚國內童男而選擇. 己極違禮意. 初擇若干人. 再擇三人.卜日 更選一人 名三棟擇. 禮義之邦 萬萬不可有此事. 况王妃及世子 嬪大君王子夫人之選 皆如此. 待士族處子之道 斷不宜如此. 云云(주석51)

그러나 揀擇의 制는 依然이 殘續하여 李朝 400年間을 通하여, 早婚을 促進하게하는 要因이 되였든 것이다. 그뿐 아니라 王室子女의 間에 이미 早婚의 傾向이 顯殊하였음은 習俗의 流布性에 依하여 더욱 그 效果를 크게 한 것이었다. 顯宗時人, 柳馨遠의 말은 곧 이것을 잘 說徙함이었다.

凡男女昏娶. 年歲必從禮制 禁早婚者. 古禮 男子三十而娶 女子二十而嫁. 後賢叉的禮令 男自十六 至三十 女自十四, 至二十. 其參酌人情 亦至矣. 今王子女 婚娶太早. 貴或慕倣之 因以成風 傷敎化 致疾天之本. 宜自國家一從禮制 申禁在下之違者也.(주석52)












































본문8: 八


이상에 진술한 사유 이외에 조선에 있어서 조혼을 촉진하게 한 부인을 탐구하면, 그것은 곧 결혼의 범위와 기간이 너무 협애하게 한정되어 있다는 사회적 사정을 거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하여, 공등무성씨의 논술한 바 있으니, 그것을 보건대 씨는 다음 여덟 가지 조목을 들어 말하였다.

1. 동본동성은 결혼하지 못함.
2. 이성도 동근인 경우에는 결혼하지 못함.
3. 적출자·서자·사생자 상호는 결혼하지 못함.
4. 양반·상민·천민 상호 간은 결혼하지 못함.
5. 소속당파를 달리하면 상호 결혼하지 못함.
6. 상중에는 금혼함.
7. 명궁이 상합치 않으면 혼인하지 않음.
8. 일단 사제였던 자는 상혼함을 불가함.

쪽수▶P78-3以上에 陳述한 事由 以外에 朝鮮에 있어서 早婚을 促進하게한 副因을 探求하면, 그것은 곧 結婚의 範圍와 期間이 넘어 狹隘하게 限定되어있다는 社會的 事情을 擧示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關하여, 工藤武城氏의 論述한 바 있으니, 그것을 보건대 氏는 다음 八箇 條目을 들어말하였다.

1. 同本同姓은 結婚하지 못함.
▶P79-12. 異姓도 同根인 境遇에는 結婚하지 못함.
3. 嫡出子·庶子·私生子·相互은 結婚하지 못함.
4. 兩班·常民·賤民 相互間은 結婚하지 못함.
5. 所屬黨派를 달리하면 相互結婚하지 못함.
6. 喪中에는 禁婚함.
7. 命宮相合치 않으면 婚姻하지 않음.
8. 一旦 師弟이었던 者는 相婚함을 不得함.

이상에 거한 조선 특유의 사정, 즉 결혼의 시기를 한정하고 결혼의 범위를 협애하게 한 결과는, 국한된 단시일 내에 또 협애한 범위 내에서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여, 그 연령 같은 것을 문제 삼으면 전혀 혼기를 잃어버리게 됨으로, 자연히 연령은 제2의로 되고, 현대문주53▶점차 이러한 조혼의 풍습을 양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a 50]
쪽수▶P79-2以上에 擧한 朝鮮 特有의 事情 即 結婚의 時期를 限定하고, 結婚의 範圍를 狹隘하게 한 結果는 局限된 短時日 內에 또 狹隘한 範圍 內에 配遇를 選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여, 그 年齡 같은 것을 問題삼으면 全然 婚期를 잃어버리게 됨으로 自然히 年齡은 第二義로 되고, 원문주53▶漸次 이러한 早婚의 風習을 釀成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16]
이같이 진술한 바에 대하여 우리의 경청할 만한 것이었다. 즉 동성불혼·상중불혼·상나불혼·이당불혼·남녀궁합 등 사는 의혼에 당하여 언제나 선결 조건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혼의 조건은 일견 조혼의 원인이 될 것 같지 않게 생각되는 것이나, 그것은 엄연한 사회적 풍습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범위와 기한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드디어 자녀의 혼기를 조속하게 함은 부인치 못할 사실일 것이다. 더구나 상중불혼률은 국가의 법제상 지극히 중요시한 것이었다. 춘관통고에는 "仁祖二十一年癸未. 命禁中外乘喪嫁娶者"라 하였고, 속대전 혼가조에는 "英祖二十年甲子. 婚姻一依家禮. 前期納幣之後 有兩家父母喪中. 子之碁服 未盡而徑行婚禮者. 以不謹居喪律論"이라 하였고, 전률통보에는 "祖父母父母喪而嫁娶, 杖八十. 流罪以下勿論. 妾滅二等, 奉祖父母父母命者不坐." 라 하였다. 현대문주54▶이에 의하면, 과연 노령에 있는 부조가 유년의 자녀로 하여금 결혼을 조속하게 함은, 그 이유가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a 51]
쪽수▶P79-3이같이 陳述한 바에 對하여 우리의 傾聽할만한 것이었다. 即 同姓不婚·喪中不婚·常那不婚·異黨不婚·男女宮合 等事는, 議婚에 當하여 언제나 先決 條件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이더한 不婚의 條件은 一見 早婚의 原因이 될 것 같지 않게 생각되는 것이나, 그것은 嚴然한 社會的 風習으로 되어있으므로, 그 範圍와 期限을 犯하지 않도록 하기 爲하여 디디여 子女의 婚期을 早速하게 함은 否認치 못할 事實일 것이다. 더구나 喪中不婚律은 國家의 法制上 至極히 重要視한 것이였다. 春官通考에는 『仁祖二十一年癸未. 命禁中外乘喪嫁娶者』라 하였고, 續大典 婚嫁條에는 『英祖二十年甲子. 婚姻一依家禮. 前期納幣之後 有兩家父母喪中. 子之碁服 未盡而徑行婚禮者. 以不謹居喪律論』▶P80-1라 하였고, 典律通補에는 『祖父母父母喪而嫁娶, 杖八十. 流罪以下勿論. 妾滅二等, 奉祖父母父母命者不坐.』라 하였다. 원문주54▶이에 依하면, 果然 老齡에 있는 父祖가 幼年의 子女로 하여금 結婚을 早速하게 함은, 그 理由가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17]
그러나 또 한 가지 조혼의 근저에는 경제적 조건이 중요한 요인이 되어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가계 존속의 후계자를 욕구하고, 아무리 강대한 가장 권한을 갖고, 아무리 선녀책과 불혼률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경제적 사정이 불허한 자에게 있어서 조혼이 양출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흔히 당권계급에서 조혼의 경향이 현저함은 곧 이러한 까닭이다. 일찍이 세종 시대의 조혼금지론의 일단을 보건대, 또한 이런 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현대문주55▶庚申二十二年三月庚戊. 議政府據禮曹呈啓. 謹按. (中畧) 後世鄙者不察婚婦之性行. 徒慕一時之富貴. 未免童幼爭先議婚. 其弊 不可勝言. (中畧) 宋司馬光曰. 世俗 好於襁褓 輕許爲婚 亦有指腹爲婚者. 及其既長或 不肖無賴. 或有惡疾. 或家貧凍餒. 或喪服祥仍. 或從宦遠方 逐至速獄訟者多矣. 是以 先祖太尉 甞曰. 吾家 必俟旣長 然後議婚. 旣通書 不數月 必成婚. 故終身無此悔. 乃子孫所當法也. 先賢之訓如此. 而今之風俗 尙有慕其富貴議婚太早. 至於高官有識者如此. 非所以合二姓之好 上以奉宗祀 下以繼后世之道也. 自今三月 初八日以後 一依文公家禮. (下畧)[a 52]

쪽수▶P80-2그러나 또 한 가지 早婚의 根底에는 經濟的 條件이, 重要한 要因이 되어있음을 看過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如何히 家系 存續의 後繼者를 欲求하고, 如何히 强大한 家長 權限을 갖고, 如何히 選女策과 不婚律의 支配을 받을지라도 經濟的 事情이 不許한 者에게 있어서 早婚이 釀出되기는 어려울 일이다. 흔히 當權階級에서 早婚의 傾向이 顯著함은 곧 이러한 까닭이다. 일찍이 世宗時代의 早婚禁止論의 一端을 보건대 또한 이런 事情을 知할 수 있는 것이다.

원문주55▶庚申二十二年三月庚戊. 議政府據禮曹呈啓. 謹按. (中畧) 後世鄙者不察婚婦之性行. 徒慕一時之富貴. 未免童幼爭先議婚. 其弊 不可勝言. (中畧) 宋司馬光曰. 世俗 好於襁褓 輕許爲婚 亦有指腹爲婚者. 及其既長或 不肖無賴. 或有惡疾. 或家貧凍餒. 或喪服祥仍. 或從宦遠方 逐至速獄訟者多矣. 是以 先祖太尉 甞曰. 吾家 必俟旣長 然後議婚. 旣通書 不數月 必成婚. 故終身無此悔. 乃子孫所當法也. 先賢之訓如此. 而今之風俗 尙有慕其富貴議婚太早. 至於高官有識者如此. 非所以合二姓之好 上以奉宗祀 下以繼后世之道也. 自今三月 初八日以後 一依文公家禮. (下畧)[18]

그런데 부권계급에 있어서도 여식에 한하여는 출가를 지연한 경향이 있다. 그것은 경제 생활의 여유 있는 부모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동거하려는 자연적 애정에 기인된 까닭이다. 조선의 속담에「말(馬)만한 처녀는 부자집 처녀」라 하여, 비교적 나이 많은 처녀는 부가에 흔하였다. 여기에 계급적 내혼제(Class Endogamy)의 일반률에 의하여, 부자 간에 혼인 관계가 생기면, 부유부장의 결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남편보다 처가 연고한 경우는 우리가 주지한 현상이거니와, 이제 대정 원년 이래, 약 십개년을 격한 삼년간의 조혼자 연령차별을 표시하면 이러하다.
김두헌 조선조혼-8.jpg
쪽수▶P80-3그런데 富權階級에 있어서도 女息에 限하여는 出嫁를 遲延한 傾向이 있다. 그것은 經濟 生活의 餘裕잇는 父母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同捷하려는 自然的 愛情에 基因된 까닭이다. 朝鮮의 俗談에 「말(馬)만한 處女는 富者집 處女」라 하여, 比較的 年多한 處女는 富家에 흔이었다. 여기에 階級的 內婚制(Class Endogamy)의 一般律에 依하여, 富者 間에 婚姻關係가 생기면, 夫幼婦長의 結果를 이루게 된 것이다. 朝鮮에 있어서 男便보다 妻가 年高한 ▶P81-1境遇는 우리가周知한 現象이거니와, 이제 大正 元年 以來, 畧十箇年을 隔한 三年間의 早婚者 年齡差別을 表示하면 이러하다.
김두헌 조선조혼-8.jpg
이에 의하면 쇼와 7년도에 있어서 15세 이상 20세 미만의 처에 대하여 17세 미만의 부는 13,675명이요, 17세 미만의 부에 대하여 20세 이상 25세 미만의 처는 640명이라는 수로 나타나 있다. 당초에 이러한 부자연한 배합의 결과는 수많은 폐단을 이루었거니와, 그중에도 초야의 신랑신부의 방을 엿보는 풍속은 실로 언어도단의 누습이라 하겠다. 일찍이 아정 이덕무는 이에 관하여 논급한 바가 있었다.

習俗不正. 嫁女迎婿. 婿宿三日. 家中婦人 必潜聽伺其私語. 何其媟也. 爲家長者 痛禁其習 可也.

그러고 보면 부권계급에 있어서, 자녀의 혼인을 조속히 함은 소위 유한계급의 일종 사수심리에 의한 점도 없지 않은 것이나, 또 다면으로 보면, 연장의 식부를 얻게 됨은 '가사의 조력자'로서 요구된 경우가 불감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오히려 경제적 조건이 여유치 못한 편이 많다. 현대문주57▶일찍이 러시아의 농민 간에도 있었던 일이니, 아직도 세르비아 아르바니아 지방에는 허다히 있다 한다.[a 53] 조선에 있어서 또한 이런 사정이 있음은 우리의 주지한 바이거니와, 일찍이 순조 시대에 정동유의 말을 듣건대 "현대문주58▶鄕曲小民之俗에 男年이 아직 壯年이 되지 못할 때, 먼저 年壯의 女子를 媒하여 그 집에 迎置하여서 農桑의 勞를 扶助하게 하다가 그 男年이 稍長함을 기다려 더불어 夫婦를 이루게 한다. 이것을 預婦라 하나니, 그러므로 徃徃 婦年이 夫보다 長하기 十數年의 者가 있으니, 此乃 無識下流之輩의 할 일이다[a 54]"하였음은 곧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부장부유의 경우는 허다히 빈민 하층계급에 있는 일이요, 기술한 바같이 여부의 속이 구매혼의 유형이었음은 더욱이 이 조혼이 경제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것이다. 여하간 빈자 간에 계급적 내혼제에 있어서는, 자연히 남자의 혼기를 잃기 용이하고, 여자의 출가를 속히 하는 경향이 있어 여기에 부장부유의 결과를 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민간에 있어서는 부가에 연소한 신부와 연다한 신랑이 없고, 빈가에 연소한 신랑과 나이 많은 신부가 없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는 것이다.
쪽수▶P81-2 이에 依하면 昭和 7年度에 있어서 15歲 以上 20歲 未滿의 妻에 對하여 17歲 未滿의 夫는 13675人이요 17歲 未滿의 夫에 對하여 20歲 以上 25歲 未滿의 妻는 640人이라는 數로 나타나 있다. 當初에 이러한 不自然한 配偶의 結果는 數多한 弊端을 이루었거니와, 그 中에도 初夜의 新郎新婦의 房을 엿보는 風俗은 實로 言語道斷의 陋習이라하겠다. 일찍이 雅亭 李德懋는 이에 關하여 論及한 바가 있었다.

習俗不正. 嫁女迎婿. 婿宿三日. 家中婦人 必潜聽伺其私語. 何其媟也. 爲家長者 痛禁其習 可也.

▶P82-1그러고보면 富權階級에 있어서, 子女의 婚姻을 早速히 함은 所謂 有閑階級의 一種奢修心理에 依한 點도 없지 않은 것이나,또 他面으로 보면, 年長의 息婦를 얻게 됨은, 「家事의 助力者」로서 要求된 境遇가 不勘한 것이다. 이러한 境遇는 오히려 經濟的 條件이 餘裕치 못한 便이 많다. 원문주57▶일찍이 露西亞의 農民間에도 있었던 일이니, 아직도 세르비아 아르바니아 地方에는 許多히 있다 한다.[19] 朝鮮에 있어서 또한 이런 事情이 있음은 우리의 周知한 바이거니와 일찍이 純祖時代에 鄭東愈의 말을 듣건대원문주58▶鄕曲小民之俗에 男年이 아직 壯年이 되지 못할 때, 먼저 年壯의 女子를 媒하여 그 집에 迎置하여서 農桑의 勞를 扶助하게 하다가 그 男年이 稍長함을 기다려 더부러 夫婦를 이루게 한다. 이것을 預婦라 하나니, 그러므로 徃徃 婦年이 夫보다 長하기 十數年의 者가 있으니, 此乃 無識下流之輩의 할 일이다[20] 하였음은 곧 이러한 事情을 잘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反對로, 夫長婦幼의 境遇는 許多히 貧民 下層階級에 있는 일이요, 旣 述한 바같이 預婦의 俗이 購買婚의 遺形이였음은 더욱이 이 早婚이 經濟的 條件과 密接한 關係가 있음을 알 것이다. 何如誾 貧者 間에 階級的 內婚制에 있어서는, 自然히 男子의 婚期를 失하기 容易하고, 女子의 出嫁을 速히 하는 傾向이 있어 여기에 夫長婦幼의 結果를 내인 것이다. 그러므로 一般 民間에 있어서는 富家에 年少한 新婦와 年多한 新郎이 없고, 貧家에 年少한 新郎과 年多한 新婦가 없는 것이 通例로 되어있는 것이다.
이상 논술한 바로써, 조선의 조혼의 원인은 이미 대가족 조직에 배태하여, 그것이 고려에 있어서는 대원 공녀의 정책과 이조에 있어서는 왕가 간택의 관제라는 특수 사정에 인하여 촉진되었으며, 또한 혼인의 범위와 기한의 속박으로 인하여 더욱이 그 경향을 하게 하였음을 알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이루어진 풍습은 자연히 미혼자의 사회적 지위를 극도로 저락하게 하였으니, 인은 과로 되고 또 과는 인으로 되어, 사회적 지위를 저락하게 하지 않고자 더욱이 조혼의 풍습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면 어떠하여 이 조혼의 풍을 일소할 수 있을까, 또 어떠한 연령이 최적할 결혼 연령일 것인가에 대하여는 아직도 남아있는 일사회문제라 하겠다. (1935. 1. 6)
此小篇 昭和9年度 帝國學士院의 學術 硏究 補助費에 依한 「조선가족제도의 연구」의 일부분이다.
쪽수▶P82-2以上 論述한 바로써, 朝鮮의 早婚의 原因은 이미 大家族 組織에 胚胎하여, 그것이 高麗에 있어서는 對元 貢女의 政策과 李朝에 있어서는 王家 揀擇의 官制라는 特殊 事情에 因하여 促進되었으며, 또한 婚姻의 範圍와 期限의 束縛으로 因하여 더욱이 그 傾向을 하게 하였음을 알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이루어진 風習, 自然히 未婚者의 社會的 地位를 極度로 低落하게 하였으니, 因은 果로 되고 또 果는 因으로 되어, 社會的 地位를 低落하게하지 안▶P83-1코저 더욱히 早婚의 風習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면 어떠하여 이 早婚의 風을 一掃할 수 있을까, 또 어떠한 年齡이 最適할 結婚 年齡일 것인가에 對하여는 아직도 남아있는 一社會問題라 하겠다.(一九三五·一·六)
▶P86此小篇 昭和9年度 帝國學士院의 學術 硏究 補助費에 依한 「朝鮮家族制度의 硏究」의 一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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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李朝 世宗莊大王實錄 第37卷 第24枚.
  2. 和田于一 著 婚姻法論 126頁
  3. 同上
  4. 朝鮮總督府編, 調查月報 第2卷 第6號.
  5. 同上
  6. 朝鮮總督府編, 調查資料 第22輯, 朝鮮의 人口現象, 309頁.
  7. 內閣統計局編, 列國國勢調查要覽, 64頁.
  8. 延禧專門學校 教授 李順鐸氏의 計調查에 依함.
  9. 拙稿, 朝鮮의 家族構成 參照.
  10. 李朝 世宗莊大王實錄 第85卷 第46枚.
  11. 鄭東愈 者, 書永 第2卷.
  12. 城大法文學會 第2部 論纂 第2輯, 哲學論集所載, 秋葉隆 敎授 論文, 朝鮮의 婚姻形態.
  13. 史觀 第3冊, 孫晋泰 氏 論文, 朝鮮의 率婿婚俗에 對하여.
  14. 朝鮮史講座 第10講, 村山智順 氏 述, 朝鮮社會制度史.
  15. Fustel de Coulanges: I. cite antique. P. 50. 第28版, 中川善之助 氏 譯, 116頁.
  16. 工藤武城 氏 論文 「朝鮮特有의 犯罪, 本婦殺害犯의婦人科學的考察一.(「朝鮮」, 昭和 8年 3·4·5月號 所揭)
  17. 李能和 氏 著, 朝鮮女俗考第2, 章12 第九章 第11章 參照.
  18. 李朝世宗實錄, 第88卷 第27枚.
  19. Westermarck, ibid. P. 386.
  20. 鄭東愈, 上揭書 第2卷.






현대문주


  1. 이조세종장대왕실록 제37권 제24매.
  2. 화전우일 저 혼인법론 126혈
  3. 위와 같음.
  4. 조선총독부편, 조사월보 제2권 제6호.
  5. 위와 같음.
  6. 조선총독부편, 조사자료 제22집, 조선의 인구현상, 309혈.
  7. 내각통계국편, 열국국세조사요람, 64혈.
  8. 연희전문학교 교수 이순탁씨의 계조사에 의함.
  9. 졸고, 조선의 가족구성 참조.
  10. 이조세종장대왕실록 제85권 제46매.
  11. 정동유 자, 서영 제2권.
  12. 성대법문학회 제2부 논찬 제2집, 철학논집소재, 추엽륭 교수 논문, 조선의 혼인형태.
  13. 사관 제3책, 손진태 씨 논문, 조선의 솔서혼속에 대하여.
  14. 조선사강좌 제10강, 무라야마 지쥰 씨 술, 조선사회제도사.
  15. 삼국지, 고구려전.
  16. Fustel de Coulanges: I. cite antique. P. 50. 제28판, 제노스케 나카가와 씨 역, 116혈.
  17. 이조 태종실록.
  18. 이덕무 저, 사소절권지삼, 사전삼, 인륜편.
  19. 상게, 조선의 혼인형태, 93혈.
  20. Westerma ck: The History of Human Marriage. Vol. 1. P. 337 이하
  21. Westermarck, ibid. P.370
  22. Goodsell: The History of the Family as a Social and Educational Institution. P. 119.
  23. Hastings,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ks. VIII. P. 467.
  24. 조선」(소화 7년 7월호)에 게재된 혼인 연령 통계에 의함.
  25. Mayne, Treatise on Hindu law and Usage P. 83.
  26. Risley Peoples of India. P. 154.
  27. Gerist, Census India (1711) Vol. I. P. 252.
  28. Risley, ibid. P. 190.
  29. Westermarck, ibid. P. 380.
  30. 고려사, 권27.
  31. 위와 같음. 권35.
  32. 위와 같음. 권28.
  33. 위와 같음. 권32.
  34. 위와 같음. 권109, 열전22.
  35. 위와 같음. 권106, 열전19.
  36. 위와 같음. 권109, 열전22.
  37. 심양일기인조, 정축년 9월 5일.
  38. 이조인조실록, 제35권 제36매.
  39. 이긍익 저, 연려실기술별집.
  40. 이조태종실록 제15권 제19매.
  41. 위와 같음. 제16권 제25매.
  42. 위와 같음. 제16권 제2매.
  43. 이황, 성호사설, 국혼간택조.
  44. 이조선종대왕실록 제43권 제6매.
  45. 위와 같음. 제7매,
  46. 이기 송와잡기
  47. 이조효종실록 제11권 제43매.
  48. 이긍익, 위와 같음
  49. 유형원, 반계수록
  50. 공등무성 씨 논문 「조선특유의 범죄, 본부살해범의부인과학적고찰일.(「조선」, 소화 8년 3·4·5월호 소게)
  51. 이능화 씨 저, 조선녀속고제2, 장12 제구장 제11장 참조.
  52. 이조세종실록, 제88권 제27매.
  53. Westermarck, ibid. P. 386.
  54. 정동유, 상게서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