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고려예술 의욕에 끼친 영향의 일고찰

North Korea Humanities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다운받기

불교가 고려예술 의욕에 끼친 영향의 일고찰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佛敎가 高麗藝術 意欲에 끼친 影響의 一考察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7년 11월
시작쪽 57쪽 종료쪽 73쪽 전체쪽 17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신라 말 고려 초에 민중들이 출가피역(出家避役)하는 경향이 농성함에 정경 상 불안을 현대문주1▶고려 태조가 느끼지 아니한 바가 아니었으나[a 1] 현대문주2▶태조 자신이 벌써 불교에 물젖어있어[a 2] 한편으로는 민심의 수람(收攬)과 사원 세력의 조자(助資)를 얻기 위하여 그들을 두호(杜護)치 아니할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후대의 정호작란(政扈作亂)을 원려(遠慮)하여 사원 남립(濫立)‧사재 겸병의 폐를 현대문주3▶도선비기(道詵秘記, 옥룡기)에 의하여 계훈(戒訓)치 아니치 못하였지만[a 3] 역대 제왕은 태조의 이 오의(奧意)를 이해치 못하고 오히려 승과선시의 제를 여러 승려의 관료화의 길을 열고 국사왕사의 승제를 여러 교권을 강화하고 권귀헌면(權貴軒冕)의 수계로부터 사서천례의 출가에 이르기까지 거국이 삼실의 노(奴)가 되고 사시의 성풍은 사원 경제의 국가적 경제에서의 이탈을 더욱더 조장하여갔다.
쪽수▶P57-1新羅末 高麗初에 民衆들이 出家避役하는 傾向이 濃盛함에 政經上 不安을 원문주1▶麗太祖가 느끼지 아니한 바가 아니었으나[1] 원문주2▶太祖自身이 벌써 佛敎에 물젖어있어[2] 한편으로는 民心의 收攬과 寺院勢力의 助資를 얻기 僞하여 그들을 杜護치 아니할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後代의 政扈作亂을 遠慮하여 寺院濫立‧寺財 兼併의 弊를 원문주3▶道詵秘記에 依하여 戒訓치 아니치 못하였지만[3] 歷代諸王은 太祖의 이 奧意를 理解치 못하고 오히려 僧科選試의 制를 여러 僧侶의 官僚化의 길을 열고 國師王師의 僧制를 여러 敎權을 强化하고 權貴軒冕의 受戒로부터 士庶賤隸의 出家에 이르기까지 擧國이 三實의 奴가 되고 捨施의 盛風은 寺院經濟의 國家的 經濟에서의 離脫을 더욱더 助長하여갔다.
이 사이에 있어 불교 자체는 가지기도(加持祈禱)의 타력본원(他力本願)에 타(墮)하여 일반 민중에 미신적으로 젖어들어가 혹은 무〿의 기불행사와 혼나(混儺)되어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무위적멸을 위주하여 청담도풍(淸談道風)과 혼여(混與)되어있어 청건한 신교를 이루지 못한 채 승려의 요속화, 사원의 유원화 등 반갑지 못한 일반적 불순한 혼란 상태는 도리어 고려 전반의 정경‧예문‧신교‧습속 등 백반범사(百般凡事)에 영향되지 아니한 바 없다고 하여도 가하다. 특히 감각적인 것을 통하여 정관의 길로 들어가려는 예술의 본성과, 감각적인 것을 차견함으로써 정관의 길로 들어가려는 종교의 본성과는 방편적으로 적극 소극의 차가 있을지언정 결국 이로동귀라 귀착되는 그 이상향은 한 곳에 있는 까닭에 당대 불교의 융도으로 말미암은 불교적 영향이 란 실로 지대한 바가 있었다고 본다. 물론 당대 예술의 어떠한 것을 보면 일견 불교와는 관계가 없을 듯하나 그러나 다시 돌이켜 그 내면적 정신을 관류하고 있는 것을 반성한다면 어느 하나 불교적 정신에서 벗어날 것이 없다. 도신적 사상이라든지 예술의 백률성 등도 동양에 있어선 적어도 이 불교적 영향을 무시하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18) 고려조에 있어서의 같은 경향을 우리는 하필 중국의 영향이란 것만을 염두에 두고 논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으로 고려 자체도 그 불교적 기반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고 고려 예술에 있어서의 불교의 영향이란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심학을 위주한 선종이 그 대본되는 자라 하겠으니 모든 적상을 차유하고 직지돈오를 주장하는 그곳에 고려 예술로 하여금 특히 객관적 형해에 구애치 않고 주관적 심성을 고조하는 동기를 이루게 한 것이다.
쪽수▶P57-2此間에 있어 佛敎自體는 加持祈禱의 他力本願에 堕하여 一般 民衆에 迷信的으로 젖어들어가 或은 巫〿의 祈祓行事와 混儺되어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無爲寂滅을 爲主하여 淸談道風과 混與되어있어 淸健한 信敎를 이루지 못한 채 僧侶의 妖俗化, 寺院의 遊園化等 반갑지 못한 一般的 不純한 混亂狀態는 도리어 高麗全般의 政經‧藝文‧信敎‧習俗 等 百般凡事에 影響되지 아니한 바 없다고 하여도 可하다. 特히 感覺的 인 것을 通하여 靜觀의 길로 들어가려는 藝術의 本性과, 感覺的 인 것을 遮遣함으로써 靜觀의 길로 들어가려는 宗敎의 本性과는 方便的으로 積極消極의 差가 있을지언정 結局 異路同歸라 歸着되는 그理想鄕은 한 곳에 있는 까닭에 當代佛敎의 隆盜으로 말미암은 佛敎的 影響이▶P58-1란 實로 至大한 바가 있었다고 본다. 勿論 當代藝術의 어떠한 것을 보면 一見 佛敎와는 關係가 없을 듯하나 그러나 다시 돌이켜 그 內面的 精神을 貫流하고 있는 것을 反省한다면 어느 하나 佛敎的 精神에서 벗어날 것이 없다. 道神的 思想이라든지 藝術의 白律性等도 東洋에 있어선 적어도 이 佛敎的 影響을 無視하고서는 到底히 理解할 수 없다.(18) 高麗朝에 있어서의 같은 傾向을 우리는 何必 中國의 影響이란 것만을 念頭에 두고 論할 것이 아니라 歷史的 社會的으로 高麗 自体도 그 佛敎的 羈絆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고 高麗藝衛에 있어서의 佛敎의 影響이란 具體的으로 말한다면 心學을 爲主한 禪宗이 그 大本되는 者라 하겠으니 모든 蹟象을 遮遺하고 直指頓悟를 主張하는 그곳에 高麗藝術로하여금 特히 客觀的 形骸에 拘碍치않고 主 觀的 心性을 高調하는 動機를 이루게 한 것이다.

夫浮屠氏之法一也 或稱禪或稱教何也 佛心謂之禪 佛說爲之教 教也者 得法之具也 沿而得之 則筌蹄 〿 發狗也 如或不然 桎梏文字 而迷其指歸 則終身是々求佛勤 面見效轉遲也 若禪者 佛與祖 見 性之一印也 夫靈源本覺如月清淨 本無點埃 茍不爲 妄靑所染 有以〿光返照 懸解超悟 則自家己分 直趣菩提 其路甚捷 其功甚速 是禪之爲無上大乘也 (李相卷25大安國集寺同前膀)

운이란 것은 간단하나마 고려 일반의 불교에 대한 경향성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이 형해적(이곳에서는 교학으로 표현되어있다)인 것을 떠나서 주관적인 것으로의 경도경향(傾到傾向), 특히 노첩공속(路捷功速)의 길을 취하여 직취보제(直趣菩提)기를 기원하는 그들의 심정의 이면에는─이리하여 식재연명(息災延命)하고 적멸위악(寂滅爲樂)기를 기원하는 그들의 심정의 이면에는 권위의 무상, 병란의 빈기, 계급의 알력 수렴 등, 국가사회적으로 불안하던 그들의 생활의 소극성 허무성과 관련되어 있다. 권귀는 향락안일을 탐하고 승려는 무위한거를 원하는 그 밑에 깔려있는 민중은 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으며 〿은 과를 이루고 과는 인을 이루어 불행한 고륜을 이조 500년간에 상하에 재전코 있었다. 자〿의 〿〿〿 〿〿의 〿일이 심학의 정적과 함께 려조의 정취의 일반을 이루다시피 된 것도 이러한 사회적 성(性)으로 말미암아서이고 그들의 낭만적 향락성‧문학적 산문성‧회화적 저회성도 이러한 사회 정경에서 배양된 이러한 경향성의 소산이였다.
쪽수▶P58-2 夫浮屠氏之法一也 或称禅或称教何也 佛心谓之禅佛说谓 教也者 得法之具也 沿而得之 則筌蹄〿〿狗也 如或不然 桎梏文字 而迷其指歸 則终身遑遑求佛甚勤 而见效转迟也 若禅者 佛与祖 見性之一印也 夫靈源本覺如月清净 本無點埃 苟不爲妄情所染 有以廻光返照 懸解迢悟 則自家已分 直趣菩提 其路甚捷 其功甚速 是禪之爲無上大乘也 (李相國集 卷25 大安寺 同前膀)
云이란 것은 簡單하나마 高麗 一般의 佛敎에 對한 倾向性質을 表現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이 形骸的 (이곳에서는 敎學으로 表現되어있다)인 것을 떠나서 主觀的 인 것으로의 傾到傾向, 特히 路捷功速의 길을 取하여 直趣菩提기를 祈願하는 그들의 心情의 裏面에는─이리하여 息災延命하고 寂滅爲樂기를 祈願하는 그들의 心情의 裡面에는 權威의 無常, 兵亂의 頻起, 階級의 軋轢 收斂 等, 國家社會的으로 不安하던 그들의 生活의 消極性 虛無性과 關連되어 있다. 權貴는 享樂 安逸을 貪하고 僧侶는 無爲閑居를 願하는 그 밑에 깔려있는 民衆은 慘上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으며 〿은 果를 이루고 果는 因을 이루어 不幸한 苦輪을 李朝 500年間에 上下에 再轉코 있었다. 者〿의 〿〿〿 〿〿의 〿▶P59-1逸이 心學의 靜寂과 함께 麗朝의 情趣의 一般을 이루다시피 된 것도 이러한 社會的 性으로 말미암아서이고 그들의 浪漫的 享樂性‧文學的 散文性‧繪畵的 低徊性도 이러한 社會情景에서 培養된 이러한 傾向性의 所產이였다.
이러한 생활 감정, 이러한 사상 경향에서 산출되는 예술이란 고전적 명랑성을 가질 수는 도저히 없고 낭만적 정서적 음영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현실의 생활은 음참하고 사상은 회하나 그로 말미암아 예술에 나타난 음영의 대는 실로 크고 큰 것이었다. 음영이 적은 신라의 예술은 한껏 명랑하고 장엄한 것이므로 누구나 알기 쉽고 종교적 분위가 적은 리조의 예술은 윤기없는 진찬 한편으로 기울어졌으나 정서에 살고 형이상에 물젖은 려조의 예술은 '악극의 애조(哀調)' '적조의 기운'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쪽수▶P59-2이러한 生活感情, 이러한 思想傾向에서 産出되는藝術이란 古典的 明朗性을 가질 수는 到底히 없고 浪漫的 情緖的 陰影이 深刻한 것으로 나타난다卽現實의 生活 은 陰慘하고 思想은 晦하나 그로 말미암아 藝術에 나타난 陰影의 大는 실로 크고 큰 것이었다. 陰影이 적은 新羅의 藝術은 한껏 明朗하고 壯嚴한 것이므로 누구나 알기 쉽고 宗敎的 氛圍가 적은 李朝의 藝術은 潤氣없는 陳燦 한편으로 기울어졌으나 情緖에 살고 形而上에 물젖은 麗朝의 藝術은 「樂極의 哀調」 「寂照의 氣韻」을 多分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특색을 우리는 위선에서 볼 수 있겠는가─조선의 건축이란 원래가 계급적 억제가 많던 것으로 민옥 내에서는 하등의 미적 조형을 볼 수 없었고 계급적 건물 장감적 건물에서만 미적 형태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 계급적 장성의 건물은 순전히 중국 계통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 중국 건물은 원래가 신전 건물을 갖지 아니한 '이시〿중'적 권속적 건물이었다. 불교가 중국에 수입될 때도 양식적으로 하등의 변형을 입지 않고 철두철미 그들의 궁전사사(寺司)양식으로써 대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가 독특의 건물이라는 탑파까지도 인도원식의 복분식 부도가 아니라 그것은 오직 퇴화된 모형으로 수식적으로 고루정상에 놓였을 뿐이요, 탑파 건물이란 중국 고유의 고권 건물로서 처리되었던 것이다. 물론 건물 부분에 있어 탑파 중심에 찰주가 경영된다든지 상륜이 옥상에 놓인다든지 하는 것은 불탑 특유의 규약으로 보통 건물에는 없는 것이나 건축 양식은 그대로 중국 원유의 것이였으며 다른 건물에 있어서도 와당 무늬‧벽화 장식 등에 연화인동불상불구 등 기타 여러가지 도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요컨대 외부적 부분적 수식적에 끝인 것이요 건축의 양식 그 자체에는 하등의 불교적 영향이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계통 속에 들어있는 고려의 계급 건물도 불교의 융성으로 말미암아 그 조영이 성창되었다 뿐이지 특별히 불교로 말미암아 영향된 신양식의 발생이란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불상이 들어있으니까 불전이라 하고 승려가 거처함으로써 방장이라 할 따름이지 권귀가 기거한다면 궁전으로, 속인이 거처한다면 민옥으로 곧 통용할 수 있을만치 되어있든 건물이었다. 려조에 있어 한참 기불축리의 행사가 성행될 때 궁전이 곧 도장이 되고 궁가를 버려 곧 사찰을 삼을 수 있었음이, 이내 곧 불교가 양식적으로 하등의 규약성을 갖지 아니한 까닭이요. 따라서 양식상 영향이란 것이 없었든 소이(所以)였다. (이것을 저 희랍의 신전이나, 기독교의 성당 건물과 비교하면 신전 성당들이 얼마나 비실용적이요, 순전히 신만을 위한 건물이던가를 연상 수 있다) 물론 불찰의 장엄성, 즉 그 경영의 대의 영향을 받아 도관‧신사까지도 려조에 있어서 최외히 경영된 것은 인 정할 수 있겠고 또 산지가람, 현대문주4▶특히 선찰의[a 4] 유행으로 말미암아 심산유곡에까지 범궁패궐이 총울(叢欎)케 된 것은 불교의 공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것은 요컨댄 재래 양식의 경영의 빈다성(頻多性)을 촉진하였을 뿐이지 불교로 말미암은 새로운 양식의 발생이란 것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만하다. 우리는 이 반문을 물론 수긍하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양식 상 문제보다도 건물 경영에 있어서의 정신적으로 끼쳐진 영향이란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당대의 불교는 형해를 무시하고 일절만사를 자신의 정경, 각오의 기연으로 보는 돈오의 심학이다. 문제는 양식에 있지 않고 정신적으로 진여에 귀료(歸了)함에 있다. 심산유곡으로 가람을 끌고 들어간 곳에는 자연의 신비성‧숭고성‧장엄성에 동취되고 합덕되려는 곳에 있다. 이것은 노장철학이 자연에 귀일되려는 사상과 동공이곡(同工異曲)에 속하는 것으로 인간적 공기를 대자연 속으로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리고 말려는 정신이다. 무위공관은 노불을 합일시킨 근기이지만 고려 건축에 자연에 대한 위치를 설정한 원리도 된 것이었다.
쪽수▶P59-3그러면 이러한 特色을 우리는 爲先에서 볼 수 있겠는가─朝鮮의 建築이란 元來가 階級的 抑制가 많던 것으로 民屋 내에서는 何等의 美的 造型을 볼 수 없었고 階級的 建物 張減的 建物에서만 美的 形態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 階級的 張成의 建物은 純全히 中國系統에 屬하여 있는 것으로 中國 建物은 元來가 神殿 建物을 갖지 아니한 「以示〿重」的 權俗的 建物이었다. 佛敎가 中國에 輸入될 때도 樣式的으로 何等의 變形을 입지 않고 徹頭徹尾 그들의 宮殿寺司樣式으로써 代用하고 있었던 것이다. 佛家 獨特의 建物이라는 塔婆까지도 印度原式의 覆盆式 浮屠가 아니라 그것은 오직 頹化된 模型으로 修飾的으로 高樓頂上에 놓였을 뿐이요, 塔婆 建物이란 中國固有의 高權 建物로서 處理되었던 것이다. 勿論 建物 部分에 있어 塔婆中心에 擦柱가 經營된다든지 相輪이 屋上에 놓인다든지 하는 것은 佛塔特有의 規約으로 普通 建物에는 없는 것이나 建築樣式은 그대로 中國原有의 것이었으며 다른 建物에 있어서도 瓦當紋儀•壁畫裝飾 等에 蓮花忍冬佛像佛具 等 其他 여러가지 圖像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요컨대 外部的 部分的 修飾的 에 끝인 것이요 建築의 樣式 그 自體에는 何等의 佛敎的 影響이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P60-1같은 系統 속에 들어있는 高麗의 階級 建物도 佛敎의 隆盛으로 말미암아 그 造營이 盛昌되었다 뿐이지 特別히 佛敎로 말미암아 影響된 新樣式의 發生이란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佛像이 들어있으니까 佛殿이라하고 僧侶가 居處함으로써 方丈이라 할 따름이지 權貴가 寄居한다면 宮殿으로, 俗人이 居處한다면 民屋으로 곧 通用할 수 있을만치 되어있든 建物이었다. 麗朝에 있어 한참 祈紱祝釐의 行事가 盛行될제 宮殿이 곧 道場이 되고 宮家를 버려 곧 寺刹을 삼을 수 있었음이, 이내 곧 佛敎가 樣式的 으로 何等의 規約性을 갖지 아니한 까닭이요. 따라서 樣式上影響이란 것이 없었든 所以이였다. (이것을 저 希臘의 神殿이나, 基督敎의 聖堂 建物과 比較하면 神殿聖堂들이 얼마나 非實用的 이요, 純全히 神만을 爲한 建物이였든가를 聯想수 있다) 勿論 佛刹의 壯嚴性, 卽 그 經營의 大의 影響을 받아 道觀‧神祠까지도 麗朝에 있어서 崔嵬히 經營된 것은 認 定할 수 있겠고 원문주4▶또 山地伽藍, 特히 禪刹의[4] 流行으로 말미암아 深山幽谷에까지 梵宮貝闕이 叢欎케된 것은 佛敎의 功績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것은 要컨댄 在來樣式의 經營의 頻多性을 促進하였을뿐이지 佛敎로 말미암은 새로운 樣式의 發生이란 것은 없었든 것이 아닌가고 反問함즉하다. 우리는 이 反問을 勿論首肯하는 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樣式上 問題보다도 建物 經營에 있어서의 精神的으로 끼쳐진 影響이란 것을 看過할 수 없다. 前에도 말한바와 같이 當代의 佛敎는 形骸를 無視하고 一切萬事를 自身의 淨鏡, 覺悟의 機緣으로보는 頓悟의 心學이다. 問題는樣式에 있지 않고 精神的 으로 眞如에 歸了함에 있다. 深山幽谷으로 伽藍을 끄고 들어간 곳에는 自然의 神祕性‧崇高性‧莊嚴性에 同趣되고 合德되려는 곳에 있다. 이것은 老莊哲學이 自然에 歸一되려는 思想과 同工異曲에 屬하는 것으로 人間的 工技를 大自然속으로 후물후물하게 녹여버리고 말려는 精神이다. 無爲空觀은 老佛을 合一시킨 根機이지만 高麗建築에 自然에 對한 位置를 設定한 原理도 된 것이었다.
"今王之所居堂 圓櫨方頂 飛鞏連甍 丹碧藻飾 望之潭々然 依崧山之脊 蹭道突兀 古木交陰 若嶽祠山寺而己"(高麗圖經)라 한 것은 고려 망월왕궁(望月王宮)을 두고 말한 것이어니와 그것이 저 선종가람의 산지배치법, 자연배합법이 무의식중에 따라서 고려 건축의 흔의 본성을 이룬 적례라 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하필 이 왕거뿐 아니라 관사도 사사도 민가도 능묘도 이 자연배합법을 중요시하였으니 소위 사신상응의 지(地)를 엄택한다는 풍수비보의 설이 도선국사(道詵國師)를 통하여 일행선사의 비법을 전한 것이라 하지만 그 전래자서의 문제는 하여간에 그 미신적 추복기원의 정신을 박탈한다면 실은 자연에 귀화되려는 정신의 발로였다 할 수 있고 또 그 미신적 추복기원의 관념이란 것도 원은 중국 특유의 음양구기의 설이라 하는지 모르지만 려조에 들어와서의 정신은 불교의 비밀수법의 행사와 다분히 혼잡된 흔적이 있으니 그것이 비록 잡신적 형태를 뜻하고 있다 하나 불교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줄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혼탁한 이 잡신적 영향은 당대 건축 토목의 경영에 다대한 제약을 끼치고 있었지만 이러한 순정치 아니한 불교의 영향이란 제외하고 전술한 정상된(?) 불교적 정신에서의 영향을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 즉 모정‧원지의 경영에 나타난 불교적 영향이거니 일본에서도 일찍이 선파서원(禪派書院)의 영향을 받아 불단에서 탈화된 "상간"이란 것이 일반 민가에까지 한 양식을 이루게 되었고, 또 헌다분향(献茶焚香)의 불사가 일반화되어 다실의 경영과 및, 그에 부대된 정원예술이 특수한 발전을 보였던 것이다. 고려에 있어서도 한참 불교가 숭신되어 위로 왕궁후가로부터 아래로 여항민옥에까지 불상불화불탑이 봉안되고 기도축리가 성행되었던만큼 일본 건축의 "상간"과 같은 형식이 없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개성가옥의 제도가 다른 지방의 제도와 달라서 내실주방이 삼간장실을 이루어 남정하여 놓이고 북벽삼간을 통하여 "반침"뿐이라는 것이 경영되나니 "반침"의 의의가 벌서 현대문주5▶일본 건축의 "상간"과 유사할 뿐 아니라[a 5] 지금은 그 용태가 전연 달라졌다 하더라도 방장선실의 불단과 같은 것이 아니였던가 생각된다. 다만 조선에서는 일찍이 불교가 폐기되었고 사회 변도에 따라서와 같은 문아한 형식까지 변양되지 못하여 반침의 원의를 입증할 아무런 자료도 남기지 아니하고 있으나 당대의 있어서는 저 일본건축의 "상간"과 유사한 의태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법하다.
쪽수▶P60-2『今王之所居堂 圓櫨方頂 飛鞏連甍 丹碧藻飾 望之潭▶P61々然 依崧山之脊 蹭道突兀 古木交陰 若嶽祠山寺而己』 (高麗圖經)라 한 것은 高麗 望月王宮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와 그것이 저 禪宗伽藍의 山地配置法, 自然配合法이 無意識中에 따라서 高麗 建築意欣의 本性을 이룬 適例라 할 수 있지 아니한가 何必이 王居뿐 아니라 官寺도 社祠도 民家도 陵墓도 이自然配合法을 重要視하였으니 所謂 四神相應의 地를 嚴擇한다는 風水裨補의 說이 道詵國師를 通하여 一行禪師의 秘法을 傳한 것이라 하지만 그傳來自緖의 問題는 何如間에 그迷信的 追福祈願의 精神을 剝奪한다면 實은 自然에 歸化되려는 精神의 發露였다 할 수 있고 또 그 迷信的 追福祈願의 觀念이란 것도 原은 中國特有의 陰陽拘忌의 說이라 하는지 모르지만 麗朝에 들어와서의 精神은 佛敎의 秘密修法의 行事와 多分히 混雜된 痕跡이 있으니 그것이 비록 雜信的 形態를 뜻하고 있다 하나 佛敎的 影響을 無視할수 없을 줄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混濁한 이雜信的 影響은 當代建築土木의 經營에 多大한 制約을 끼치고 있었지만 이러한 純正치 아니한 佛敎의 影響이란 除外하고 前述한 正常된(?) 佛敎的 精神에서의 影響을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 即 茅亭‧園池의 經營에 나타난 佛敎的 影響이그니 日本서도 일찍이 禪派書院의 影響을 받아 佛壇에서 脫化된 "床間"이란것이 一般民家에까지 一樣式을 이루게 되었고, 또 献茶焚香의 佛事가 一般化되어 茶室의 經營과 및, 그에 附帶된 庭園藝術이 特殊한 發展을 보였던 것이다. 高麗에 있어서도 한참 佛敎가 崇信되어 위로王宮侯家로부터 下로 閭巷民屋에까지 佛像佛畫佛塔이 奉安되고 祈禱祝釐가 盛行되었든만치 日本 建築의 "床間"과 같은 形式이 없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원문주5▶지금도 開城家屋의 制度가 다른 地方의 制度와 달라서 內室主房이 三間長室을 이루어 南正하여 놓이고 北壁三間을 通하여 "半寢"뿐이라는 것이 經營되나니 "半寢"의 義意가 벌써 日本建築의 "床間"과 類似할뿐 아니라[5] 지금은 그 用態가 全然 달라졌다 하드래도 方丈禪室의 佛壇과 같은 것이 아니였던가 생각된다. 다만 朝鮮서는 일찍이 佛敎가 廢棄되었고 社會 變度에 ▶P62-1따라서와 같은 文雅한 形式까지 變樣되지 못하여 半寢의 原意를 立證할 아무런 資料도 남기지 아니하고 있으나 當代의 있어서는 저日本建築의 "床間"과 類似한 意態를 가졌던 것으로 推測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보다도 고려에 가장 성행되고 애호된 모정원지의 경영이야말로 확실히 불교적 정신에 물젖은 경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은일청적의 심취의 소산이니 모정은 분향전다하여 참선시키기 위한 선암에서 출발하여 물외에 한적하려는 황로의 청의와도 합일되었고 원지는 식련재위(植蓮栽葦)하여 식선(識禪)하기 위한 사지(사찰에는 보통 연지의 경영이 있었다는 것이다)에서 출발하여 강호에 소요하려는 은일의 청도와도 합여되었던 것이다.
쪽수▶P62-2그러나 이러한 樣式보다도 高麗에 가장 盛行되고 愛好된 茅亭園池의 經營이야말로 確實히 佛敎的 精神에 물젖은 經營이였다고 할 수 있다. 卽그것은 隱逸淸寂의 心趣의 所產이니 茅亭은 焚香煎茶하여 參禪키 爲한 禪庵에서 出發하여 物外에 閑適하려는 黃老의 淸意와도 合一되었고 園池는 植蓮栽葦하여 識禪키 爲한 寺池(寺剎에는 普通蓮池의 經營이 있었다는 것이다)에서 出發하여 江湖에 逍遙하려는 隱逸의 淸度와도 合如되었던 것이다.

幽禽入水擘靑羅 微動方池擁蓋荷 欲識禪心元自淨 秋蓮濯濯出寒波(水多寺荷池)
杜門無客到 煮茗與僧期 荷耒且學圃 歸田當有時 貧甘老去早 虛閣秋來早 漸欲成衰病 疏慵不啻玆(草堂端居和子美新賃草屋韻)
焚香道案讀黃庭 竟日無人扣竹扃 千首詩中驕富貴 一張琴上養襟靈 龍山曉霧濃於雨 鵠嶺宵熢遠似星 醉夢欲回殘月白 座看松影落寒廳(鶯溪草堂偶題)
(以上東國李相國集)
半生光景屬離居 旅食從來不願餘 窓外芭蕉饒夜雨 盤中苜蓿富春蔬 家貧自有簞瓢樂 計拙非因翰墨疏 時到煙花禪榻畔 坐忘身世等籧廬 (次韻答順庵) ─ 李穀 陽坡居士愛淸閑 後後紅塵是强顔 何日閉門麾俗客 焚香相對說溪山 (獻洪侍中彦博) ─ 曹係芳
柳巷輕煙寒食後 松山翠色晩晴餘 苦呤未得賞春句 還向明窓讀佛書 (次韻呈韓由君李穎叔) ─ 鄭思道
松江叢書不輟草 紙札相壓筐箱小 杞未棘兮菊未莎 肯羨人間擊鮮飽 十角吳牛二頃田 西山朝來一雨好 躬負畬鍤理吾稼 木決騠邊立水鳥 顧渚又復置茶園 茶譜水經推勘早 此中淸風知者誰 涪江漁父紫溪老
(次韻和金钝村四時歐公韻右夏記天隨子) ─ 洪侃
何處難忘酒 尋眞不遇回 書窓明返照 玉篆掩殘灰 方丈無人守 伷扉盡日開 園鶯啼老樹 庭鶴睡蒼笞 道味誰同話 先生去不來 深思生感慨 回首重徘徊 把筆留題壁 攀欄懶下臺 助吟多態度 觸處絶塵埃 暑氣蠲林下 薰風入殿隈 此時無一盞 煩慮滌何哉
(題郭興東 山齋壁)─容宗 以上東文選

쪽수▶P62-3幽禽入水擘靑羅 微動方池擁蓋荷 欲識禪心元自淨 秋蓮濯濯出寒波(水多寺荷池)
杜門無客到 煮茗與僧期 荷耒且學圃 歸田當有時 貧甘老去早 虛閣秋來早 漸欲成衰病 疏慵不啻玆(草堂端居和子美新賃草屋韻)
焚香道案讀黃庭 竟日無人扣竹扃 千首詩中驕富貴 一張琴上養襟靈 龍山曉霧濃於雨 鵠嶺宵熢遠似星 醉夢欲回殘月白 座看松影落寒廳(鶯溪草堂偶題)
(以上東國李相國集)
半生光景屬離居 旅食從來不願餘 窓外芭蕉饒夜雨 盤中苜蓿富春蔬 家貧自有簞瓢樂 計拙非因翰墨疏 時到煙花禪榻畔 坐忘身世等籧廬 (次韻答順庵) ─ 李穀 陽坡居士愛淸閑 後後紅塵是强顔 何日閉門麾俗客 焚香相對說溪山 (獻洪侍中彦博) ─ 曹係芳
柳巷輕煙寒食後 松山翠色晩晴餘 苦呤未得賞春句 還向明窓讀佛書 (次韻呈韓由君李穎叔) ─ 鄭思道
松江叢書不輟草 紙札相壓筐箱小 杞未棘兮菊未莎 肯羨人間擊鮮飽 十角吳牛二頃田 西山朝來一雨好 躬負畬鍤理吾稼 木決騠邊立水鳥 顧渚又復置茶園 茶譜水經推勘早 此中淸風知者誰 涪江漁父紫溪老
(次韻和金钝村四時歐公韻右夏記天隨子) ─ 洪侃
何處難忘酒 尋眞不遇回 書窓明返照 玉篆掩殘灰 方丈無人守 伷扉盡日開 園鶯啼老樹 庭鶴睡蒼笞▶P63-1道味誰同話 先生去不來 深思生感慨 回首重徘徊 把筆留題壁 攀欄懶下臺 助吟多態度 觸處絶塵埃 暑氣蠲林下 薰風入殿隈 此時無一盞 煩慮滌何哉
(題郭興東 山齋壁)─容宗 以上東文選
이러한 예는 일일히 빈거할 필요도 없지만 재정원지의 경영에 얼마나 도불적 영향이 심각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건축의 다실정원의 경영이 순전히 다도를 통하여 선기에 직참(直參)키 위한 경영이였음에 비하여 고려의 모정원지의 경영은 단순히 분향전다만을 위한 경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연에 회귀하여 자연과 동취되려는 경영이였다. 저네들은 다실을 "수기옥"이라 부르고 정원을 "상정"이라 하는 만큼 그들은 자연을 나에게 이끌어들여서 자연에 귀의하였고 고려의 경영은 나를 자연에게 몸으로써 던져버려 자연에 귀의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양자를 비교하면 전자는 인공의 미‧노력의 미‧초사의 미를 통하여서 얻은 적미이였고 후자는 겸아의 미‧무위의 미‧방일의 미를 통하여서 얻은 적미이였다. 이를 불교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자력적이었고 후자는 타력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고려의 건축은 형해적인 것을 던져버리고 정서적으로 선적의 직참코 말았다. 그러함으로써 권속적 건물의 장엄에서보다도 모정원지의 소적(蕭寂)한 경영에서, 양식 상 문제보다도 경영 배치의 대관적 입지에서, 불교의 영향이 정신적으로 컸던 것을 시인치 아니할 수 없다.

相公曾此日開筵 一擲靑錢僅百千 借問華堂誰喚出 不如茅屋舊天然 舊有茅亭臨池環坐飮酒今易以瓦屋 (過奇相林園)─李圭報

은 그 일반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쪽수▶P63-2이러한 例는 一一히 頻擧할 必要도 없지만 齋亭園池의 經營에 얼마나 道佛的 影響이 深刻하였든가를 짐작할 수 있다. 日本建築의 茶室庭園의 經營이 純全히 茶道를 通하여 禪機에 直參키 爲한 經營이였음에 比하여 高麗의 茅亭園池의 經營은 單純히 焚香煎茶만을 爲한 經營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自然에 回歸하여 自然과 同醉되려는 經營이였다. 저네들은 茶室을 「數奇屋」이라 부르고 庭園을 「箱庭」이라 하는 만큼 그들은 自然을 나에게 이끌어들여서 自然에 歸依하였고 高麗의 經營은 나를 自然에게 몸으로써 던져버려 自然에 歸依하는 態度를 取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兩者를 比較하면 前者는 人工의 美‧勞力의 美‧焦思의 美를 通하여서 얻은 寂美이였고 後者는 謙我의 美‧無爲의 美‧放逸의 美를 通하여서 얻은 寂美이였다. 이를 佛敎的으로 말하면 前者는 自力的 이었고 後者는 他力的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高麗의 建築은 形骸的 인 것을 던져버리고 情緖的으로 禪寂의 直參코말았다. 그럼으로써 權俗的 建物의 莊嚴에서보다도 拳亭園池의 蕭寂한 經營에서, 樣式上 問題보다도 經營配置의 大觀的 立地에서, 佛敎의 影響이 精神的으로 컸던 것을 是認치 아니할 수 없다.
相公曾此日開筵 一擲靑錢僅百千 借問華堂誰喚出 不如茅屋舊天然 舊有茅亭臨池環坐飮酒今易以瓦屋 (過奇相林園)─李圭報
은 그 一斑을 說明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이와 같은 정신적 영향은 건축이 자연 배경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써 그곳에 용이하게 발현될 수 있었고 또 용이하게 간취(看取)할 수 있으나 그러나 항상 개인로써 존재하여 배경을 가질 수 없는─적어도 갖기 어려운 조각에서는 용이하게 나타나기 어려웠고 또 용이하게 간취하기 어렵다. 물론 불상의 조소술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삼청도상이 발생되고 일본에서 신위우상이 발전되듯이 고려에서도 도상신상이 더러 발전된 모양이나 미술적으로 현재 이렇다 할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고 불상도 초기 작품에 다소 웅건한 것이 남아있으나 대개는 신라 대의 여운을 공식적으로 남기고 있을 뿐이다. 시대가 뒤질수록 점차 고려의 특색을 발휘하여 연익한 정취를 가진 불상이 소상을 통하여 다소 나타나게는 되었으나 일본 조각에서와 같이 특히 소조 목조를 통하여 조사상이 가지고 있는 그 회삽유원한 맛이라든지 불보살이 가지고 있는 현란한 수식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관찰하면 저네들이 인공을 통하여 정적의 선기를 탈래할 수 있었음에 반하여 고려인은 몸으로써 선기에 해소하게 되고 마는 까닭에 조형적으로 이러한 선미가 있는 조소을 남기기 어려웠을 뿐더러 형해를 경시하는 심학 그 자체가 형상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조각으로 하여금 존재성을 희부하게 하였다 하겠으며 외면적으론 불교의 미신적 보급으로 말미암은 일반 수요량의 대가 기념비적(Monumentale) 조법의 조상을 남기게 하지 못하고 방편적으로 상의만 보유하고 있는 편의적 조상만을 남기게 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조각은 대체에 있어 우상적으로 남아있었을 뿐이요 미술적인 것으로 남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안일한거를 이상으로 하든 그네들, 타력 본원을 이상으로 하고있는 그들에게는 조각같은 힘찬 예술은 남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열이 〿부한 그네들에게는 삼차원을, 입체를 파내려갈 힘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리하여 조각은 도상인 것으로 흘러갈 운명을 지고 있었다. 우리는 건축과 조각의 중간적인 존재라고 할만한 석탑석등 등이 체량으로서는 큰 것이 더러 있으나 규격이 조그만 라대 유품보다 명랑치 못하고 최준치 못한 것은 그러나 그 놓여진 환경의 자연배경으로 말미암아 다분의 정취성을 가지고 있게된 것은 상술한 정의에 부합되는 것이라 하겠으며, 또 라대의 능석들과 려대의 능석들과 비교할 때 려대의 것이 얼마나 도상적인 것으로 퇴락되어 있는가를 알 수있다. 누구는 고려말의 공민왕 및 노국공주의 현릉정릉의 경영 및 능석을 보고 중흥기분에 찬 조형같이 말하나 그러나 역사적 계연에서 볼 때 이것은 적어도 고려고〿의 역사적 사회적 정념을 가지지 아니한 예외적 존재라 한 것이다. 예외적 존재는 전체 성에 이르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것이 예외적 존재임은 재래의 역대 능묘와 비교함으로써 용이하게 알 수 있는 것이라 예컨대 재래의 능묘는 거개 황왕후비가 훙어〿〿시일 간에 경영한 것인 만치 그곳에 나타난 능석의 조〿성질은 당시 보편된 능력‧예술 의욕에서 정직하게 조성할 수 있었고 따라서 전체적 역사적 사회적 정의정〿을 구현하고 있게 되었고 또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노국공주의 정릉 및 공민왕의 현릉은 공민왕이 애비의 훙어를 비통한 나머지 왕이 100년 후, 〿기를 바라고 생전에 國〿를 기울여 수년을 두고 경영한 비〿총이라 그러므로 그 경영조각이 〿〿적 실력으로선 월등한 우위에 있던 현종으로부터 인종대까지의 능석보다 도리어 호장한 기세를 보일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 경영에 당한 공장도 고려의 역사적 사회성에서 태생되고 성육된 고려인이 아니었고 고려조와 역사적 사회성을 달리한 원공의 소조이었음이 용이하게 추천됨에서 예외적 작품으로 간주함에 불가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국대의 가장 거장한 경영이었던 왕륜사 영전의 경영이 주〿은 현대문주6▶비록 려인이었다 하더라도 실제 공역에 있어선 원장원세가[a 6] 당하고 있었음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예외적 존재는 하필 이것 뿐이 아니다. 고려 초기의 가화로운 공〿도 비고려적인 것으로, 현대문주7▶즉 그것은 계〿 포로의 공기인으로 말미암아[a 7] 또는 현대문주8▶송인의 유파민으로 말미암아 생소하게[a 8] 수입된 공기의 소산으로 논의되어있지만 고려 후기의 걸작으로 치는 작품 중에도 현대문주9▶연극사의 종이라든지[a 9] 현대문주10▶이익재의 초상이라든지[a 10] 현대문주11▶안향의 초상이라든지[a 11] 현대문주12▶〿〿사의 십삼층석탑이[a 12] 모두 여인의 〿〿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론 후대 이씨 조선기 미술 양식이 다분의 영향을 끼치기는 하였으나 고려조에 있어서는 실로 역사적 사회적 〿〿성이 적은 따라서 수〿불합의 비본연적 작품이었다. 고려조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실로 그러한 〿기있고 〿력있는 작품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오히려 저 황량한 사지분농에 흩어져 있는 태반이 점착되고 형태가 몽롱한 상석들이 조각적 가치는 전무하다 할지라도 허무청적한 심경은 무엇보다도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할만하다.
쪽수▶P63-3그러나 佛敎의 이와 같은 精神的 影響은 建築이 自然背景을 가질 수 있는 것임으로써 그곳에 容易히 發顯될 수 있었고 또 容易히 看取할 수 있으나 그러나 恒常 個人로써 存在하여 背景을 가질 수 없는─적어도 갖기 어려운 彫刻에서는 容易히 나타나기 어려웠고 또 容易히 看取하기 어렵다. 勿論 佛像의 彫塑術로 말미암아 中國에서 三淸道像이 發生되고 日本에서 神位 偶像이 發展되듯이 高麗에서도 道像神像이 더러 發展▶P64된 모양이나 美術的으로 現在 이렇다 할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고 佛像도 初期作品에 多少 雄健한 것이 남아있으나 大槪는 羅代의 餘韻을 公式的으로 남기고 있을 뿐이다. 時代가 뒤질수록 漸次 高麗의 特色을 發揮하여 軟翊한 情趣를 가진 佛像이 小像을 通하여 多少 나타나게는 되었으나 日本彫刻에서와 같이 特히 塑彫木彫를 通하여 祖師像이 가지고 있는 그 晦澁幽遠한 맛이라든지 佛菩薩이 가지고 있는 絢爛한 修飾美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理論的으로 觀察하면 저네들에 이 人工을 通하여 靜寂의 禪機를 脫來할 수 있었음에 反하여 高麗人은 몸으로써 禪機에 解消게 되고 마는 까닭에 造型的으로 이러한 禪味가 있는 彫塑을 남기기 어려웠을 뿐더러 形骸를 輕視하는 心學 그自体가 形相性을 떠나서 存在할 수 없는 彫刻으로 하여금 存在性을 稀簿하게 하였다 하겠으며 外面的으론 佛敎의 迷信的 普及으로 말미암은 一般需要量의 大가 記念碑的 (Monumentale)彫法의 彫像을 남기게 하지 못하고 方便的으로 像意만 保有하고 있는 便宜的 彫像만을 남기게 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彫刻은 大體에 있어 偶像的으로 남아있었을 뿐이요 美術的 인 것으로 남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安逸閑居를 理想으로 하든 그네들, 他力 本願을 理想으로 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彫刻같은 힘찬 藝術은 남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情熱이 〿簿한 그네들에게는 三次元을, 立體를 파내려갈 힘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리하여 彫刻은 圖像인 것으로 흘러갈 運命을 지고 있었다. 우리는 建築과 彫刻의 中間的인 存在라고 할만한 石塔石燈等이 體量으로서는 큰 것이 더러 있으나 規格이 조그만 羅代遺品보다 明朗치 못하고 最峻치 못한 것은 그러나 그 놓여진 環境의 自然背景으로 말미암아 多分의 情趣性을 가지고 있게 된 것은 上述한 情意에 副合되는 것이라 하겠으며, 또 羅代의 陵石들과 麗代의 陵石들과 比較할 때 麗代의 것이 얼마나 圖像的 인 것으로 頹落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누구는 高麗末의 恭愍王 及 魯國公主의 玄陵正陵의 經營 및 陵石을 보고 中興氣分에 찬 造型같이 말하나 그러나 歷史的 繼緣에서 볼 때 이것은 적어도▶P65高麗固〿의 歷史的 社會的 情念을 가지지 아니한 例外的 存在라 한 것이다. 例外的 存在는 全體性에 이르는 影響을 끼치지 못한다. 이것이 例外的 存在임은 在來의 歷代陵墓와 比較함으로써 容易히 알 수 있는 것이라 예컨대 在來의 陵墓는 舉皆皇王后妃가 薨御〿〿時日間에 經營한 것인 만치 그곳에 나타난 陵石의 彫〿性質은 當時 普遍된 能力‧藝術意欲에서 正直하게 造成할 수 있었고 따라서 全体的 歷史的 社會的 情意情〿을 具現하고 있게 되었고 또 具現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魯國公主의 正陵 及恭愍王의 玄陵은 恭愍王이 愛妃의 薨御를 悲慟한 나머지 王이 百年後, 〿기를 바라고 生前에 國〿를 기울여 數年을 두고 經營한 比〿塚이라 그러므로 그 經營彫刻이 〿〿的 實力으로선 越等한 優位에 있든 顯宗으로부터 仁宗代까지의 陵石보다 도리어 豪壯한 氣勢을 보일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 經營에 當한 工匠도 高麗의 歷史的 社會性에서 胎生되고 成育된 麗人이 아니었고 高麗朝와 歷史的 社會性을 달리한 元工의 所造이었음이 容易히 推薦됨에서 例外的 作品으로 看做함에 不可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局代의 가장 巨張한 經營이었든 王輪寺影殿의 經營이 柱〿은 원문주6▶비록 麗人이었다 하더라도 實際工役에 있어선 元匠元世가[6] 當하고 있었음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例外的 存在는 何必이것뿐이 아니다. 高麗初期의 家華로운 工〿도 非高麗的인 것으로 即 그것은 원문주7▶契〿捕虏의 工技人으로 말미암아[7] 또는 원문주8▶宋人의 流派民으로 말미암아 生疎하게[8] 輸入된 工技의 所産으로 論議되어있지만 高麗後期의 傑作으로 치는 作品 中에도 원문주9▶演劇寺의 鐘이라든지[9] 원문주10▶李益齋의 肖像이라든지[10] 원문주11▶安珦의 肖像이라든지[11] 원문주12▶〿〿寺의 十三層石塔이[12] 모두 麗人의 〿〿이 아니었다. 그것은 勿論 後代 李氏 朝鮮期 美術 樣式이 多分의 影響을 끼치기는 하였으나 高麗朝에 있어서는 實로 歷史的 社會的 〿〿性이 적은 따라서 水〿不合의 非本然的 作品이었다. 高麗朝에 있어서는 社會的으로 實로 그러한 〿氣있고 〿力있는 作品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오히려 저 荒凉한 寺址墳壠에 흩어져 있는 苔斑이 點▶P66-1着되고 形態가 矇朧한 像石들이 彫刻的 價値는 全無타할지라도 虛無淸寂한 心境은 무엇보다도 잘 表現되어있다고 할만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정경에 있던 고려로서는 조각적인 것보다도 그것을 좁히고 줄인 공예적인 것에 도리어 그네들의 심정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김동착감‧나전칠기‧상형자기등이 그것이니 그 현란하고 화욕된 품은 귀족적 향락성에 완전히 부합되어 있는 듯하나 그러나 상형에서 수곽에서 도안에서 흐르는 섬약미, 적조미, 애조미는 숨길 수 없이 나타나 있다. 실상 화만‧연화인동 등 공식적 불교 장식 도상은 제외한다고 치더라도 고려의 도상으로서 가장 특색을 이루고 있는 포위부안‧한운야학‧포도석류가 무위한청한 정취를 다분히 발로고 있다. 그중에도 고려도자는 당대 공예미술을 대표하는 동시에 한개의 종교적 존재로서 나타나 있다. 즉 그것은 다기로서의 불교의 영향과 기물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종교적 정취로 말미암아 중대저도기의 발달이 음다(飮茶)의 성풍으로 말미암아 제진되었고 현대문주13▶음다의 성풍은 선가에서 출발하여 일반화된 것으로[a 13] 일찍이 중국에서는 당대 육우의 다경 〿동의 다가와 같이 문인묵객간의 풍류사로까지 전개되었고 송대에 들어와서는 투다명전의 속희까지 있어 도속을 물론하고 보편화되었다. 이와 같이 애다의 성풍은 마침내 그 용기의 발색, 형태를 중요시하게 되었으니

越州上 鼎州次 婺州次 岳州上 壽州洪州次 或者以邢 州處越州上 殊爲不然 若邢瓷類銀 越瓷類玉 邢不如越一也; 若邢瓷類雪 則越瓷類冰 邢不如越二也 邢瓷白而茶色丹 越瓷青 而茶色綠 邢不如越三也 晋杜 毓荈賦所謂器擇陶揀出自東甌 甌越也 越州上 口脣不卷 底卷而淺 受半升已下 越州瓷岳瓷皆青 青則益茶 茶作白紅之色 邢州瓷白 茶色紅 壽州瓷黃 茶色紫 洪州瓷褐 茶色黑 悉不宜茶(陆羽茶經) 茶色白 宜黑盞 建安所造者紺黑 紋如兎毫 其坯微厚 熁之久熱難冷 最爲要用 出他處者 或薄或色紫 皆不及也

(願元慶茶〿譜) 등, 도기과 다색과의 관계가 밀접한 것이 이미 중국에서 발단되었다.
쪽수▶P66-2그러므로 이와 같은 情景에 있던 高麗로서는 彫刻的인 것보다도 그것을 좁히고 줄인 工藝的인 것에 도리어 그네들의 心情을 充分히 發揮할 수 있었다. 金銅錯嵌‧螺鈿漆器‧象型磁器 等이 그것이니 그 絢爛하고 華褥된 品은 貴族的 享樂性에 完全히 副合되어 있는 듯하나 그러나 象形에서 輸郭에서 圖案에서 흐르는 纖弱味, 寂照味, 哀調味는 숨길 수 없이 나타나있다. 實相 花蔓‧蓮花荵苳 等 公式的 佛敎 裝飾 圖像은 除外한다고 치더라도 高麗의 圖像으로서 가장 特色을 이루고 있는 蒲葦鳬雁‧閑雲野鶴‧葡萄石榴가 無爲閑淸한 情趣를 多分히 發露코 있다. 그 中에도 高麗 陶磁는 當代 工藝美術을 代表하는 同時에 한 개의 宗敎的 存在로서 나타나 있다. 卽 그것은 茶器로서의 佛敎의 影響과 器物 自體가 內包하고 있는 宗敎的 情趣로 말미암아 重大抵陶器의 發達이 飮茶의 盛風으로 말미암아 偍進되었고 원문주13▶飲茶의 盛風은 禪家에서 出發하여 一般化된 것으로[13] 일찍이 中國에서는 唐代 陸羽의 茶經 〿仝의 茶歌와 같이 文人墨客間의 風流事로까지 展開되었고 宋代에 들어와서는 鬪茶茗戰의 俗戲까지 있어 道俗을 勿論하고 普遍化되었다. 이와 같이 愛茶의 盛風은 마침내 그 容器의 發色, 形態를 重要視하게 되었으니
越州上 鼎州次 婺州次 岳州上 壽州洪州次 或者以邢 州處越州上 殊爲不然 若邢瓷類銀 越瓷類玉 邢不如越一也; 若邢瓷類雪 則越瓷類冰 邢不如越二也 邢瓷白而茶色丹 越瓷青 而茶色綠 邢不如越三也 晋杜 毓荈賦所謂器擇陶揀出自東甌 甌越也 越州上 口脣不卷 底卷而淺 受半升已下 越州瓷岳瓷皆青 青則益茶 茶作白紅之色 邢州瓷白 茶色紅 壽州瓷黃 茶色紫 洪州瓷褐 茶色黑 悉不宜茶(陆羽茶經) 茶色白 宜黑盞 建安所造者紺黑 紋如兎毫 其坯微厚 熁之久熱難冷 最爲要用 出他處者 或薄或色紫 皆不及也(願元慶茶〿譜)▶P67-1等, 陶器과 茶色과의 關係가 密接한 것이 이미 中國에서 發端되었다.
조선에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찍이 선덕왕대에 수전된 사략이 있으나 얼마 만치 파식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고 흥덕왕 3년에 입당사대렴이 재래한 것을 지리산에 배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소위 화개다란 것으로 조선 차(茶)의 대본(大本)을 이룬 모양이다. 동국이상국집13, 손한장복화 차운기지(孫翰長復和 次韻寄之)란 제시 중에(전구10행 략)

率然著出孺茶詩 豈意流傳到吾子 見之忽憶花溪遊 花溪茶所産君管記陽時往見故來詩及之 懷舊凄然爲酸鼻 品此雲峯未嗅香 宛如南國曾嘗味 因論花溪採茶時 (○○○○○○○) 官督家丁無老稚(○○○○○○○) 瘴嶺千重眩手收(○○○○○○○) 玉京萬里赬肩致(○○○○○○○) 此是蒼生膏與肉(○○○○○○○) 臠割萬人方得至(○○○○○○○) 一篇一句皆寓意 詩之六義於此備 隴西居士眞狂客 此生己向糟兵寄 酒酣謀睡業己甘 安用煎茶室費水 破千枝供一啜 細思此理眞害耳 知君異日到諫垣 記我詩中微有旨 焚山燎野禁稅茶 唱作南民息后始

라 있어 화계다가 당시 송경으로 얼마나 많이 반수되었으며 그에 따른 민고가 여간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대암사 초의의순 선사의 동다송주기에 (이능화 저 조선불교통사 하편)

智異山花開洞茶樹羅生四五十里 東土茶田之廣料無過 此者 洞有玉浮臺 臺下有七佛禪院 坐禪者常取煑飲

이라 있어 이조 말엽까지도 선가로 말미암아 다풍이 지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이상국집에

西北寒威方墮指 南方臘月如春氣 金粟黏枝己結類 均天所覆地各異 禪家調格大高生 豈把酸甜隨俗嗜 然方文無一物 (○○○○○○○) 愛聽笙整號鼎裏(○○○○○○○) 評茶品水是家風(○○○○○○○) 下略 (卷13, 雲峯住老珪 禪師得芽茶復韻)
(前略) 草庵他日叩禪居 數卷玄書討深旨 雖老猶堪手汲泉 一甌卽是參禪始(○○○○○○○)(卷13, 房狀元衍宝 見和次復韻答之 )
등 구, 이수인 시의
蘿衣百衲己忘形 悟道年來輟誦經 禪榻落花春寂寂 松風和雨出茶瓶

(東國輿地勝覽 開城神孝寺條)등 구에서 선다일미의 풍이 려조에 성행되었고 또 이상국집 전출 시구 운봉주노시 앞 절 한 구에 一師從何處得此品 入手先驚香撲鼻 博爐火試自 煎 手點花罃誇色味—
라든지 고려도경권32, 기명다저조에

土產茶味苦澁 不可入口 惟貴中國臘茶 幷龍鳳賜團 自錫賚之外(○○○○○) 商賈亦通販故邇來頗喜飮茶(○○○○○○○○○○○○) 益治茶具(○○○○) 金花烏盞翡色小甌(○○○○○○○○) 銀爐湯鼎(○○○○) 皆竊效中國制度(○○○○○○○)——

운운이라 한 것 등을 종합하여 선가음다풍이 일반에게는 보편되고 그에 따라 다구를 치장할 새 색미를 과시할 줄까지 알았던 모양이니 다와 선을 통하여서의 도기의 발전은 현대문주14▶중국의 그것과 규를 같이하였던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a 14]
쪽수▶P67-2朝鮮에도 三國史記에 依하면 일찍이 善德王代에 輸傳된 史略이 있으나 얼마만큼 播植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고 興德王三年에 入唐使大廉이 齎來한 것을 智異山에 培植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所謂 花開茶란 것으로 朝鮮茶의 大本을 이룬 모양이다. 東國李相國集13, 孫翰長復和 次韻寄之란 題詩 中에(前句十行略)
率然著出孺茶詩 豈意流傳到吾子 見之忽憶花溪遊 花溪茶所産君管記陽時往見故來詩及之 懷舊凄然爲酸鼻 品此雲峯未嗅香 宛如南國曾嘗味 因論花溪採茶時 官督家丁無老稚 瘴嶺千重眩手收 玉京萬里赬肩致 此是蒼生膏與肉 臠割萬人方得至 一篇一句皆寓意 詩之六義於此備 隴西居士眞狂客 此生己向糟兵寄 酒酣謀睡業己甘 安用煎茶室費水 破千枝供一啜 細思此理眞害耳 知君異日到諫垣 記我詩中微有旨 焚山燎野禁稅茶 唱作南民息后始>
라 있어 花溪茶가 當時 松京으로 얼마나 많이 搬輸되었으며 그에 따른 民苦가 如干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大菴寺 草衣意恂 禪師의 東茶頌註記에 (李能和著朝鮮佛敎通史下編)
智異山花開洞茶樹羅生四五十里 東土茶田之廣料無過 此者 洞有玉浮臺 臺下有七佛禪院 坐禪者常取煑飲>
이라 있어 李朝末葉까지도 禪家로 말미암아 茶風이 持續되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李相國集에
西北寒威方墮指 南方臘月如春氣 金粟黏枝己結類 均天所覆地各異 禪家調格大高生 豈把酸甜隨俗嗜 〿然方文無一物 愛聽笙整號鼎裏 評茶品水是家風 下略 (卷13, 雲峯住老珪 禪師得芽茶復韻)
(前略) 草庵他日叩禪居 數卷玄書討深旨 雖老猶堪手汲泉 一甌卽是參禪始(卷13, 房狀元衍宝 見和次復韻答之 )
등 구, 이수인 시의
蘿衣百衲己忘形 悟道年來輟誦經 禪榻落花春寂寂 松風和雨出茶瓶(東國輿地勝覽 開城神孝寺條)
西北寒威方墮指 南方臘月如春氣 金粟黏枝己結類 均天所覆地各異 禪家調格大高生 豈把酸甜隨俗嗜 〿然方文無一物 愛聽笙整號鼎裏 評茶品水是家風 下略 (卷13, 雲峯住老珪 禪師得芽茶復韻)
(前略) 草庵他日叩禪居 數卷玄書討深旨 雖老猶堪手汲泉 一甌卽是參禪始(卷13, 房狀元衍宝 見和次復韻答之 )
等句, 李祟仁始의
蘿衣百衲己忘形 悟道年來輟誦經 禪榻落花春寂寂 松風和雨出茶瓶(東國輿地勝覽 開城神孝寺條)
等 句에서 禪茶一味의 風이 麗朝에 盛行되었고 또 李相國集 前出 詩句 雲峯住老詩 前 節 一句에▶P68-1一師從何處得此品 入手先驚香撲鼻 博爐火試自 煎 手點花罃誇色味—
라든지 高麗圖經卷32, 器皿茶狙條에
土產茶味苦澁 不可入口 惟貴中國臘茶 幷龍鳳賜團 自錫賚之外 商賈亦通販故邇來頗喜飮茶 益治茶具 金花烏盞翡色小甌 銀爐湯鼎 皆竊效中國制度——
云云이라한 것 等을 綜合하여 禪家飲茶風이 一般에게는 普遍되고 그에 따라 茶具를 治裝할새 色味를 誇示할 줄까지 알았던 모양이니 茶와 禪을 通하여서의 陶器의 發展은 원문주14▶中國의 그것과 規를 같이하였던 것으로 認定할 수 있다.[14]
그러나 이것은 공예미술에 대한 불교의 외면적 관계이다. 우리는 다시 그 내면적 관계. 정신적 영향을 주의할 필요가 있으니 그 도안과제가 가지고 있는 〿〿적한취, 선조가 가지고 있는 익익한 애조, 형태〿가 가지고 있는 방일적 무구애성, 색택이 가지고 있는 유심한 적취─요컨대 이러한 요소가 종합되어 그곳에 나타난 악극의 애조, 허무한 청적은 그들의 생활이, 따라서 그들의 심성이 '무'에 통(徹)하여 선기에 직입하였든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실로만 들고자 하여 만들어진 태도─표현이 아니었고 행운유수와 같이 본연적으로 무의식중에 표현된 태도, 즉 생활과 선기가 완전히 함융되어 불아의 구별을 세울 음지가 없이 생활 자체가 종교화되고 마는─환언하면 현대문주15▶도자가 곧 종교를 이룬 형태라고 할 것이다[a 15]

造物弄人如弄幻 達人觀幻似觀身 人生幻化同爲一 畢竟誰眞復匪眞─李圭報

이것은 언표된 고려의 인생관이지만, 이것을 형여색으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이 도자이요 다시 이어나가 고려의 미술이요 예술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정경을 우리는 현대문주16▶최후로 회화미술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a 16] 물론 예에 의하여 외면적 영향─예컨대 불상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일반 도신적 잡신 방면의 회상의 발달이라든지 교외별전일자상전의 풍으로 말미암은 조사영의 발달이 끼친 일반 초상화의 발달 등은 문제치말고 불가도영중 보현·관음·나한‧원포 기타 조사영 등이 숭배 대상인 우상적 존재성을 떠나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선기로 말미암아 전혀 주관적 정념의 완상대상으로 제작되고 섭공·풍간·한산·습득·포대·연라자 등 산림만광이 혹은 〿일하게 혹은 기굴하게, 혹은 오원하게 표현케된 동기야말로 선풍의 사상화란 것을 굳세게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형해 그 자체가 벌써 그러할 뿐 아니라 필선에 있어, 발〿에 있어, 초연쇄락한 정취를, 고원유수한 정〿를, 낙〿정〿의 풍도를 아니느낄 수 없다. 물론 지금에 와서 고려의 〿적으로 이것을 입증할 아무 실물로 남아있지 아니하지만 당대 〿을 갈〿〿 〿〿〿 화적과 당대 문헌에 약간의 예에서도 이것을 〿상할 수 있다.
쪽수▶P68-2그러나 이것은 工藝美術에 對한 佛敎의 外面的 關係이다. 우리는 다시 그 內面的 關係, 精神的 影響을 主意할 必要가 있으니 그 圖案課題가 가지고 있는 〿〿的 閑趣, 線條가 가지고 있는 翊々한 哀調, 形態〿가 가지고 있는 放逸的 無拘礙性, 色澤이 가지고 있는 幽深한 寂趣─要컨대 이러한 要素가 綜合되어 그곳에 나타난 樂極의 哀調, 虛無한 淸寂은 그들의 生活이, 따라서 그들의 心性이 「無」에 徹하여 禪機에 直入하였든 態度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事實로만 〿고자 하여 만들어진 態度─表現이 아니었고 行雲流水와 같이 本然的으로 無意識中에 表現된 態度, 卽生活과 禪機가 完全히 涵融되어 佛我의 區別을 세울 陰地가 없이 生活自體가 宗敎化되고 마는─ 換言하면 陶磁가 원문주15▶곧 宗敎를 이룬 形態라고 할 것이다[15]
造物弄人如弄幻 達人觀幻似觀身 人生幻化同爲一 畢竟誰眞復匪眞─李圭報
이것은 言表된 高麗의 人生觀이지만, 이것을 形與色으로써 表現하고 있는 것이 陶磁이요 다시 이어나가 高麗의 美術이요 藝術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情景을 우리는 원문주16▶最後로 繪畵美術에 있어서도 說明할 수 있을 것 같다.[16] 勿論例에 依하여 外面的 影響─例컨대 佛像의 影響으로 말미암은 一般 道神的 雜信 方面의 繪像의 發達이라든지 敎外別傳一子相傳의 風으로 말미암은 祖師影의 發達이 끼친 一般 肖像畵의 發達 等은 問題치▶P69-1말고 佛家圖影中 普賢·觀音·羅漢‧遠褒 其他 祖師影 等이 崇拜 對象인 偶像的 存在性을 떠나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禪機로 말미암아 全혀 主觀的 情念의 玩賞對象으로 制作되고 涉公·豊干·寒山·拾得·布袋·烟蘿子 等 山林满狂이 或은 〿逸하게 或은 奇崛하게, 或은 傲元하게 表現케된 動機야말로 禪風의 思想化란것을 굳세게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形骸 그 自體가 벌써 그러할 뿐 아니라 筆線에 있어, 發〿에 있어, 超然灑落한 情趣를, 高遠幽邃한 情〿를, 落〿靑〿의 風度를 아니 느낄 수 없다. 물론 지금에 와서 高麗의 〿跡으로 이것을 立證할 아무 實物로 남아있지 아니하지만 當代 〿을 갈〿〿 〿〿〿 畵跡과 當代 文献에 若干의 例에서도 이것을 〿像할 수 있다.

神物來馴似犬羊 山僧伎倆亦荒唐 翻身遠逝非無意 頷下明珠鉢底藏(涉公降龍)
珍重於菟也解禪 困來相就共安眠 廻頭說向寒山子 穩勝靑奴暖勝氈(豊子伏虎)(以上益齋集)
觀世音子 觀音大師 白衣清淨 如月暎水 卷葉雙根 聞熏所自 寔坐竹林 虛心是奇 童子何求 曲膝拜跪 若云求法 法亦在爾(下略)(幻長老以墨畵 觀音像求予賛)─(李相國集)
屈伸俯仰〿機關 支體汗流掏肺肝 我輩養身悲甚艱 食無求飽居無安 似是之非辨豈難 義理血氣初兩端 誰教我骨多辛酸 最喜日月雙跳丸(下略) (題烟蘿 子圖)
是身虛空 天水一色 渺然而逝 風淸日白 芥平其間 唯一不識(達磨折蘆 渡江區) 以上牧隱集
毛頴初行凡案中 斯須幻出老禪翁 由來紙上元無物 於此當觀色即空 (李斗帖畫達 磨清潜戯贈) (陽村集)

등, 화제를 통하여, 화태를 통하여, 그 화취를 넉넉이 짐작할 만하다.
쪽수▶P69-2神物來馴似犬羊 山僧伎倆亦荒唐 翻身遠逝非無意 頷下明珠鉢底藏(涉公降龍)
珍重於菟也解禪 困來相就共安眠 廻頭說向寒山子 穩勝靑奴暖勝氈(豊子伏虎)(以上益齋集)
觀世音子 觀音大師 白衣清淨 如月暎水 卷葉雙根 聞熏所自 寔坐竹林 虛心是奇 童子何求 曲膝拜跪 若云求法 法亦在爾(下略)(幻長老以墨畵 觀音像求予賛)─(李相國集)
屈伸俯仰〿機關 支體汗流掏肺肝 我輩養身悲甚艱 食無求飽居無安 似是之非辨豈難 義理血氣初兩端 誰教我骨多辛酸 最喜日月雙跳丸(下略) (題烟蘿 子圖)
是身虛空 天水一色 渺然而逝 風淸日白 芥平其間 唯一不識(達磨折蘆 渡江區) 以上牧隱集
毛頴初行凡案中 斯須幻出老禪翁 由來紙上元無物 於此當觀色即空 (李斗帖畫達 磨清潜戯贈) (陽村集)
等, 畵題를 通하여, 畵態를 通하여, 그 畵趣를 넉넉이 斟酌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선가화풍에서 유래된 화양을 막론하고 산수화, 화조화, 사군자, 은일도등의 자산화, 문학적 자유화에서도 그 예술 의욕으로서의 배경에서 종교의 영향, 불교의 영향을 볼 수 있으니 현대문주17▶시진일치를 부르짖고[a 17] 현대문주18▶상외일기를 논하고[a 18] 현대문주19▶참선득묘를 운위함이 모두[a 19] 이 형해를 초월하여 직지인심견성성불의 심학의 영향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고록화의 특색이 주관적 정서주의에, 현대문주20▶문학화에 특색이 있다한 것도[a 20] 이러한 것을 뜻한 것이었으니 정서의 예술은 삼차원보다도 이차원에서 그 적성을 발견하기 용역한 것이요. 따라서 회화적 것에서 고려예술의 특색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회화적'이란 회화 자체를 뜻함이 아니요 현대문주21▶Wölfflin이 말한 "Malerische"를 뜻함이니[a 21] 원체에 대한 문인화, 북종화에 대한 남종화를 생각한다면 '회화적'이란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겠고 이어 고려 예술의 특색을 이해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고려 예술의 불교와의 관계를 그 외면적인 형해적 관계를 밟고 지나, 그 사상성에서, 정신적 영향에서 더욱 중요시한다. 즉 불교는 생활에 정신에 해유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고려의 예술 의욕은 이로부터 출발하였다.
쪽수▶P69-3그러나 이러한 禪家畵風에서 由來된 畵様을 莫論하고 山水畫, 花鳥畫, 四君子, 隱逸圖等의 自山畫, 文學的 自由畵에서도 그 藝術 意欲으로서의 背景에서 宗教의 影響, 佛教의 影響을 볼 수 있으니 원문주17▶詩盡一致를 부르짖고[17] 원문주18▶像外逸氣를 論하고[18] 원문주19▶參禪得妙를 云爲함이[19] 모두 이 形骸를 超越하여 直指人心見性成佛의 心學의 影響 ▶P70-1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高鹿畵의 特色이 主觀的 情緖主義에, 원문주20▶文學化에 特色이있다한 것도[20] 이러한 것을 뜻한 것이었으니 情緖의 藝術은 三次元보다도 二次元에서 그 適性을 發見하기 容易한 것이요. 따라서 繪畵的 것에서 高麗藝術의 特色 發見할 수 있는 것이다. 「繪畵的 」이란 繪畵自體를 뜻함이 아니요 원문주21▶Wölfflin이 말한 "Malerische"를 뜻함이니[21] 院體에 對한 文人畵, 北宗畵에 對한 南宗畵를 생각한다면 「繪畵的 」이란 容易히 理解할 수 있겠고 이어 高麗藝術의 特色을 理解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高麗藝術의 佛敎와의 關係를 그外面的 인 形骸的 關係를 밟고 지나, 그思想性에서, 精神的 影響에서 더욱 重要視한다. 卽 佛敎는 生活에 精神에 解洧되어버리고 말았으니 高麗의 藝術意欲은 이로부터 出發하였다

世間物我本非眞 亦知此身非所保 焚香對御共傳燈 未必桑門能達道

는 공민왕의 어화인 율정 윤택진에 대한 홍언박의 제구의 일단 시지만 비로소 고려 예술 의욕의 설명의 요구로 대용할 수도 있다.
쪽수▶P70-2世間物我本非眞 亦知此身非所保 焚香對御共傳燈 未必桑門能達道
는 恭愍王의 御畵인 栗亭尹澤眞에 對한 洪彦博의 題句의 一斷詩지만 비로소 高麗 藝術 意欲의 說明의 要句로 代用할 수도 있다.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麗史提綱天授十九年條에
    王患齊民多避役爲僧 崔〿請除佛法 王日新羅之季 佛氏之說 入人骨髓 人以爲死生禍福 皆佛所爲 今三韓甫一 人心未定 苦遽除佛法 必生反側矣
    라 있고 補閑集卷上에는
    (前略)太祖當干戈草創之際 留意陰陽浮屠 參謀崔凝諫云 傳曰當亂修文 以得人心 王者雖當軍旅之時 必修文德 未聞依浮屠陰陽 以得天下者 太祖曰斯言朕豈不知之 然我國山水靈奇 介在荒僻 土性好佛神欲資福利 方今兵革 未息 安危未決 旦夕恓惶不知所措 唯思佛神陰助 山水靈應 儻有效於姑息耳 豈以此爲理國得民之大經也 待定亂 居安 正可以移風俗美敎化也 云云(下略)
    라 있지만 이것이 史料로서 얼마나 客觀性을 가지고 있을까는 麗史에 나타난 行蹟에 비추어 疑問되는 바가 많으나 그러나 「齊民多避役爲僧」을 王이 患〿하였다는 것은 있을 법한 노릇이다.
  2. 麗史列傳第五崔凝傳中에
    太祖謂凝曰 昔新羅造九層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 除群醜 合三韓 爲一家 卿爲我作發願䟽 凝遂製進
    이란 것으로 能히 斟酌할 수 있다. 十訓要같은 것은 後代 僞作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例 如 今西龍 博士) 그것으로써만 곧 麗太祖의 信心을 證明함보다 이런 例가 도리어 나을 것 같다.
  3. 高麗史에 보인 十訓要의 其一 其二를 綜合하여 太祖의 政略的 術策으로 解釋한다.
  4. 律宗伽藍과 禪宗伽藍이 비록 그 配置法은 달리하고 建築 壯嚴은 다르다 하더라도 單位 建築은 要컨대 中國在來의 傳統的 樣式에서 조금도 變함이 없다. 그러나 禪宗에서는 佛殿보다도 法堂을 重要視하고 尊德을 長老라 하여 居處를 方丈이라 하고 參學의 徒를 모두 僧堂에 居케 하는 等 單位 建物의 配置法이 저 律宗伽籃의 規格的 整齊性과 매우 달라졌다. 지금 佛教建築을 論하고 있음이 아니므로 이 兩者를 比較할 必要를 느끼지 않으나 다만 中國以東에 있어 禪刹 樣式이 始創된 것은 元和 年間의 百丈懷海로 말미암아서이라한다. 宋景德元年 楊億의 刪定한 傳燈錄序撰에 所謂 古清規序라는 것이 있으니 全文 紹介가 冗長한 험이 있으나 東方 禪刹의 規矩를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이곳에 들어둔다.
    古清規序(忽滑太快天 著 禪學思想史 上卷에서 轉載)
    翰林學士朝散大夫行左司諫知制誥同修國史判史館事柱國南陽郡國開國侯食邑一千一百户賜紫金魚袋臣楊億 述
    百丈大智禪師 以禪宗肇自少室至曹溪以來 多居律寺 雖列別院 然於說法住持未合規度 故常爾介懷 乃曰 佛祖之道欲誕布化元 冀來際不泯者 豈當與諸部阿笈摩飮爲隨行耶 或曰 瑜珈論瓔珞經是大乘戒律 胡不依隨哉 師曰 吾所宗非局大小乘 非異大小乘 當博約折中 設於制範務其宜也 於是創意別立禪居 凡具道眼者有可尊之德 號曰長老 如西域道高臘長呼須菩提等之謂也 卽爲化主 卽處於方丈 同淨名之室 非私寢之室也 不立佛殿唯樹法堂者 表佛祖親囑受當代爲尊也 所裒學衆無多少無高下 盡入僧堂依夏次安排 設長連床 施椸架掛塔道具 臥必斜枕床脣右脇吉祥睡者 以其坐禪旣久略偃息而已 具四威儀也 除入室請益任學者勤怠 或上或下不拘常準 其闔院大衆朝參夕聚 長老上堂陞座主事徒衆雁立側聆 賓主問酬激揚宗要者 示依法而住也 齋粥隨宜一時均遍者 務于節儉表法食雙運也 行普請法上下均力也 置十務謂之寮舍每用首領一人管多人 營事令各司其局也 或有假號竊形混于淸衆別致喧撓之事 卽當維那檢舉抽下本位掛搭 擯令出院者 貴安淸衆也 或彼有所犯卽以拄杖杖之 集衆燒衣鉢道具 遣逐從偏門而出者 示恥辱也 詳此一條制有四益 一不污淸衆生恭信故 二不毀僧形循佛制故 三不擾公門省獄訟故 四不泄於外護宗綱故 四來同居聖凡孰辦 且如來應世尙有六群之黨 況今像末 豈得全無 但見一僧有過 便雷例譏誚 殊不知輕衆壞法其損甚大 今禪門若稍無妨害者 宜依百丈叢林規式 量事區分 且立法防姦 不爲賢士 然寧可有格而無犯 不可有犯而無飮 惟大智禪師護法之益其大矣哉 禪門獨行自此老始 淸規大要遍示後學令不忘本也 其諸軌度集詳備焉 億幸叨叡旨刪定傳燈 成書圖進 因爲序引 旹景德改元歲次甲辰良月吉日書
  5. 日本建築의 「床丿間」라는 것은 即 「寢間」의 뜻으로 原은 寢座에서 出發하였다가 貴人의 上座로 變遷되고 다시 禪院方丈의 影響으로 佛壇化하였다가 지금 보는 바와 같은 室內上座의 修飾處로 된 것이다.
    岡倉覺三 著 「茶の本」及高橋龍藏著「茶道」叅照
  6. 高麗史 恭愍王世家 18年 9月條에
    是月 伐礎石于崇仁門外 輓致馬岩 大如屋 震且吼聲如牛 又發丁州縣需材 水運或〿或溺死者無算 中外困弊無 敢言者 時王召元朝梓人元世于濟州 使營影殿 世等十一 人挈家而來云云이라 있다.
  7. 高麗史圖經 卷19 民庶工技條
    高麗工技至巧 其絶藝悉歸于公 如幞頭所將作監乃其所也. 常服白紵袍皂巾 唯執役趨事 則官給紫袍 亦聞契丹降虜數萬人 其工技十有一 擇其精巧者 留於王府 比年器服益工 第浮僞頗多 不復前日純質耳
  8. 中尾萬三 博士 著 「朝鮮高麗陶磁考」 一九頁 二三頁 參照
  9. 朝鮮 金石總覽 上 演福寺鍾銘 參照
  10. 震檀學報 第3號 拙稿 參照
  11. 震檀學報 第3號 拙稿 參照
  12. 東國輿地勝覽卷13 豊德佛字敬天寺記 參照
  13. 三宅長策 「天目考」(陶器講座 第6卷) 叅照
    李能和 著「朝鮮佛敎通史 下編」獻草爲芝文士譏王條에도
    古人云 菊花之隱逸者也 牧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 者也 今余則云芝草之神仙者也 蘭草之隱逸者也 茶草之 賢聖(卽禪)者也 以有玄微之道 清和之德故 支那唐時趙 州從諗禪師尋常接人 輒云喫茶去 自爾趙州茶盛稱於世 茶之一道途屬于禪也
    라 하였다.
  14. 湖岩 「茶故事」 (朝鮮日報 昭和 11年 12月) 參照
  15. 內山省三 著 「朝鮮陶磁鑑賞 」 叅照
  16. 與 本註 [10] 同
  17. 詩畫一致를 부르짖는 것은 畵의 文學化, 卽 主觀化 情緒化를 뜻하는 것으로 益齋集, 東國李相國集, 補閑集 等, 麗代文集의 處處에서 볼 수 있는 精神이다. [註 10] 叅照
  18. 崔滋 補閑集의 陳補闕評詩 中에
    ─陳補闕讀李春卿詩云 啾啾多言費楮毫 三尺喙長只自勞 謫仙逸氣萬像外 一言足倒千詩豪 及第吳芮公日 逸氣一言 可得開乎 陳曰 蘇子贍品畵云 摩詰得之於象外 筆所未到 氣已吞詩畵一也 杜子美詩 雖五字中尙有氣呑象外 李春卿走筆長篇亦象外得之是謂逸氣謂一語者欲其重也 夫世之嗜常惑凡者不可與言詩 況筆所未到之氣也
    라 있으니 이는 詩論이나 畫論은 빌어온 詩論이오 詩畫一致의 理論과 함께 象外의 逸氣를 求함이 形骸를 遮遺하여 眞如를 覺得하려는 佛教의 態度와 다름이 없다 하겠다. 晝論六法에 氣韻生動을 重要視하는 精神도 心學의 影響에서 出発한 것으로 論할 수 있다. 郎 東洋에서의 藝術의 自律性의 出發이 이러한 데 있는 것이 兼하여 理解된다.
  19. 東國李相國集 軍中答安處士置民手書 中에 僕之向之 比處士以文湖州禪居士者 蓋墨竹絕似與可參禪得妙如龐蘊 故指的 實言耳云云
  20. 與 本註[10] 同
  21. Heinrich Wölfflin, Kuastgeschichtliche Grundbeg - riffe. S, 20 ff.






현대문주


  1. 麗史提綱天授十九年條에
    王患齊民多避役爲僧 崔〿請除佛法 王日新羅之季 佛氏之說 入人骨髓 人以爲死生禍福 皆佛所爲 今三韓甫一 人心未定 苦遽除佛法 必生反側矣
    라 있고 補閑集卷上에는
    (前略)太祖當干戈草創之際 留意陰陽浮屠 參謀崔凝諫云 傳曰當亂修文 以得人心 王者雖當軍旅之時 必修文德 未聞依浮屠陰陽 以得天下者 太祖曰斯言朕豈不知之 然我國山水靈奇 介在荒僻 土性好佛神欲資福利 方今兵革 未息 安危未決 旦夕恓惶不知所措 唯思佛神陰助 山水靈應 儻有效於姑息耳 豈以此爲理國得民之大經也 待定亂 居安 正可以移風俗美敎化也 云云(下略)

    라 있지만 이것이 사료로서 얼마나 객관성을 가지고 있을까는 려사에 나타난 행적에 비추어 의문되는 바가 많으나 그러나 '齊民多避役爲僧'을 왕이 환〿하였다는 것은 있을 법한 노릇이다.
  2. 麗史列傳第五崔凝傳中에
    太祖謂凝曰 昔新羅造九層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 除群醜 合三韓 爲一家 卿爲我作發願䟽 凝遂製進

    이란 것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십훈요같은 것은 후대 위작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예를 들어, 이마나시 류(今西 龍)) 그것으로써만 곧 려태조의 신심을 증명함보다 이런 예가 도리어 나을 것 같다.
  3. 고려사에 보인 십훈요의 그 1, 2를 종합하여 태조의 정략적 술책으로 해석한다
  4. 율종가람과 선종가람이 비록 그 배치법은 달리하고 건축 장엄은 다르다 하더라도 단위 건축은 요컨대 중국재래의 전통적 양식에서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불전보다도 법당을 중요시하고 존덕을 장로라 하여 거처를 방장이라 하고 참학의 도를 모두 승당에 거케 하는 등 단위 건물의 배치법이 저 율종가람의 규격적 정제성과 매우 달라졌다. 지금 불교건축을 론하고 있음이 아니므로 이 양자를 비교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나 다만 중국이동에 있어 선찰 양식이 시창된 것은 원화 연간의 백장회해로 말미암아서이라한다. 송 경덕 원년 양억의 산정한 전등록서찬에 소위 고청규서라는 것이 있으니 전문 소개가 용장한 험이 있으나 동방 선찰의 규구를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이곳에 들어둔다.

    古清規序(忽滑太快天 著 禪學思想史 上卷에서 轉載)
    翰林學士朝散大夫行左司諫知制誥同修國史判史館事柱國南陽郡國開國侯食邑一千一百户賜紫金魚袋臣楊億 述
    百丈大智禪師 以禪宗肇自少室至曹溪以來 多居律寺 雖列別院 然於說法住持未合規度 故常爾介懷 乃曰 佛祖之道欲誕布化元 冀來際不泯者 豈當與諸部阿笈摩飮爲隨行耶 或曰 瑜珈論瓔珞經是大乘戒律 胡不依隨哉 師曰 吾所宗非局大小乘 非異大小乘 當博約折中 設於制範務其宜也 於是創意別立禪居 凡具道眼者有可尊之德 號曰長老 如西域道高臘長呼須菩提等之謂也 卽爲化主 卽處於方丈 同淨名之室 非私寢之室也 不立佛殿唯樹法堂者 表佛祖親囑受當代爲尊也 所裒學衆無多少無高下 盡入僧堂依夏次安排 設長連床 施椸架掛塔道具 臥必斜枕床脣右脇吉祥睡者 以其坐禪旣久略偃息而已 具四威儀也 除入室請益任學者勤怠 或上或下不拘常準 其闔院大衆朝參夕聚 長老上堂陞座主事徒衆雁立側聆 賓主問酬激揚宗要者 示依法而住也 齋粥隨宜一時均遍者 務于節儉表法食雙運也 行普請法上下均力也 置十務謂之寮舍每用首領一人管多人 營事令各司其局也 或有假號竊形混于淸衆別致喧撓之事 卽當維那檢舉抽下本位掛搭 擯令出院者 貴安淸衆也 或彼有所犯卽以拄杖杖之 集衆燒衣鉢道具 遣逐從偏門而出者 示恥辱也 詳此一條制有四益 一不污淸衆生恭信故 二不毀僧形循佛制故 三不擾公門省獄訟故 四不泄於外護宗綱故 四來同居聖凡孰辦 且如來應世尙有六群之黨 況今像末 豈得全無 但見一僧有過 便雷例譏誚 殊不知輕衆壞法其損甚大 今禪門若稍無妨害者 宜依百丈叢林規式 量事區分 且立法防姦 不爲賢士 然寧可有格而無犯 不可有犯而無飮 惟大智禪師護法之益其大矣哉 禪門獨行自此老始 淸規大要遍示後學令不忘本也 其諸軌度集詳備焉 億幸叨叡旨刪定傳燈 成書圖進 因爲序引 旹景德改元歲次甲辰良月吉日書.

  5. 일본건축의 「상별간」라는 것은 즉 「침간」의 뜻으로 원은 침좌에서 출발하였다가 귀인의 상좌로 변천되고 다시 선원방장의 영향으로 불단화하였다가 지금 보는 바와 같은 실내상좌의 수식처로 된 것이다.
    오카쿠라 텐신(岡倉覺三) 저 「茶の本」및 고교 용장 著「茶道」 참조
  6. 고려사 공민왕세가 18년 9월조에

    是月 伐礎石于崇仁門外 輓致馬岩 大如屋 震且吼聲如牛 又發丁州縣需材 水運或〿或溺死者無算 中外困弊無 敢言者 時王召元朝梓人元世于濟州 使營影殿 世等十一 人挈家而來

    云云이라 있다.
  7. 고려사도경 권19 민서공기조

    高麗工技至巧 其絶藝悉歸于公 如幞頭所將作監乃其所也. 常服白紵袍皂巾 唯執役趨事 則官給紫袍 亦聞契丹降虜數萬人 其工技十有一 擇其精巧者 留於王府 比年器服益工 第浮僞頗多 不復前日純質耳

  8. 나까오 만조우(中尾萬三) 박사 저 「조선고려도자고」 19혈 23혈 참조
  9. 조선 금석총람 상 연복사종명 참조
  10. 진단학보 제3호 졸고 참조
  11. 진단학보 제3호 졸고 참조
  12. 동국여지승람 권13 풍덕불자경천사기 참조
  13.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 「천목고」(도기강좌 제6권) 참조
    리능화 저「조선불교통사 하편」헌초위지문사기왕조에도

    古人云 菊花之隱逸者也 牧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 者也 今余則云芝草之神仙者也 蘭草之隱逸者也 茶草之 賢聖(卽禪)者也 以有玄微之道 清和之德故 支那唐時趙 州從諗禪師尋常接人 輒云喫茶去 自爾趙州茶盛稱於世 茶之一道途屬于禪也

    라 하였다.
  14. 호암 「茶故事」(조선일보 쇼와11년 12월)참조
  15. 우지야마 소죠(內山省三) 저 「조선도자감상 」 참조
  16. 각주 10번과 같음
  17. 시화일치를 부르짖는 것은 화(畵)의 문학화, 즉 주관화 정서화를 뜻하는 것으로 익재집, 동국이상국집, 보한집 등, 여대문집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정신이다. [주 10] 참조
  18. 최자 보한집의 진보궐평시 중에

    ─陳補闕讀李春卿詩云 啾啾多言費楮毫 三尺喙長只自勞 謫仙逸氣萬像外 一言足倒千詩豪 及第吳芮公日 逸氣一言 可得開乎 陳曰 蘇子贍品畵云 摩詰得之於象外 筆所未到 氣已吞詩畵一也 杜子美詩 雖五字中尙有氣呑象外 李春卿走筆長篇亦象外得之是謂逸氣謂一語者欲其重也 夫世之嗜常惑凡者不可與言詩 況筆所未到之氣也

    라 있으니 이는 시론이나 화론은 빌어온 시론이오 시화일치의 이론과 함께 상외의 일기를 구함이 형해를 차유하여 진여를 각득하려는 불교의 태도와 다름이 없다 하겠다. 주론육법에 기운 생동을 중요시하는 정신도 심학의 영향에서 출발한 것으로 논할 수 있다. 랑 동양에서의 예술의 자율성의 출발이 이러한 데 있는 것이 겸하여 이해된다.
  19. 동국이상국집 군중답안처사치민수서 중에 "僕之向之 比處士以文湖州禪居士者 蓋墨竹絕似與可參禪得妙如龐蘊 故指的 實言耳"云云
  20. 각주 10번과 같음
  21. Heinrich Wölfflin, Kuastgeschichtliche Grundbeg - riffe. S, 20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