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섭

North Korea Humanities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김명지(CNU2024))이 작성했습니다.




김준섭(金俊燮)
김준섭.jpeg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한겨레음악대사전.
 
한글명 김준섭 한자명 金俊燮 영문명 Kim Jun-seop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913년 몰년 1968년 출신지 전라도 전공 판소리, 창극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김준섭(金俊燮)은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출신의 현대 판소리 명창으로, 일설에는 전라남도 곡성 또는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전라남도 나주시 출신이라고도 한다. [1] 정응민(1894~1961) 문하생으로 보성소리를 전승했다. [2]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하였고,1943년 결성된 동일창극단에 참가하여 「심청전」에서 심봉사역을 잘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1947년 이후에는 국악사(國樂社)에서 창극활동을 하는 등, 주로 지방에서 창극과 판소리 공연에 참가하였다. [3]


생애


상경 이전 (~1935)

정응민인물(1894~1961) 문하생으로 보성소리를 전승했다.[4] 김준섭은 처음에 공창식인물(孔昌植)에게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서 「심청가」를 익히고, 그 후 김정문인물(金正文)문하에서 「흥보가」,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를 차례로 이수한 후, 독학을 계속했다.[5] 김준섭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난데다 소리를 배우려는 의지가 지극하여 오랜 노력 끝에 명창으로 일가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6]


상경 이후 (1935~1947)

1935년에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단체(朝鮮聲樂硏究會)에 가입해서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등 명창을 따르면서 기량이 더욱 쌓았고,[7] 1941년 결성된 창극좌단체에서 창극공연을 하였다.[8] 그 이후에는 동일창극단단체에 참가하여 「심청전」 창극의 심봉사 역할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9]

1943년 9월 제일극장에서 이운방(李雲芳)의 창작 창극 "남강의 풍운"으로 동일창극단의 창단공연을 가졌을 때 안기옥·오태석·임방울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10]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하던 김준섭은 이 시기 창극좌 뿐 아니라 화랑창극단단체[11]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12]


지방으로 돌아오다 (1947~1968)

1947년 이후에는 국악사단체(國樂社)에서 창극활동을 하는 등, 주로 지방에서 창극과 판소리 공연에 참가하였다.[13] 1960년부터 지방에 살면서 판소리 공부에 전념한 김준섭은 조선창극단단체(朝鮮唱劇團) 및 국립국극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14] 이후 고향에 묻혀 살면서 오로지 판소리 예도에만 정진하다가, 1968년 5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15]





연구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성악연구회는 1934년에 결성되어 1940년까지 존속했던 판소리·기악 중심의 전문 전통음악 단체이다.[16] 조선성악연구회는 1934년 11월 첫 창극공연을 시작하여 점차 창극 활동에 집중하면서 창극은 단체의 주된 공연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1934년 11월경부터 1939년 10월까지 모두 26회의 창극공연을 전개하였다.[17] 단체의 창극공연 가운데 1934년 11월부터 1939년 10월까지의 출연자가 확인되는 명단을 정리해 보면 김준섭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8]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본격적인 창극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직속극단인 창극좌를 조직한 이후부터이다.[19] 극단 창극좌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1942년 2월 7일부터 시작된 <심청전>과 <춘향전>의 공연기사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고, 이때 김준섭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으며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하던 김준섭은 이 시기 창극좌 뿐 아니라 화랑창극단에도 참여하여 활동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20]
조선성악연구회의 결성 및 활동이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인 창극 문화를 주도함으로써 쇠잔해 가던 판소리 창자들의 연행문화를 다시 대중문화의 주류로 편입시키고, 창극사적으로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21]


동일창극단

동일창극단은 조선연예협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한양창극단과 반도연무대가 통합해 결성된 창극단이었다. 새롭게 결성된 동일창극단의 첫 공연은 1943년 4월 17일에서 6월 19일까지 있었던 북부지역 순회공연이었다.[22] 동일창극단의 주도인물과 구성원들은 1943년 10월 2일에 있었던 공연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동일창극단의 단원들은 남자부에서 김준섭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으며 김준섭은 창극좌와 화랑창극단 모두 활동했던 인물이었다.[23] 김준섭은 동일 창극단에 참가하여 「심청전」 창극의 심봉사 역할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24]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준섭 Person: 정응민 A hasMaster B
Person: 김준섭 Person: 공창식 A hasMaster B
Person: 김준섭 Person: 김정문 A hasMaster B
Person: 김준섭 Group: 조선성악연구회 A isMemberOf B
Person: 김준섭 Group: 창극좌 A isMemberOf B
Person: 김준섭 Group: 화랑창극단 A isMemberOf B
Person: 김준섭 Group: 동일창극단 A isMemberOf B
Person: 김준섭 Group: 국악사 A isMemberOf B
Person: 김준섭 Group: 조선창극단 A isMemberOf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디지털완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한겨레음악대사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한겨레음악대사전.
  5. 디지털완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디지털화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디지털완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디지털화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한겨레음악대사전.
  11.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70쪽. 조선성악연구회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연극협회에 소속되었던 창극단으로 1940년 12월경에 창단되었다.
  12.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70쪽.
  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한겨레음악대사전.
  15. 디지털화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6.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한국전통연희사전.
  17.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31쪽.
  18.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39쪽.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공연출연자> 명단 속 김준섭을 발견할 수 있다.
  19.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한국전통연희사전.
  20.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70쪽.
  21.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한국전통연희사전.
  22.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82쪽.
  23.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87쪽.
  24. 디지털화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