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칠(SNU24-1)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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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金聖七)
김성칠.jpg
출처 : 국제신문 2009년 6월 26일 기사[1]
 
한글명 김성칠 한자명 金聖七 영문명 Kim Seong Chil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3년 몰년 1951년 출신지 경상북도 영천 전공 역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김성칠은 한국의 역사학자이다. 금융조합에 근무하다가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저서에 《조선역사》《동양사개설》, 번역에 《용비어천가》《열하일기》 등이 있다.[2]


생애


탄생

1913년 6월 18일 경상북도 영천군 북습면(現 영천시 청통면) 원촌리 215번지에서 아버지 운강(雲岡) 김상한(金相漢, 1879 ~ 1950. 11. 30)[3]과 어머니 함안 조씨(1875 ~ 1939. 4. 8)[4] 사이에서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3]


비밀결사 조직 결성

1927년 신녕공립보통학교(現 신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現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11월 교내 비밀결사 구화회(丘火會)에 가입해 문화부 위원에 임명되었고, 12월 27일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대구중학교·대구공립상업학교·대구공립농림학교 등 3개 학교 학생들과 함께 혁우동맹(革友同盟)을 결성하자 이에 가입해 제4야체이카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28년 2월 26일 혁우동맹이 혁우동맹이 적우동맹(赤友同盟)으로 전환되자 정치문화부 위원을 맡았고, 1학년에 대한 포섭을 주로 담당했다. 또한 9월 8일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생·퇴학생·졸업생을 중심으로 우리동맹을 결성하자, 정치문화부 담당이 되었다.[4]


일본경찰에 의한 체포

교내 비밀결사 조직의 실체가 일본 제국 경찰에 탐지되었고,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29년 8월 7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의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했고, 1929년 12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구류갱신 결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1929년 12월 18일 보석으로 출옥했고,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미결구류일수 중 30일, 법정미결구류 통산일수 54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검사 측의 공소 이유없음으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5]


출옥 후 일본유학

출옥했으나 대구고등보통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당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도우며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시, 농업, 역사에 관한 책을 주로 읽었다. 그러던 1932년 동아일보 농촌구제책 현상 모집에서 1등에 당선되어 이때 얻은 상금으로 일본 규슈 도요쿠니(豊國)중학교에 1년간 유학하여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1932년 9월 상경해 고등예비학교에 입학했다. 1937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영일군 장기면(現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서 장기금융조합 이사로 재직하였다. 1940년 8월 7일 카네미츠 세이시치(金光聖七)로 창씨개명했다.[6]


대학교에서의 생활과 사망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사학 전공에 선과생으로 입학했다. 1943년 학도병 지원을 거부해 한동안 학업을 중단했다. 8.15 광복 후 경성대학 법문학부에 복학하여 그 해 여름에 졸업하고, 사학과 조수가 되어 연구활동을 하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시로 피난했다. 1951년 10월 9일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 영천군으로 갔다가 괴한에 의해 피살당했다.[7]





연구


역사학 연구

김성칠은 조선시대사와 청나라 역사, 그리고 양국 간의 관계를 주로 연구하였다. 이러한 관심은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를 번역하는 데에 이르기도 했다. 더불어 한국어에도 관심이 많아 《용비어천가》는 물론 펄 벅의 《대지》, 강용흘의 《초당》 등의 작품을 한글로 옮기기도 했다.[8]


한국사 연구

해방 직후 한국 문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민중을 위해 쉽게 한국사를 풀어 쓴 《조선역사》를 저술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한글로 저술이 되었기 때문에 지식인층 뿐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층도 한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9]


여러방면에서의 연구

농촌에서 태어나 금융조합에서 일한 경력이 있기에 농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져 관련 글을 여러 매체에 기재하기도 하는가 하면, 한국 전쟁에 대해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일기를 서술한 것을 인정받아 제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역사 앞에서》의 일부분이 수록되기도 했다.[10]





저술


저술 목록

[11]

연번 저술명 학술지&출판사 간행연월일
A001 조선역사 조선금융조합연합회 1946.
A002 사회생활과 이웃나라 동양역사 정음사 1947.
A003 고쳐 쓴 조선역사 조선금융조합연합회 1949.
A004 신동양사 공저,동지사 1948.
A005 (중등사회생활과) 이웃나라의 생활: 역사 공저, 동지사 1949.
A006 우리나라역사: 사회생활과 정음사 1950.
A007 동양사개설 공저 1950.
A008 국사통론 감당사 1951.
A009 대지(大地) 역서 1940.
A010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역서 1941.
A011 조선농촌담(朝鮮農村譚) 역서 1942.
A012 열하일기(熱河日記) 역서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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