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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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R21KHU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24일 (목) 23:20 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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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박승희의 신극 운동 의의에 대한 문서입니다.

내용



박승희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토월회의 실패의 원인을 박승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박승희 혼자만의 책임으로 돌리기에 당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너무나 좋지 않았다. 토월회라는 이름을 갖고 활동했다고 볼 수 있는 1923년 ~ 1931년은 다른 식민지 시기에 비해서 일본 당국의 검열과 탄압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공연의 상연은 일본 당국의 승인 하에 이루어져야 했고,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면 상연을 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 연극계는 기반이 약했다. 박승희 본인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것처럼, 토월회는 시작부터 자본, 인물, 각본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 동인제로 시작한 만큼,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인물들은 있었지만, 연극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맡을 인물은 없었다. 연극 상연의 기본은 각본,무대, 그리고 배우이다. (자본의 문제는 세 문제의 근본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무대와 배우의 문제에 자본 문제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 토월회는 시작부터 위태로웠고, 이는 비단 토월회만 안고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 식민지 조선에는 다양한 극단이 있었는데, 공연조차 올리지 못한 극단들도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이 된다. (박승희의 토월회에 반발하여 탈퇴한 토월회 단원들이 결성한 백조회를 예시로 들 수 있다.) 그 극단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 또한 각본, 무대, 배우였다. (그리고 이는 현대 한국 극단에도 해당되는 문제이다. 전문 극단의 필연적 숙명과 같은 문제이기도 하다.)
더불어 가장 근본적인 자본의 문제는 그들의 신분 문제로 해결되기 쉽지 않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토월회는 동경 유학생의 동인제로 시작한 단체이다. 토월회가 창립되었을 당시, 그들은 학생 신분이었다. 학생 신분의 예술인들에게 연극 상연을 목적으로 거금을 투자할 (좋은 말로 투자이지, 사실상 기부 행위) 이는 없었다. 박승희도 이에 대해, "지위(地位)도업고명망(名望)도업고학생(學生)인우리를밋고천원(千圓)이라는큰돈을줄이(理)가잇겟습니까?" [2]라고 회고했을 정도이다.학생 신분의 한계는 자본 문제뿐만 아니라 '연극' 자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연극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당대 조선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었다. "본선택의 불명보다도 출연인물의 무경험이 우리들의 첫 출발을 여지없이 짓밟고 말 엇스니 무대에나가기 전에는 소진장의와 같이 제법 말을 잘하던 사람들도 한번 무대에발을 올려 노키만 하면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한마디의 말을 하려도 이삼분식낑낑 매다가간신이 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극본의 대사를 무슨 글이나 읽드시 술술나려 오이든 사람들도 한 번 무대에 출연케 만되면 벼란간에 장승과 같이 딱딱해저서 정신에 착각이 생기는 관계인지 출연중도에그대로 무대 뒤로 뛰 얻으러 와서 할 수 없이 연극도중에 막을 나리고 만 거짓말 같은 실태까지 발생한 까닭에 처음 날에는 동경유학생들이 한다니 대처 토월회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라는 호기심에이끝리어 상당히많이 왔던 관중들도 그 이튿날 되는 제2일부터는 벌써그 영향이미치게 되어 아주 영성하기짝이 없는 것이 엇습니다." [3]박승희 본인의 입으로 언급한 것처럼,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만 공연에 오를 수는 없었다. 또한 유학생이라는 신분에 너무 취해, 당대 조선 관객들을 얕잡아 본 것 또한 문제였다.[4] 습작기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데뷔를 하고자 한 청년들의 한계를 처절하게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토월회는 기존 한국의 극을 상연하는 극단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박승희는 일본 유학 시절 다양한 연극을 보면서 서양의 근대극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했다. 한국 근대극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극예술연구회가 1931년 등장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박승희가 처절한 실패를 맞본 토월회 제1회 공연은 1923년이었다. 토월회 이전에 진지하게 근대극을 상연했던 전문적인 극단으로 볼 수 있는 극단은 협률사 정도로 파악되는데, 협률사는 사실상 대한제국 황실 및 당대 조선 고위층의 지원 하에 있었기에, 토월회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5](아마추어와 프로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동인제로 시작했음을 불구하고, 당대 기준으로 혁신적인 근대극을 상연하고자 한 박승희를 비롯한 토월회 단원들의 신극 운동이 없었다면, 이후에 극예술연구회를 비롯한 다양한 근대극 극단 또한 없었을 것이다.
토월회는 당대 기준으로 파격적인 월급제를 시행-시도한 극단이다. 물론 이는 박승희의 개인적인 철학에서 시작된 제도는 아니었지만[6] , 어찌했든 시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7]그 월급제로 인해 토월회가 여러 번 파국을 맞이한 것 또한 사실이다. 임금 문제로 배우들의 파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단원들의 잦은 탈퇴 또한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박승희의 신극 운동을 실패했다고 규정한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단순하게 실패로 규정하기 전에 그들이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분명하게 봐야 한다. 젊은이들의 패기만으로는 당대의 시대를 넘을 수 없었다. 예술은 시대와 불화하면서 창조된다. 하지만 그들은 불화할 수 없었다. 박승희는 근대극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대 관객들은 근대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관객들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상업적 안정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이 있어야 연극을 올리고, 예술인들도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박승희는 어쩔 수 없이 상업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박승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관객들을 부를 수 있는 극을 올려야 했고, 당대 조선의 상황을 수용해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근대극은 근대화와 독립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수용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교화성이 담보되어야 했다.[8] 하지만 그 교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큰 산이 있었다. 바로, 일제의 검열이었다. 일제의 검열은 극의 교화성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했다.[9]대중성도, 예술성도, 상업성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 박승희와 토월회가 있었다. 박승희와 토월회의 신극 운동의 실패를 오로지 박승희의 문제로만 보기에는 시대적 배경이 너무나 암울했다.
토월회 단원들의 행적을 보면, 박승희 본인의 개인적 문제가 없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토월회는 사실상 박승희 1인 독재 극단이기도 했다. 따라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연출자가 지는 것은 맞다. 그럼에도, 시대적 배경을 참작하자는 것이다. 엄격한 잣대로 박승희를 보기 이전에, 현재의 상황을 돌아보고 당대의 상황을 돌아봤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이다. 학자들이 박승희의 신극 운동 실패 원인으로 꼽는 문제들은 현재 한국 극단들도 해결하지 않고 있는 문제이다. 그런 문제를 박승희에게만 엄격하게 적용할 이유가 있을까 한다. 그것이 최소한 후배들의 예의가 아닌가 한다.

참고문헌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김재석,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학회』 34, 2011.

주석

  1.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五)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5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2.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五)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5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3. 박승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317219291107e1052&set_date=19291107&page_no=5 新劇運動七年 (七)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 『조선일보』, 1929년.11월.07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4. 본고는 박승희가 1929년 조선일보에 본인이 직접 기고한 글을 참고하며 작성했다. 다만, 박승희 본인이 작성한 글이기에 조금은 거리를 두며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박승희는 토월회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했는데, 1929년의 자의식 과잉과 자신감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토월회에 대한 허무와 아쉬움에 대해 말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필자의 기준으로, 1929년의 박승희는 매우 자의식 과잉적 측면을 보여주었고 그러기에 그의 글을 텍스트 그대로 읽지는 않았다.
  5. 김재석,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학회』 34, 2011, P.14.
  6. 김재석,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학회』 34, 2011, P.14.
  7. 현대의 한국 극단 또한 임금 체불 및 열정 페이 논란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물론 자본의 문제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예술을 열정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편견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 예술계의 적폐적 사상의 근원을 찾고 싶으면, 일제강점기의 예술인들의 흔적을 따라가면 된다. 다만 당대로서 어쩔 수 없었던 측면 또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예술계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예술이 태초부터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8. 김재석,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학회』 34, 2011, P.16~17.
  9. 김재석,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학회』 34, 2011,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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