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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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H21KHU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24일 (목) 13:07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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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내용

1876년, 조선 조정이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청凊 및 유럽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서울과 인천 등에는 ‘양행洋行’이나 ‘상회商會’와 같은 이름을 한, 무역회사들이 세워졌다. 인천 제물포와 서울 회동에 지점을 개설한 독일계 회사인 세창양행世昌洋行; Meyer & Co.이나, 마찬가지로 인천에 설립된 미국계의 타운센트 상회陀雲仙商會; Townsend Co. 등이 그 예다. 이들은 외국의 여러 상품을 수입하여 판매하고, 조선의 산물을 수출하면서 성장했다.[1] 이러한 수입품들은 '박래품'이라고 불리었는데, '舶來品', '큰 배에서 온 물품'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20년 관세 인상과 관련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이에 대해 ‘모양 있고, 쓰기 좋고, 튼튼한, 서양 사람의 손으로 만든’ 상품이라 하면서 일본산 수입품들과 구분 짓고 있다. 박래품은 ‘서양’에서 수입된, 갖고 싶을 만큼 좋은 특별한 상품들이었던 것이다. 초창기,‘물 건너온’ 세련된 서양 상품의 상당수는 왕실이나 특별히 부유한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품이자, 자신들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위세품이었다.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2] 박래품의 종류로는 시계, 양복, 양산, 향수, 석유 등이었으며, 일반 대중들은 실물을 보고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통해 아는 경우가 많았다. 또, 외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수입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시간이 흘러, 일반 대중들도 일상 생활용품으로서 박래품을 사용하였으나, 국내산보다는 훨씬 더 비싼값에 팔렸다. 1930년대에 들어서, 모던 세대들은 수입 의류 소비를 통해 과시성을 드러냈다. 양복이나 양장 원단, 패션 관련 상품들의 대부분은 수입품이었다. 각 상품은 그냥 시계 혹은 금시계가 아니라 영국제 센손, 베넷트, 서서의 파섹크, 인터내슈낼, 론진, 미국의월삼, 엘진, 하-봐드, 하밀튼(숙녀비망첩, 1933) 등과 같이 구체적인 브랜드로 등장하였다. 대유행이었던 털실도 영국제와 일본제 비하이부, 국인, 보다니와 같은 수입 브랜드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3] 과시적 소비는

식민치하의 곤궁했던 사회경제적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이와 같은 모던 신세대 여성들의 과시적 소비는 단순한 근대 성의 상징적 표현 이상의 것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부, 모더니즘을 차별화시키고 극대화시키는 수단으로서, 상징성을 과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에는 특히 모던 신세대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투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주석

  1. 최효찬,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전해진 상품, 박래품", (인천,) 『민속소식 신축년 육월』online, 국립민속박물관.
  2. 최효찬, 위 글
  3. 박혜원,「한국 근대 문화 소비 주체로서 모던 신세대의 가치관, 소비문화, 의복 태도 특성: 1920년대∼1930년대를 중심으로」,『대한가정학회지』49(9), 대한가정학회, 2011, 99-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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