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동서관 터
목차
개요
우리나라 개화기 최초의 근대적 서점인 회동서관의 설립 배경 및 설립 인물, 설립 의의 등을 알아보고자 한다.
내용
회동서관의 설립
1897년 고제홍에 의해 세워진 서울시 남대문로 1가 14번지 자리에 '고제홍서사' 또는 '고제홍서포' 라는 서적상으로 출발했다. 각종 교과서와 일반 출판물을 판매하던 고제홍서사에서 고제홍의 아들 고유상이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이름을 회동서관으로 바꾸고 출판업에 비중을 두고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회동서관 이름 변천사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통해 당시 위상과 이름이 변한 과정을 알 수 있다.[1]
회동서관 출판 서적
- 『해동명장전』(1907)
- 조선 인조대에 이르는 걸출한 장군들의 전기 모음집
- 『화성돈전』(1908)
-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전기
- 『철세계』(1908), 『설죽매』(1908), 『추월색』(1912) 등
11개 분야 약 200여종의 서적을 출판하였다.
출판법 제정 공포(1909)
출판법이란 1909년 2월 23일에 공포된 법으로, 조판하기 전 원고를 사전에 검열한 다음 인쇄한 출판물을 배포하기 전 다시 납본검열을 받도록 하여 출판물들을 통제한 법이다. 이로인해 회동서관이 출판한 서적 중 일부 서적은 불온사상(ex.화성돈전, 설죽매), 과학소설(ex.철세계)이라는 이유로 판금조처를 당했다.
회동서관의 부흥기
고유상은 종두법 창시자인 지석영을 필자로 영입해 『자전석요』(1909)라는 베스트셀러를 펴냈다. 이 책은 무려 초판이 5,000부, 약 20여판을 찍어 10만 부를 보급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여기서 얻은 수익으로 매서운 일제의 출판법에도 꿋꿋이 그 위상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1918년 무렵 종로에 광익서관, 견지동에 출판소 계문사를 차리고, 대구에도 지점을 내었다. 이는 한국 출판 기업사에서 최초의 대형 경영체제로 기록되고 있다.[2]
고유상은 상해에서의 출판 제작과 상무인서관과 같은 곳과의 출판 무역을 통해 위험을 감수하는 발전적인 경영에 뛰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칠서' 간행 사업을 지속하고 매년 당서를 들여와 보급했다.[3]
회동서관의 쇠퇴
서적상은 우수수 생겨나는 출판업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 인쇄소를 따라가지 못하였고, 출판법 때문에 서적이 판매 금지되는 일이 많아졌다. 또한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었던 츨판업계의 분위기는 중국과 밀접했던 회동서관과는 맞지 않았다. 결국 회동서관은 한용운의『님의 침묵』(1926), 이광수의 『재생』 등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중단하였다.
회동서관의 의의
회동서관은 출판업계에서 종합 출판사이자 성공한 출판 기업체였다. 또한 『자전석요』를 출판하여 근대 출판술 이래 최초로 대량 보급을 실현하였다. 더 나아가 중국과 교류하며 얻은 경험을 통해 고대 소설을 제외한 모든 출판물에 대해 출판 계약에 따라 인세를 지불한 선례를 남기며 신서적 및 신문화 전파에 앞장섰던 근대적 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4]
회동서관터 표석
회동서관은 1880년대에 고제홍이 창업해 1950년대까지 존속한 서점 겸 출판사이다. 1907년 그의 아들 고유상이 회동서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무정』 등을 간행해 한국 근대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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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회동서관 터 표석」 |
- 회동서관 터 표석 위치
참고문헌
논문
이종국, 「개화기 출판 활동의 한 징험―회동서관의 출판문화사적 의의를 중심으로]」,『한국출판학회』49, 2005, 215~252. 우승규,「나절로 만필 」,『동아일보』,1974,5. 안춘근,『한국출판문화사대요』,p.375.
웹사이트
블로그 '슬비네', 회동서관터
금동근, 日帝 감시받던 조선 출판사…‘회동서관’ 등 1910년대 사진 발견, 동아일보, 2008
임종업, ‘회동서관’ 을 아십니까, 한겨레, 2005
주석
기여
- SYK21KU : 최초 작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