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월회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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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R21KHU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24일 (목) 23:31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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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전문극단 토월회가 유랑 극단으로 전락하여 사실상의 해체를 맞이한 토월회 1930에 대한 문서입니다.

내용

1930년, 토월회의 고질적 문제가 폭발했다. 토월회가 안고 있던 고질적 문제는 이미, 박승희토월회 1923 문서에서 어느 정도 언급을 하였지만, 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후술할 계획이다. 일단 토월회는 1930년 1월 22일을 마지막으로 조선극장에서 그 흔적을 감추었다. 물론 박승희가 1932년 창립한 태양극장이 1933년 조선극장으로 복귀는 하지만, 태양극장은 전문 극단으로 보기에 매우 민망한 수준의 극단이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태양극장은 신극 운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박승희가 극단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극단인데, 태양극장이 올린 극이 대부분 토월회 시절의 극이었다는 점만 확인하더라도, 토월회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고 볼 수 있다.[1] [2] [3] 이에 대해 각설하고 다시 토월회로 돌아오면, 토월회가 전문 극단으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상 1930년이 마지막이다. (1929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찌했든 유랑 극단 수준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고, 기록 상으로는 1930년까지로 볼 여지는 있다.) 물론 이전에도 토월회에 대한 회의는 제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버텨오던 토월회는 1930년 1월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극단으로서의 명맥이 끊긴다. 그렇다면 1930년 1월, 조선극장에서의 토월회의 모습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930년 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토월회는 극 「월요일」 상연 중, 일본 경찰에 의해 공연이 중단되는 일을 겪었다. 당대 일본 경찰은 상연 전, 공연의 각본을 확인하고 검열을 통과해야 상연 허가를 했다. 극 「월요일」도 미리 각본을 제출하여 검열을 통과했다. 하지만 공연 중 배우들이 각본과 다른 공연을 시작하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월요일」의 각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검열된 각본과 다른, 소위 '불온한' (혹은 탈선) 공연이 진행되자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토월회 배우들을 공연 중 체포했다. 이로 인해 토월회 배우 리운영(이운영)과 전옥(김옥으로 추정, 조선일보에는 전옥으로 되어있음. 한자 때문에 혼용이 된 점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 체포되었고, 25일간의 구류되었다.[4] 그리고 나서 조선극장에서의 토월회의 흔적은 태양극장의 공연 전까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토월회가 1930년 1월 혹은 2월 중으로 조선극장에서 임거정전(임걱정전으로 추정)을 각색하여 상연하고자 계획했다는 점을 보면, 1930년 1월 22일의 사건은 단순하게 넘어 갈 사건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5] 극 「월요일」 상연 이후, 토월회의 흔적은 진주, 부산, 통영 수원 등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6] [7] [8](그리고 이것은 조금은 TMI이긴 하지만, 지방 순회 공연과 관련된 기사는 더 이상 문화면에 실리지 않았다. 주목해야 한다면 주목할 수도 있는 지점이다.)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토월회가 지방을 순회하며 올린 공연은 제대로 된 극장에서 올린 공연도 아니었고, 정식 공연의 형태로 올린 공연도 아니었다. 1930년 1월 22일자 「월요일」 상연 이후, 토월회는 1달도 되지 않아서 급격하게 몰락을 했다. 지방 순회 공연 당시 40여 명의 단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9] , 조직적으로 와해는 되지 않았지만, 부족하더라도 전문 극단으로서 존립하던 과거와 달리, 외적으로 급격하게 몰락한 모습은 확인할 수 있다. 1930년 2~3월 경에 진행된 지방 순회 공연 이후, 토월회의 흔적은 그 어느 신문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1930년 8월 경의 박승희의 근황은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토월회의 대표 박승희가 홍해성과 경성소극장을 조직한 것을 보면, 8월 이전에 이미 토월회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고도 볼 수 있다.[10]

1930년 1월 22일의 사건에 대해선 해방 이후의 증언을 참고하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자료를 찾게 된다면, 후에 다시 수정하겠다. 본고의 토월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증언과 신문 자료를 통해 이루어졌고 필자 또한 이의 한계를 알고 있다. 해방 이후, 박승희가 토월회에 대해 쓴 책이 있다는데, 그 책을 필자가 아직 참고하지는 못했다는 점은 양해 바란다.


토월회는 1923년부터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필자는 그 고질적인 문제가 1930년 1월에 터졌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박승희 본인 또한 어느 정도는 매우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일단 토월회는 심각한 각본난에 시달리고 있었다.[11] 토월회는 창립 초기부터 박승희 혼자 실질적으로 각본/각색을 맡았다. 물론 중간에 홍사용(홍노작)이 잠시 담당한 적도 있었지만, 주로 박승희 혼자 작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각본의 완결성과 예술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승희는 이전에 상연했던 극을 다시 올리는 악수를 두었다. 다른 문제는 배우 문제였다. 박승희는 여배우 구인난이라고 언급했지만[12], 토월회의 실상은 달랐다.[13](물론 해당 연구가 신문 자료를 중심으로 인물 정보를 수합했기에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인물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다.) 토월회는 공연마다 전체 남녀 배우의 성비가 1:1 정도는 유지했다. (극에 참여한 배우를 포함하여, 당시에 토월회에 단원으로 존재했던 모든 이들을 포함한 수치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심각하게 누적된 성비의 불균형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당대 기준으로 탑스타급 여배우인, 이소연, 복혜숙, 전옥 등의 배우를 보유했음에도 여배우 구인난을 한탄하는 것은 박승희의 연출자로서의 무책임과 경솔로 볼 여지가 있다. 배우와 관련한 토월회의 문제는 오히려 배우 관리의 측면에 있다. 박승희와의 개인적 문제로 배우뿐만 아니라 단원들의 이탈 또한 잦았는데, 이는 연출자 박승희의 책임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토월회 1923에서도 언급했지만, 한 작품을 창작하면서 연출자들은 다양한 애로를 겪는다. 배우 문제는 어느 연출자나 갖고 있는 문제이다. 배우와 연출자가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방향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을 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필자는 어느 정도는 박승희의 책임이라고 보지만, 당시 토월회가 놓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는 할 수 있다.) 배우 문제는 또한 신인 배우 육성 문제와도 연관 지어 볼 필요가 있다. 토월회는 토월회연기자양성 과정을 통해 신인 배우 발굴 및 육성에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대 극단으로서는 혁신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14] 식민지라는 특수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제한된 자본을 갖고 있는 토월회가 온전한 교육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박승희가 언급한 것처럼, 토월회는 초창기부터 자본난에 시달렸다. 전용 극장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토월회는 조선극장, 단성사와 같은 극장에 임대료를 내고 공연을 올려야 했다. 극장세가 하루에 250원 정도 했다는 박승희의 회고를 보면[15], 토월회는 다양한 자본 문제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박승희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자본 문제에서 비롯된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지나친 상업성 추구였다. 1929년 조선극장으로 돌아온 토월회는 만담과 노래 공연으로 이루어진 막간 공연을 통해 관객을 모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막간 공연 때문에 배우들과 불화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극단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렸다는 증언이 있다.[16] 자금난으로 시작한 막간 공연으로 인해 극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신극 운동을 전개한 토월회의 정신 근본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제대로 된 배우가 없다 보니 본 연극 공연에 집중하기보다 막간 공연에 집중했다고 한다. 즉, 토월회 내적인 한계가 극심해지자 연극의 수준이 떨어졌고 관객들도 외면하기 시작하자, 발을 돌린 관객들을 다시 부르기 위해 연극에 집중하기보다 막간 공연에 집중했다는 것인데, 이는 전문 극단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까지 이미 1929년에 토월회가 추락했다는 것이다. 수익성을 위해 계속 공연을 올렸어야 했는데, 새로운 각본을 창작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같은 극을 계속 올렸어야 했고, 그로 인해 배우들의 이탈은 잦아질 수밖에 없었고, 배우들이 부족하다보니 아직 공연에 올리면 안 되는 수준의 배우를 공연에 올리고, 연극의 수준은 점차 떨어지고, 수익성이 악화되자 연극에 집중을 하지 막간 공연에 집중하면서 극단으로서의 정체성은 이미 상실한 상태에서 1930년 1월 22일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토월회의 내적 문제이기도 했지만,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기도 했다. 자유로운 창작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제한된 각본과 자본으로, 동인제로 시작한 극단이 필연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이었다.

토월회 1930은 진지하게 연구해봐야 하는 파트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제한된 자료로 인해 엄밀한 연구를 진행하지 못했지만, 토월회의 마지막을 이해하는 단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순하게 실패했던 극단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토월회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극단이었다. 이는 박승희의 탓도 아니고, 토월회의 탓도 아니었다. 한 개인이, 한 집단이, 시대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없는 법이다. 토월회는 시대의 벽을 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시대의 벽을 넘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여전히 토월회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 토월회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17]

참고문헌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주석

  1. 劇團 太陽劇場歸京公演」, 『조선일보』, 1933.12.15. 8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2. 朝劇新年興行 太陽劇場上演」, 『조선일보』, 1934.01.01.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3. 劇團 太陽劇團 新春公演」, 『조선일보』, 1934.01.30. 7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4. 脚本과를린다고 土月會員檢擧」, 『조선일보』, 1930년.01월.24일. (석간 07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5. 土月會에서 林巨正傳을脚色上演」, 『조선일보』, 1930년.01월.15일. (석간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6. 讀者優待券 진주에서」, 『조선일보』, 1930년.02월.14일. (석간 03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7. 釜山丁卯夜學 音樂會開催」, 『조선일보』, 1930년.02월.20일. (석간 03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8. 土月會同情劇 통영유치원위해」, 『조선일보』, 1930년.02월.21일. (석간 03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9. 土月會同情劇 통영유치원위해」, 『조선일보』, 1930년.02월.21일. (석간 03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10. 洪海星氏主宰로 京城小劇塲組織」, 『조선일보』, 1930년.08월.28일. (석간 07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11. 新劇運動七年 (十)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15일. (석간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12. 新劇運動七年 (十)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15일. (석간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13. 조선극장을 통해 보는 식민지 조선의 연극·영화계_극단 토월회와 상영된 조선 영화를 중심으로
  14. 다만 현대의 극단 혹은 프로덕션이 시행하고 있는 육성과정을 통해 토월회연기자양성 과정을 접근한다면, 교육 목적이 아닌 노동 목적의 측면에서 토월회가 해당 시스템을 도입했을 가능성 또한 있다. 누군가는 궂은 일을 해야 하고, 이는 언제나 막내의 몫이기 때문이다. 현대도 그러한대, 과거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필자의 의견이다.
  15. 新劇運動七年 (十)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15일. (석간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16. 新劇六十年의証言 (3) 土月會時代」, 『경향신문』, 1968.07.20. 05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7. CJ토월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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