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전문절도
개요
일제시대에는 서적만을 전문적으로 절도하는 범죄가 많이 발생했다. 최근에는 이렇게 서적만을 전문적으로 절도하는 일이 드물지만, 당시에는 꽤 많은 수의 서적 전문 절도범들이 존재했고, 이로 인한 피해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서적전문절도의 몇몇 케이스와 당시 책과 소득을 합쳐 왜 이들이 책이라는 상품을 전문적으로 훔쳤고, 어디에 사용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내용
일제시대 당시 서적의 평균가격과 조선인의 소득
출판사(세로)/주제(가로) | 구소설 | 신소설 | 신문예 | 농학서 | 척독서 | 의학서 | 창가서 | 경서류 |
---|---|---|---|---|---|---|---|---|
박문서관 | 30.1 | 34.6 | 120.3 | 70.0 | 77.0 | 82 | 51.2 | 138.4 |
회동서관 | 31.7 | 38.4 | 101.4 | 38.6 | 60.6 | 87.5 | 48.8 | 116 |
영창서관 | 31.0 | 47.5 | 146.4 | 60.0 | 79.6 | 92.0 | 49.4 | 262.5 |
덕흥서림 | 29.0 | 35.0 | 182.5 | 60.0 | 76.9 | 80.0 | 44.6 | 137.5 |
출판사들은 대중의 수요가 많았던 신구소설류, 창가서 등에 대해선 비교적 낮은 가격을, 지식층이 즐겨보던 신문에서, 경서류 같은 경우에는 높은 가격을 매겼으며, 실용서 또는 교양서에는 평균적인 가격을 매겼음을 알 수 있다.[2]
그리고 시대별 평균가격의 경우 1913년, 1925년, 1930년의 가격변화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위의 표는 1932년에서 1940년대의 대략적인 평균가격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박문서관에서 출판된 금국화의 경우 가격의 변화가 50전, 45전, 45전이었으며, 영창서관에서 출판된 강상루의 경우에도 50전, 50전, 50전으로 가격의 큰 변화가 없었기에, 위의 표는 1932년에서 1940년대까지의 책의 가격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3]
1932~1940년대 당시 조선의 1인당 월평균 소득은 61원이었다.[4]
조선인의 평균소득에 비해 책의 가격은 상당한 고가였으며, 이는 다양한 이유로 돈이 필요하던 사람들에게 좋은 절도품목이 되었다.
서적전문절도 사례
그는 서적을전문으로 본정통 각 서점을 도라다니면서 갑빗싸고 전당잘잡는 법률서적만 절취하여황금정모 전당포에 입질하야 유흥에 소비 하였다는데 | ||
출처: 「書籍專門窃盜(서적전문절도)」, 『조선일보』, 1936년.4월.5일. (2면), |
書籍專門窃盜(서적전문절도) 二日間三百卷(이일간삼백권) 흠친책을그집에되팔어 本町署(본정서)에서取調中(취조중) 이틀동안에 서적상백여권을 훔치어 절도죄스피—드업의 신기록을지은자가 잡히엇다 | ||
출처: 「書籍專門窃盜(서적전문절도) 二日間三百卷(이일간삼백권)」, 『조선일보』, 1934년.12월.2일. (2면), |
奇特(기특)한讀書狂(독서광) 書籍專門窃盜(서적전문절도) 평양경찰에발견체포 取調警官(취조경관)도同情(동정) 【平壤(평양)】책을 읽고십흐나 수중에돈은업고 생각한나머지 자긔의 필요한서적을 서점에가 책을 절취하다가 발각되어 평양서에 체포 되엇는데... | ||
출처: 「奇特(기특)한讀書狂(독서광) 書籍專門窃盜(서적전문절도)」, 『조선일보』, 1931년.08월.25일. (2면), |
이들이 돈을 주로 사용한 곳
참고문헌
방효순, 「일제시대 민간 서적발행활동의 구조적 특성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김계연,「1930년대 경성도 전세난에 월급 23% 주거비로」, 『연합뉴스』, 2016년.6월.7일,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주석
- ↑ 방효순, 「일제시대 민간 서적발행활동의 구조적 특성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104p.
- ↑ 방효순, 위의 논문 104p
- ↑ 방효순, 위의 논문 107p
- ↑ 김계연,「1930년대 경성도 전세난에 월급 23% 주거비로」, 『연합뉴스』, 2016년.6월.7일,
『연합뉴스』online , 연합뉴스.
기여
- 최초작성 최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