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월회 1923
개요
이 문서는 동인제로 시작한 토월회 1923의 의의에 대한 문서입니다.
내용
1923년,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토월회가 창립되었다. 토월회는 처음부터 극단은 아니었다. 1923년 5월 유학생들의 '연극 및 비평' 동아리 형식으로 시작을 하여, 1923년 7월 조선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올렸다.[1] 학생 극단으로 시작한 만큼, 전문성이나 체계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동경 유학생 중심의 극단이었다는 이유로 당대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1회 공연은 박승희가 말한 것처럼, 말 그대로 처참했다.[2]각본 문제뿐만 아니라, 극단 내에 전문 배우가 전무한 정도의 상태였기에, 공연 중 많은 NG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 배우가 부재한 상태에서 열정과 자만심으로 공연을 올렸기에 그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 이 실패로 인해 토월회는 점점 극단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박승희 또한 제1회 공연의 실패로 토월회가 발전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3]제1회 공연 이후, 2회 공연을 준비하면서 토월회 단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전문 배우들이 토월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안석주, 이소연, 이백수 등, 당대 혹은 그 이후에 한국 영화-연극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배우들이 토월회에 합류하게 되었다.[4] 또한 박승희가 서양의 소설과 극을 각색하여 각본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제1회 공연에서 패인으로 지목되었던 배우의 연습 문제 또한 제2회 공연에서 해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제2회 공연의 흥행 성적이 당대 기준으로 엄청났다는 (박승희의 입을 빌리자면) 이야기를 통해 토월회가 빠른 시일 내에 안정성을 확보했고, 전문 극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5]
제2회 공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토월회 내적으로는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우선 동인제로 시작한 모임인만큼, 전문 극단으로 변모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창립 단원들 또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월회 창립 멤버인 김복진, 김기진, 연학년이 제2회 공연 이후 탈퇴했고, 토월회에 몇 없는 전문 배우 안석주가 탈퇴를 하고 무대미술가 이승만, 윤상렬 또한 탈퇴를 하면서 토월회는 1차 위기에 빠지게 된다.[6]박승희는 핵심 단원들의 탈퇴 이유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이후에 토월회를 탈퇴한 단원들이 형성한 백조회, 산유화회와 같은 극단이 박승희에 대한 반발로 창립되었다는 것을 보면,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정 문제 등으로 토월회에 문제가 생겼던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참고문헌
주석
- ↑ 「土月會의 終幕」, 『조선일보』, 1923.07.08.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五)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5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 조선일보. - ↑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五)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5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 조선일보. - ↑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八)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8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 조선일보. - ↑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八)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8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 조선일보. - ↑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九)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9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 조선일보.
기여
- LHR21KHU: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