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및 액세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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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2월 8일 (수) 22:39 판 (Timeline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9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두산동아, 2006. 온라인 참조: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한국 문화사)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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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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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소조 신문명의 풍조가 밀려들어온지 약반세기이래 종래의 모든 문물제도는참으로 괄목할만치 대변화를하게되엇다. 지금 변화된모든 것을 일일이 열거할필요는 느끼지안커니와 우리의일상생활상에 가장격변을 이르킨것중의 비근한 것 몇가지만을 들어보다면 갓은 모자로, 신(가죽신)은 양화로, 짚세기는 고무신으로, 버선은 양말로, 두루마기는 외투로, 도포는 모닝코트나 프록코트로, 긴치마는 스커트(강둥치마)로 이러케 격변하게되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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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의상과 양복」, 『동아일보』, 1939.01.19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930년대에 이르러 양장과 양복이 일반화되었고, 부속품인 시계, 장갑, 모자 등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근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복식의 형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내용

1930년대 의류 및 액세서리

본 내용을 다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1930년대의 의복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경성기는 신문물과 조선의 문화가 공존하던 시기였다. 1930년대 경성의 거리에는 머리를 땋고, 한복을 입은 전통적 차림새를 갖춘 사람들과 서양식 머리를 하고 양복과 양장을 입은 모던걸, 모던보이들이 함께 걸어다녔다. 모던 신세대들은 유행 의복, 해외 유행 소식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유행을 선도하였다.


1937년8월31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이가을의 신사복은 '드레-프' 타입의 특장을기초로한스타일이 류행입니다. 상의의 거리는 아조길고익개에는 드레-프타입을살릴정도로 솜을 너호며 가슴은충분한 여유를 두고 허리다음은 상의끗츨 슬적주려서 소매를 쫍게하는스타일입니다.


모던 신세대 남성들의 유행 아이템과 스타일로는 싱글 브레스티드 슈트,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 세비로, 레인코트, 트렌치코트, 인버니스와 같은 슈트와 코트 스타일이었다.[1] 그리고 이런 양복이라는 틀에서 가슴과 허리 디자인을 다르게 하거나, 소매나 바지 가랑이를 줄이기도 하고, 바지의 아랫단만을 넓히는[2] 등 유행하는 스타일이 달라졌다. ‘세계 대전 후엔 약해 보이고 스마트한 스타일보다 야만에 가까운 남성적인 스타일이 유행한다[3]’라는 표현이 상당히 흥미롭다. 당시 신문에 양복 절도사건 기사가 빈번하게 실렸듯, 양복은 매우 고가의 의복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양복을 구매하고자 하는 모던보이들을 위 해 미국제 “中古洋服類(중고양복류) 大安賣(대안매)”도 인기리에 이뤄졌다.[4] 양복의 빛깔과 품질은 물론 부속품인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과의 조화도 중요시[5]여겼다. 단발령에 의해 강제로 짧아진 머리는 초반엔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나, 점점 머리 스타일에도 유행이 나타나고, 모자는 양장의 필수적인 요소로 하이칼라 이미지를 표현하였다. 안경도 양반들의 소유물이었으나 신문물이 대중들에게 일반화되면서 동그란 모양의 금속 안경태를 쓰는 것은 인텔리함을 뽐내는 액세서리로 여겨졌다.



여성 의복과 스타일의 경우, 1920년대 여학생의 단발, 흰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 굽 높은 구두와 붉은 목도리 등으로 시작된다. 1930년대에는 서구식 코트, 팔 다리가 노출되는 스타일, 숏 스커트 등의 양장 스타일이 유행하였다.[6] 여성 의류 역시 옷감의 색감과 디자인 뿐 아니라, 스커트의 길이, 네크라인의 종류, 깃의 장식 등 유행하는 스타일[7]이 다양하였다. 인텔리 여성, 가정 부인, 여급 등 직업에 따라 선호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구두의 경우 발등에 꽃무늬가 놓이고 끈 장식이 달리는 등 보다 우아하게 발전했고, 일부 상류층에서만 착용되었던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보편화되었다. 핸드백과 목도리가 널리 유행했고, 상류층에서는 여우 목도리가 유행해 가짜 여우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8] 부속품과의 매치 뿐 아니라 화장법에 따라서도 옷차림을 다르게 하였다.(붉은 색의 옷이 얼굴의 화장과 조화로우나 이 때 '베니(화장품)'의 색을 붉은 색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기사.[9])

남녀 공통적으로 하이킹, 수영 등과 같은 스포츠용, 내지 여행용 등 상황에 맞게, '홈-스팡'같은 소재의 옷들을 입기도 했다.



유행을 소개하는 글에선, 일본보다는 ‘런던’, ‘뉴욕’, ‘파리’가 많이 언급되었다.[10] 이는 일본으로부터의 영향보다는 서구의 대중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행 아이템들을 소개하며 할리우드 배우들의 사진을 싣는 경우가 많았다. .[11]

양복과 양장의 도입부터 광복 이전까지의 양장과 양복을 중심으로 한 대략적인 타임라인은 다음과 같다. (연노랑색: 남성복 / 연보라색: 여성복 / 분홍색:여성교복 /하늘색:남성교복)[12]


참고문헌

논문

웹사이트

주석

  1. 박혜원,「한국 근대 문화 소비 주체로서 모던 신세대의 가치관, 소비문화, 의복 태도 특성: 1920년대∼1930년대를 중심으로」,『대한가족학회지』49(9), 대한가족학회, 2011, 99-109.
  2. 패슌 쇼오(2)가을철 유행될 남자양복」, 『동아일보』, 1933.09.02『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3. 패슌 쇼오(2)가을철 유행될 남자양복」, 『동아일보』, 1933.09.02『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4. 김지혜,「광고로 만나는 경성의 미인, 모던걸 모던보이」,『미술사논단』43, 한국미술연구소, 2016, 207-227.
  5. 삼사년 봄이가져올 유행의신사숙녀복」, 『동아일보』, 1934.02.22『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6. 박혜원, 위 논문, 2011
  7. 패슌 쇼오(一)가을철 유행될 부인네 옷감」, 『동아일보』, 1933.09.01『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8. 맹문재,「일제 강점기의 여성지에 나타난 여성미용 고찰-1930년대를 중심으로」,『한국여성학』19(3), 한국여성학회, 2003, 5-30.
  9. 삼사년 봄이가져올 유행의신사·숙녀복」, 『동아일보』, 1934.02.22『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0. 의상의 철학(끝)」, 『동아일보』, 1934.01.07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1. 미국의 초가을 유행 두가지」, 『동아일보』, 1933.08.01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9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두산동아, 2006. 온라인 참조: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한국 문화사)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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