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주점 터
목차
개요
문화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은성주점의 설립 시기와 관련 인물들, 은성주점을 통해 본 문학커뮤니티공간의 의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내용
은성주점 개점
1953년 탤런트 최불암의 모친 이명숙이 이은성이라는 이름으로 연 주점이다. 최불암의 아버지가 과로로 숨진 이후 아들과 생계를 잇기 위해 연 막걸릿집이라고 한다.[1]
은성주점에 모인 문화인들
- 이봉구
-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명동을 좋아하여 반평생을 명동에서 생활하다 보니 '명동백작', '명동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작품의 배경이 주로 명동의 다방, 술집이며, 작중 인물은 실명의 문인과 예술인들로서 이들의 애환을 담고 있다. [2]
- 거의 매일 카운터 옆 통나무의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사색에 잠겼는데, 그의 이러한 모습은 매우 유명하였다. 이 때문에 은성주점은 ‘봉구주점’으로도 불렸으며, 은성주점에서의 이봉구는 일종의 상징같은 존재였다. [3]
- 변영로
- 일제강점기 「코스모스」, 「꿈많은 나에게」, 「나의 꿈은」 등을 저술한 시인.영문학자. [4]
- 박인환
- 해방 이후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 「목마와 숙녀」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5]
- 전혜린
- 해방 이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래완료의 시간 속에』 등을 저술한 수필가.번역문학가. [6]
- 임만섭
- 평양출신 테너 가수
그 외에도 소설가, 시인, 화가, 가수, 영화감독 등 다양한 문화인들이 모였었다.
은성주점의 의의
은성주점은 근대 우리나라에 많이 세워지던 다방과 같이 문화인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특히 애주가들의 모임 장소로서 애용되고는 했는데, 이러한 문화 커뮤니티적 공간은 은성주점 외에도 이상의 '제비다방', 이경손의 '카카듀', '갈채다방', '동방살롱' 등이 있다. 이러한 다방과 주점들은 문화인들의 커뮤니티로서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문화인들의 교류를 통해 영감을 얻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은성 주점에서 시를 쓰던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도 주점에 있던 언론인 극작가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가수 나애심과 테너 임만섭이 노래로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하다.[7]
또한 작품을 출품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장소로서도 활용되었는데, 문인들은 이곳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출판 기념회를 갖기도 하였으며, 미술인들은 개인전을 열고, 음악인들은 신곡 연주회를 가졌다. [8] 이러한 공간은 문화예술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작품을 쉽게 접하고 감상하며, 문화예술인들과 소통할 수 있던 공간으로서 대중문화 발전에서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은성주점의 쇠퇴
은성주점은 명동의 상승하는 물가와 지대에 버티지 못하고 폐점하였다. 그러나 많은 문화 다방들도 사라졌는데, 이는 문화센터, 복합예술공간이 늘어나면서 그 자리가 좁아지게 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은성주점 터 표석
이 곳에서 약10m 앞에는 1960년대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봉구(1915~1983)와 번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던 주점 터이다. 특히 이봉구 선생은 명동을 좋아하여 ‘명동시장(明洞市長)·명동백작(明洞伯爵)’ 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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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성주점 터 표석」 |
-은성주점 터 표석 위치
참고문헌
논문
장혜지, 김재범 자생적 문화예술공간이 문화예술 교류에 미치는 영향 문화산업연구, 17(4), 2017, 97-104.
웹사이트
야초의 역사문화유적답사 투어노트 민족의 소리 동아방송(DBS) 문화콘텐츠닷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석
- ↑ 문갑식,최불암 어머니 명동 은성 주점을 차린 이유는?,2015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봉구(李鳳九))
- ↑ 문화콘텐츠닷컴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변영로(卞榮魯))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인환(朴寅煥))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전혜린(田惠麟))
- ↑ 이상국, 술병 속에서 시가 울던 명동의 은성, 2009.
- ↑ 장혜지, 김재범 자생적 문화예술공간이 문화예술 교류에 미치는 영향 문화산업연구, 17(4), 2017, 97-104.
기여
- SYK21KU : 최초 작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