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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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화와 더불어 새롭게 등장했던 여성의 직업임과 동시에 에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으로 근대의 이중성을 지녔던 직업인 여급은 근대 소비 문화의 일각을 이루었다. 근대의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여급 자신은 불안정한 급여와 노동 조건, 낮은 사회적 인식을 복합적으로 직면하는 근대의 타자였으나, 동시에 직업적 전문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그를 인정받기 위한 사회적 활동을 실천에 옮겼으며 실제로 일본에 유학하여 더욱 전문적인 접객을 습득하는 여급도 있는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래의 관습에 대한 전복의 가능성을 지닌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일시적인 성적 교류의 대상이었으며 역설적으로 가부장제의 바탕으로 자리하는 결혼제도 밖의 대상으로, 이는 그들이 자유로운 성적 주체로 자리매김할 여지를 열어주기도 했다.

내용

식민지 근대화의 유흥공간 카페

서구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분위기에 위스키와 아사히 및 삿포르 맥주 등의 주류, 재즈와 블루스, 유행가, 신민요 등 다양한 새로운 음악으로 구성된 카페는 신세대를 겨냥한 근대적 공간이었다. 대중문화를 선도하며 서구문화를 즐김으로써 최첨단의 취미를 향유하는 공간임에 동시에 일본의 카페문화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술을 팔고 댄스를 추는 유흥공간으로 자리한 것이다. 일본에서부터 유입된 '에로, 그로(테스크), 넌센스'의 퇴폐문화 중 에로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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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사람들은 카페를 ‘에로의 신전’ 또는 ‘향락 제작소’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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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택! 역사를 갈랐다 (34) 1930년대 모던 보이 vs 마르크스 보이」,『서울신문』,2011.11.11『서울신문』online,서울신문.


카페는 본래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던 남촌, 경성부 명치정 등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부터 조선인들도 카페에 방문하였고 여급이 증가했다. 1921년 대경성도시개발로 인해 본정에는 백화점, 상업 및 금융시설들이 확대되며 소비도시의 자리를 굳혔고 이에 따라 극소수 조선인들도 종로에 신축 건물을 세우고 유흥업종을 확대시켰다. 이 중 카페는 대표적 유흥공간이었다. 1930년대 초부터는 '아리랑', '미나도','파라다이스' 등의 카페가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북촌, 종로 등에도 진출하였다. 주로 일본자본을 바탕으로 규모가 큰 카페가 개업했다. 1936년 종로에 위치한 일본인 업주 소유 카페는 122개로, 조신인 업주 소유 162개에 비해 열세이긴 했으나 적지 않은 규모였다. 재조일본인들은 식민 지배체제에서 특권적인 위치와 집단적 생활구조를 공유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젠더와 계급의 위계가 작동하였고 재조일본인 카페여급은 일본 내지와 조선 외지를 오가는 초국적 이주민의 삶을 살았다.

여급의 이중적 타자성과 어려움

카페와 여급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의 표상으로서 재래의 조선복식과 일본의 복식이나 유행, 양장을 섞어 입는 혼종성을 띄었다. 이러한 일제-서구풍의 여급은 여성이라는 젠더 위계의 약자성과 자본 체계에 있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종업원의 위치로 포섭해 일제-서구의 지배적 위치를 끌어내리는 기회를 피식민지 조선의 남성에게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인 남성은 여급을 불러 접대받으며 서구 근대에 대한 지배욕과 성적 욕망을 채웠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급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즉 '여성이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신종 직업이면서 이러한 성매매의 혐의와 혼종성을 내재하고 있어 사회적으로도 인식이 좋지 못했다. 특히 재래의 관습을 벗어나 교육을 받고 스스로 경제력을 가지려 했던 새로운 여성상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직업으로서 씌워진 '허영'의 혐의와 성적 대상화된 이미지가 가장 적극적으로 투영되는 직업이었다. 더욱이 여급은 일정한 월급 없이 카페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손님들의 팁으로 생활비를 마련하였으므로 손님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입장에 처했으며,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출하지 않고 인내해야 한다는 상황과 사회적 인식에 괴로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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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웻트레쓰는""카페"에서먹기만하고 부터잇스면서 월뎡수입으로는 별로히 뎡한바이업서오즉손님에게서밧는"틥"을모아 그네들은생활비를 보태어쓴다한다 그러고보니 웃음을팔며 애교를팔아서라도 손님의호의를사서 한푼이라도어들궁리를아니할수업게된다그러고보니흐터진감정이 보드라울수가 업는지라 부듸치는곳마다 충돌이업슬수업스나 그럴때마다 그대로그것을견듸어나가지아니하야서는 별도리가업는것이엇다...(중략)...현금경성안에는 이작업에 종사하는 조선녀자의 수가상당히늘어가서 대략이삼십명이나 되며그네들의"틥"으로말미아마수입되는 총액수는 평균매월삼사십원가량이라 한다 또그네들의이직업을 가지게되는 원인을삷히면흔히는상배실련해태허영등으로인하야 적합한 직업을엇지못하얏기때문에 최후로 그것을가지게되는가장 ◇끗장가는직업 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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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 엄중단속 본뎡셔의텰퇴」,『동아일보』,1928.03.04.『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네이버.


더욱이 실제로 외국인이 여급으로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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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에실업난 해고된노,독여급

카폐에 외국녀자 사용말라고

본정서영업주에과료

시내본정경찰서에서 그관내에잇는 각 『카페』에서 외국인여급을 고용하는것을금시식히라고 재삼영업주에게주의를 시킨일잇섯다 그럼에불가하고 서사허정에잇는 『살론‧아리랑』에서는 독일녀자릴데메 일명대기경자(29)를 시내본정이정목에잇는본미인좌에서는 로서아녀자마리아‧니나(26)를고녀급으로고용한사실로 륙일 본정경찰서에서는 량방주인을 호출하여다가각긔과료십원에 처함과 동시에금후의 고용을절대로 금지시키엇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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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역에실업난 해고된노,독여급」,『조선일보』,1931.10.07.『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네이버.


여급이 된 여성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여급 생활을 선택한 이유는 기존의 직업을 이어가기 어렵거나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직업 여성은 최저한의 생활비를 맞추지 못할 정도의 급여를 받았고, 특히 예술인들은 전시총동원체제 전환 등의 사회적 이유로 문화사업이 위축되어 직업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혹은 재래의 관습에서 벗어나 손님과 교류가 비교적 자유로운 여급이라는 직업을 통해 자유로운 유희, 사교와 연애를 즐기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 생계 곤란: 중등 교육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특히 버스 걸, 점원, 교사 등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여급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성이 종사하는 직업군의 급여가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낮아 그나마 수입이 높은 여급 생활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특히 자신의 생계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지게 된 여성들은 비교적 급여가 높은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여급이 되기도 했으나 불안정한 노동 조건 및 수입으로 인해서 많은 여급들은 개별적 호객 행위로 성매매를 하는 사창군을 형성하기도 했다.
  • 배우에서 여급으로의 전환: 특히 총동원체제로 전환되면서 문화산업이 위축되어 배우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전직 배우라는 특성을 통해 경쟁력을 지닐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고객의 에로 서비스에 적극적으로 종사하지 않아도 여급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실제 기록에 남은 여급들

  • 김명순(마리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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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경성에서 출생, 1932년 ‘낙원’ 카페에서 근무, ‘말괄량이’라는 별명, 큰 키와 마른 체구, 한복보다는 양장이 어울린다는 평, 톡톡 쏘고 깍쟁이 같은 성격, 영화배우 경력.

[1]

  • 김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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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 이후 영화배우로 알려졌으며 1932년에 ‘목단’ 카페에서 근무. 술을 잘 마시고 욕을 잘하는 것으로 유명해 여급으로서의 애교와 서비스를 기대하기보다는 덤덤한 술친구로 대하는 편이 적절하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배우로서의 명성에 힘입어 손님들과의 위계에 비교적 덜 구애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주조조합대회에서 정무총감에게 헌수 올릴 사람으로 뽑혔다.

[2][3]

  • 김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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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김갑순으로 1904년 충북 옥천군 군서면 은향리 출신으로, 17세에 마흔 넘은 남자와 결혼했다가 2년 만에 이혼하였다. 상경하여 병원 간호부로 일하며 노모와 딸을 부양했지만 생계가 어려워지자 주위 권유로 여급이 되었다. ‘스타’, ‘태평양’, ‘엔젤’ 등의 카페에서 일했으며 ‘엔젤’에서 만난 노병운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나 그는 이미 가정이 있어 이루지 못하고 1933년 9월 26일 투신자살하였고 그 다음날 노병운도 한강에 투신하여 당대의 대표적 정사사건으로 경성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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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여급

한강에투신

정부에처자잇슴을

비관하고자살한듯

이십칠일 새벽한시경 한강인도교에서 투신자살을한 녀자가잇섯다 그는주소를 시내견지동사십사번지에두고 현재 종로이정목 『카페,엔젤』에서 녀급노릇을 하는 깁갑순으로 판명되얏스며 시체는 곳건지엇다 한다 자살한원인은 방금조사중이나 김갑순은 시내모공립병원에조수로잇는모와오래전부터 정을두고 지내든바최근에와서 그남자에게 처자가잇슴을알고 비관자살한것인듯 하다고 추측된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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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 여급」,『조선일보』,2011.11.11『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네이버.


  • 이덕성(미네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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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경성에서 출생하였고 ‘금주’란 이름으로 서울과 인천 각지에서 기생 일을 하다가 경성의 ‘태평양’ 카페를 시작으로 여급으로 일했다. 1932년 4월부터 낙원회관에서 근무하였고 파리한 얼굴에 오똑하고 뾰족한 콧날을 가졌다 한다.

[5]

  • 조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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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경성에서 태어나 <유랑>, <숙영낭자전> 등에 출연해 배우 경력을 거쳐 ‘목단’ 카페에서 일했다. 곱게 핀 봉선화가 고개를 숙일 만큼 아담스럽고 곱게 생겼다 한다. 장기는 특별히 없으나 배우 경력이 있어 인기가 있었다.

[6]

  • 천진자(지쓰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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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정삼순으로 1919년 경성에서 출생했으며 경성 복판에 은송정이 생겼을 때부터 일하기 시작해 오사카에서 수 년 동안 견학하고 돌아와 진고개 골목의 웬만한 곳을 모두 거치며 13년의 경력을 가진 능숙한 직업인으로 ‘낙원회관’의 여급 감독으로 일했다. 미모보다는 손님의 기분을 맞춰주는 특기로 주목받았다.

[7]


유흥공간 카페에 대한 단속

이렇듯 카페가 성적인 유흥공간으로까지 여겨지자 조선총독부에서도 취체한 바 있다. 본래 술을 팔며 어두운 조명에 음악을 틀고 여급이 무대에서 춤을 추며 팁을 받는 카페의 공간 조성이 성매매로 이어지지 않도록 가게 밖에서의 호객 행위와 춤을 아예 금지하고 음악 재생도 엄격히 제한하였으며 객실의 넓이와 객석 수, 조명의 색까지도 규제하였다. 또한 여급의 고용은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여급의 팁을 온전히 보전하게 하는 등 엄격한 규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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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철추 자극제홍등도엄금

강렬한 자극과 향락의 산물로생겨난"카페"는 시대적 대중의기호에 응하야 기록적발전을보여현재조선내의 업자의수는 사백이십으로 이천사백팔십구명의여급들이 가두에 진출하야 써비스...(중략)... 일,사사관공서,학교,병원등지에 접근한때에 그부근의상황으로보아 또는 풍기를 보지할 필요가 잇을 때에는 카페영업을허가치안흘일

일,객실은 삼십오평방메돌이상의 널비를 가진외에 한층에이실이상을 인정치안코 객석은 의자한개에 일인주의로 하는데 조명도 사평방메돌에 십촉광이상으로백색으로 할것.

일,무도 무용을 금지하고 영업시간에 라디오축음기의 사용등에도 엄격한사항을 규정할것.

일,여급은 깩실의 오평방메돌에일인아하로고용은 경찰서장의허가를 요하고팁은전부 여급의수입으로 하는데영업상의 금전부담은 절대금지하고보호한다는 엄중한 규정으로되어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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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에철추」,『동아일보』,1927.06.15.『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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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엄중단속

본뎡셔의텰퇴

시내에잇는"카페"의내용개선에대하야 당국에서는 여러가지로당업자들에게루차주의를식히엿스나 의연히 규측위반자가만흔중더욱이녀"뽀이"고용관게에여러가지로불미한뎜이만허서풍속공안상적지아니한해를끼치는터인바 시내에서카페가가장만흔곳을관할하는시내본뎡서에서는작십사일오전열시부터관내카페영업자 오십삼명을 동서루상으로모하가지고영목서댱으로부터결뎜개선에대한엄중한 주의를식히엇다는데그내용은전부아홉가지조항으로 작부나녀"뽀이"들을"카폐"문간에내어보내여객을끄는등사는절대로하지못한다는것을위시하야고용녀자에대한취체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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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 엄중단속 본뎡셔의텰퇴」,『동아일보』,1927.06.15.『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네이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의 인기는 식지 않은 듯 보인다. 학생들이 카페를 즐겨 찾고, 하숙으로 여급을 부르기까지 하여 이에 대한 단속이 가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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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카페에도 학생은절대금지

여급들이하숙을찾어다녀

영업자에게 엄중경고

【평양】 학생들의 카페출입은얼마전부터 단속하고 잇는터이나최근에 다시 학생들의 제복 제모가 카-페가에 활긔를 띠울뿐아니라 한두번 만나서 얼골이익어지는 동안에 여급들은 학생들의 하숙을 찾어다니는등, 풍긔상 불미한 점이 만타하야 평양서에서는 여급들의 생활이면을 조사하는 동시에 영업자에게 대하야 불일간 경고를 발하리라 한다경고의 내용은 영업장소에 학생을 절대로 들어오지못하게 할것과 여급이 집금 기타로 외출할시에는 반듯이 이인이상이 함께 다니도록 하라는것인바 이로써 학생들의 옷자락이 카-페에서 살아지게 되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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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양카페에도 학생은절대금지」,『동아일보』,1935.06.30.『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네이버.



잡지에 나타나는 여급, 직업으로서의 여급

일제강점기 일어 종합잡지였던『조선공론』에는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정도까지 예기를 다루고 있으나 이는 점점 감소하고, 1920년대부터 카페와 여급에 대한 짧은 칼럼이 실린다. 카페를 개방된 근대공간으로 언급하고 있다. 1920년대에는 여급을 '직업여성'으로 지칭하며 월급제를 주장하는 글이 '카페야화'라는 칼럼으로 실리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전체 카페 업계의 동향, 전망 등을 다루게 되며 카페개혁을 위해 좌담회를 열었다는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1931년 「여급의 이야기」라는 한 재조일본인 여급을 취재한 글에서는 돈을 위해 여급에 종사하는 것이므로 애정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듯 여급이 직업여성이라는 의식이 점차 생겨나고 있었으며, 이것은 점차 일본의 여급들의 노동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1930년대 여급의 수가 증가하고, 지방정부의 재원 부족으로 여급에게도 세금이 부과되게 되었으며, 이는 여급을 공식적인 직업으로 인정하는 단초가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급을 성매매 종사자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 남아 있어, 여급들은 잡지에 직접 자신의 직업을 공식화하고 전문화하려는 취지의 글을 투고하며 자신의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도 공인 받으려 하였다. 여성의 비극,그 여자는 여자고보를 졸업하고 엇재서 기생과 여급이 되엿나?」라는 『삼천리』제4권 제5호에 기재된 세 기고문에는 연애 상대를 고르고 싶어했으며 그렇게 만난 남성과 아이까지 가지게 되나, 그는 이미 본처가 있었고 사생아를 가진 비혼모가 된 필자는 구직활동 끝에 여급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내막이나, 보통학교 선생으로 자랑할 만한 딸이었으나 이제는 여급으로 일한다며 친척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상황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근대문물의 유입으로 자신의 학력과 신념을 지니고 그에 맞는 상대를 꿈꾸던 신여성들이, 그와 지식이나 신념은 통하더라도 이미 어릴 적 조혼하여 본처를 둔 남성 지식인들과의 연애 끝에 버려져 결혼을 통한 제도 진입이 불가하게 된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했던 직업 중 하나가 여급이었음을 보이고 있다. 여급은 즉 자유연애와 결혼에 있어 여성에게 전가되는 부담을 덜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그렇지만 분명히 자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긍지를 가질 수도 있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여급들은 성매매 종사자라는 사회 인식에 대해서 그러한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은 사실이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노동에 임한다고 주장하였다. 1934년 4월 6일에는 여급 잡지 『女聲』이 발간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는 「조선의 여성들아! 주저말고 직업전선으로!!」라는 글에는 눈을 부릅뜨고 두 주먹을 불끈 쥔 투쟁적인 이미지의 여성 사진이 실리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강문석,) "[여급이 있었던 일제강점기 까페]", (근대의음식점,) 『근대문화 역사유산』online, 지역N문화.

박소영,「1930년대 카페 여급 담론의 탈식민주의 연구」,『동북아시아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0, 107~111쪽.

박진경, 미야지마 요코, 「카페의 식민지근대, 식민지근대의 카페: 재조일본인 사회, 카페/여급, 경성」,『한국여성학36(3), 한국여성학회, 2020, 111~151쪽.

서지영, 「노동과 유희의 경계:식민지 시대 카페 여급」,『여/성이론』(18), 도서출판여이연, 2008, 171~183쪽.

이성은, 「식민지 근대 카페 여급의 정치경제학적 위치성과 정체성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학』 23(2), 한국여성학회, 2007, 47~75쪽.

주석

  1. "[김명순]",(경성유흥공간,)『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2. "[김보신]",(경성유흥공간,)『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3. 이처럼 드물기는 해도, 카페를 자신의 자유로운 사교와 연애, 유희의 장으로 활용하는 여급들도 없지 않았다.
  4. "[김봉자]",(경성유흥공간,)『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5. "[이덕성]",(경성유흥공간,)『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6. "[조경희]",(경성유흥공간,)『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7. "[천진자]",(경성유흥공간,)『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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