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열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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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87년 1월 14일 오전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사망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에 의한 치사사건이라는 데서 사람들은 분노를 크게 일으켰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얘기로 발뺌하며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들었고, 이것이 온 국민을 분노케 했다.


내용

발생 원인

박종철은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에서 학생회장을 맡아 중심적으로 학생활동을 전개해 왔고 86년 청계피복노조합법화요구시위로 구속되어 재판 끝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감옥생활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러던 와중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과 교류하게 되었고, 이것이 소문이 나서 경찰은 박종운을 잡기 위해 박종철의 주변을 감시했다. 그 결과 박종철은 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전개

경찰은 초기 발표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 없는 얘기를 하며 발뺌을 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의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엉망이 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 등이 들렸다는 사실에 근거해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치안본부는 물고문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물고문 가담자는 2인에 불과하다고 축소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부영 전민련 상임의장이 영등포교도소에서 조한경과의 대화를 통해 고문진상의 축소조작을 밝혀냈다. 이후 천주교 정의평화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3인의 추가 가담자를 발표하였다.

그런 와중에 치안본부는 1월16일 오전 8:00시경 가족의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림으로써 증거인멸을 도모했다. 나아가 87년 2월7일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를 원천봉쇄하고 강압과 왜곡을 반복했다. 결국 치안본부는 결국 치안본부는 고문진상 은폐, 조작을 인정했다. 하지만 은폐, 조작이 당사자들의 입맞춤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소도 면회기록에서 치안본부 지휘라인의 은폐노력이 드러나고, 조한경 강진규를 횡하려던 2억원 입금통장의 실체도 드러났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은폐조작 지시사실도 인정되는 등 결국은 축소 은폐 노력의 진상이 폭로되었다.


결과

범국민적인 투쟁의 결과 이와 관련한 재판에서 중요한 판결이 나왔다. “원고들의 인격적 법익이 침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위 피고들 및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에게 이로 인한 伸怨權(신원권)이란 법리를 판례를 하였다. 재판부는 「당시 피고 경찰수뇌부가 원고에게 진상 은폐함을 풀 권리(伸怨權)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무자비한 고문살해에 연이어진 계속된 은폐조작은 모두 내무부, 치안본부, 안기부, 보안사, 검찰등이 모인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이는 모두 그 위의 전두환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1]

이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를 열었고, 이를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 지배체제는 6.29 항복선언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영향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관련영상


참고문헌

열사정보_박종철-당시21세online,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KBS 인물현대사, "KBS 인물현대사 – 박종철 1부, 탁치니 억하고 죽다 / KBS 20040611 방송", YouTube, (2004.06.11), 작성일: 2022년 1월 12일.


주석

  1. 열사정보_박종철-당시21세online,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