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H21KU 과제 2
개요
서울의 역사문화 표석과 관련된 인물은 한양 즉 서울을 수도로 하였던 조선의 국왕들과 연관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표석과 관련된 인물은 조선의 제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인 고종이다. 고종의 재위 기간은 1863년부터 1897년으로, 1873년 친정을 시작한 이후 급격한 근대 시기를 맞게 되었고 격변의 시기를 지나며 역사문화 표석의 내용과 가장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1]
내용
개화기
통상 개화론은 문호 개방을 전후하여 조선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론, 곧 개화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개항 후, 조선 정부는 일본으로 수신사를, 청으로 영선사를 파견하여 신문물을 수용하고자 하였고, 김홍집,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으며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운영하였다.[2]
근대화의 추진
1. 광무개혁
군사면에서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훈련시켰다. 하지만 이는 구식 군인들의 반란인 임오군란으로 이어졌고, 청의 내정 간섭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의료면에서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이 설립되었고, 교육면에서는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육영공원, 공립실업학교인 상공학교와 광무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발전소 건설, 철도 개통, 은행 및 회사 설립 등 사회기반 시설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양한 개혁들이 일어났다. [3]
2. 갑신정변
조선 내에서의 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근대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최초의 근대적 출판기관인 박문국이 창설되고,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3. 의의
조선의 개항 시기에는 주로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국민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며, 식민지화의 본격적인 시작 이후부터 각종 이권을 서양 및 일본 열강에게 넘겨 국권을 박탈당하는 계기가 되었다.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이후, 자주적으로 시행되었던 근대화 정책도 중단되게 되었다. 하지만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 개화기에 일어난 사회 개혁 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신분제 철폐, 불평등 구조 개편 등에 해당하는 내용은 본격적으로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 고종 역시 청과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고, 왕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국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황제국을 선포하고, 다양한 근대 정책을 시행하고 그 기반을 마련했다. 따라서 개항기 시대에 청의 세력을 빌려와 임오군란을 해결하고, 을미사변 때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간 사건 등을 근거로 무력하고 무능력한 국왕이었다는 고종에 대한 비판에 대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 반박의 여지이자 재평가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시절, 고종과 측근들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해왔는지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Timemapper
참고문헌
주석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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